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레이크의 파나마 원정 Drake's Assault on Panama | ||
| 시기 | ||
| 1596년 1월 6일 ~ 1월 20일 | ||
| 장소 | ||
| 파나마 지협 | ||
| 원인 | ||
| 서인도 제도 원정 실패를 만회하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공세.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선박 15척, 군인 및 선원 600명. | 다양한 해안 방어 시설, 군인 및 민병대 200명. | |
| 피해 | ||
| 다수 질병으로 사망, 선박 2척 침몰. | 알려지지 않음. | |
| 결과 | ||
| 스페인군의 승리. | ||
| 영향 | ||
|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사망. | ||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96년 1월 6~20일,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서인도 제도 원정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파나마로 향하면서 벌어진 원정.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마지막 원정이다.2. 상세
1595년,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존 호킨스에게 서인도 제도를 급습해 스페인 본토에 보내는 금과 은의 공급원에 타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두 사람은 선박 27척, 병사 2,500명을 동원해 8월 28일에 플리머스에서 출항했다. 그러나 이후 잉글랜드 함대는 고난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항해 도중에 간단히 공략할 수 있으리라 믿고 카나리아 제도의 라스 팔마스를 공격했다가 예상 외로 수비대와 현지 주민의 강한 저항에 직면해 4척이 큰 손상을 입는 타격을 입고 물러나야 했고, 과들루프 해전에서 프랜시스 호가 스페인군에 나포당한 뒤 잉글랜드 함대의 계획이 탄로나 버렸으며, 1차 산 후안 해전에서 사전에 계획을 입수한 뒤 철저히 대비했던 스페인군에게 완패했다.이렇듯 잉글랜드 함대가 실패의 나날을 보내던 중, 존 호킨스가 열병으로 사망하면서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총사령관이 되었고, 토머스 바스커빌이 부제독을 맡았다. 드레이크는 아무런 전리품을 얻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본 채 잉글랜드로 귀환한다면 여왕의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 여기고, 더 쉬운 먹잇감을 찾아 남쪽으로 항해하기로 했다. 원정대는 남미로 향했고, 일주일 후 리오아차에 접근했다. 12월 18일, 드레이크는 마을을 점령한 뒤 인근의 라 란체리아와 타피아를 점령하여 더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이후 주민들이 몸값을 지급하지 않자, 해당 지역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2주 후 남서쪽으로 항해한 잉글랜드 함대는 산타 마르타로 쳐들어갔지만, 주민들은 이미 도시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렇지만 스페인 총독 프란시스코 오르도네스 플로레스를 잡는 데 성공했고, 몸값 4,000두카트를 받고 총독을 풀어준 뒤 산타 마르타를 불태웠다. 그러나 원정 과정에서 역병이 창궐하면서 잉글랜드 선원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계획대로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를 공격하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본 드레이크는 그 대신 금과 은이 스페인으로 보내지는 중요한 스페인 기지인 파나마를 접수하기를 바라며 그곳으로 항해했다.
1596년 1월 6일, 드레이크와 그의 부하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놈브레 데 디오스에 정박했다. 배에서 내린 그들은 마을 근처로 이동했지만, 민병대 100명이 지키고 있는 작은 요새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요새는 곧 함락되었고, 수비대는 패주했다. 마을은 거의 저항 없이 함락되었지만, 약탈품은 거의 얻지 못했다. 드레이크는 2주간 머물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몸값을 요구해 봤지만,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하자 마을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항구에 있던 모든 배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마을에서 돈을 얻지는 못했지만, 근처 언덕 꼭대기에 있는 망루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은 상자 하나와 금괴 2개, 진주 몇 개, 그리고 다른 귀중품들이 있었다.
부제독 토머스 바스커빌은 마을 주변에 있는 스페인군을 정리하기 위해 병사 수백 명을 선발했다. 1월 20일, 그들은 오래된 파나마 도로를 따라 행진해 작은 정착지인 벤타 데 라 케브라다를 점령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비가 내렸고, 높은 습도 속에서 거의 30마일을 힘겹게 행군해야 했다. 셋째 날, 바스커빌은 카피릴라 정착지 인근의 협곡과 마주쳤다. 이 협곡은 나아갈수록 더욱 가팔랐고, 도로는 언덕을 건너야 했다. 언덕 정상에는 도랑이 있는 협곡으로 둘러싸인 요새였으며, 이 요새를 방어한 인물은 후안 엔리케스 코나부트 대위가 이끄는 스페인군 70명이었다.
바스커빌은 언덕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지만, 스페인군은 참호를 판 채 그들을 상대로 선전했다. 잉글랜드군은 3시간 동안 끈질기게 공격했지만 번번이 격퇴당했고,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여기에 에르난도 데 리에르노 아구에로 대위 휘하의 아르케부스 50명이 추가로 합류하면서, 언덕을 접수하는 건 더 힘들어졌고, 바스커빌에게 남은 보급품과 탄약 절반이 비와 심한 습기 탓에 손상당했다. 결국 바스커빌은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퇴각했다. 이날 잉글랜드군에서는 바스커빌의 동생 니콜라스를 포함해 6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스페인군의 손실은 전사 7명과 부상자 수 미상이었다.
바스커빌의 부대는 사기가 저하된 데다 역병에 시달린 채 1월 22일 놈브레 데 디오스에서 드레이크와 재회했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걸 알게 되자 드레이크는 파나마 공략을 포기하고 사흘 후 전군을 함대에 싣고 철수를 시작했다. 1월 27일, 드레이크의 함대는 에스쿠도 데 베라과스 섬 앞에 정박했지만, 그 당시 잉글랜드 선원들은 질병으로 대부분 무기력해졌다. 그나마 건강한 37명이 배에서 내린 뒤 파토르 강에서 식수를 확보하려 했지만, 반대편 본토에서 온 산티아고 델 프린시페의 스페인 주민들에게 습격받았다. 잉글랜드군은 대부분 죽임당했고, 소수만이 탈출했다. 드레이크는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하자, 함대에 포르토 벨로를 향해 동쪽으로 항해하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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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관을 수장하는 잉글랜드 해군 장병들 |
그러나 드레이크는 며칠 후 심한 이질에 걸렸고, 1596년 1월 28일에서 29일 밤에 기함 디파이언스 호에서 병사했다. 기록에 따르면, 드레이크는 죽기 전에 전신 갑옷을 입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포르토 벨로 인근 부에나벤투라 섬 앞바다에서 납으로 안감 처리된 관에 담겨 바다에 묻혔다. 바스커빌은 함대 사령관을 맡은 뒤 산타 마르타에 대한 재공격을 고려했다가, 산티아고로 향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60척의 돛을 단 스페인 함대가 자신들을 몰살하려 하고 있으며, 그들이 유카탄 해협에 주둔해 귀환 경로를 차단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오자, 바스커빌은 함께 모여서 외항 경로를 통해 탈출하기로 했다. 다만 대서양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195톤급 엘리자베스 호와 50톤급 딜라이트 호는 상태가 좋지 않고 항해할 승무원이 부족했기에 자침했다. 스페인 함대는 후벤투드 섬 인근에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가로막았다. 이어진 피노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는 스페인 함대에게 전함 2척을 상실했지만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폭풍에 시달렸고, 플리머스로 도착했을 때 남은 선박은 8척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 스페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해적 활동을 전개해 스페인인의 공포를 한 몸에 받았던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페인 전역이 열광했으며, 하느님이 그를 통해 자신들에게 가했던 형벌이 끝났다고 여겼다. 스페인 시인 로페 데 베가는 하느님이 내린 재앙이 끝난 것을 기념하여 승리의 시를 집필했다. 반면,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 굴욕을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제3대 컴벌랜드 백작 조지 클리퍼드에게 함대를 재구축한 뒤 드레이크가 패배했던 산 후안을 점령하고 가능한 오랫동안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1598년 6월, 컴벌랜드 백작은 여왕의 뜻을 받들어 2차 산 후안 해전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