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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드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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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William Dr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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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윌리엄 드루리
William Drury
출생 1527년 10월 2일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호스티드
사망 1579년 10월 13일 (향년 52세)
아일랜드 왕국 먼스터 워터포드
배우자 마조리 웬트워스(1560년 결혼)
자녀 제인, 앤, 엘리자베스
아버지 로버트 드루리
어머니 엘리자베스 브루데넬
형제 로버트, 드루
직위 베릭 원수, 아일랜드 대법관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기사. 메리 여왕 내전에서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제임스 6세 정부를 지원했고, 아일랜드 대법관을맡아 가톨릭 수도자들을 탄압했다.

2. 생애

1527년 10월 2일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의 호스티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버킹엄셔 해저리의 로버트 드루리 경이었고, 어머니는 버킹엄셔 찰폰트 세인트 피터의 엘리자베스 브루데넬이었다. 그는 1495년 하원 의장을 지낸 로버트 드루리 경의 손자였으며, 형제로 하원 의원을 여러 차례 역임한 로버트 드루리와 드루 드루리가 있었다.

일찍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곤빌 칼리지에서 교육받았고, 1544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생포되었다. 이후 석방된 그는 1549년 데번셔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나중에 베드퍼드 백작이 될 존 러셀을 지원했다. 1554년 치핑 와이컴의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메리 1세 치세 동안엔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1558년 11월 메리 1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새 여왕으로 등극한 뒤, 윌리엄은 본격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1559년, 그는 스코틀랜드 정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에든버러로 파견되었고, 5년 후에 베릭의 원수 겸 부총독이 되었다. 그는 1567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반란군에게 폐위된 뒤 로클레번 성에 연금된 사건을 자세히 관찰하고 재상 윌리엄 세실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또한 런던에 펠리컨 호에 실려 운송된 2개의 굴뚝을 위한 자재를 포함한 건축 자제를 세실에게 보냈다.

윌리엄은 제임스 6세의 초대 섭정인 제임스 스튜어트의 활동에 관한 보고서를 여러 차례 런던에 보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모레이 백작이 자금이 부족해지자 메리 여왕의 보석을 전당포에 맡기거나 팔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1568년 1월 모레이 백작이 인치키스의 포병 요새를 파괴했지만 던바 성을 공략하기엔 막대한 비용이 들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윌리엄은 1568년 2월에 윌리엄 세실에게 로클레번에 포로로 잡혀 있던 메리 여왕이 "옆구리에 병이 나고 팔에 통증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고했다.

1568년 3월, 윌리엄은 잉글랜드 은화가 스코틀랜드 기본 금속 동전으로 채택되어 스코틀랜드 조폐국에서 이익을 내고 다시 주조되었다고 보고했다. 또한 그는 1568년 4월 3일에 세탁부로 변장한 메리가 3월 25일 로클레번 성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발각되었다고 보고했다. 메리는 5월 2일에 마침내 탈출했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복위를 꾀했지만 랭사이드 전투에서 모레이 백작에게 패배한 뒤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윌리엄은 메리 여왕을 칼라일 성에서 메리 여왕을 찾아간 쉴스토크-브레이의 댄 커가 국경 지역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댄 커는 테비엇데일, 리즈데일, 그리고 서부 국경 지역에서 모레이 백작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선동적인 서적을 유포했다고 한다. 헌스던 남작 헨리 케리는 댄 커를 감시할 사람들을 배치했고, 댄 커는 결국 세스퍼드의 월터 커에게 체포되었다.

1570년 1월 19일, 윌리엄은 헨리 게이츠 경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가서 스털링 성의 그레이트 홀에서 모레이 백작과 만나 저녁 식사 후 그의 침실에서 토론했다. 모레이 백작은 잉글랜드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에든버러에서 그들 및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만나 잉글랜드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스코틀랜드로 도망친 인사들을 넘기는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답했다. 그 후 모레이 백작은 1월 23일에 린리스고에서 윌리엄과 재차 약속을 잡으려고 길을 나섰다가, 랭사이드 전투 때 메리 여왕을 위해 싸웠다가 생포된 적이 있었던 보스웰 호 출신의 제임스 해밀턴이 그의 삼촌인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존 해밀턴의 집 창문에서 화승총을 발사하면서 암살당했다.

모레이 백작 암살 사건 이후, 윌리엄은 메리 여왕의 지지자들을 상대로 습격전을 이끌었다. 1570년 5월, 그는 1,000명이 넘는 병력을 지휘하여 글래스고 성과 해밀턴, 크레이그네선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 후 덤버턴 성에 잠시 머물렀다가 총격을 받았지만 목숨을 건졌고, 스코틀랜드에 외교 활동을 벌이기 위해 3차례 방문했다가 암살자들의 위협을 받고 돌아가야 했다. 1572년 4월, 스코틀랜드 주재 잉글랜드 대사 토머스 랜돌프와 함께 레스탈리에 머물면서, 더글러스의 목사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제7대 세튼 경이자 메리 여왕의 궁내장관이었던 조지 세튼 경을 리스 해안에서 납치할 음모를 꾸몄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1573년 5월, 윌리엄은 스코틀랜드군과 연합하여 윌리엄 커콜디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군이 농성하는 에든버러 성을 포위했다. 그는 에든버러 공방전이 벌어지는 동안 성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로열 마일에 있는 에든버러의 세관원이자 부유한 상인인 로버트 고를레이의 집에 주둔했다. 에든버러 성이 함락되었을 때, 메리 여왕의 보석과 왕관 보석 또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예복이 들어있는 금고가 '동굴' 또는 지하실의 상자에서 발견되었다. 당시에 윌리엄 커콜디와 윌리엄 드루리가 보석을 놓고 비밀 거래를 했다는 의심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1572년 레스탈리에서 일종의 외교적 선물로 윌리엄 드루리의 아내 마조리 웬트워스에게 청록색 보석 몇 개를 주려고 한 정황이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 드루리와 윌리엄 커콜디 모두 이를 부인했기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에든버러 성이 함락되고 윌리엄 커콜디가 처형된 지 1년 후, 윌리엄 커콜디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 편지에서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남긴 보석과 드루리가 600파운드의 대출을 위한 담보로 일부를 받았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었다고 한다.

1576년 아일랜드 먼스터 지방의 주지사로 부임한 뒤 엄격하지만 효율적으로 통치해 치안을 바로잡는 데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1578년 아일랜드 대법관이 되어 아일랜드 왕국의 통치를 진두지휘했다. 이 무렵, 프랑스에서 아일랜드로 몰래 밀입국한 패트릭 오헬리 주교와 콘 오루크 수도자가 반란군 지도자였던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가 제1차 데스몬드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살 길을 찾기 위해 그들을 넘기기로 하면서 윌리엄에게 끌려가 심문받았다. 두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는 종교적 사명을 이루려 했을 뿐, 반란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으며, 교황과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침략하려 한다는 의혹에 관한 질문에 답하길 거부했고, 수장령을 받들겠다는 서명을 하는 것 역시 거부했다.

이에 윌리엄은 두 사람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호주 시드니의 대주교이자 호주 최초의 추기경인 패트릭 프랜시스 모란은 저서 <순교자들의 삶>에서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드루리의 명령은 비범한 수준의 야만성으로 실행되었다. 두 죄수는 먼저 고문대에 올려졌고, 그들의 팔과 발은 망치로 맞았으며, 허벅지 뼈가 부러지고 날카로운 쇠못과 바늘이 손톱 아래에 잔인하게 꽂혔다. 이는 극심한 고통을 유발했다. 그들은 상당한 시간 동안 이러한 고문을 받았고, 거룩한 고해 사제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에게 끈기와 인내를 권고했다.

결국 두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는 1579년 8월 13일 칼말록 성벽의 문중 하나의 인근에 있는 나무에 매달리는 교수형에 처했다. 그들의 유해는 14일간 매달렸고, 두 시신 모두 칼말록 수비대에 의해 사격 연습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579년 10월 13일, 윌리엄 드루리는 워터포드에서 급사했다. 그 후 잉글랜드의 침탈에 반발한 먼스터인들이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의 지휘하에 봉기하면서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이 발발했다. 이 반란은 4년간 이어지면서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한 잉글랜드군의 강경 진압과 기근, 전염병 창궐로 먼스터 인구의 최대 1/3이 사망하는 참극을 초래했다.

윌리엄 드루리에 의해 처형된 패트릭 오헬리와 콘 오루크는 1992년 9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3. 가족

  • 마조리 웬트워스(? ~ 1587): 초대 웬트워스 남작 토머스 웬트워스의 딸이자 초대 테임의 윌리엄스 남작 존 윌리엄스의 미망인. 윌리엄 드루리가 사망한 후 1580년에 헤리퍼드셔 크로프트 성의 제임스 크로프트 경의 셋째 아들인 제임스 크로프트와 재혼했다.
    • 제인 드루리: 리처드 쳇우드 경의 부인.
    • 앤 드루리: 로버트 하트웰의 부인.
    • 엘리자베스 드루리(1573 ~ ?): 1573년 12월 12일에 태어난 뒤 12월 29일에 버킹엄셔의 롱크렌던에서 세례를 받았고, 엘리자베스 1세, 로버트 더들리를 대부모로 삼았다는 것 외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