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거포일 공방전 Siege of Carrigafoyle Castl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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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
1580년 부활절 | ||
장소 | ||
아일랜드 왕국 케리주 벨리롱포드 인근 | ||
원인 | ||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을 진압하려는 잉글랜드군의 공세 | ||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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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윌리엄 펠럼 | 줄리안 대위 | |
병력 | ||
600명 | 66명 | |
결과 | ||
잉글랜드군의 승리. | ||
영향 | ||
먼스터 요새 상당수가 귀순함. |
1. 개요
제2차 데스몬드 반란 시기인 1580년 부활절, 잉글랜드군이 아일랜드 반군과 스페인군을 케리거포일 성에서 포위 공격해 함락한 공성전.2. 케리거포일 요새
케리거포일(Carrigafoyle)은 아일랜드어 '캐리 그 안 포일 (Carraig an Phoill, "구멍 속 바위")'을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1490년대에 코너 리아스 오코너케리가 섀넌 강 어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만의 바위 위에 건설한 거대한 탑형 요새로서 먼스터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 중 하나로 손꼽혔다. 이 성은 약 20마일(32km) 떨어진 섀넌강 상류의 무역 도시 리머릭에 물자를 공급하는 해상 교통로를 전략적으로 통제했기 때문에 섀넌 강의 수호자로 알려졌다.케리거포일 요새 인근의 만은 북쪽으로는 숲이 우거진 섬에 의해 강어귀로부터 보호되었고, 만 안쪽의 성벽은 서쪽과 남쪽에 이중 방어벽으로 방어되었다. 내벽은 바운(bawn: 아일랜드의 탑 하우스를 둘러싼 방어벽.)을 둘러쌌고, 요새를 둘러싼 해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외벽으로 덮어 있었으며, 외벽에는 더 작은 탑이 있었다. 탑 망루 자체의 높이는 86피트였고, 성벽의 가파른 면은 벽돌과 모르타르로 쌓여 있었다. 만조 때 해자 안에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상륙장은 배수량 100톤의 배를 수용할 수 있었다.
3. 전투 경과
1579년 7월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이 발발한 이래, 케리거포일 요새는 스머윅 항구에 처음 상륙한 스페인 군인 16명과 아일랜드인 50명이 지켰다. 이 요새엔 민간인 여성과 어린이도 있었다. 요새를 담당한 이는 이탈리아 출신 기술공으로 알려진 줄리안 대위였다. 1580년 초, 아일랜드 대법관 윌리엄 펠럼은 조지 케어우 경과 함께 병사 600명을 이끌고 반란의 중심지인 먼스터로 진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여기에 윌리엄 윈터가 지휘하는 3척의 돛대 선박이 해안에서 군수 물자를 수송했다.1580년 부활절에 케리거포일에 도착한 잉글랜드군은 요새 남동쪽에 진을 쳤고, 윌리엄 윈터의 함대는 만 너머 하구에 정박하여 중형 대포 3문과 컬버린(소형 포탄을 발사하는 거대한 함포) 1문을 윌리엄 펠럼에게 전달했다. 대포들은 북쪽으로 뻗어 있는 낮은 성벽을 따라 외벽과 평행하게 100야드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이틀에 걸쳐 6시간 동안 케리거포일 요새를 향한 포격을 벌였다. 여기에 윌리엄 윈터의 함선들은 요새의 바다쪽 벽에 대포를 발사했다.
윌리엄 펠럼은 공격 첫날 병사들에게 해안 제방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했지만, 장병들은 수비대의 총격 세례를 맞고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피해를 무릅쓰고 성벽에 바짝 다가간 뒤 사다리를 던졌지만, 스페인 출신의 할버드 병사들이 사다리를 밀어냈다. 데스몬드 반란 진압에 참여한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는 성벽의 바위 측면이 피로 미끄러워지면서 해협이 잔해로 가득 찼다고 묘사했다. 펠럼은 도탄탄에 맞았고, 수비병들의 야유를 받았지만, 포격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펠럼은 윈터가 수송선을 통해 보태 준 병력과 합세해 전력을 다시 갖춘 뒤 포격을 재차 가했다. 두세 발의 포탄에 탑이 금이 갔고, 서쪽의 거대한 성벽이 기초부터 무너져 내려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깔렸다. 생존자들은 얕은 물을 통해 도망쳤지만, 대부분은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렸다. 나머지(민간인 여성 한 명 포함)는 야영지로 끌려와 인근 나무에서 목이 매달려 죽었다. 줄리안 대위 역시 체포되었고, 3일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4. 결과
케리거포일 요새를 공략한 잉글랜드군은 북쪽에서 반란군을 차단하고 외국군이 먼스터의 주요 항구인 리머릭에 상륙하는 것을 막았다. 그 후 다른 데스몬드 가문 요새들도 빠르게 함락되었다. 애스키턴 성은 스페인 수비대가 성벽을 폭파하면서 버려졌고, 뉴캐슬 웨스트, 발리로건, 래스킬, 벨리더프 수비대는 곧 항복했다. 맥카시 모르 등 반란에 가담했던 많은 영주도 잉글랜드가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했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이리하여 반란이 곧 진압되는 듯 했지만, 1580년 7월 아일랜드 동부의 렌스터에서 위클로 산맥을 기반으로 삼던 피아흐 맥휴 오바인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면서 전쟁이 장기화했다.캐리거포일 성은 이 공방전에서 너무 심하게 파손되어 복구되지 못했다. 다만 외벽과 해자를 포함한 유적지는 현재 여전히 남아 있으며, 포격의 여파가 여실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