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흐룬로 공방전 Beleg van Groenl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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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
| 1597년 9월 11일~9월 28일 | ||
| 장소 | ||
| 네덜란드 헬러 흐룬로 | ||
| 원인 | ||
| 스페인군의 지배를 받는 저지대 국가를 탈환하려는 마우리츠의 공세.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보병 6,000명, 기병 1,400명, 대포 14문. | 보병 800명, 기병 300명. | |
| 피해 | ||
| 미미함. | 전원 포로. | |
| 결과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승리. | ||
| 영향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의 사기 증진. | ||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97년 9월 11~28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스페인 제국의 지배를 받던 흐룬로를 두 번째로 공격해 공략에 성공한 공성전. 마우리츠의 1597년 원정의 네 번째 전투이다.2. 상세
흐룬로는 네덜란드 동부 헬러에 있는 작지만 비교적 중요한 도시였다. 이곳은 독일과의 국경에 인접했으며, 데벤테르와 쥣펀과 같은 한자 동맹에 가담한 네덜란드 도시들과 독일 사이의 무역로에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도시는 수 세기에 걸쳐 해자, 보루, 대포가 있는 요새로 확장되어 주변 지역을 통제했다. 다른 도시들은 중세 성벽만으로 만족했지만, 흐룬로는 안트베르펀,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등과 함께 근대 방어 시설을 갖췄다.1580년, 빌럼 1세 편에 가담해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던 레넨베르크 백작 조르지 반 라라잉은 스페인 제국 편으로 돌아서기로 결단하고, 흐룬로를 접수해 스페인 제국에 넘겼다. 1581년 레넨배르크 백작에 사망한 후,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 사령관 프란시스코 베르두고가 이 도시를 관리했다. 이후 흐룬로는 반란군을 진압하러 떠나는 스페인군의 집결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율리히, 클레베, 베르크 공국은 흐룬로의 스페인 수비대에 자금을 지급했다.
1595년 7월 14~24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총사령관 마우리츠는 흐룬로를 탈환하기 위해 공세를 벌였으나 끝내 실패했다. 2년 후인 1597년, 스페인군이 본국의 세 번째 파산 선고로 급료를 받지 못하면서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그나마도 주력군이 위그노 전쟁에 투입되면서 플란데런에 주둔한 병력이 열악해지자, 마우리츠는 이ㄴ때를 틈타 그해 8월 1일부터 헤이그에서 출발해 원정을 감행했다. 그 결과 라인베르크(8월 20일), 뫼르스(9월 3일)을 연이어 점령했다.
이후 마우리츠는 프레데릭 반 덴 베르흐가 링겐과 주변 지역의 군대를 동원해 제벤보우덴으로 진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라인강을 신속하게 건너서 네덜란드 동부로 진격해 프레데리크를 압박하기로 했다. 9월 8일 라인강을 건너고 뒤이어 리페강을 도하한 후,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선봉대는 9월 11일 흐룬로 앞에 이르렀다. 연합군은 보병 8개 연대와 기병 7개 연대로 구성되었는데, 보병은 6,000명이었고, 기병은 1,400명이었다. 또한 보급품과 식량을 실은 마차 행렬의 길이는 20km가 넘었다. 보병을 위해 신속히 설치된 진영은 폭 650m, 길이 800m였다. 당시엔 비가 많이 내렸고, 병사들은 9월 13일까지 막사를 짓고 진영 주변에 해자를 파느라 바빴다.
한편, 2년 전 흐룬로를 공격한 마우리츠를 막아낸 바 있었던 얀 반 스티룸은 이번에도 보병 800명과 기병 300명을 거느리고 흐룬로 수비에 나섰다. 마우리츠는 적의 훼방을 뿌리치고 흐룬로 주변에 요새를 지었고, 9월 13일 마을을 향해 진입로가 파지기 시작했다. 또한 흐룬로 성채 주변 해자의 물을 빼려는 수로 공사가 시행되었고, 흐룬로 수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연이어 습격했다가 반격받기 전에 성채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흐룬로 마을은 적 대포들의 맹포격을 받아 최소 60채의 가옥이 불길에 휩싸였다.
9월 26일, 흐룬로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성벽을 따라 24곳에 진입로가 건설되어 적군이 성벽을 따라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구원군이 올 가망이 없자, 2년 전에 "최후의 피 한 방울을 흘릴 때까지 흐룬로를 지키겠다"라고 선언한 바 있었던 얀 반 스티룸은 이번엔 항복 협상하기로 했다. 그는 부대장 뵈트베르겐과 코르텐바흐의 제안에 따라 말, 포병, 깃발, 무기, 그리고 짐을 자유롭게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마우리츠는 무기와 짐만 옮길 수 있다고 밝혔다. 9월 7일, 코르텐바흐는 그의 기병들이 말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며, 말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우리츠는 거부했지만, 함께 따라온 의원들은 양보 의사를 밝혔다. 의원들은 흐룬로의 병사들과 펠리페 2세의 신민으로 남기를 원하는 주민들은 평화롭게 도시를 떠날 수 있지만, 3개월 동안 뫼즈강 이쪽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들은 이에 따르기로 했고, 항복은 성립되었다. 9월 28일, 마우리츠, 빌럼 루드비크 반 나소딜렌부르크, 그리고 호엔로헤 가문의 부대가 마을을 접수하기 위해 입성했다. 그날 저녁, 얀 반 스티룸은 조건부 항복 후 관례에 따라 마우리츠와 함께 만찬을 가진 뒤 떠났다. 이후 마우리츠는 수비대를 흐룬로에 남겨두고 브레데부르트 원정에 착수했다.
흐룬로는 1606년 암브로시오 스피놀라가 이끄는 스페인군에 의해 도로 함락되어 스페인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흐룬로가 마침내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중에 넘어가기까지는 20년 이상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