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8 08:53:05

레너드 데이커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컴벌랜드의 샤이어 기사
레너드 데이커
Leonard Dacre, knight of the shire for Cumberland
성명 레너드 데이커
Leonard Dacre
출생 1533년
잉글랜드 왕국 컴벌랜드
사망 1573년 8월 12일 (향년 39~40세)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뤼셀
아버지 제3대 길즐랜드의 데이커 남작 윌리엄 데이커
어머니 엘리자베스 탈보트
형제 앤, 도로시, 토머스, 에드워드, 프랜시스, 막달렌
직위 컴벌랜드의 샤이어 기사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기사. 잉글랜드 북부 반란 시기 반군을 진압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나중에 잉글랜드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해외로 망명했다.

2. 생애

제3대 길즐랜드의 데이커 남작 윌리엄 데이커와 제4대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의 다섯 번째 딸인 엘리자베스 탈보트의 차남이자 제4대 길즐랜드의 데이커 남작 토머스 데이커의 동생이다. 누이 막달렌 데이커는 초대 몬터규 자작 앤서니 브라운의 아내이자 메리 1세시녀로, 메리 1세를 충실히 섬기는 모습을 보여줬고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 후에도 훌륭한 처신을 보여줘서 궁정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본래 컴벌랜드의 지주 출신이었다가 영주로 발돋움한 그의 가문은 북부 국경지대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다.

1558년, 1559년, 1563년에 컴벌랜드의 샤이어 기사로서 의회에 참석했다. 1566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에게 우호적인 편지를 보내는 등 스코틀랜드 정계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566년 형 토머스 데이커가 사망한 뒤 그의 조카인 조지 데이커가 제 5대 길즐랜드의 데이커 남작이 되었다. 조지 데이커는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후견을 받았는데, 1569년 5월 17일 노퍽의 테트퍼드에서 나무로 만든 장대에서 놀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사고사했다.

이후 레너드는 자기에게 남작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잉글랜드 정부는 데이커 남작위를 회수하고, 조지 데이커의 누이들인 앤, 메리, 엘리자베스를 공동 상속녀로 두기로 했다. 여기에 노퍽 공작은 이 세 누이를 자신의 세 아들들과 나란히 결혼시킴으로써, 데이커 남작령의 영지들을 자기 가문에 흡수했다. 레너드는 이 일련의 상황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1569년 11월, 잉글랜드 북부 반란이 발발했다. 레너드는 자기가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나도는 상황임에도 궁정으로 가서 윈저 궁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알현한 뒤, 자신을 충성스러운 신민이라고 공언하고 반란 진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북부로 돌아간 레너드는 반란군이 이미 헥삼에서 해산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레이스토크 성과 데이커 가문 소유의 여러 저택을 점거하고, 나워스 성을 요새화했으며, 3천 병력과 국경 지대 주민들, 그리고 데이커 가문 추종자들을 소집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던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는 레너드가 반란군에 맞선 것을 칭찬했지만, 제9대 볼턴의 스크로프 남작 헨리 르 스크로프는 반란이 끝났는데도 나워스 성을 요새화하고 추종자들을 결집한 레너드의 의도를 의심했다. 1570년 1월 20일, 헨리 르 스크로프는 레너드를 체포하라는 중위의 명령을 받았지만, 나워스 성에서 그를 빼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잉글랜드 재상 윌리엄 세실에게 보고했다. 스크로프는 그 대신에 레너드에게 칼라일로 가서 국가의 상황에 대한 협의회에 참석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레너드는 자기가 학질에 걸려 움직일 수 없으며, 스크로프와 동료들이 나워스 성에서 저녁을 먹는다면 자신의 단순한 머리와 측근이 최고의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레너드가 계속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의뭉스러운 태도로 일관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1570년 2월 15일 초대 헌스던 남작 헨리 케리에게 레너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헌스던 경은 존 포스터 경과 함께 나워스 성으로 진군해 2월 20일 새벽에 도착했지만, 성이 너무 강력하게 방어되어 있어서 스크로프 경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칼라일로 이동했다. 그러자 레너드는 나워스 성에서 출진해 그들을 추격했고, 4마일간 쫓아간 끝에 켈트 강둑에 도착했다. 이후 레너드의 보병대는 '켈트 다리'에서 헌스던의 군대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헌스던은 기병대를 이끌고 레너드의 보병대 측면을 요격하여 300~400명을 사살하고 200~300명을 생포했다. 레너드는 군대가 와해하자 추적을 따돌린 뒤 역시 스코틀랜드의 리즈데일로 달아났다.

그 후 스코틀랜드의 베드룰 성에서 숨어지냈고, 1570년 4월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리스에서 회의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프랜시스 노턴의 서신에 따르면, 1571년 9월 18일 제3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에게 잉글랜드로 쳐들어갈 병력을 요청했다고 한다. 1572년 6월, 그는 메헬렌에서 페리아 공작부인 제인 도머에게 서신을 보내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향한 원정을 벌이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그는 펠리페 2세로부터 매달 100플로린의 연금을 받았다. 브뤼셀의 성 니콜라스 교회의 기념 비석에 새겨진 라틴어 비문에 따르면, 레너드는 1573년 8월 12일에 브뤼셀에서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