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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츠의 1597년 원정


파일:Nederlanden_1597.svg.png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97년 네덜란드 공화국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가 대대적으로 단행한 원정.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 원정을 통해 라인강 연안과 네덜란드 동부 트벤터 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스페인 제국의 지배로부터 탈환했다.

2. 배경

마우리츠의 1591년 원정으로 아이셀강과 발강 등지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5개 도시를 접수한 뒤, 마우리츠는 수년간 네덜란드 북부와 남부 일대를 꾸준히 공략했다. 특히 1594년 네덜란드 북동부의 핵심 도시인 흐로닝언공략한 것은 가장 큰 성공이었다. 그러나 1595년 7월 헬러 지방의 흐룬로를 탈환하려 했다가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하다가 크리스토발 데 몬트라곤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접근하자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했고, 리페강변 평원에서 벌어진 기병전에서 스페인군 식량부대를 급습하려던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 기병대가 스페인 기병대의 급습을 받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마우리츠의 공세가 꺾인 직후인 1596년 4월 말, 스페인 제국군이 오스트리아 대공 알베르트 7세의 지휘하에 칼레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왕국네덜란드 공화국에 군수 물자와 병력을 보내주는 주요 항구를 접수하면서 유리한 고지에 선 알베르트 7세는 여세를 몰아 플란데런으로 이동한 후, 브뤼헤 시민들로부터 1,200,000 길더의 특별세를 거둬들여서 플란데런 내 네덜란드 공화국이 보유한 유일한 항구도시인 오스텐트를 포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우리츠가 새로운 병력과 보급품을 보내 오스텐트 수비대를 대폭 강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알베르트 7세는 오스텐트 공략을 포기했다.

그 후 알베르트 7세는 안트베르펜에서 셀트강을 지나 브라반트로 이동했지만, 베르헌옵좀과 브레다 중 어느 쪽을 공략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적의 방어 상태가 미약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마우리츠는 5천 병사를 이끌고 브라반트에 주둔했고, 그동안 마우리츠와 협력했던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 숙련병 4,000명을 이끌고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에 참여하러 떠났다. 아렙르트 7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공세를 개시해 2차 헐스트 공방전에서 1591년 마우리츠의 손아귀에 넘어갔던 헐스트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제 스페인군이 좀 더 진군해 자신들을 짓밟으려 들 것을 우려했지만, 알베르트 7세는 헐스트 공방전에서 심각한 손실을 보아서 진군을 계속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고 플란데런으로 철수했다.

1597년 초,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 실패는 스페인 제국의 3번째 파산을 초래했고, 이 때문에 플란데런에 주둔한 스페인군에 대한 급료 지급이 끊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군 내 용병들이 대거 탈영하거나 폭동을 일으켰다. 게다가 많은 스페인군이 플란데런에서 프랑스로 파견되어 위그노 전쟁에서 앙리 4세에 맞서는 프랑스 가톨릭 연맹을 지원했기 때문에,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군의 병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에 참여하느라 네덜란드를 떠났던 프랜시스 베레의 잉글랜드군이 네덜란드 전선으로 돌아오자, 마우리츠는 스페인군을 향한 반격 작전을 준비했다.

3. 경과

3.1. 투른호우트 전투

1596~1597년 초, 알베르트 7세는 부르고뉴의 바락스 백작 필리베르트 드 라이에게 보병 4,000명, 기병 500명을 맡겨서 브레다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투른호우트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의 목표는 톨렌 시를 겨울에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첩자들을 통해 네덜란드 공화국에 그대로 전달되었고, 마우리츠는 헤이르트루이덴부르크에 군대를 집결했다. 보병 6,800명, 기병 800명이 집결했는데, 이 중 2/3는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이었다.

1597년 1월 23일 아침,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4개 사단으로 나뉘어 기병대를 측면에 배치한 채 헤이르트루이덴부르크에서 출발했다. 열악한 도로 사정 속에서도 38km를 하루 동안 강행군한 끝에, 그날 저녁 투른호우트에서 북동쪽으로 5km 떨어진 라벨스 마을에 도착해 진을 쳤다. 그날 자정, 연합군은 진영을 치운 뒤 투른호우트 외곽으로 접근했다. 한편, 바락스 백작은 적의 군세가 1만 명이 넘는다는 과장된 보고를 받았고, 투른호우트에는 조그마한 성과 울타리, 도랑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적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여기고 남쪽의 요새화된 도시인 헤렌탈스로 철수하기로 했다. 마우리츠는 적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기병대를 급파했다.

1월 24일 새벽, 스페인군 전체가 헤렌탈스로 향했다. 이윽고 군대가 아 강둑에 도착하자, 바락스 백작은 강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 중 하나만 빼고 모두 파괴했다. 이후 군대 전체가 강을 건너는 동안, 스페인 머스킷 부대가 강 반대편에 주둔해 적군의 도하 시도를 저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잉글랜드 선봉대의 돌격에 직면하자 곧 패주했다. 그 후 잉글랜드 소총 기병부대가 스페인 후위대를 8km 동안 끈질기게 따라가서 타격을 입혔고, 네덜란드 머스킷 장병들이 뒤따라 이동했다. 마우리츠는 잉글랜드-네덜란드 기병 전체에게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서 붙들라고 명령했고, 그의 보병과 포병은 진흙투성이의 길에서 힘겹게 따라갔다.

프랜시스 베레는 강에서 멀리 떨어진 큰 숲을 발견하고, 머스킷 분견대를 소집해 숲 가장자리에 배치하여 은폐했다. 이들은 스페인 후위대를 향해 사격을 끊임없이 가해 타격을 입혔다. 또한 프랜시스 베레는 기병 16명과 함께 도로를 따라 적군을 추적하면서, 마우리츠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다리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말을 탈 때까지 선두에서 도보로 계속 달렸다. 잉글랜드-네덜란드 선봉대와 스페인 후위대 사이의 소규모 접전은 연합군 기병대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3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이 무렵, 스페인군은 기병 작전에 적합한 황야인 티엘렌하이데에 도착했다.

바락스 백작은 남쪽으로 진군하면서 파이크병으로 구성된 방전 4개를 형성하게 했고, 스페인군의 표전적인 관행대로 측면에는 머스킷 부대를 배치했다. 그의 기병대와 마차는 폐쇄된 길로 들어섰다. 첫 번째 방진은 술츠 백작이 이끄는 독일군으로 구성되었고, 그 뒤를 왈롱인과 부르고뉴인이 뒤따랐다. 트레비소 후작은 숙련된 스페인군과 이탈리아군과 함께 후방을 맡았다. 프랜시스 베레는 주력 기병대와 합세한 뒤, 스페인군 앞으로 나아갔다. 스페인 좌익 기병대와 보병대는 연합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자마자 전선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하여 적이 포진한 숲을 향해 돌진했다. 이에 베레의 머스킷 부대가 첫 번째 일제 사격을 가하자, 스페인 보병들은 삽시간이 무너져 도주했다.

바락스 백작은 기병대에게 퇴각을 엄호하라고 명령했지만, 호헨로헤바이커스하임 백작 볼프강과 그의 네덜란드 기병대가 스페인군 우익을 급습했고, 프랜시스 베레가 그 뒤를 따랐다. 호엔로헤 백작이 술츠의 독일 연대를 공격하는 동안, 베레의 잉글랜드군과 네덜란드 기병대는 스페인군 후위대를 급습했다. 기습은 완벽했다. 스페인 기병대는 첫 공격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순식간에 폐쇄된 길의 입구로 퇴각했다. 대부분은 연합군 기병대의 공격에서 벗어나 건너편의 습지대로 달아났다. 뒤이어 니콜라스 파커의 잉글랜드 기병 중대가 스페인 기병대와 짐을 추격해 헤렌탈스 도로를 따라 질주했다.

스페인 기병대가 격퇴되자,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기병대는 무질서하게 이동하는 스페인 보병대를 공격했다. 왈롱 연대는 측면을 숲으로 보호하며 전열을 갖추려 했지만, 기병대가 눈앞에서 패주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뚝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멀리서 기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다가오는 네덜란드 보병대를 보자, 그들은 전열을 무너뜨리고 아 강을 건너 헤렌탈스로 도망치려 했다. 술츠 연대의 머스킷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 뒤따르는 파이크병들을 향해 도망쳐서 서로 뒤엉키다가, 적 기병대의 돌격을 받자 집단 항복했다.

트레비소 후작 휘하의 숙련된 테르시오는 전투 대형을 갖추고 한동안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네덜란드-잉글랜드 기병대가 스페인 보병의 밀집 대열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 권총과 카빈총을 근거리에서 발사해 일방적으로 사살했다. 바락스 백작은 부하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적 기병이 근거리에서 쏜 카빈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기병대의 사격으로 스페인 대열 내부에 틈이 생기자, 기병대는 그 틈으로 질주해 적 진형 내부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적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한편, 생존한 독일군과 후방의 다른 보병들은 동시에 무너졌고, 공황 상태에 빠진 생존자들은 그들 사이에 배치된 다른 두 연대 앞을 질주해 사격 시야를 가리고 그들 역시 공황 상태에 빠지게 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기병대는 곧 두 연대까지 무너뜨려서 스페인 보병 거의 전부 패주하게 했다. 이후의 상황은 일방적인 학살로 점철되었으며, 그 사이 파커의 기병대는 폐쇄된 길을 뚫고 스페인군 마차들을 약탈했다. 스페인군 잔당은 이탈리아 용병대장 니콜로 바스타가 수습한 뒤 헤렌탈스로 철수했다. 스페인군이 투른호우트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제일란트로 쳐들어갈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의회는 재정적인 이유로 마우리츠에게 즉시 새로운 원정을 시작할 자금을 주지 않았고, 마우리츠 역시 잉글랜드군이 이 원정에 합류할지 장담할 수 없어서 봄 내내 병영에 가만히 있어야 했다.

3.2. 1차 라인베르크 공방전

1597년 7월 31일, 네덜란드 정부는 마우리츠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쥐여주면서, 위그노 전쟁에 참여한 스페인군이 아미앵 공방전에 전념하는 틈을 타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라고 요구했고, 마우리츠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라인강을 따라 진군해 라인베르크와 뫼르스를 점령한 뒤 네덜란드 동부를 통과하여 흐룬로와 올덴잘을 접수하기로 했다. 라인베르크를 접수하면 오버레이설에 흩어진 스페인 기지들을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었다. 1597년 8월 4일, 마우리츠는 사촌인 빌럼 로더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와 함께 보병 7,000명, 기병 1,200명을 이끌고 아른험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프랜시스 베레의 부관 호러스 베레가 이끄는 잉글랜드인과 헨리 발푸어 경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포함되었다.

연합군은 알펜 마을과 성을 무혈 접수한 뒤, 라인베르크로 진군하여 8월 10일 도착하자마자 즉시 포위 공격했다. 라인베르크의 스페인 수비대는 수년간 이 지역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던 카밀로 사키노의 지휘 아래 85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해 다들 전투에 참여하길 원하지 않아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 없었다. 연합군은 라인강에서 바지선을 통해 상륙한 다량의 대포를 이용할 수 있었다. 8월 11일 도시 성벽을 향해 접근로가 파였다. 그 과정에서 빌럼 로더베이크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고, 마우리츠는 휴식 중일 때 포탄이 천막에 들어와서 머리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갔다.

포대가 배치된 후, 도시는 집중 포격을 받았다. 그렇게 10일간 포격이 이어진 끝에, 사키노는 수비대의 불만이 고조되어 반란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자, 어쩔 수 없이 협상을 요청했고 8월 20일에 항복했다. 라인베르크 대주교는 그 지역과 주민들을 약탈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고, 마우리츠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스페인 수비대는 무기와 깃발, 짐을 챙긴 채 도시를 떠났고, 연합군이 라인베르크에 입성했다.

3.3. 뫼르스 공방전

라인베르크를 접수한 마우리츠는 뒤이어 라인강 서쪽 기슭에 있는 뫼르스로 진군했다. 당시 스페인 측 헬러 총독 헤르만 반 덴 베르흐는 이 요새에 안드레스 데 미란다의 지휘 아래 수비대 400명을 배치했다. 마우리츠는 도착하자마자 뫼르스를 양쪽에서 포위했고, 그의 포병들은 8월 29일에 포대를 설치했고, 공병들은 도시를 둘러싼 해자를 세 군데에서 메워서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뫼르스 수비대는 스페인 제국이 세 번째로 파산한 여파로 급료가 지급되지 않는 상황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전투를 수행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9월 3일 성벽 일부가 무너지자, 그들은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란다에게 당장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미란다는 이에 따라 마우리츠와 협상한 끝에 도시를 넘겼고, 스페인군은 무기와 깃발, 짐을 챙긴 채 성채를 떠났다. 마우리츠의 군대는 뫼르스에 진입하여 요새를 강화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3.4. 2차 흐룬로 공방전

뫼르스를 접수한 후, 마우리츠는 스페인 장성 프레데릭 반 덴 베르흐가 링겐과 주변 지역의 군대를 동원해 제벤보우덴으로 진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라인강을 신속하게 건너서 네덜란드 동부로 진격해 프레데리크를 압박하기로 했다. 9월 8일 라인강을 건너고 뒤이어 리페강을 도하한 후,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선봉대는 9월 11일 흐룬로 앞에 이르렀다. 연합군은 보병 8개 연대와 기병 7개 연대로 구성되었는데, 보병은 6,000명이었고, 기병은 1,400명이었다. 또한 보급품과 식량을 실은 마차 행렬의 길이는 20km가 넘었다. 보병을 위해 신속히 설치된 진영은 폭 650m, 길이 800m였다. 당시엔 비가 많이 내렸고, 병사들은 9월 13일까지 막사를 짓고 진영 주변에 해자를 파느라 바빴다.

한편, 2년 전 흐룬로를 공격한 마우리츠를 막아낸 바 있었던 얀 반 스티룸은 이번에도 보병 800명과 기병 300명을 거느리고 흐룬로 수비에 나섰다. 마우리츠는 적의 훼방을 뿌리치고 흐룬로 주변에 요새를 지었고, 9월 13일 마을을 향해 진입로가 파지기 시작했다. 또한 흐룬로 성채 주변 해자의 물을 빼려는 수로 공사가 시행되었고, 흐룬로 수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연이어 습격했다가 반격받기 전에 성채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흐룬로 마을은 적 대포들의 맹포격을 받아 최소 60채의 가옥이 불길에 휩싸였다.

9월 26일, 흐룬로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성벽을 따라 24곳에 진입로가 건설되어 적군이 성벽을 따라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구원군이 올 가망이 없자, 2년 전에 "최후의 피 한 방울을 흘릴 때까지 흐룬로를 지키겠다"라고 선언한 바 있었던 얀 반 스티룸은 이번엔 항복 협상하기로 했다. 그는 부대장 뵈트베르겐과 코르텐바흐의 제안에 따라 말, 포병, 깃발, 무기, 그리고 짐을 자유롭게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마우리츠는 무기와 짐만 옮길 수 있다고 밝혔다. 9월 7일, 코르텐바흐는 그의 기병들이 말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며, 말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우리츠는 거부했지만, 함께 따라온 의원들은 양보 의사를 밝혔다. 의원들은 흐룬로의 병사들과 펠리페 2세의 신민으로 남기를 원하는 주민들은 평화롭게 도시를 떠날 수 있지만, 3개월 동안 뫼즈강 이쪽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들은 이에 따르기로 했고, 항복은 성립되었다. 9월 28일, 마우리츠, 빌럼 로더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 그리고 호엔로헤 가문의 부대가 마을을 접수하기 위해 입성했다. 그날 저녁, 얀 반 스티룸은 조건부 항복 후 관례에 따라 마우리츠와 함께 만찬을 가진 뒤 떠났다. 이리하여 마우리츠는 2년 전에 공략하지 못했던 흐룬로를 손아귀에 넣었다.

3.5. 브레데부르트 공방전

흐룬로를 접수한 후, 마우리츠는 10월 1일 보병 6,000명과 기병 1,200명, 대포 24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브레데부르크로 진군했다. 당시 이 마을은 프랑스 출신의 다미앙 가르도 대위와 부관 반 브로크하이센이 이끄는 보병 200명, 기병 40명, 대포 20문이 배치되었다. 마우리츠는 브레데부르트로 가는 길을 봉쇄하고 호레이스 베레가 지휘하는 13개 잉글랜드 중대와 프리지아 총독 빌럼 로더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 백작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12개 중대와 함께 마을 서쪽 알텐에 본부를 두었다. 동쪽에는 반 솔름스 백작의 9개 중대와 메레우 장군의 12개 스코틀랜드 중대가 함께 주둔했고, 두이벤부르데가 지휘하는 6개 중대는 미스테와 코를레에 주둔했다.

10월 2일, 흐룬로 요새에서 차출된 대포 12문이 전방에 배치된 뒤 첫 번째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후 마우리츠가 항복을 요구하자, 수비대가 성벽 위에서 도전적으로 화답했다.
"너희 앞에는 흐룬로 병사들이 없다!"

그러면서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를 위해 최후의 한 명까지 도시를 방어하겠다고 선언했다. 수비대는 브레데부르트가 발이 푹 빠지는 깊은 습지대 사이에 있어서 포위 공격하기 힘들며, 이중 해자가 설치되었고, 일곱 개의 성벽, 2개의 원형 성벽, 2개의 라벨린으로 보호되는 2개의 도시 성문이 있는 강력한 방어 시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군이 곧 올 거라고 믿었기에 끝까지 저항하기로 했다. 마우리츠는 습지대가 워낙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어서 도시 주변에 포위망을 구축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일단 해자의 물을 빼기 위해 물레방아 근처에 댐을 뚫었다. 하지만 그는 곧 늪지대 한가운데의 저지대에서 해자의 물을 빼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마우리츠는 병사와 포병을 최전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접근로를 파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10월 3일 동쪽과 서쪽에서 도시를 향해 포격을 퍼부으면서 프리지아인과 잉글랜드인 장병들을 도시에서 400m 이내로 접근해 진입로를 건설하게 했다. 이후 마우리츠는 1597년 7월 15일 헤이그에서 시연된 이동식 코르크 다리를 쓰기로 했다. 이 다리는 여러 개의 구간으로 구성되어 무장 병력 150명과 그들이 이끄는 중포를 실을 수 있었다. 다리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나무판자로 보강되었다. 마우리츠는 이 이동식 코르크 다리를 되스뷔르흐에서 가져오게 했다.

이후 5일간 연합군이 맹공을 퍼부은 끝에, 10월 8일 스코틀랜드 장병들이 도시 서쪽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여 알터포르트강 앞의 한 지역을 점령했다. 또한 이날 뒤스뷔르에서 온 배들이 이동식 코르크 다리의 첫 번째 교량 부분을 가져왔다. 10월 9일 이른 아침, 도시는 또다시 전면 포격을 받았다. 특히 동쪽과 서쪽을 중심으로 맹렬하고 지속적인 포격이 쏟아졌다. 남쪽에서는 장병들이 엄폐물 없이 건설하느라 성벽에서 쏟아지는 끊임없는 포격에 시달린 끝에 이동식 코르크 다리를 건설했다. 여기에 장병들은 첫 번째 성벽에 접근하여 참호를 파고 들어갔다.

이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수비대는 드러머를 성벽으로 올려보내 항복 조건을 협상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이 성채를 공략하느라 큰 희생을 치렀던 포위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드러머가 성벽 위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대포알에 머리가 날아갔다. 공격군이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성문을 뚫고 안으로 진입하자, 스페인군은 항복의 표시로 모자를 공중으로 던졌지만 살해당했다. 남은 스페인군 120명은 마지막 피난처인 내성으로 도주했다.

어려운 전투 끝에 브레데부르트 시내에 진입한 연합군은 마우리츠의 용인 아래 이틀간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한편, 프랑스인 총독 다미앙 가르도는 내성으로 후퇴하려 했지만, 반 브로크하이젠의 중대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고, 성 다리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다미앙이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 협상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협상을 거부해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르도는 충성스러운 병사들과 함께 성벽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나중에 호엔로헤 부대 소위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막대한 돈을 주고 자유를 얻었다. 브로크하이젠의 병사들도 1,700 골드 길더를 지급하고 떠날 수 있었다. 수비대는 이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3개월 동안 뫼즈강 이편에서 연합군에 대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0월 12일, 수비대는 6,000골드 길더에 달하는 몸값을 지급한 뒤 떠났다. 브레데부르트 시민들도 6,000길더를 지급해야 했지만, 그날 밤에 전리품을 찾던 연합군 군인이 어둠 속에서 사물을 확인하기 위해 짚단에 불을 질렀다가, 그 불이 번지면서 20채를 제외한 모든 집이 불타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우리츠는 이 사건에 매우 화를 냈지만, 다른 마을이 자신에게 대항할 엄두를 못 내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여러 전쟁 포로를 브레덴에서 석방한 뒤 포로 생활과 브레데부르크 화재 소식을 널리 알리게 했다. 또한 마우리츠는 시민들이 큰 화재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몸값을 면제하기로 했다. 브레데부르트 시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마우리츠에게 포도주 3통을 줬다.

3.6. 엔스헤더 공방전

브레데부르트에서 심각한 파괴를 자행한 후,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스코틀랜드인과 프리지아인 부대는 솔름스 백작과 반 두이벤보르데의 지휘 아래 빈터스 베이크에서 그로나우로 진군했고, 정찰대는 로저에서 론네커로 이동해 가장 높은 지점에서 주변 지역을 관찰했다. 마우리츠는 브레데부르트에서 가져온 포병대를 이끌고 10월 18일 뒤 따라갔다. 연합군 선봉엔 스코틀랜드인이 섰고, 프리지아인 주력 부대가 그 뒤를 따라갔고, 잉글랜드군이 후위대를 결성했다.

이윽고 글라너브루크와 엔스헤더의 중간 지점에서, 마우리츠는 군대를 완전한 전투 대열로 정렬한 뒤 나팔수를 엔스헤더 성문으로 보내 수비대와 친스페인 시민들에게 한 시간 안에 항복한 뒤 깃발과 무기, 식량을 들고 도시를 포기하며, 앞으로 3개월 동안 뫼즈강 북쪽에서 스페인 국왕을 위해 싸우지 말라고 요구했다. 또한 그는 흐룬로와 브레데부르트 수비대가 항전을 택했다가 도시가 파괴당한 걸 알리면서, 만약 이번에도 대포를 쏜다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겠으며, 대포를 보고 싶다면 누군가를 보내 검사하도록 허용해 줄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엔스헤더 수비대와 주민들이 잠시 논의한 뒤, 반 그루트벨트 중위가 이끈 사절단이 찾아와서 포병대를 확인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포병대를 확인한 후, 그들은 마우리츠의 조건을 "절대적으로 공정하다"라고 받아들였다. 다만 한 시간 안에 떠날 준비를 하는 건 불가능하며, 해가 저물어가고 있으니 하룻밤의 여유를 주고, 연합군이 그날 밤 도시에 진입하지 않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마우리츠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다음 날, 마우리츠는 자크 뫼르의 중대를 도시로 보내 교회에서 떠나는 사람들에게 선서를 집행하게 했다. 그 후 수비대 400명 중 반 그루트벨트와 바스케스 중위가 이끄는 두 중대, 총 108명이 도시를 떠났다. 자크 뫼르와 그의 중대는 엔스헤더의 수비를 맡았다. 마우리츠는 방어하기 어려운 요새들을 대부분 해체해, 적군이 도시를 접수할 마음이 들지 않게 했으며, 그의 병사들은 안쪽 해자와 바깥쪽 해자 사이의 성벽을 바깥쪽 해자 안으로 밀어 넣었다.

3.7. 오트마르숨 공방전

엔스헤더에 무혈 입성한 뒤, 마우리츠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4,000명을 이끌고 올덴잘로 진군하면서, 반 두이벤부르데 백작이 이끄는 네덜란드-잉글랜드군 2,800명을 오트마르숨으로 따로 파견했다. 그날 저녁 오트마르숨에 도착한 네덜란드군은 엔스헤더를 공략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팔수를 성문으로 보내 항복을 권고하면서, 스페인군과 친스페인 시민들은 깃발, 무기, 식량을 가지고 도시를 떠나며, 앞으로 3개월 동안 뫼즈강 북쪽에서 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한 공격군이 대포를 한 발이라도 쏘게 한다면, 브레데부르트와 흐룬로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위협적으로 덧붙였다.

그러나 모든 병사와 시민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성벽 위로 올라가서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를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한 이상 도시의 명예를 위해 항복할 수 없다면서, 반 두이벤부르데 백작의 안녕을 빌며 마우리츠가 이 대답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이에 공격군이 공성전을 준비하자, 수비대는 성벽에서 머스킷 총과 대포로 끊임없이 사격을 가했고, 잉글랜드군 진영에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도시에서의 사격은 저녁과 밤 내내 지속되었다.

10월 20일, 반 두이벤부르데 백작은 오트마르숨을 대포 4문으로 포격했다. 이후 다시 항복을 요구했지만, 수비대 지휘관 오토 반 덴 산데는 펠리페 2세가 포위당한 시민과 수비대는 포위군을 향해 계속 사격하고 도시를 사수하라고 명령했으며, 더 높은 계급의 사람만이 도시를 넘길 수 있다며 거부했다. 이후 연합군은 진입로를 건설한 후 그 위에 대포 4문을 배치했고, 수비대는 이 포대를 향해 포격을 끈질기게 가했다. 이 때문에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정확한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10월 21일, 네덜란드군은 오트마르숨에 3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그 후 마우리츠가 보낸 서면 조건이 제시되었다. 수비대 전원은 자유로운 통행을 허가받고, 철제 대포 2문, 군기 2개, 화약 800파운드, 도화선 2,000개, 밀가루 4톤, 식량을 챙기고 도시를 떠나는 걸 허락받았다. 이에 수비대 120명 전원이 항복하고 라인강으로 떠났고, 오트마르숨 요새와 외부 해자는 엔스헤더처럼 해체되었다.

3.8. 올덴잘 공방전

별동대가 오르마르숨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 마우리츠의 주력군은 올덴잘로 향했다. 올덴잘은 1572년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매년 올덴잘에서 고이센(Geuzen)[1]이 추방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올덴잘의 방어 시설은 도시를 둘러싼 주 성벽, 보루 6개, 해자, 그리고 흙벽으로 구성되었지만, 방어 시설 재건 작업 중 일부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프레데릭 반 보이머 총독 휘하 수비대 400명이 배치되었다. 그들은 대형 대포 한 문만 가지고 있어서, 4,000명에 달하는 적군에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도 10월 20일 포위전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대포와 화승총으로 응수해 일부 적병을 사살했다.

하지만 적군이 이에 굴하지 않고 도시를 둘러싸고 참호를 파자,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수비대는 명예로운 항복 조건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결과, 총독과 성직자, 그리고 스페인 수비대는 링겐으로 명예롭게 떠날 수 있게 되었고, 다음 날인 10월 23일 마우리츠는 올덴잘에 입성했다.

3.9. 링겐 공방전

오트마르숨과 올덴잘을 잇달아 접수한 마우리츠의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트벤터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스페인군이 주둔한 도시인 링겐으로 진군해 그곳을 접수함으로써, 스페인군을 트벤터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로 했다. 이 도시에는 프데데릭 반 덴 베르흐가 이끄는 스페인군 500명이 주둔했다. 연합군은 육로를 통해 링겐으로 진군하면서, 중포를 선박에 싣고 바덴해를 거쳐 엠스강을 지나 링겐으로 운반했다.

10월 25일 중포가 도착하자, 연합군은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수비대는 이에 맞서 활발히 출격해 적 기지에 타격을 가했지만, 선두에서 공격하던 잉글랜드군과 스코틀랜드군에게 밀려났다. 이후 많은 병사를 투입한 끝에 포대를 건설한 후 요새화된 성벽에 포격을 가해 파괴했다. 수비대장 프레데릭은 구원군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했지만,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플란데런 총독 알베르트 7세로부터 구원군을 보낼 수 없으니 자신의 안전과 도시의 안위를 보전하라는 명령을 받자 결국 항복한 후 무기와 깃발, 짐을 챙기고 플란데런으로 이동했다.

이리하여 링겐을 접수한 마우리츠는 군대를 겨울 숙영지로 보냈다. 그는 1597년 8월부터 11월까지 일련의 원정을 감행해 여덟 개 도시를 공략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동부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해 네덜란드의 명장으로서 이름을 널리 떨쳤다.
[1] 거지를 의미한다. 1566년 네덜란드 귀족 400명이 궁궐로 몰려와서 탄원서를 바쳤을 때, 펠리페 2세의 이복누이이자 네덜란드 대리 통치인인 마르게리타 디 파르마는 두려운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옆에 있던 신하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들은 거지들일 뿐입니다."라고 속삭였다. 나중에 이 말을 전해 들은 네덜란드 귀족들은 처음엔 자신들을 무시하는 작태에 분개했지만, 이내 "거지라고 부르겠다면, 아예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거지가 되겠다"라며 화려한 장식을 모조리 떼어내고 '거지들'을 자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