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1 12:51:08

아치볼드 캠벨(제4대 아가일 백작)

성명 아치볼드 캠벨
Archibald Campbell
출생 1507년
스코틀랜드 왕국 아가일
사망 1558년
스코틀랜드 왕국 아가일 던닐
아버지 제3대 아가일 백작 콜린 캠벨
어머니 진 고든 던닐
형제 존, 엘리자베스, 아그네스
배우자 핼렌 해밀턴, 마거릿 그레엄, 캐서린 맥린
자녀 아치볼드, 자넷, 콜린, 마거릿, 자넷, 아그네스, 메리(사생아), 아그네스(사생아)
직위 제4대 아가일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거친 구혼 시기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

제3대 아가일 백작 콜린 캠벨과 제3대 헌틀리 백작 알렉산더 고든의 딸 진 고든의 장남이다. 형제로 존[1], 엘리자베스[2], 아그네스[3]가 있었다.

1529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은 그는 그 해 10월 스코틀랜드 남부의 군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원정대 지휘를 맡아 여러 반란군 지도자들을 자발적으로 복종시켰다. 그런데 반란의 주동자였던 더니베그의 알렉산더 맥도널드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에게 자신은 스코틀랜드 정부에 개인적으로 호의적이며, 이번 소요는 아가일 백작들이 군도의 부관직을 이용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제임스 5세는 아치볼드를 소환해 자기가 받은 군도의 세금과 임대료 에 대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심문을 받은 그는 한동안 투옥되었다가 얼마 후 석방되었지만 부관 직을 박탈당했고, 제임스 5세가 사망한 후에야 부관을 다시 맡을 수 있었다.

1542년 4월 28일에 반포된 왕실 헌장에서, 아치볼드는 스코틀랜드 왕의 와인 저장고 주인으로 칭해졌다. 그 해 12월 제임스 5세가 사망하고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유아 메리가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등극한 뒤 반포된 왕의 유언장에서, 그는 제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 그리고 스코틀랜드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과 함께 섭정 의회의 위원으로 지명되었으며, 비튼 추기경은 왕국의 총독이자 메리 여왕의 보호자로 지명되었다.

이후 아란 백작의 권세가 강해져서 비튼 추기경이 일시 구금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치볼드는 자기 영지로 물러난 뒤 헌틀리 백작, 모레이 백작, 보스웰 백작 패트릭 헵번과 함께 많은 남작과 지주, 그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의 지원을 받아 퍼스에 집결한 뒤 아란 백작에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얼마 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가 메리 여왕과 자기 아들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 결혼 조약을 성사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헌틀리 백작, 보스웰 백작,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함께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스털링으로 진군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아란 백작은 7월 25일 에든버러와 린리스고 사이의 들판에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만난 뒤 악수와 우호적인 포옹을 통해 화해했다. 그 후 그들은 커클리스턴에서 우호 협정을 체결했고, 아란 백작은 친 영국 정책과 종교 개혁을 포기하고 메리 여왕과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기로 했다.

1544년 초,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는 입장을 바꿔 헨리 8세의 편에 선 뒤 아란 섬을 약탈했고, 헨리 8세가 지원한 배 18척과 병사 800명을 이끌고 뷰트 섬과 로데세이 섬을 접수했다. 아치볼드는 이에 맞서기 위해 출진해 4천 병력을 이끌고 더눈 성을 접수했다. 이에 레녹스 백작은 잉글랜드 장교들과 협의한 후 더눈 성을 공격해 인근 마을과 교회를 불태웠고, 뒤이은 공방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아치볼드는 도주했다. 이후 레녹스 백작은 킨타이어 제도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지만, 아란 백작이 급파한 토벌대에게 밀려나 1544년 5월 28일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레녹스 백작의 영지가 몰수되었을 때, 아치볼드는 가장 큰 몫을 보상으로 받았다.

1547년 9월 10일 핑키 전투에 참여한 그는 서부 하이랜드 부대 4천 명과 함께 스코틀랜드 군 우익을 지휘했지만, 아군이 참패하는 걸 막지 못했다. 1548년 1월, 그는 던디로 진군한 뒤 브로티 공방전에 참여해 그곳을 공략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해딩턴 공방전에 참여했고,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에 의해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헌틀리 백작과 동시에 코클 기사로 선임되었다. 1554년 8월 마리 드 기즈 왕대비의 지시를 받아 서부 제도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무렵, 그는 존 녹스가 주도하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1556년 제네바로 가던 녹스를 캠벨 성에서 대접했으며, 1557년 12월 개혁파 설교자들이 정부가 공개적으로 설교하도록 허용할 때까지 개인 주택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데 합의한 후 자기 저택에 개신교 설교자들이 자류롭게 지낼 수 있도록 보호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존 해밀턴은 아치볼드가 개혁파 신앙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긴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개혁 신앙을 옹호하는 장문의 답신을 보내며 거절했다.

1558년 8월 21일과 1558년 12월 2일 사이에 스코틀랜드 아가일의 던닐에서 사망했고, 스코틀랜드 카월 반도의 킬문 교구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한 뒤 아들 아치볼드 캠벨이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핼렌 해밀턴(? ~ 1541년):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의 딸.
    • 아치볼드 캠벨(1532 ~ 1573): 제5대 아가일 백작. 개신교도가 스코틀랜드에서 인정받기 위해 마리 드 기즈에 맞섰으며, 메리 여왕이 돌아온 뒤 여왕의 지지자로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단리 경 암살 사건과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의 여왕 '납치' 직후 결혼 사건이 벌어지자 큰 충격을 받고 여러 귀족과 함께 보스웰 백작을 격파하고 메리 여왕을 생포했다. 하지만 메리 여왕 폐위에는 반대하여 여왕의 복위를 위해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귀순하고 제임스 6세를 새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들었다.
    • 자넷 캠벨: 아일랜드 티르코넬의 소왕 칼바흐 오도넬의 부인.
  • 마거릿 그레엄: 제3대 맨티스 백작 윌리엄 그레엄의 딸.
    • 콜린 캠벨(1542 ~ 1584): 이복형제 아치볼드 캠벨이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한 뒤 제6대 아가일 백작이 되었다.
    • 마거릿 캠벨(? ~ 1572): 초대 도운 경 제임스 스튜어트의 부인.
    • 자넷 캠벨: 제13대 멕린 씨족 수장 헥터 오그 맥린의 부인.
    • 아그네스 캠벨(1538 ~ ?): 수녀.
  • 캐서린 맥린: 제8대 두아르트 수장 헥터 모르 맥린의 부인.
  • 사생아
    • 메리 캠벨: 아르드말레이시의 기사 제임스 스튜어트의 부인.
    • 아그네스 캠벨: 제4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과 제3대 헌틀리 백작 알렉산더 고든의 딸 자넷 고든의 사생아.

[1] ? ~ 1568, 메리 여왕의 복위 시도에 참여했다가 랭사이드 전투에서 전사했다.[2] ? ~ 1548,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의 사생아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초혼, 제11대 서덜랜드 백작 존 고든과 재혼.[3] 1526 ~ 1601, 제6대 디너베그의 맥도널드 수장 제임스 맥도널드와 초혼, 아일랜드 티르에오게인의 게일인 영주 털로우 리나흐 오닐과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