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6 21:00:30

리페 전투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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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페 전투
Slag bij Lippe
파일:Nederlaag_van_het_Staatse_leger_bij_Wesel,_1595.jpg
시기
1595년 9월 3일
장소
베젤 인근 리페강변 평원
원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공세로부터 라인베르크를 보호하려는 스페인군과 이들을 매복 공격하려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충돌.
교전 세력
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 네덜란드 공화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제국
지휘관
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 마우리츠
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 필립스 반 나소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니콜라스 파커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크리스토발 데 몬드라곤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후안 데 코르도바
병력
기병 500~700명. 기병 500명.
피해
100~300명 사상. 60명 사상.
결과
스페인 제국군의 승리.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95년 9월 3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스페인군을 리페강변에서 기습 공격했으나 패퇴한 기병전.

2. 배경

1595년 7월, 마우리츠는 보병 6,000명, 기병 200~300명, 대포 16문으로 이뤄진 병력을 모아 1차 흐룬로 공방전을 감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 장군 크리스토팔 데 몬드라곤은 92세의 고령에도 스페인 연대 2개, 스위스 용병 2천 명, 왈롱 부대, 그리고 윌리엄 스탠리의 아일랜드 연대로 구성된 보병 7,000명, 기병 1,300명을 이끌고 도시를 구원하러 출진했다.

몬드라곤은 라인강을 건너기 위해 브라반트와 헬러를 거쳐 진군했다. 이에 대해 여러 장교가 흐룬로로 곧장 달려가지 않고 라인강을 굳이 건너는 계획에 의문을 제기했고, 병사들은 투덜거렸다. 그러자 몬드라곤은 의자를 가져와 라인강둑에 앉은 채 모든 병력이 강을 건널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밝혔다. 또한 흐룬로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마우리츠가 철수하지 않으면 그와 직접 교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병사들은 입을 다물었고, 선박 다리를 사용하여 강을 건넜다.

7월 21일, 마우리츠는 몬드라곤의 스페인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스페인군이 멀리 돌아서 진군하는 걸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마우리츠는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당황했다. 그는 포대와 아케드를 서둘러 완성하려 했고, 도르스텐의 다리를 해체하려 했지만,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7월 24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흐룬로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뒤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7월 25일, 마우리츠는 빌럼 로더베이크와 다른 장교들과 상의한 후, 도시 포위망을 완벽하게 구축하지 못한 마당에 스페인 구원군과 싸우는 건 무리한 짓이니 포위를 해제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철수한 후 흐룬로에 입성한 몬드라곤은 네덜란드의 공격으로부터 라인베르크를 지키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베젤 강 인근 딘스라켄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마우리츠는 이에 맞서기 위해 베젤에 진영을 세웠다. 양쪽 군대 사이에는 리페강이 흘렀다. 스페인군의 진지는 강력했다. 후위대와 좌익은 라인강으로, 우익은 리페강과 '테스터부르크'(Testerburg)라고 불리는 황무지 언덕으로 덮여 있었다. 두 군대는 몇 주 동안 서로를 바라봤고, 두 기병대가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 종종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얼마 후, 스페인 식량 수집대는 진영에서 2~3리그 떨어진 곳에서 식량을 찾으러 출진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마우리츠는 적 식량 수집대를 매복 공격해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9월 1일, 그는 사촌이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령관인 필리스 반 나소에게 매복 작전의 지휘권을 맡기고, 다음 날 새벽에 리페 강을 건너 스페인 식량 수집대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숲에 숨어 있다가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마우리츠의 목표는 식량 수집대를 격파하고 식량을 빼앗아서 네덜란드 진영으로 인도해, 몬드라곤이 더 큰 병력을 동원해 이를 되찾으려고 달려오도록 유도한 후, 필립스가 이들을 유인해 네덜란드 진영으로 후퇴하면 마우리츠가 적군을 급습해 막심한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필립스는 매복 공격을 위해 500~700명의 네덜란드 및 잉글래드 기병대를 동원했고, 그의 두 형제인 에르네스트 카시미르와 로더베이크 권터, 솜즈의 에른스트 백작, 파울과 마르셀러스 백스, 그리고 잉글랜드 대위 니콜라스 파커, 로버트 베레 등이 동행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적의 의도를 간파했다. 마우리츠의 이복형제이자 후계자인 프레데릭 헨드릭의 오라녀 공작들의 일대기를 출간하기 위해 고용한 프랑스 법학자 조세프 드 라 피세에 따르면, 몬드라곤은 연합군에서 이탈한 잉글랜드 군인을 통해 적의 매복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이탈리아 예수회 수도자 안젤로 갈루치에 따르면, 몬드라곤은 적진에 숨어든 간첩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아무튼 몬드라곤은 적군의 기습 공격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보병 300명, 기병 150명이 식량을 수집하고 돌아가는 아군을 지키게 했고, 부관 후안 데 코르도바에게 머스킷 병사 300명과 대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아군을 매복 공격하려는 적을 역습하도록 했다.

3. 경과

1595년 9월 3일 새벽,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 기병대는 선박 다리를 통해 리페강을 건넜다. 마우리츠는 보병 5,000명과 나머지 기병대를 거느리고 그들이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오길 기다렸다. 필립스는 그의 군대는 편대 4개로 나누었다. 첫 번째 편대는 살란트의 드로사르 휘하의 기병 125명, 두 번째 편대는 킨스키 백작 휘하의 기병 125명, 세 번째 편대는 필립스와 그의 형제들이 함께하는 발렌 중위 휘하의 기병 150명, 마지막 편대는 잉글랜드 대위 니콜라스 파커 휘하의 기병 120명이었다.

크루덴부르크에 도착한 필립스는 발렌 중위가 이끄는 기병 부대에서 선발된 40명을 보내 식량 채집원들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훨씬 큰 스페인군이 이들을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한 네덜란드 장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필립스에게 전령을 보내 작전 변경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적을 세울 욕망에 가득 차 있던 필립스는 그들은 호위 부대일 뿐이라고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 기병대를 공격해 격퇴하려 했다. 이때 스페인군은 적군이 몰려올 걸 예측하고 너도밤나무 숲 너머로 기병대를 포진해 뒀다. 후안 데 코르도바는 호송대를 지키는 기병대 외에도 적어도 7개의 기병 편대를 이끌었다. 헨드릭 반 덴 베르흐, 지롤라모 카라파, 카를로 마리아 카라치올로, 파울로 에밀리오 마르티넨고, 후안 본인, 아돌프 반덴 베르흐, 산초 데 베르흐가 각자 기병 편대를 맡았다. 몬드라곤은 호위대에 네덜란드군의 의도를 알리고 군인들에게 구원이 올 때까지 제 위치를 지키라고 격려했다.

필립스는 작은 숲속의 좁은 길을 따라 진군한 끝에 열린 들판으로 나타났다. 이때 헨드릭 반 덴 베르흐와 카를로 마리아 카라치올로의 기병 편대가 그들을 급습했다. 반 덴 베르흐의 부대에 속한 머스킷 병사들은 일제 사격을 가한 후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네덜란드 선두 부대와 격돌했고, 스페인 기병들은 적 기병들을 향해 맹렬히 돌격했다. 당시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구은 8개 편대로 편성되었지만, 좁은 통로에서 공격받아서 창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권총과 칼로 상대해야 했다. 필립스,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사촌 솔름스의 에른스트는 전투가 벌어진 직후 중상을 입고 낙마했다. 구원군으로 온 킨스키와 발렌의 군대는 중상을 입은 지휘관들을 구출하지 못했고, 일부 네덜란드 병사들은 도주했다.

후속 부대를 이끌고 달려온 니콜라스 파커는 도망자들을 수습한 뒤 전투를 재개했고, 스페인 기병대에 역공을 가했다. 그 후 교전은 열린 들판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기병전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스페인 기병 편대 2~3개를 패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직후 파울로 에밀리오 마르티넨고가 그의 중대를 이끌고 측면으로 돌격하여 네덜란드 기병 부대를 물리쳤다. 이후 병력을 재정비한 후안 데 코르도바가 공격을 재개했다. 네덜란드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 전열이 무너져서 리페 강 앞에서 살아남으려고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후안 데 코르도바는 기병대를 보내 그들을 추격했고, 강을 건널 좋은 장소를 찾지 못한 네덜란드 군인 일부가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이리하여 전투는 스페인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전투 손실에 관해서는 다양한 기록이 전해진다. 플랑드르 개신교 신자인 기욤 보다르는 네덜란드군의 손실을 말 88마리, 포로 83명, 전사 24명으로 정했다. 이탈리아 추기경 귀도 벤티볼리오는 스페인군 사상자는 60명이었고, 네덜란드군은 300명 이상이 죽었다고 밝혔다. 이탈리아 예수회 수도자 안젤로 갈루치는 네덜란드군의 사상자가 300명이라고 기록했다. 스페인 군인이자 작가인 카를로스 콜로마는 스페인군의 전사자는 19명이었고, 네덜란드군은 깃발 3개와 말 400마리를 상실했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잉글랜드 기병대 사령관 필립스 반 나소는 솔름스의 에른스트 백작과 함께 중상을 입은 채 생포된 뒤 그들의 가톨릭 사촌인 반 덴 베르흐 형제의 방문을 받고 스페인 외과의의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필립스는 다음 날 스페인 진영에서 사망했고, 에른스트는 3일 후에 사망했다. 잉글랜드 대위 로버트 베레는 얼굴에 창이 꽂혀서 전사했다. 잘란트의 드로사르와 페르디난트 킨스키 백작도 전사했다. 에른스트 카지미르는 생포된 뒤 몸값으로 10,000플로린을 지급하고 풀려났다. 몬드라곤은 죽은 지휘관들의 시신을 마우리츠에게 보냈고, 마우리츠는 이 시신들을 아른험에서 명예롭게 매장했다. 스페인군의 사상자 중 주목할 만한 군인은 카라파, 마르티넨고, 카라치올로 뿐인데, 모두 상처를 입었으나 치명적이지 않았다.

비록 소규모 전투였지만, 그동안 마우리츠의 공세에 밀리기만 했던 스페인 진영은 오랜만에 거둔 호쾌한 승리에 기뻐했다. 그들은 캉브레 앞에서 대포 87문, 머스킷과 아르케부스 6,000개로 도시를 향해 3번의 일제 사격을 가하며 승리를 기뻐했다. 그 후 스페인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각자의 진영에서 16일간 대치했지만, 별다른 군사 행동을 벌이지 않았다. 마우리츠는 라인강에 다리를 놓고 뫼르스를 기습 공격하려 했지만 발각되자 작전을 취소했다. 또한 빌럼 로더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가 몬드라곤이 트벤테에 숙소를 잡으려고 보낸 스페인 5개 중대를 급습하려 했지만, 그 중대들은 엔스헤데로 이동했고, 트벤테에 도착한 네덜란드군은 보급품이 실린 수레 몇 대만 탈취할 수 있었다.

그해 11월, 몬드라곤은 뫼즈강을 다시 건너 여러 마을에 군대를 분산시켰고, 마우리츠도 숙영지로 돌아갔다. 1596년 1월 4일, 몬드라곤은 안트베르펜 요새에서 자연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아들 알론소를 안트베르펜 성주로, 손자 크리스토발을 파이크 부대 지휘관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