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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도밍고 습격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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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도밍고 습격
영어: Capture of Santo Domingo
스페인어: Toma de Santo Domingo
파일:Boazio-Sir_Francis_Drake_in_Santo_Domingo.jpg
시기
1586년 1월 1일
장소
스페인 제국 누에바에스파냐 산토도밍고
원인
잉글랜드 왕국을 위협하는 스페인 제국의 해상 무역에 타격을 입히려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의지.
교전 세력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제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프랜시스 드레이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크리스토퍼 칼레일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크리스토발 데 오발레
병력
선박 23척, 군인 및 선원 2,300명. 군인 및 민병대 1,400명, 기병대 100명, 갤리선 1척, 선박 30척.
피해
선박 3척 침몰, 사상자 20명. 200명 사상 또는 포로, 갤리선 1척 침몰, 함선 20척 파괴, 함선 3척 나포.
결과
잉글랜드군의 승리.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86년 1월 1일,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이 누에바에스파냐산토도밍고를 습격한 전투.

2. 배경

1585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네덜란드 공화국의 핵심 거점 중 하나인 안트베르펀을 공략했다.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선 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이대로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재정복하면 여세를 몰아 잉글랜드를 침공하리라고 여기고 네덜란드를 돕기로 했다. 1585년 8월 10일,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대표단은 잉글랜드의 논서치 궁전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는 보병 6,400명과 기병 1,000명을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의 지휘하에 네덜란드로 파견하고 연간 60만 플로린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원해,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맞서는 걸 돕기로 했다. 네덜란드는 그 대가로 브리엘과 플리싱겐을 잉글랜드에 넘기기로 했고, 잉글랜드는 그 도시들에 수비대를 주둔하기로 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 국가평의회에 의원 2명을 임명하는 권리를 누렸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논서치 조약 소식을 듣고 이를 엘리자베스 1세의 선전포고라고 여기고, 잉글랜드를 무력으로 응징할 준비에 착수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 측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마음먹고, 수석 고문 프랜시스 월싱엄을 통해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누에바에스파냐를 공격하는 원정대를 지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1585년 8월 플리머스 항을 출항한 잉글랜드 함대는 출항을 서두르다 보니 보급품이 고르지 않게 분배되었고, 일부 선박은 이미 동료 선박으로부터 식량과 물을 빌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누에바에스파냐까지 갈 여력이 안 되겠다고 판단한 드레이크는 중간 기착지로 삼을 장소를 물색한 끝에, 스페인 본토에 상륙해서 물자를 충당한 뒤 누에바에스파냐로 진격하겠다는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웠다.

1585년 9월 27일 ~ 10월 11일,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스페인 비고만에 상륙한 뒤 비고 시 주민들과 건물들을 공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배에 식량과 물을 공급받았다. 그렇게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물자를 순조롭게 수집한 잉글랜드 함대는 비고에서 출항한 뒤 11월에 방어되지 않은 라고메라 섬에서 물을 실었다. 11월 11~28일,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잉글랜드 함대는 카보베르데의 산티아고 마을을 공격하여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아메리카로 계속 항해했다.

12월, 드레이크는 카리브해의 무인도 세인트키츠에 도착하여 여정 도중에 걸린 병을 치료받으면서 보급품을 수집했다. 이때 그는 히스파니올라 섬에 있는 스페인 도시 산토도밍고에 소규모 정찰대를 파견했다. 산토도밍고는 누에바에스파냐의 핵심 도시였으며, 1500년대 초에 건설된 성벽인 포르탈레사 오자마 요새가 설치되었고, 그 안에 토레 데 오메나헤(Torre de Homenaje, 경의의 탑)가 있었다. 총독 크리스토발 데 오발레는 육지와 바다를 모두 지키는 포병대를 잘 갖췄으며, 1,5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했는데, 그중 100명은 기병이었다. 도시의 해상 방어는 갤리선 1척과 여러 종류의 선박 30척이 담당했다.

정찰대는 서쪽으로 항해하던 드레이크와 합류한 뒤 산토도밍고가 바다에서 공격하기에는 방어력이 너무 막강하다며, 다만 서쪽으로 약 10마일 떨어진 하이나 강어귀에서 상륙하기 좋은 해변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진영이 잉글랜드 함대가 근처에 이르렀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그 해변에 기습 상륙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즉시 작전을 개시하기로 했다.

3. 경과

1586년 1월 1일 자정 직후, 드레이크는 바호스 데 하이나에 도착했고, 크리스토퍼 칼레일과 그의 장병들이 경비가 없는 해변에 상륙했다. 도시로 이어지는 정글을 통과하는 길 역시 무방비 상태였고, 잉글랜드군은 쉽게 전진했다. 한편, 드레이크가 이끄는 주력 함대는 해안을 따라 10마일을 항해해 산토도밍고로 향했다. 스페인군은 곧 잉글랜드군의 위협을 감지하고, 군대를 소집하고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토목 공사를 시작했으며, 많은 마을 주민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여기에 항구 입구에 배 3척을 침몰해 적 함대의 강제 진입을 막으려 했다.

이윽고 잉글랜드 함선들이 항구 입구 바로 앞에 자리를 잡자, 드레이크는 포르탈레사 오자마 요새를 향해 함포 사격을 명령했다. 이에 스페인 함선들이 그들을 향해 포격했다. 이날 스페인 함선들이 쏜 포탄 중 한 발이 엘리자베스 보나벤처 호에 명중했지만, 나머지는 빗나갔다. 드레이크는 함선들에 더 가까이 접근하라고 명령했고, 곧 성과 토루를 향한 포격을 벌였다. 이에 스페인 함선들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분산되면서, 스페인군의 전열이 흐트러졌다.

한편, 칼레일과 병사 800명은 정글을 뚫고 도시에 접근해 산토도밍고 인근에 이르렀다. 드레이크는 배를 타고 병력을 보내 우회 작전으로 상륙을 시도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에 스페인군은 기병, 보병, 포병을 해안에 가장 가까운 기지를 배치해 이들의 상륙을 저지하려 했다. 그렇게 스페인군이 도시를 비운 틈을 타, 칼레일과 그의 장병들은 정글에서 빠져나와 2개의 대열을 형성했다. 그들이 스페인군 우익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자, 크리스토발 데 오발레는 즉시 마을 입구를 보호하는 새로운 전투 대형을 편성하도록 했고, 스페인 기병대는 소 떼의 엄호 아래 잉글랜드군의 측면과 후방을 위협했다. 그러나 칼레일은 창병과 머스킷 총병을 배치해 스페인 기병대를 향해 사격했고, 소들은 총소리에 놀라 정글로 도망쳤고, 스페인 기병대는 밀려났다.

칼레일의 2개 종대는 계속 전진하면서 스페인군의 총격을 받았지만, 그들은 굳건히 진군한 뒤 일제 사격을 가해 스페인군을 압도했다. 여기에 드레이크의 상륙 부대가 30분 이내에 산토도밍고의 서쪽 성벽에 도달하자, 스페인군과 민병대 대부분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이제 크리스토발 데 오발레와 함께 싸우는 스페인군은 300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총기가 없었다. 칼레일은 파월 상사에게 돌격대를 이끌고 보조문을 공격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정문으로 향했다. 두 잉글랜드군 부대는 파이크를 앞세워 밀어붙였고, 스페인군은 정문과 보조문 모두 돌파당한 후 도주했다.

이리하여 산토도밍고 마을로 들어선 잉글랜드군은 스페인군을 닥치는 대로 처단했고, 산토도밍고의 주요 요새인 포르탈레자 오자마로 향했다. 소규모의 스페인군이 이 요새에서 버텼지만, 산토도밍고 시내는 아무런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포르탈레자 오자마 요새는 육지와 바다에서 잉글랜드군의 포격을 받으며 밤이 될 때까지 버텼지만, 남은 수비대가 어둠을 틈타 배를 타고 빠져나갔고, 다음 날 새벽 포르탈레자 오자마 요새 중앙에 있는 토레 데 오메나헤 위에 잉글랜드 왕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이리하여 산토도밍고는 잉글랜드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4. 결과

잉글랜드군은 산토도밍고를 공략하면서 전사 7명, 부상 20명의 손실만 입었고, 스페인군의 사상자도 비슷했지만, 포로로 잡힌 이는 200명 가까이에 달했다. 또한 20척이 넘는 스페인 선박들이 나포되거나 불태워졌다. 이후 잉글랜드 선원과 병사들은 마음껏 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은 교회를 골라내 가톨릭 성당만 파괴했고, 장식품을 훔쳤으며, 조각상과 창문을 부수고, 종교적인 주제가 담긴 태피스트리를 찢고, 제단을 모욕했다. 이후 공공건물을 약탈하고 개인 주택에서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약탈했다. 다만 산토도밍고 대성당은 파괴되지 않았다. 드레이크가 그곳에 본부를 두고 기도와 시편을 부르고 승리를 거두는 걸 허락해 준 하느님에게 감사를 표한 곳이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해군은 산토도밍고를 공략한 후 식량, 와인, 담배를 포함한 많은 물품이 노획되었지만, 오덴시아의 금고에서 회수된 금화는 16,000두카트에 불과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이 산토도밍고 마을과 포로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막대한 몸값을 지급하도록 강요해 더 많은 돈을 챙기기로 했다. 1월 12일, 산토도밍고 사법부 수장인 후안 말라레호가 드레이크에게 접근해 협상을 시작했다. 드레이크는 100만 두카트라는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고, 후안 말라레호는 이를 지급할 여력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평화 협상이 쉽게 타결되지 않자, 드레이크는 민간인 건물과 교회를 차례로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의 부하들은 도시의 웅장한 석조 건물을 불태웠다. 그래도 스페인군이 물러설 기미가 없자, 드레이크는 더 많은 건물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급기야 드레이크가 산토도밍고 대성당까지 불태우겠다고 위협하자, 말라레호는 2만 5척 두카트를 바치기로 했다.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었고, 드레이크는 몸값을 받는 즉시 산타도밍고에 남은 것들을 보존한 채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드레이크는 최근 잉글랜드군에 합류한,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 소년과 함께 스페인 진영에 대표단을 보냈다. 그러나 스페인 측은 이를 모욕으로 여겨 흑인 소년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에 격분한 드레이크는 살인범이 죽었거나 살아 있다고 확인할 때까지 많은 스페인 사람을 고의로 처형했다. 결국 스페인 측은 드레이크를 달래기 위해 흑인 소년을 살해한 자를 도시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1월 말 몸값이 지급되자, 잉글랜드군은 2월 1일 산토도밍고를 떠나 다른 목적지로 향했다.

산토도밍고는 드레이크의 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항구에 있던 30척 이상의 선박이 불타거나 침몰했고, 갤리선은 불에 탔으며, 드레이크가 자신의 배 호프 호, 벤자민 호, 스카우트 호를 대체하기 위해 3척의 선박을 징발했다. 나포된 선박 중 하나는 600톤급 무장상선이었는데, 잉글랜드인들은 이 선박의 이름을 '새해 선물'로 바꾸었다. 대포 240문과 다량의 상품이 잉글랜드 함선에 옮겨졌고, 해방된 갤리선 노예 수십 명도 잉글랜드 선박에 가담했다. 산토도밍고의 1/3은 폐허로 전락했고, 모든 군사, 종교 건물이 파괴되었다. 스페인 장성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토라케마다는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주민들이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형벌"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산토도밍고가 드레이크의 습격으로 인한 참상에서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스페인은 큰 경제적 피해를 보고 위신에 큰 타격을 입었던 반면, 잉글랜드 왕국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한편, 드레이크는 산토도밍고를 떠난 뒤 누에바 그라나다 본토에 있는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 공략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