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헌스던 남작 헨리 케리 Henry Carey, 1st Baron Hunsd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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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헨리 케리 Henry Carey |
출생 | 1526년 3월 4일 |
잉글랜드 왕국 런던 | |
사망 | 1596년 7월 23일 (향년 70세)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서머셋 하우스 | |
배우자 | 앤 모건(1545년 결혼) |
자녀 | 조지, 마이클, 캐서린, 존, 윌리엄, 윌리엄, 토머스, 토머스, 에드먼드, 로버트, 헨리, 필라델피아, 마거릿 |
아버지 | 윌리엄 케리 경 |
어머니 | 메리 불린 |
형제 | 캐서린 |
직위 | 초대 헌스던 남작, 에어의 판사, 궁내장관.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남작, 군인. 헨리 8세의 정부였던 메리 불린의 아들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으로, 잉글랜드 북부 반란 진압에 일조했고 추밀원 의장이자 하원 의원으로 활약했다. 또한 궁내장관으로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극단인 '챔벌레인 경의 부하들'(Lord Chamberlain's Men)을 처음으로 후원한 인물로 유명하다.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
1526년 3월 4일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 런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윌리엄 케리는 헨리 8세의 시종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내각의 신사로 선임되어 궁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머니 메리 불린은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의 시녀로, 나중에는 여동생 앤 불린의 시녀를 맡았다. 메리 불린은 1520년과 1525년 사이에 윌리엄 케리와 결혼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헨리 8세의 정부였다. 이 때문에 그녀가 낳은 두 자식인 캐서린과 헨리의 진짜 아버지는 윌리엄 케리가 아니라 헨리 8세라는 소문이 세간이 떠돌았다. 1535년, 헨리 8세가 메리의 여동생인 앤 불린과 결혼했을 때, 아일워스의 목사 존 해일은 의회에 아래의 서신을 보냈다."스아이드모어 씨가 저에게 어린 마스터 케리를 보여주며, 그가 왕비의 여동생에게서 태어난 우리 군주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왕비는 그를 궁정에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헨리와 메리 사이의 관계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고 끝났는지 분명하지 않아서, 이 소문의 진위는 불분명하다. 또한 헨리 8세는 또 다른 정부인 엘리자베스 블런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를 자기 아들이라고 인정했지만, 메리 불린의 아이들을 자기 자식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버지 윌리엄 케리는 1528년 발한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아들에게 에식스, 윌트셔, 햄프셔, 버킹엄셔 내 상당한 토지를 물려줬다. 당시 헨리는 아직 어렸기에 직접 토지를 경영할 수는 없었고, 왕실이 관례에 따라 그의 후견권을 맡았다. 헨리 8세는 후견권을 앤 불린에게 넘겼다. 이후 헨리 케리는 헨리 8세의 시종인 헨리 노리스와 존 더들리의 아들들과 함께 복음주의 학자 니콜라스 버번에게 교육받았다. 1534년, 어머니 메리 불린이 윌리엄 스태퍼드와 비밀리에 결혼했다가 발각당해 궁정에서 추방되었다. 이에 불린 가문은 그녀가 수치스럽다고 여기고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앤 불린과 조지 불린이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된 후, 헨리 케리는 불린 가문의 유일한 남성 상속자가 되었다.
메리 불린은 1543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에식스의 로치포드 홀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한편 앤 불린이 처형된 후 헨리의 후견권은 다시 왕실로 돌아갔고, 그의 먼 친척인 프랜시스 브라이언이 후견권을 맡은 뒤 그를 워번 수도원으로 보내 그곳에서 고급 교육을 받게 했다. 1545년 5월 21일, 헨리 케리는 아크스톤의 토머스 모건 경의 딸인 앤 모건과 결혼하는 걸 허락받았다. 같은 해,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해상 전투를 벌일 때 포츠머스에서 존 더들리 제독 휘하 대위로 복무했다. 1546년과 1551년에 잉글랜드 대사의 수행원으로서 프랑스를 여행했고, 1547년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버킹엄 자치구의 의원이 되었다. 1549년 버킹엄셔의 리틀 브릭힐과 버튼 영지를 받았으며, 1551년부터 1552년까지 사촌인 엘리자베스 공주의 집에서 신사로서 봉사했다.
1553년 제인 그레이와 메리 공주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짧은 내전을 벌였을 때, 그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가 여왕으로 등극하자, 확고한 개신교 신자였던 헨리 케리의 누나 캐서린과 그의 계부인 윌리엄 스태퍼드는 각자의 가족을 데리고 유럽 대륙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헨리 케리는 잉글랜드에 남아 1553년부터 1558년까지 메리 1세의 추밀원에서 프리 커터(Pre -Cutter, 왕이 식사 시 먹을 고기, 생선, 가금류, 과일, 채소 등을 정확하고 예술적으로 자르는 직책.)를 맡았다.
다만 그는 메리 1세가 이끄는 정부와 몇 차례 갈등을 벌였다. 1554년, 그는 허가 없이 한창 진행 중이던 의회를 떠났고, 이에 따라 왕의 재판소에 그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었지만, 응답은 없었다. 1555년, 헨리 케리는 정부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1557년에는 1551년 507파운드의 빚을 왕실에 져놓고 여태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플리트 감옥에 갇혔다가 5월 19일 보석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2.2.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
1558년 11월 메리 1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한 뒤, 헨리 케리의 경력은 급상승했다. 새 여왕은 그를 자신의 친척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기사 작위를 내렸다. 1559년 1월 13일, 대관식을 이틀 앞둔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케리를 초대 헌스던 남작으로 선임했다. 또한 같은 해에 에식스, 켄트주, 하트퍼드셔의 영지와 헌스던 영시를 수여했다. 헨리 케리는 그 덕에 연간 4,000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1560년 10월 13일에는 왕실 매사냥꾼 직위도 얻었는데, 이에 따라 매년 40파운드를 추가로 받았다.헨리 케리는 15959년과 1560년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마상창시합에 참가했고, 1561년 5월 18일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564년 엘리자베스 1세가 케임브리지 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는 여왕을 수행한 뒤 '마기스테르 아르티움'(magister artium) 칭호를 받았고, 신사 연금 수급자 대장으로 선정되면서 왕실 경호원 계급으로 승진했다. 헨리 케리는 직설적이고 정직한 태도로 일관해 여왕의 신임을 얻었지만, 궁정의 다양한 이해 집단과 거리를 뒀으며, 과감한 조치를 선호했다. 궁정 신하들은 그런 그를 경계했지만, 군인들은 그를 특별히 따랐다.
매사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않고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척 신중했던 엘리자베스 1세와는 기질 차이가 무척 컸기에 가끔 마찰이 벌어졌지만, 그들의 관계는 대체로 매우 우호적이었다. 1562년 엘리자베스 1세가 천연두에 걸려서 위중해지자, 그녀는 의회에 헨리 케리를 돌봐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여왕은 그에게 다양한 임무를 맡겼다. 1560년 초, 헨리 케리는 처음으로 스코틀랜드에 파견되어 마리 드 기즈 왕대비를 돕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파견된 프랑스군에 맞서 토머스 하워드와 함께 싸웠다. 프랑스와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헨리 케리는 1564년 프랑스에 외교 사절을 이끌고 가서 젊은 국왕 샤를 9세에게 가터 훈장을 수여했다. 3년 후, 그는 다시 프랑스로 파견되었지만, 무슨 연유로 그런 건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3. 잉글랜드 북부 반란
1568년 8월 25일, 헨리 케리는 베릭의 총독으로 선임되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국경지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헨리 케리는 국경지대에서 잉글랜드 재상 윌리엄 세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국경지대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몇 달 전에 스코틀랜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망명했기 때문에 무척 혼란했다.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의 이모인 마거릿 튜더의 후손으로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고, 가톨릭 신자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부모인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은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이상 무효라고 여기고, 엘리자베스 1세를 사생아로 간주했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를 친척이자 동등한 여왕으로 존중해주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해줬고, 헨리 케리는 1568년 9월에 여왕의 이런 행보를 비판했다.그 후 1569년 9월 그는 궁정 직위에서 물러난 뒤, 스코틀랜드로 가서 메리 여왕을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는 동시에 그녀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배제하는 게 가능할지를 살펴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한 뒤 가톨릭을 잉글랜드의 국교로 복원하려고 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이 발발했다. 이에 헨리 케리는 북부 의회의 의장이자 제3대 서식스 백작인 토머스 래드클리프를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통해 자신의 지위로 급히 돌아갔다. 그해 11월 26일, 그의 배는 헐 강변의 킹스턴에 도착했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서식스 백작이 변함없는 충심을 품고 있으니 그를 의심하지 말라고 청했고, 이후에는 서식스 백작의 지휘하에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반란을 일으켰던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가 스코틀랜드로 망명하자,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퍼시 가문이 지난날 몰수했던 미들즈브러와 리치먼드의 집사 자리를 되찾았다.
한편, 나워스 성주 레너드 데이커는 반란이 진압된 후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레이스토크 성과 데이커 가문 소유의 여러 저택을 점거하고, 나워스 성을 요새화했으며, 3천 병력과 국경 지대 주민들, 그리고 데이커 가문 추종자들을 소집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던 토머스 래드클리프는 레너드가 반란군에 맞선 것을 칭찬했지만, 제9대 볼턴의 스크로프 남작 헨리 르 스크로프는 반란이 끝났는데도 나워스 성을 요새화하고 추종자들을 결집한 레너드의 의도를 의심했다. 1570년 1월 20일, 헨리 르 스크로프는 레너드를 체포하라는 중위의 명령을 받았지만, 나워스 성에서 그를 빼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잉글랜드 재상 윌리엄 세실에게 보고했다. 스크로프는 그 대신에 레너드에게 칼라일로 가서 국가의 상황에 대한 협의회에 참석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레너드는 자기가 학질에 걸려 움직일 수 없으며, 스크로프와 동료들이 나워스 성에서 저녁을 먹는다면 자신의 단순한 머리와 측근이 최고의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레너드가 계속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의뭉스러운 태도로 일관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케리에게 레너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헨리 케리는 1570년 2월 15일 존 포스터 경과 함께 나워스 성으로 진군해 2월 20일 새벽에 도착했지만, 성이 너무 강력하게 방어되어 있어서 스크로프 경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칼라일로 이동했다. 그러자 레너드는 나워스 성에서 출진해 그들을 추격했고, 4마일간 쫓아간 끝에 켈트 강둑에 도착했다. 이후 레너드의 보병대는 '켈트 다리'에서 케리의 군대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케리는 기병대를 이끌고 레너드의 보병대 측면을 요격하여 300~400명을 사살하고 200~300명을 생포했다. 레너드는 군대가 와해하자 추적을 따돌린 뒤 역시 스코틀랜드의 리즈데일로 달아났다.
그 후 헨리 케리는 토머스 래드클리프 등 반란 진압의 주역들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자들을 심판대에 세운 뒤 가차 없이 교수형에 처했는데, 그 숫자가 최소 700여 명에 달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사촌에게 찬사를 보내는 서신을 보내면서, 친필로 이렇게 덧붙였다.
"해리, 승리가 우리의 것이라는 말과 신께서 자네를 내 영광의 도구로 택하셨다는 물 중 어느 것이 더 기쁜지 거의 말할 수 없소. 내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는 후자를 택하겠소."
엘리자베스 1세는 1571년 5월 더비셔와 요크셔 네 데이커 가문 영지를 몰수한 뒤 헨리 케리에게 보상으로 줬다. 헨리 케리는 이 땅 덕분에 연간 207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여왕은 헌스던 하우스에 직접 가서 헨리 케리에게 승리를 축하하기도 했다.
2.4. 메리 여왕 내전 개입
이 무렵,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를 국왕으로 받드는 세력과 메리 여왕의 복위를 꾀하는 세력 간의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헨리 케리는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와 함께 엘리자베스 1세의 승인을 받지 않고 제임스 6세를 추종하는 자들을 지원했고, 1570년에 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을 여러 차례 침공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들을 점령했다. 이때 헨리 케리는 서식스 백작에게 병사 1,000명을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은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에게 보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서식스 백작은 잉글랜드군이 내전을 치르면서 소모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여기고 거절했다.1570년 7월 베릭 총독에서 물러난 뒤 1년간 휴식을 취한 그는 1571년 10월 23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동부 국경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이는 그가 국경 보안에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외교 협상에도 책임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제임스 6세 정부를 지지했지만, 스코틀랜드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걸 꺼렸다. 이 때문에 헨리 케리는 메리 여왕의 추종자들을 설득해 귀순을 받아내는 동시에 스코틀랜드 섭정 정부에게 유리한 조건을 협상해야 하고, 때로는 섭정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안았다.
당시 메리 여왕 추종자들은 프랑스의 도움이 올 거라고 믿었기에 귀순을 거부했고, 섭정 정부는 더 많은 군자금을 잉글랜드로부터 뜯어내려고 했다. 헨리 케리는 이 상황에 넌더리를 내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돈 낭비하지 말고, 내전에 개입하지 말자고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통하지 않자 1572년 5월 윌리엄 세실 재상에게 자신이 직위를 떠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신이 급여를 한동안 받지 못했고, 자기가 가진 자원만으로 비용을 충당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572년 7월 31일, 메리 여왕과 제임스 6세의 지지자들은 에든버러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했고, 헨리 케리는 8월 중순에 비로소 런던으로 돌아갔다.
2.5.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중재자
1577년 11월 16일,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케리를 추밀원 위원에 선임했다. 그는 이로써 권력의 중심에 섰지만, 스코틀랜드의 정세에도 여전히 깊이 관여했다. 1578년부터 1579년 1월까지, 헨리는 엘리자베스 1세를 대신하여 제3대 헌팅던 백작 헨리 헤이스팅스와 협력하여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가 잉글랜드에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유도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케리와 헤이스팅스에게 그들의 대표인 로버트 보우스 경이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할 경우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걸 허락했다. 하지만 로버트 보우스는 모튼 백작과 반항하는 영주들 사이의 협상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헨리 케리는 1579년 1월에 국경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왔다.그 후 케리는 모튼 백작이 섭정으로 오래 버틸 수 없을 거라는 걸 눈치채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더 이상 모튼 백작을 지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듣지 않고 1579년 11월 케리에게 군대를 맡겨서 실각 위험에 처한 모튼 백작을 지원하고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억제하게 했지만, 케리가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모튼 백작이 체포되었다. 1581년 6월 2일 모튼 백작이 처형된 후, 케리는 제임스 6세의 사절이 잉글랜드에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해 9월, 그는 다시 추밀원 회의에 참석했다.
그 후 헨리 케리와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 문제를 놓고 종종 충돌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로 망명한 친잉글랜드 성향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지원하려고 노력했지만, 케리는 이제 제임스 6세의 군림을 인정하고 그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여기고 여왕의 명령을 종종 무시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첩보 책임자인 프랜시스 월싱엄은 케리를 지지했고, 그가 여왕의 명령을 회피하는 걸 허용했다. 여왕은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케리와 말다툼을 종종 벌였고, 추밀원 회의를 오랫동안 떠나 잉글랜드 북부에서 활동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케리를 계속 중용했고, 케리는 1586년 10월 스코틀랜드 전 여왕 메리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포더링헤이 성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케리는 잉글랜드 북부에 자주 머물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제임스 6세는 그를 잉글랜드 추밀원 내 스코틀랜드 대변인으로 여겼고, 추밀원 자체도 그를 스코틀랜드 정무 담당 장관으로 대했다.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모두 그를 상대 군주와 소통하는 연결 고리로 활용했다. 1587년 2월 엘리자베스가 제임스의 어머니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처형한 후, 북부에서 케리의 입지는 특히 중요해졌다. 제임스는 스페인과의 동맹 제안을 받았지만, 엘리자베스를 위해 거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케리에게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케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제임스 6세의 측근 중에 어머니의 원수를 갚으라고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고 경고했고, 이에 경각심을 품은 엘리자베스 1세는 그에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우호 관계를 회복할 전권을 부여했다. 1587년 12월 제임스 6세는 케리의 설득에 따라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양자 간의 우호 관계를 확립했다.
2.6. 정치 경력
헨리 케리는 1580년대에 궁정에서 점점 더 중요한 직책과 임무를 맡았다. 1582년, 케리는 초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제2대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와 함께 프랑수아 에르큘 드 발루아 공작을 수행하며 앤트워프에 파견된 잉글랜드 대사관의 일원이었다. 또한 그는 1583년부터 1585년까지 하트퍼드셔 주지사를 지냈으며, 1585년 7월에 궁내장관에 선임되었다.그는 궁내장관으로서 '챔벌레인 경의 부하들'(Lord Chamberlain's Men) 극단을 후원했는데, 이 극단에 소속된 극작가 중 가장 유명한 이는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 케리는 1594년 극단이 런던에서 공연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또한 그는 신하들이 여왕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는 청원할 때 이를 수락하거나 거부할 책임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궁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587년 8월 무적함대의 위협이 다가오자,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할 경우를 대비해 케리를 북쪽으로 보내 북부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1588년 4월, 케리는 남쪽으로 소환되었고, 그해 7월 20일 여왕의 경호원으로 활동할 36,000명의 군대를 지휘했다. 무적함대가 칼레 해전 이후 와해한 뒤, 그는 수년간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1589년, 최근에 사망한 로버트 더들리로부터 트렌트 남쪽 에어의 판사직을 물려받았고, 윌리엄 세실, 찰스 하워드와 함께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군이 스페인에 대항하는 군사 활동을 하는 것을 프랑스로부터 인정받는 조약을 체결하는 데 공헌했다.
2.7. 에밀리아 라니어와의 불륜
헨리 케리와 그의 아내 앤 모건은 대체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남편이 죽은 후, 앤은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그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케리는 다양한 정부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는 잉글랜드 최초의 여성 시인으로 종종 회자하는 에밀리아 라니어였다. 두 사람은 1587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라니어는 18세였고, 케리는 그녀보다 무려 45세 많았다. 케리는 그녀에게 연간 40파운드의 연금을 줬으며. 다양한 보석을 선물했다.그러던 1592년, 라니어는 23세의 나이에 케리의 아이를 뱄다. 이에 케리는 그녀에게 돈을 주고 여왕 궁정의 음악가이며 라니어의 사촌인 알폰소 라니어와 결혼시켰다. 교회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1592년 10월 18일 알드게이트의 세인트 바톨로프 교회에서 결혼했다. 1593년, 라니어는 케리의 아들 헨리 라니어를 낳았는데, 아마도 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밀리아와 알폰소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알폰소는 사치스럽게 살면서 에밀리아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금세 탕진했다. 에밀리아는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여러 편 지었다.
2.8. 사망
헨리 케리는 사망할 때까지 관직을 유지했다. 1596년 6월, 그는 마지막으로 추밀원에 참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중병을 앓았고, 1596년 7월 23일 런던의 서머셋 하우스에서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1세는 죽어가는 그를 찾아와서 그의 외조부인 토머스 불린이 가지고 있던 윌트셔 백작 작위를 수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케리는 생전에 받을 자격이 없었던 영예를 사후에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케리가 사망한 후, 엘리자베스 1세는 그의 빚을 대신 갚겠다고 약속했고, 사촌을 위해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다. 그의 유해는 1596년 8월 12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미망인과 아들 조지는 그의 무덤 위에 웅장한 기념비를 세웠다. 아내 앤 모건은 1607년 1월 19일에 사망했고, 남편의 유해가 있는 봉안당 옆에 묻혔다.
3. 가족
- 앤 모건(1529 ~ 1607): 아크스톤의 토머스 모건 경의 딸.
- 조지 케리(1547 ~ 1603): 제2대 헌스던 남작.
- 마이클 케리(1550 ~ 1581)
- 캐서린 케리(1550 ~ 1603): 초대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의 부인.
- 존 케리(1551 ~ 1617): 제3대 헌스던 남작.
- 윌리엄 케리(1552): 요절.
- 윌리엄 케리(1553 ~ 1593)
- 토머스 케리(1555 ~ 1556): 요절.
- 토머스 케리(1556 ~ 1587년 이후)
- 에드먼드 케리(1558 ~ 1637)
- 로버트 케리(1560 ~ 1639): 초대 몬머스 백작.
- 헨리 케리(? ~ 1599): 베릭 및 버킹엄 지역구 의원.
- 필라델피아 케리(1563 ~ 1629): 제10대 스크로프 남작 토머스 스크토르프의 부인.
- 마거릿 케리(1564 ~ 1605):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의 치세에 잉글랜드의 외교관, 의원, 학자, 군인으로서 활약한 에드워드 호비 경의 부인.
헨리 케리는 생전에 여러 사생아를 두었는데, 그중에는 엑서터 주교를 역임한 발렌타인 케리(1570 ~ 1626)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