| <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 스튜어트 Alexander Stewart, Duke of Albany | ||
| 이름 | 알렉산더 스튜어트 (Alexander Stewart) | |
| 출생 | 1454년 | |
| 스코틀랜드 왕국 | ||
| 사망 | 1485년 8월 7일 (향년 30~31세) | |
| 프랑스 왕국 파리 | ||
| 배우자 | 캐서린 싱클레어 (1475년 결혼/1477년 결혼 무효) | |
| 안 드 라 투르 (1479년 결혼) | ||
| 자녀 | 알렉산더, 마거릿, 존 | |
| 아버지 | 제임스 2세 | |
| 어머니 | 헬러의 마리아 | |
| 형제 | 제임스 3세, 메리, 데이비드, 존, 마거릿 | |
| 직위 | 초대 올버니 공작 |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 올버니 공작. 형 제임스 3세에게 숙청당할 뻔한 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손잡고 제임스 3세에 대적했으나 끝애 패배하고 프랑스 왕국으로 망명했다.2. 생애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와 헬러의 마리아 왕비의 차남이다. 1458년 이전에 올버니 공작으로 선임되었고, 마치 백작과 에넌데일 및 맨 섬의 영주권을 받았다. 1460년 어머니의 친가가 있는 헬러 공국으로 여행했으며, 1464년 돌아오자마자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스코틀랜드 통치와 방어에 참여하기 시작한 그는 1470년대 초 스코틀랜드 제독 겸 버윅 수비대장이 되어 스코틀랜드 변경 방어를 지휘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면서도 형 제임스 3세 치세 초기 왕실 자문 위원으로는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임스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높았고, 왕은 이를 불쾌하게 여겼다.1477년, 제임스 3세는 동생인 올버니 공작과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결혼을 추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잉글랜드와의 평화를 추진하는 제임스 3세의 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여 영토를 새로 확보해 이득을 챙기길 희망하는 귀족들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제임스 3세와 올버니 공작 간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제임스 2세는 한 주술사로부터 자기가 가까운 친척의 손에 죽을 거라는 말을 들은 뒤, 형제들에 대한 의심을 굳혔다고 한다.
1479년, 제임스 3세는 두 아우인 올버니 공작과 마르 백작 존을 고발했다. 마르 백작 존은 마녀와 결탁한 혐의로 고발당한 뒤 크레이그밀러 성에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옥사했다. 올버니 공작은 왕에 대항하여 던바 성에 무기와 식량을 공급하고, 반군을 지원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의 휴전을 위반하여 잉글랜드 국경지대를 습격하여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고발당했다. 올버니 공작은 체포를 피해 파리로 피신해 루이 11세의 환영을 받았으며, 오베르뉴 여백작 안 드라 투르와 결혼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그가 제임스 3세를 공격하는 걸 돕지 않았고, 알렉산더는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1482년 6월, 알렉산더는 포더링헤이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포더링헤이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오럽니 공작은 에드워드 4세의 지원을 받고 스코틀랜드 왕이 되는 대가로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주권 하에 두며, 스코틀랜드의 로우랜드 일부를 잉글랜드의 소유로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알렉산더는 에드워드 4세,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함께 스코틀랜드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스스로 '스코틀랜드 국왕 알렉산더 4세'를 칭하며 신민들을 이끌려 했다. 에드워드 4세, 글로스터 공작,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는 2만 군대를 이끌고 베릭으로 진군해 함락시킨 뒤, 에든버러로 진군했다. 제임스 3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가, 로더에서 불만을 품은 귀족 집단에 의해 체포되었다. 왕은 에든버러 성에 투옥되었고, 1482년 가을 알렉산더가 잉글랜드 진영에서 이탈하여 에든버러로 들어간 뒤, 제임스 3세 지지자들과 협상한 끝에 제임스 3세를 왕으로 계속 받드는 대가로 새로운 정권의 수장이 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에든버러 성을 함락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1482년 10월 초, 올버니 공작은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을 맡았고, 마르 백작 작위를 차지했으며, 이전에 소유했던 토지와 관직을 다시 획득했다. 그는 1482년 12월 의회를 개최하고 자신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거물 중 한 명이었던 제2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은 자기의 목표였던 마르 백작을 올버니 공작이 가져간 것에 반감을 품었다. 그는 1482년 9월 말 감옥에서 풀려난 제임스 3세와 손잡고 올버니 정권의 구성원들을 매수해 자기 편으로 포섭했다. 그 결과 1482년 12월에 열린 의회는 올버니 공작 대신 제임스 3세를 계속 받들기로 결의했고, 올버니 공작 정권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올버니 공작은 1483년 1월 던바로 피신했다. 그 후 잉글랜드 수비대가 던바 성에 들어오도록 한 뒤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년 후, 올버니 공작은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하던 제9대 더글러스 영주 제임스 더글러스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1484년 7월 22일 로크마벤 전투에서 덤프리스 백작 로버트 크라이튼이 이끄는 왕실군에게 패배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생포되었고, 올버니 공작은 잉글랜드로 도주했다. 그의 작위와 영지는 스코틀랜드 왕실에 몰수되었다. 그 후 올버니 공작은 1485년에 스코틀랜드에 잠입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뒤 제임스 더글러스가 감금되었던 에든버러 성에 투옥되었다. 연대기 작가 애덤 에이벨은 올버니 공작이 경비병을 죽이고 침대 시트로 만든 밧줄을 사용하여 성벽을 내려와서 탈출했다고 밝혔다
에든버러 성에서 탈출한 뒤 프랑스로 망명한 올버니 공작은 1485년 8월 7일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주최한 기사 시합에 참여했다가 사고를 당해 치명상을 입고 곧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