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 헐스트 공방전 Beleg van Hul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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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
| 1591년 9월 20일~9월 24일 | ||
| 장소 | ||
| 네덜란드 남서부 플란데런 지방 헐스트 | ||
| 원인 | ||
| 마우리츠의 스페인 지배하 저지대 국가를 향한 탈환 작전.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보병 4,000명, 기병 600명. | 400명. | |
| 피해 | ||
| 미미함. | 전군 항복. | |
| 결과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승리. | ||
| 영향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네이메헌 공략 작전 시행. | ||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91년 9월 20일~9월 24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스페인군의 지배를 받던 헐스트를 기습 공격해 공략한 공성전. 마우리츠의 1591년 원정에서 벌어진 다섯 번째 전투이다.2. 상세
1591년 7월 21~25일, 파르마 공작이자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총사령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네이메헌 인근의 크노첸부르크 요새를 공략하려 했다가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에게 패퇴했다.(크노첸부르크 전투) 그 후 네이메헌에 한동안 머물던 그는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로부터 앙리 4세의 프랑스 국왕 등극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킨 프랑스 가톨릭 동맹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8월 5일 네이메헌을 떠나 프랑스로 진군하면서, 네이메헌에 강력한 수비대를 남겨두고 프란시스코 베르두고를 지휘관으로 세웠다.그 후 마우리츠는 지금까지 거둔 성과에 만족해 겨울 숙영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적의 동태를 관찰하던 베르두고는 적군이 올해에는 더 이상 공세 작전을 펼치지 않을 거라고 여기고, 본인 역시 겨울 숙영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였다. 9월 중순, 마우리츠는 보병 4,000명, 기병 600명을 선박들에 실은 뒤 크레버빌레에 몰래 상륙한 후 헐스트로 진군했다. 당시 헐스트 시에 있던 수비대 거의 절반이 다른 곳으로 파견되었고, 남은 병사는 400명밖에 없었다.
9월 19일 헐스트에 도착한 마우리츠는 즉각 포위한 뒤, 적 구원군이 오기 전에 헐스트를 빠르게 공략하기로 하고 대규모의 지속적인 포격을 명령했다. 그렇게 닷새 동안 무자비한 포격이 이어지자, 수비대 사령관 카스티요 대령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 협상을 요청했고, 마우리츠는 즉시 받아들였다. 스페인 수비대는 무기, 깃발, 짐을 짊어지고 도시를 떠나는 걸 허락받았다. 헐스트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안트베르펜 인근에서 파르마 공작의 아들 라누치오 파르네세가 주관하는 행사를 벌이던 스페인 수뇌부에게는 실로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파르마 공작은 분노해 카스티요가 병사 절반을 다른 데로 멋대로 보내고 경계를 게을리했으며, 적을 상대로 오래 버티지 않고 항복한 것을 반역으로 간주하고 즉시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마우리츠는 헐스트 요새를 강화하고 주위에 방어선을 구축해 스페인군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하도록 한 뒤, 네이메헌을 공격해 함락시킴으로써 1591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 후 헐스트는 5년간 네덜란드의 수중에 남아있다가 1596년 당시 네덜란드 총독이며 후에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는 알베르트 7세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2차 헐스트 공방전) 이후 스페인군의 지배를 받다가 1645년 프레데릭 헨드릭이 이끄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