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1 21:47:31

윌리엄 펠럼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아일랜드 대법관
윌리엄 펠럼
William Pelham, Lord Justice of Ireland
파일:Field_Marshal_Sir_William_Pelham,_Lord_Justice_of_Ireland_(d_1587)_by_Hieronimo_Custodis.jpg
성명 윌리엄 펠럼
William Pelham
출생 1528년
잉글랜드 왕국 서식스주 로튼
사망 1587년 11월 24일
스페인령 네덜란드 발헤렌 섬 플리싱겐
아버지 윌리엄 펠럼
어머니 메리 샌디스
형제 에드먼드(친형제)
니콜라스(이복형제)
배우자 엘리노어 네빌 (결혼 미상 / 1574년 사망)
도로시 캐츠비 (1576년 이전 결혼)
자녀 윌리엄, 페레그린, 앤
직위 아일랜드 대법관.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데스몬드 반란 시기 잉글랜드 왕국을 위해 아일랜드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2. 생애

1528년경 일글랜드 왕국 서식스 로튼에서 젠트리 출신인 윌리엄 펠럼과 헴프셔주 베이싱스토크 인근 바인의 초대 남작 윌리엄 샌디스의 딸 메리 샌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제로 아일랜드 재무부 남작과 얼스터에서 최초로 순회재판을 연 판사를 맡은 에드먼드 펠럼이 있었으며, 아버지가 첫 번째 아내 메리 케어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제 니콜라스 펠럼은 서리와 서식스의 고위 판사, 아룬델과 서식스의 하원 의원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1538년에 사망했고, 그는 장남으로서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1560년, 펠럼은 리스 공방전에 참전해 파이오니어(Pioneer: 공병건설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의 대장을 맡아서 4개의 보루가 있는 포대를 건설했다. 이 건축물은 "펠럼 산"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지휘부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형편없는 공학 기술로 인해 지휘관 윌리엄 그레이의 아들인 아서 그레이가 다쳤다고 한다. 펠럼은 1562년 11월 제3대 워릭 백작 엠브로즈 더들리의 지휘 아래 르아브르에서 파이오니어를 지휘했고, 1563년 2월 위그노 전쟁에 참전해 샤티용 영주이자 위그노의 지휘관 가스파르 드 콜리니에게 가담하여 공략에 일조했다. 3월에 르아브르로 돌아온 그는 6월에 라인그레이브 부대와의 전투 도중 상처를 입었다. 이후 르아브르를 프랑스에 도로 내주는 협상에 참여했고, 항복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인질이 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펠럼은 이탈리아 공병대장 야코포 아콘치오와 함께 트위드 강변의 베릭 요새를 검사하고 개선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 포병 중장으로 선임되어 수년간 잉글랜드 왕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요새 방어력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1578년 제11대 코브햄 남작 헨리 브룩, 프랜시스 월싱엄과 함께 네덜란드 외교 사절단에 동행했고, 이듬해 여름에는 아일랜드로 파견되어 셰인 오닐의 지속적인 팔레 지역 습격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때 아일랜드 총독 윌리엄 드루리 경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윌리엄 드루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후 아일랜드 추밀원에 의해 아일랜드 대법관에 선임되었다.

1579년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이 발발한 후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가 반란에 가담하려 하자, 그는 데스몬드 백작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백작을 반역자로 선포했다. 이후 백작이 머무는 애스키튼을 공격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갤웨이를 거쳐 더블린으로 이동했고, 먼스터의 전쟁 관리를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에게 맡겼다. 엘리자베스 1세는 아일랜드에 쓸데없는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백작을 반역자로 선포한 펠럼에게 불쾌감을 토로했다.

펠럼은 1580년 1월 반란을 조속히 진압하라는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먼스터로 직접 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식량이 부족해서 2월 중순까지 워터포드에서 지체하다가, 스페인군이 아일랜드 반군을 돕기 위해 상륙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코크와 워터포드의 통치를 윌리엄 모건 경에게 맡기고 오몽드 백작과 함께 코넬로와 케리를 거쳐 딩글 반도까지 진군하여 상륙을 저지하기로 했다. 그는 원정을 떠난 내내 현지인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3월 25일 캐리거포일 성을 포위한 그는 케리거포일 공방전을 치른 끝에 함락하고 그곳을 지키던 수비대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모조리 죽였고, 성을 지키던 줄리안 대위를 체포해 사흘 후 교수형에 처했다.

케리거포일 요새를 공략한 뒤, 펠럼은 북쪽에서 반란군을 차단하고 외국군이 먼스터의 주요 항구인 리머릭에 상륙하는 것을 막았다. 그 후 다른 데스몬드 가문 요새들도 빠르게 함락되었다. 애스키턴 성은 스페인 수비대가 성벽을 폭파하면서 버려졌고, 뉴캐슬 웨스트, 발리로건, 래스킬, 벨리더프 수비대는 곧 항복했다. 맥카시 모르 등 반란에 가담했던 많은 영주도 잉글랜드가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했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그 후 리머릭에 본부를 둔 펠럼은 데스몬드 지구에 수비대를 주둔하도록 했다. 그의 목표는 반란군의 활동을 케리주에 국한하고 윌리엄 윈터가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의 도움을 받으며 반군을 굶겨서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또한 지방의 귀족과 수장들의 회의를 소집했지만, 참석은 저조했다.

그 후 오몽드 백작과 함께 케리주로 진군해 캐슬아일랜드에서 데스몬드 백작과 반란 선동자인 니콜라스 샌더스를 거의 잡을 뻔했지만 아깝게 놓친 뒤, 메인 강 계곡을 따라 딩글 반도까지 진격하며 데스몬드 백작과 니콜라스 샌더스를 잡으려 했다. 펠럼은 윌리엄 윈터의 지원에 따라 딩글 반도와 코크 사이의 해안을 철저히 약탈했고, 아일랜드 서부 씨족장들은 하나둘씩 그에게 복종했다. 코크에서 모든 영주와 수장들이 모여 큰 회의를 했고, 베리모어 경을 제외한 모두가 그의 용서를 받았다. 하지만 펠럼은 이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워럼 세인트 레저 경의 조언에 따라 그들을 데리고 리머릭으로 갔다. 데스몬드 백작은 여전히 펠럼의 추격을 따돌렸지만, 그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 펠럼은 더 높은 계급의 반란 용의자를 사살하지 않는 한 어떤 반란군도 항복해서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펠럼은 뒤이어 케리주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준비를 했지만, 그 사이에 제14대 윌튼 드 그레이 남작 아서 그레이더블린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펠럼은 본래 헨리 월롭 경을 국검과 함께 더블린으로 보내 사임 의사를 밝히려 했지만, 총독 비서관 에드먼드 스펜서가 자신에게 보인 무례함에 화가 나서 직접 더블린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악천후로 애슬론 근처에서 다시 머물렀고, 9월 7일이 되어서야 더블린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서 국검을 총독에게 반환하고 잉글랜드 대법관 직위를 사임했다. 이후 펠럼을 먼스터 주지사로 선임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아서 그레이와 함께 드로이다로 가서 요새를 시찰했지만, 중병에 걸려 마차를 타고 더블린으로 돌아갔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고 10월 초 아일랜드를 떠났다.

1581년 1월 16일, 펠럼은 제6대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와 헨리 네빌 경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 메리를 셰필드에서 레스터셔에 있는 애쉬비 드 라 주크 성으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성은 제3대 헌텅던 백작 헨리 헤이스팅스의 거주지였다. 그들은 메리의 서류를 압수하여 런던으로 보내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 명령들은 취소되었고, 메리는 채츠워스 하우스에서 조지 탈보트의 보호를 받았다. 한편, 펠럼은 파이오니어 대장 직을 계속 맡았지만, 이 활동을 하는 장병들을 지원하던 중 막대한 돈을 허비하고 빚더미에 시달렸다. 1586년, 엘리자베스 1세는 그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참전해 네덜란드 반란군을 이끄는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돕는 조건으로 그의 빚을 탕감받게 해주곘다고 제안했다. 펠럼은 이 제안에 받아들이고, 자기 재산에 대한 저당권을 레스터 백작과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에게 내건 뒤, 그해 7월 네덜란드로 가서 로버트 더들리와 합류했다.

로버트 더들리는 펠럼의 군사적 능력과 풍부한 경험을 높이 평가하여 육군 원수로 삼았다. 그러나 이 조치는 이전부터 잉글랜드 육군에서 활약하던 두 형제 존 노리스와 에드워드 노리스의 분노를 샀다. 그는 로버트 더들리의 일방적인 총애를 등에 업고 두 형제와 갈등을 벌였다. 그러던 1586년 8월 6일, 헤르트루이덴베르크에 있는 호엔로헤 백작의 숙소에서 열린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에드워드 노리스의 목숨을 거의 앗아갈 뻔한 싸움을 일으켰다. 며칠 후, 로버트 더들리와 함께 두스베르크 앞의 참호를 검사하던 중, 어딘가에서 날아온 탄환에 복부를 맞았다. 이 때문에 생긴 상처는 즉시 치명적이지는 않았고, 스페인군을 상대로 쥐트펜 전투에 참여했으며, 데벤테르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1587년 4월 로버트 더들리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와 바스에서 수역을 탐험했다. 가을에 증원군과 함께 네덜란드로 돌아갔지만, 1587년 11월 24일 발헤렌 섬의 플리싱겐에 상륙한 직후 총상이 악화하여 사망했다.

3. 가족

  • 엘레노어 네빌(? ~ 1574): 제5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헨리 네빌의 딸.
    • 윌리엄 펠럼: 제2대 펠럼의 윌러비 남작 찰스 윌러비의 딸 앤 윌러비의 남편.
  • 도로시 캐츠비(? ~ 1623): 노서햄턴셔 위스턴 출신 지주 앤서니 캐츠비의 딸,. 윌리엄 도머 경의 미망인.
    • 페레그린 펠럼
    • 앤 펠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