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렌가스 제도 해전 스페인어: Batalla de las islas Berlengas 영어: Battle of the Berlengas | ||
| 시기 | ||
| 1591년 7월 15일 | ||
| 장소 | ||
| 대서양 베를렌가스 제도 | ||
| 원인 | ||
| 스페인 해안에서 약탈을 자행한 잉글랜드 사략선에 대한 스페인 함대의 역공.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갤리선 5척. | 전함 5척. | |
| 피해 | ||
| 사망자 2명. | 선박 1척 나포, 사망 또는 포로 150명 이상. | |
| 결과 | ||
| 스페인군의 승리. | ||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91년 7월 15일, 대성양의 베를렌가스 제도 앞바다에서 스페인 함대가 본국 해안 지대에서 해적 활동을 벌인 잉글랜드 사략선들을 요격한 전투.2. 상세
1591년 봄, 제3대 컴벌랜드 백작 조지 클리퍼드는 잉글랜드 왕실 소속 선박인 600톤급 갤리온 '선 가랜드'와 자기 선박 4척(260톤급 샘슨, 골든 노블, 알레 가르타, 소형 피나스 디스커버리)을 이끌고 사략 작전을 벌이기 위해 세인트 빈센트곶으로 향했고, 윌리엄 몬슨이 그의 부제독을 맡았다. 이들은 리스본에서 스페인 해안에서 향신료를 식도 출항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네덜란드 선박 2척을 나포했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에 대항해 동맹을 맺었지만, 이 선박에는 포르투갈산 화물과 선원들이 있었다.잉글랜드군은 와인을 실은 배 한 척과 설탕을 실은 배 2척을 더 나포해 잉글랜드로 보냈다. 그중 한 척은 선체가 새어서 선원들을 해안에 내린 후 해체되었다. 나머지 2척은 역풍을 만났고, 식량이 부족해 라코루냐 항구에 정박해야 했고, 즉시 스페인군에 나포되었다. 한편, 컴벌랜드 백작의 사략 함대는 포르투갈 도시 페니슈 해안에서 떨어진 작은 군도인 베를렌가스 제도로 항해했다. 그는 그곳에서 윌리엄 몬슨에게 골든 노블 호의 피터 베일리 선장과 함께 네덜란드 선박에서 훔친 화물을 잉글랜드로 가져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1591년 7월 15일, 잉글랜드로 귀환하던 윌리엄 몬슨의 함선들은 포르투갈 총독인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1]의 지시에 따라 사략선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은 프란시스코 콜로마가 파견한 스페인 갤리선 5척의 급습을 받았다. 이후의 치열한 교전 끝에, 스페인 갤리선들은 골든 노블 호를 나포하고 적병 150명 이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으며, 네덜란드 함선에 실렸다가 잉글랜드군에 넘겨진 화물을 회수했다. 스페인군의 전사자는 단 2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컴벌랜드 백작은 멀리서 포격전이 벌어진 소리를 들었지만, 역풍 때문에 윌리엄 몬슨을 돕지 못했다.
전투가 끝난 뒤, 컴벌랜드 백작은 알베르트에게 서신을 보내 스페인에 대한 심각한 보복을 원하지 않는다면 잉글랜드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많은 잉글랜드 선원과 군인들은 새 옷을 받고 풀려났지만, 윌리엄 몬슨은 프랑스의 키스카이스와 리스본에서 다른 장교 6명과 함께 키스카이스와 리스본에서 2년간 갤리선 노예로 살아야 했다.
베를렌가스 제도 해전 2주 후, 스페인의 연례 보물 수송선을 나포하기 위해 아소르스 제도로 파견된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경이 아소르스 제도로 원정했지만 1차 플로레스 전투에서 스페인군에 패배했다.
[1] 1598년부터 1621년까지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네덜란드 군주 직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