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험프리 길버트 경 Sir Humphrey Gilber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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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9년 |
잉글랜드 왕국 데번 브릭섬 그린웨이 | |
사망 | 1583년 9월 9일 |
아소르스 제도 해상 | |
직업 | 군인, 모험가, 탐험가, 국회의원 |
배우자 | 앤 오처 |
자녀 | 6남 1녀 |
형제 | 존, 에이드리언 |
아버지 | 오토 길버트 |
어머니 | 캐서린 챔퍼노운 |
직업 | 탐험가, 시인, 정치인, 해군 장성.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마지막 국왕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복무한 영국의 군인이자 모험가, 탐험가, 국회의원. 북미와 아일랜드 농장의 영국 식민지 제국 형성의 선구자였다. 월터 롤리의 이부형제이기도 하다.2. 생애
2.1. 초년기
1539년경 잉글랜드 왕국 남부 데번주의 해안 도시인 브릭섬의 그린웨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데번의 컴튼, 그린웨이, 캘림턴의 영주 오토 길버트이고, 어머니는 데번의 모드버리 영주인 필립 챔퍼노운의 넷째 딸인 캐서린 챔퍼노운이었다. 어머니 캐서린은 아버지 오토 사후 데번주의 파델 영지를 다스리는 소영주였던 월터 롤리와 재혼하여 월터 롤리를 비롯한 6명을 낳았다. 그의 친형제인 존 길버트, 에이드리언 길버트와 이부형제인 월터 롤리는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이들 모두 엘리자베스 1세 치세 기간에 두각을 드러냈다. 또한 어머니 캐서린의 친이모는 엘리자베스 1세의 가정교사였던 캣 애슐리로, 길버트 형제와 월터 롤리를 궁정에 소개한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 길버트의 외삼촌은 국회의원, 데번의 보안관, 서부의 제독이었던 아서 챔퍼노운 경이었다.길버트의 멘토는 아일랜드 총독 헨리 시드니 경이었다. 그는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배웠고, 군사 기술과 항해술도 익혔다. 졸업 후 위그노 전쟁에 참전해 위그노 편에 서서 가톨릭 세력과 맞섰다. 1563년 르아브르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그곳에서 상처를 입었다. 1566년부터는 헨리 시드니 휘하에서 아일랜드에 복무해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에 맞선 셰인 오닐과 싸웠다. 1년 후, 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잉글랜드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여왕에게 아메리카에서 아시아로 이어지는 북서 항로 탐사를 다룬 논문 <카타이아로 가는 새로운 항로 발견에 대한 답론>을 제출했다.
2.2. 아일랜드에서의 군 경력
길버트는 아일랜드로 돌아온 뒤 셰인 오닐이 암살된 후 얼스터 주지사에 선임되었고, 동시에 아일랜드 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는 수석 고문인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에게 "눈을 회복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소환해달라고 요청하고 상당한 로비 자금을 보내기도 했지만, 1569년 4월 먼스터 지방의 소왕과 의회 설립을 제안하고 코크 주 주변에 많은 잉글랜드인을 정착시키려 하는 등 먼스터에서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헨리 시드니와 토머스 스미스 경이 데번셔에서 많은 사람들을 얼스터 지방에 정착시키려는 계획에도 참여했다.1567년, 피터 케어우는 자신이 과거에 케어우 가문이 소유한 아일랜드 영지의 합법적인 상속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존 후커와 윌리엄 페리엄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 칼로우 주의 오드로네 남작령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시도는 오몽드 백작 에드먼드 버틀러를 비롯한 현재 아일랜드 젠트리들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쳤고, 잉글랜드 관리들도 그의 주장을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버트는 자신의 친척인 피터 케어우의 주장을 지지했다.
피터 케어우가 현재의 칼로우 주에 해당하는 아이드론 남작령을 점령한 후, 길버트는 군대를 미스 블랙워터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해서 에드먼드 버틀러를 물리쳤다. 이후 분쟁은 렌스터에서 먼스터 지방으로 번졌고, 데스몬드 백작 가문이 제1차 데스몬드 반란을 일으켰다. 길버트는 헨리 시드니에 의해 대령으로 임명되어 반란군 주동자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를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피츠제럴드 가문은 칼말록에서 쫓겨났지만, 이내 군대를 재정비한 뒤 칼말록에서 길버트를 포위했다. 길버트는 돌격을 감행해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과 격돌해, 말이 쓰러지고 방패가 창에 꿰뚫리는 등 격전을 벌인 끝에 물리쳤다.
그 후 길버트는 반란군 영토를 휩쓸면서 케리와 코넬로를 무사히 통과하며 포병 지원 없이 30~40개 성을 함락했다. 이 성들에 살던 주민들이 모두 도망쳤기 때문에, 그는 이 많은 성을 접수하면서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적을 사살하지 않았다. 이후 반란군 지도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전장에서 살해된 적들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고, 그날 저녁에 그의 천막으로 가는 길의 좌우에 수급들이 망대에 꽂힌 채 줄지어 놓였다. 당시 아일랜드의 게일인들에게는 적의 목을 베고 전시하는 것이 흔한 관행이었지만, 악습에 빠진 영주들의 폭정에 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주장하는 잉글랜드 장교가 이 관습을 받아들인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전세가 불리해진 반란 지도자 한 명이 항복하면서 반란은 수그러들었고, 길버트는 1570년 1월 1일 드로이다에서 과거에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가 세웠던 숙영지 한가운데에서 헨리 시드니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피츠모리스는 여전히 붙잡히지 않았고, 길버트가 잉글랜드로 돌아간 지 한 달 후 칼말록을 탈환했다.
2.3. 1570년대의 행적
1570년 잉글랜드로 돌아간 길버트는 앤 오처와 결혼하여 아들 6명과 딸 1명을 두었다. 그는 플리머스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토머스 스미스와 함께 철을 구리로, 안티몬을 수은으로 변환하는 연금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572년, 길버트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얼스터에 있는 토머스 스미스의 버려진 농장에서 차출된 민병대 1,500명을 이끌었지만,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런던에서 1572년부터 1578년까지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1573년 엘리자베스 1세에게 런던에 아카데미 설립을 제안했는데, 이는 토머스 그레샴 경이 그레샴 칼리지를 설립하면서 실현되었다. 또한 길버트는 윌리엄 세실, 로버트 더들리와 함께 뉴 아트 협회 설립을 도왔다.그 후 길버트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실패한 해상 탐험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막대한 개인 재산과 가족 재산 일부를 잃었다. 마틴 프로비셔의 그린란드 항해를 지원했을 때는 황금으로 보이는 노란 돌들을 잉글랜드로 가져오는 성과가 있었지만, 그 노란 돌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길버트는 본인이 직접 탐험하기로 마음먹고, 1578년 11월 배 7척을 이끌고 플리머스에서 아메리카로 향했지만, 배 6척은 폭풍우에 심하게 시달리는 바람에 항구로 돌아와야 했고, 오직 이부형제 월터 롤리가 이끄는 팰컨 호만이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1579년, 길버트와 롤리는 아일랜드 대법관 윌리엄 드루리의 부름을 받아 아일랜드로 파견된 뒤, 오랜 숙적인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와 육지와 바다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먼스터 반란군을 지원하러 온 스페인 함대를 요격하는 것이었다. 길버트는 250톤급 앤 에인저, 릴리프, 그리고 10톤급 스쿼럴 등 3척의 함선을 지휘했다. 길버트는 1579년 6월에 3척을 이끌고 출항했지만, 랜드스 앤드 주변의 안개와 폭우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의 함대는 비스케이만으로 표류했고, 스페인 함대는 이를 틈 타 아일랜드 딩글 항구에서 반란군과 합류했다. 그해 10월, 길버트는 코브 항구에 입항한 후 지역 주민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칼로 머리를 내리쳤고, 상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난간 밖으로 던져버리는 등 심각한 폭력 행위를 자행해 민심을 잃었다. 이후 아일랜드에 흥미를 잃은 길버트는 북아메리카로 가서 왕실을 위한 땅을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2.4. 뉴펀들랜드 개척 시도와 최후
1578년 초, 길버트는 왕실로부터 6년짜리 탐사 허가를 받았다. 1583년, 탐사 허가가 만료되기 직전일 때 가톨릭 투자자들로부터 거액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법에 억압받던 이들은 조국에 적대적인 유럽 국가로 망명하는 걸 원치 않았고,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길버트는 노룸 베가 강 주변 900만 에이커(36,000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분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1583년 6월, 길버트는 5척의 배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다. 그중 한 명인 롤리호는 월터 롤리가 지휘했지만, 보급품이 부족하여 중도에 회항해야 했다. 길버트의 선원들은 주로 범죄자와 해적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통제가 어려웠지만, 길버트는 여러 역경을 극복하고 뉴펀들랜드에 도착했다. 그의 함대가 뉴펀들랜드의 세인트존스 항구에 이르렀을 때, 현지 항만 사령관의 명령으로 지역 어선들의 봉쇄를 받았다. 이는 지난해 길버트의 투자를 받은 선장 한 명이 포르투갈 선박을 해적처럼 공격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길버트는 봉쇄를 돌파한 뒤 왕실로부터 받은 허가증을 제시했고, 1583년 8월 5일 공식 의식을 통해 남북으로 200리그(약 400km) 이내의 땅을 포함한 뉴펀들랜드를 왕실의 이름으로 점유했다. 길버트는 지역 어선단의 지휘를 맡아 세금을 부과했지만, 정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몇 주 후, 길버트의 함대는 귀국을 위해 출항했다. 이때 그는 애지중지하는 배인 스쿼럴호를 고집했다. 그는 다른 고위 장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함대의 항로를 변경했다. 그 결과 배 한 척이 세이블섬 서쪽 해안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좌초되어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9월 9일 아소르스 제도 해상에서, 함대는 폭풍을 만났다. 길버트가 탄 스쿼럴 호는 파도 속에서 힘겹게 항해했다. 선원들은 길버트에게 더 큰 배로 옮겨 타라고 설득했지만, 길버트는 거부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배의 후갑판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고 하며, 동행하던 골든 하인드 호에서 그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고 한다.
"우리는 육지에서만큼 바다에서도 천국에 가깝다!"
자정 무렵, 스쿼럴 호의 불빛이 꺼졌고, 골든 하인드 호의 초병은 길버트가 배 밖으로 떠밀려 나갔다고 보고했다. 그 직후 스쿼럴 호는 모든 승무원과 함께 가라앉았고, 길버트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