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헨리 시드니 Sir Henry Sidne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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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필립 시드니 Philip Sidney |
출생 | 1529년 7월 20일 |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펜허스트 플레이스 | |
사망 | 1586년 5월 5일 (향년 56세) |
잉글랜드 왕국 러들로 성 | |
배우자 | 메리 더들리(1551년 결혼) |
자녀 | 필립, 로버트, 메리, 엘리자베스, 암브로시아 |
누이 | 메리, 루시, 앤, 프랜시스 |
아버지 | 윌리엄 시드니 경 |
어머니 | 앤 파켄햄 |
직위 | 아일랜드 총독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마지막 국왕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 활동한 군인, 정치인. 아일랜드 왕국 총독으로서 아일랜드인들을 통치했다. 잉글랜드 왕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크게 늘리는 데 일조했지만, 지나치게 강압적인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데스몬드 반란을 초래했다.2. 생애
1529년 7월 20일,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펜허스트 플레이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시드니는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치세에 왕실 시종으로 활동했으며, 플로든 전투에 참전해 대승에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어머니 앤 파켄햄은 휴 파켄햄 경의 딸이자 초대 사우샘프턴 백작 윌리엄 피츠윌리엄의 형제인 토머스 피츠윌리엄의 미망인이다. 누이로 메리[1], 루시[2], 앤[3], 프랜시스[4]이 있었다.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지에서 유명한 항해사 리처드 챈슬러와 함께 지냈고, 에드워드 왕자의 동반자로서 왕실에서 자랐다. 155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켄트에 있는 펜허스트 영지를 포함한 광범위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1556년 여동생 프랜시스와 결혼한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가 아일랜드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헨리는 아일랜드 부재무관으로서 아일랜드에 동행했다. 그는 더블린 주변 지역인 페일 일대로 축소된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행정을 아일랜드 각지로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일랜드 족장들이 잉글랜드 왕실에 복종하기 위해 취한 래드클리프의 원정에 참여했다. 1557년 서식스 백작이 얼스터 원정을 떠난 동안, 헨리는 레들린 섬을 침공해 황폐화했다. 이듬해 서식스 백작이 잉글랜드로 떠나 있는 동안, 그는 아일랜드 정부의 전적인 책임을 맡아 뛰어난 행적 능력을 보여줬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한 뒤 래드클리프가 여왕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떠나 있는 동안, 그를 대신해 총독직임을 대행한 헨리는 얼스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떨치던 오닐 가문의 수장인 셰인 오닐과 무력 충돌을 여러 차례 벌였고, 1559년 8월 서식스 백작이 복귀할 때까지 셰인 오닐의 잉글랜드 영지 습격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웨일스 변경백회 의장으로 임명되어 아일랜드 부재무관 직을 사임한 뒤, 수년 간 주로 러들로 성에서 머물면서 런던을 자주 방문했다.
1562년 7월 엘리자베스 1세의 지시에 따라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어 엘리자베스가 메리 여왕과의 회담을 이듬해로 연기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엘리자베스 1세와 만나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에 대해 협의하고 싶었던 메리 여왕은 이에 서운함을 느끼고 울었다고 한다. 이후 메리 여왕과 함께 홀리루드 궁전 정원에 있을 때 불쾌한 사건이 벌어졌다. 메리 여왕이 헨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헵번이라는 이름의 대위가 여왕에게 다가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여왕은 그 종이를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건넸고, 제임스 스튜어트가 종이를 열어보니 음란한 시구 네 연과 음란한 그림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 후 헵번은 체포를 피해 잉글랜드로 달아났다고 한다.
1565년, 헨리는 전년도에 서식스 백작의 뒤를 이어 아일랜드 총독을 맡았던 니콜라스 아놀드 경을 대신하여 아일랜드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아일랜드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아일랜드를 떠났을 때보다 팔레 일대가 더 가난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걸 확인했고, 오닐 씨족의 수장인 셰인 오닐이 팔레를 심각하게 약탈했기 때문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셰인 오닐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토벌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얼스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춘 오닐 씨족을 적대하는 걸 망설였지만, 헨리의 강력한 요청에 결국 토벌령을 내렸다. 셰인 오닐은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유격전을 전개했지만, 헨리는 오닐 씨족의 라이벌인 컬바 오도넬을 지원했고, 오닐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걸 막기 위해 데리에 잉글랜드 수비대를 배치했다.
1567년, 파셋모어 전투에서 오도넬 씨족에게 패배한 뒤, 셰인 오닐은 엔트림의 맥도넬 씨족 수장에게 항복했다. 맥도넬은 헨리와 비밀리에 협정을 맺은 뒤, 쿠센달에서 열린 잔치에서 오닐 씨족을 대거 학살하고 셰인 오닐을 참수했다. 그 후 헨리는 남쪽으로 주의를 돌려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 사이에 분쟁을 조장했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투옥했다. 이후 얼스터로 진군하여 셰인 오닐의 후임 씨족 수장인 터로그 루이네크 오닐의 복종을 받아냈다. 그 후 벨파스트와 캐릭퍼거스에 잉글랜드 수비대를 배치해 티르 에오게인의 오도넬 씨족과 엔트럼의 맥도넬 씨족을 모두 복속했다.
그러나 헨리는 잉글랜드 정부에 대항한 게일인 족장들을 토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 농민들에 대한 살인도 자행했다. 그는 농민을 위협한다면 일반 대중과 전통적인 지역 통치자의 유대를 끊는 확실한 방법이라 여기고 그들을 거침없이 살육했다. 데이비드 에드워즈는 2010년 <잔혹한 시대: 근대 초기 아일랜드의 폭력과 정치적 갈등>에서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이 시기 정부 활동의 암울한 측면 중 하나는 일반 대중의 상당수에 대한 군사적 엄중 조치의 공식적 확대였다. 농민을 위협하는 것은 일반 대중과 전통적인 지역 통치자의 유대를 끊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왕위 계승 과정에서 비천한 계층을 죽이는 일이 만연했다. 심지어 별것 아닌 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시드니 총독은 외출에서 돌아와 화이트홀에 보낸 편지에서 아일랜드 '촌뜨기'들을 너무 많이 죽여서 셀 수조차 없었다고 농담했다.
1567년 가을 잉글랜드로 돌아간 헨리는 10개월 동안 런던에 머물다가 아일랜드로 돌아온 뒤 벌리 남작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수석 고문인 윌리엄 세실에게 아일랜드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고, 얼스터의 아일랜드 씨족 제도를 자유민 제도로 대체하고, 섬 전체에 만연하는 게일 관습을 억제하는 일련의 조치를 하라고 촉구했다. 1569년, 그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의회를 개최해 잉글랜드 국왕의 특별 법정인 스타 챔버(Star Chamber)의 아일랜드 버전인 성 법원(Court of Castle Chamber) 설립을 제안했는데, 이는 여왕의 지지를 받아 그의 소환 이후 설립되었다.
또한 헨리는 먼스터와 코노트에 군사 장관을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피츠제럴드 가문의 인사인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가 주도한 제1차 데스몬드 반란의 발발을 촉발했다. 여기에 더블린 정부의 승인으로 아일랜드 토지를 획득할 권리를 인정받은 데번 출신의 모험가 피터 케어우 경이 오몽드와 킬케니의 게일인-노르만 영주들과 갈등을 벌이자, 그는 피터 케어우를 지지했다. 1570년, 에드먼드 버틀러 경의 많은 추종자들이 교수형에 처형되었고, 제3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의 세 형제가 아일랜드 의회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1571년, 헨리는 엘리자베스 1세의 미미한 지원에 실망하여 아일랜드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1575년 9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는 걸 허락받고 아일랜드에 돌아왔지만,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은 더 악화했다. 앤트림에서 솔리 보이 맥도넬이 이끄는 맥퀼런 가문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자, 헨리는 앤트림으로 진군해 어느 정도 평정한 뒤 남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주민들을 복종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섬의 행정 구역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고, 잉글랜드 모델에 기반한 카운티 구역을 신설했다. 아드(Ard)와 클랜데보이(Clandeboye) 카운티를 통합하여 캐릭퍼거스(Carrickfergus) 카운티를 형성했고, 오패럴 씨족(Clan O'Farrell)의 구역을 롱퍼드(Longford) 카운티로 전환했다. 또한 코노트에서도 유사한 정책을 시행하여 토몽드에 있는 오브라이언 씨족(Clan O'Brien)의 땅을 클레어(Clare) 카운티로 전환했고, 골웨이(Galway) , 메이오 (Mayo), 슬라이고(Sligo) , 로스커먼(Roscommon) 카운티의 경계도 정했다.
1576년 클랜리카르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했고, 1578년 멀라마스트 학살을 자행하는 등 아일랜드 중부 남동 지역인 레이이스 주의 일곱 씨족에 대한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 여기에 그가 민병대 자금 마련을 위해 부과한 연간 세금은 페일 지역 귀족들 사이에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저명한 변호사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런던으로 파견하여 엘리자베스 1세에게 직접 불만을 전달했다. 이들은 아일랜드 정부의 여러 주요 인사, 특히 아일랜드 대법관 윌리엄 제러드 경의 지지를 받았다. 제러드의 이탈은 지난 5년간 제러드를 "나의 수석 변호사"라고 부르며 필수적인 동맹자로 여겨왔던 헨리의 입지를 위태롭게 했다.
헨리의 장남인 필립 시드니는 아버지를 옹호하기 위해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담론>을 정부에 기고했다. 필립은 이 글에서 누구에게도 세금을 면제하지 않는 것이 세금의 가장 큰 부담을 짊어졌던 많은 이의 고통을 덜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특권층, 즉 모든 부유층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부담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지워집니다. 그들은 신음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의 울부짖음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립은 뒤이어 아일랜드에서는 관대함보다 가혹한 수단이 더 정당하므로, 저들의 요구를 절대로 들어주지 말고, 강경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헨리는 1578년 9월 잉글랜드로 소환되어 여왕을 알현했다. 필립은 그토록 믿었던 윌리엄 제러드의 배신에 분노를 토로했지만, 여왕은 차갑게 응대했다.
그 후 다시는 요직에 앉지 못했고, 단지 잉글랜드 추밀원 의원으로서 궁정에 간간이 들리면서 1579년부터 1583년까지 발발해 먼스터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힌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을 강경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잉글랜드 주민들을 먼스터에 대거 이주하는 정책도 찬성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러들로 성에서 살면서 웨일스 변경백회의 의장으로서 활동하다가 1586년 5월 5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펜허스트의 세례자 요한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메리 더들리(1530/1535 ~ 1586): 초대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