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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크럼 무어 전투 영어: Battle of Ancrum Moor | |||
| 시기 | |||
| 1545년 2월 27일 | |||
| 장소 | |||
| 스코틀랜드 체드버러 북서쪽 앤크럼 평원 | |||
| 원인 | |||
| 잉글랜드군의 스코틀랜드 로우랜드 약탈에 대한 스코틀랜드인들의 반격 |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 지휘관 | |||
노먼 레슬리 | 랄프 유어 브라이언 레이턴 | ||
| 병력 | |||
| 5,200명 | 2,500명 | ||
| 피해 | |||
| 알려지지 않음. | 800명 전사, 1,000명 포로 | ||
| 결과 | |||
| 스코틀랜드군의 승리. | |||
1. 개요
1545년 2월 27일, 스코틀랜드군이 로우랜드를 약탈하고 귀환하던 잉글랜드군을 급습해 섬멸한 전투.2. 상세
1543년 7월 1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대표단은 그리니치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메리 여왕 생전, 그리고 두 사람이 사망한 후 1년간 평화를 유지하며, 메리 여왕은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결혼하며, 두 사람의 자녀가 두 나라를 통치할 권리를 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올드 동맹'을 깨서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힘을 합쳐 잉글랜드를 위협하는 일을 방지하고, 장차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에 통합하려는 헨리 8세의 의중이 담겨 있었다.그러나 1543년 12월 15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그리치니 조약 수용을 거부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갱신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1544년 4월 보병 12,000명, 기병 4,000명, 수송선 200척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 슈루즈버리 백작 프랜시스 탈보트, 리슬 자작 존 더들리에게 맡겨 스코틀랜드를 침공하게 했다. 그들은 그 해 5월 7일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약탈하고 불태운 뒤, 잉글랜드로 유유히 돌아갔다.
1545년 1월, 랄프 유어와 브라이언 레이턴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콜딩엄 수도원에서 출발해 멜로즈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들의 집뿐만 아니라 지역 수도원까지 약탈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과정에서 앵거스 백작 가문의 무덤과 기념물까지 파괴했다. 본래 친 잉글랜드파 인사로, 전쟁 발발 후 스코틀랜드 당국의 의심을 받아 에든버러 성에 감금되었던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이 소식에 격분해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분견대 300명을 모았고,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속속 모이면서 분견대가 멜로스에 도착했을 때 1,000명이 넘었다.
1545년 2월 26일, 노먼 레슬리가 지휘하는 분견대 1,200명이 앵거스 백작에 가세했다. 이후 그들은 랄프 유어에 의해 황폐해진 브랜스홀름과 버클루크에서 동원된 월터 스콧 휘하 스코틀랜드 국경부대와 합류하면서 5,200명으로 불어났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체드버러에서 잉글랜드군을 추적했다. 2월 27일, 앵거스 백작은 잉글랜드군이 체드버러에서 북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앤크럼 무어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적진을 향해 재빨리 이동해 잉글랜드군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을 장악했다.
랄프 유어는 스코틀랜드군이 언덕을 장악한 걸 뒤늦게 확인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인들은 지형을 이용하여 군대의 실제 규모를 은폐했기 때문에, 랄프 유어는 적의 수가 매우 적다고 착각하고 언덕을 장악하기로 했다. 독일에서 고용된 란츠크네히트 부대가 먼저 언덕으로 진군했고, 그 뒤를 기병대가 따라갔다. 스코틀랜드군은 이들의 공세를 가볍게 격파한 뒤, 곧바로 언덕에서 내려와 적진으로 돌진했다. 랄프 유어는 군대를 수습해 반격하려 했지만 쉽사리 이루지 못했고, 도리어 유어의 군대에 속해있던 스코틀랜드 기병이 잉글랜드군을 배신하고 앵거스 백작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랄프 유어는 전사했고, 잉글랜드군 잔당은 황혼녘까지 쫓기다가 겨우 전장을 빠져나갔다. 이날 잉글랜드군은 8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스코틀랜드군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다.
잉글랜드 측 사료에 따르면, 전투 후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전장에 와서 앵거스 백작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는 포로 한 명에게 랄프 유어의 시신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한 뒤, 그의 시신 앞에서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이시여, 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는 너무나 잔인하고, 또 너무나 잔인한 사람이었기에 많은 남자와 고아들이 원망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그런 살육과 유혈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이 승리 소식을 접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스코틀랜드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고, 잉글랜드군은 공세를 중단했다.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가 사망하면서 거친 구혼은 종결되는 듯 했으나, 새 국왕 에드워드 6세을 대신해 잉글랜드를 통치할 호국경이 된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스코틀랜드를 재차 굴복시키려 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