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우포르트 전투 Slag bij Nieuwpoor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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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
| 1600년 7월 2일 | ||
| 장소 | ||
| 벨기에 오스텐트 인근 니우포르트 | ||
| 원인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됭케르크 공세와 스페인군의 반격.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보병 9,400명, 기병 2,500명. | 보병 6,000명, 기병 1,200명. | |
| 피해 | ||
| 1,700~2,700명 사상. | 4,000명 사상 또는 포로. | |
| 결과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전술적 승리, 전략적 패배. | ||
| 영향 | ||
| 네덜란드 공화국의 됭케르크 원정 좌절, 스페인 제국의 오스텐트 공략 작전 개시. | ||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600년 7월 2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과 스페인 제국군이 니우포르트에서 맞붙은 회전. 후대에 마우리츠가 개발한 선형진이 스페인군의 테르시오를 물리친 대표적인 전투로 회자되었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전략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 배경
1598년 5월 2일, 베르뱅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평화가 성립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전선으로 보내졌던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이 플란데런으로 도로 돌아와서 네덜란드 전선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598년 9월 13일에 사망한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는 그 해 5월 6일에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자기 딸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의 결혼 지참금으로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사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여섯 번째 아들이며, 1596년부터 네덜란드 총독으로 활동한 알베르트 7세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알베르트 7세는 아내의 권리로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네덜란든 반란군을 완전히 토벌해 전쟁을 끝내고 네덜란드를 온전히 다스리겠다는 동기부여를 받았다.[1]1598년 9월, 플란데런 군사령관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는 알베르트 7세의 지시에 따라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라인강 하류의 강둑에 있는 오르소이를 접수한 뒤, 라인강을 건너 9월 24일 알펜에 무혈입성하고 이틀 후엔 브로이히 성을 점령했다. 10월 12일에는 1년 전 1차 라인베르크 공방전에서 상실했던 라인베르크 요새 역시 가볍게 되찾았다. 그 후 멘도사는 군대를 나누었다. 한 부대는 헬러 지방을 침공했고, 11월 8일에 두팅험 마을을 접수했다. 그 사이에 나머지 부대는 리페강을 건너 10월 30일에 라인강 하류의 도시 리스로 진군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스페인군은 리스 주변 지역과 뮌스터 주교령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했다.
1599년 4월, 알베르트 7세는 헬러로 진군해 마우리츠의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과 대치하면서, 멘도사에게 스페인인 사이에서 "섬으로 가는 열쇠"라고 불렀던 센켄샨츠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센켄샨츠를 공략한다면, 스페인군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독일 간의 연락망을 끊어서 네덜란드를 고립시킬 수 있었다. 멘도사는 지시에 따라 보병 17,000명, 기병 2,000명, 그리고 공성무기들을 이끌고 센켄샨츠로 진군했다. 그러나 센켄샨츠 공방전에서 적의 예상치 못한 거센 저항에 고전하다가, 왈롱 출신의 클로드 라 바로트가 이끄는 네덜란드군 5천 명이 미사강 상류에서 비밀리에 출발해 봄멜러바르트의 헤델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멘도사는 900명만 있는 센켄샨츠를 굳이 공략하기보다는 5천 적병을 섬멸하는 쪽이 네덜란드 공화국에 더 큰 타격을 입힐 거라고 판단하고, 센켄샨츠의 포위를 푼 뒤 적병 5,000명을 격파하러 출진했다.
클로드 라 바로트의 군대는 멘도사의 스페인군이 추격하는 가운데 북쪽의 잘트봄멜로 후퇴했고, 스페인군은 그들을 추격해 5월 15일 케셀과 테렌사이의 뫼즈강을 건너 봄멜러바르트 섬에 있는 잘트봄멜 요새를 포위했다.(잘트봄멜 공방전) 그러나 수비대가 강력하게 저항했고, 마우리츠가 선박 다리를 통해 보급을 꾸준히 공급했기에 막대한 손실만 볼 뿐 공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6월 13일 플란데런으로 퇴각했다. 잘트봄멜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후, 스페인군은 거듭된 패배로 군기가 문란해졌고,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거나 폭동을 일으키면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스페인 측은 이 상황을 수습하느라 플란데런 방면군의 모든 추가 공세를 보류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는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1600년 1월 반격 작전을 감행해 와흐텐동크에 무혈 입성했고, 뒤이어 크레브쿠어 요새를 포위해 급료 미지급에 불만이 많던 수비대에게 상당량의 금화를 지급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스페인군이 잘트봄멜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건설했던 산안드레스 요새를 포위했다. 멘도사는 이곳마저 네덜란드 공화국을 정복할 원정군의 교두보를 완전히 상실하기에 루이스 데 벨라스코에게 4,000 병력을 맡겨 구원에 착수하게 했지만,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포위선을 철저히 요새화한 데다 산안드레스 요새로 접근하는 모든 길이 연합군의 제발 건설로 인해 강물로 침수되면서 좀처럼 접근하지 못하다가 결국 철수했고, 산안드레스 수비대는 구원이 올 가망이 없자 항복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에 가담한 7개 주에 남아있던 마지막 스페인 요새가 무너졌고,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수뇌부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반면에, 네덜란드 의회는 연이은 성공에 고무되었고, 이참에 플란데런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내고 저지대 국가를 통합할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감행하자는 의견이 거세졌다. 이때 대연금관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가 됭케르크를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됭케르크는 1585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네덜란드 주변을 운항하는 스페인 함대 주력을 그곳에 배치한 이래 스페인 해군의 주요 항구로 활용되었으며, 스페인 당국에 고용된 사략선이 그곳에서 자주 출항해 네덜란드 공화국의 해운 및 어업에 큰 피해를 줬다.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는 그곳을 공략한다면 사략선을 퇴치해 상선과 어업을 보호할 수 있고, 스페인 정부가 플란데런 방면 자국군에 보내는 금화를 전달하기 곤란해지며,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스페인과의 전쟁을 재개하도록 독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됭케르크를 접수한 뒤 잉글랜드에 넘긴다면, 그동안 공성전을 치를 군자금을 대기 위해 대출을 받은 공화국의 잉글랜드에 대한 빚을 청산할 수 있고, 잉글랜드 해군이 영국해협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요한의 주장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지만, 마우리츠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됭케르크를 지금 당장 포위하면 적의 영토에 깊숙이 진입해서 작전을 수행해야 하므로, 겐트, 브뤼허 같은 친 스페인파 도시들을 후방에 둬야 하고, 스페인군의 반격도 매서울 테니, 자칫했다간 네덜란드군이 포위되어 섬멸당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공화국은 파멸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우리츠의 사촌이자 프리슬란트 총독인 빌럼 루드비크 반 나소딜렌부르크도 이에 동의했다. 두 사람은 스레르토겐보스, 그라브, 펜로 등 공화국에 가까운 도시들을 공략하는 데 초점을 맞추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한이 됭케르크 공략의 필요성을 설파했고, 이에 설득된 의원들이 마우리츠에게 지시에 순종하라고 요구하자, 마우리츠는 결국 이에 따르기로 했다. 다만 정부 구성원들이 군대와 함께 플랑드르로 진군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3. 경과
3.1. 됭케르크 원정
마우리츠는 공화국의 방위를 보장하기 위해 필리프 반 호엔로헤노이엔슈타인과 빌럼 루드비크 반 나소딜렌부르크를 일부 군대와 함께 남겨두었다. 두 사람은 호이스덴과 스헤르토겐보스에 대한 견제 공격을 가해 적의 시선을 잡아끄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1600년 6월 19일 플리싱언에 보병 13,000명과 기병 3,000명, 선박 1,250척[2]이 집결했다. 마우리츠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루드비크 군터 반 나소, 마우리츠의 이복형제인 프레데릭 헨드릭,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 등이 부관을 맡았다. 그들은 플란데런 내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지하는 유일한 항구도시 오스텐트에 상륙한 뒤 됭케르크로 진군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그러나 원정군은 처음부터 곤경에 처했다. 6월 22일, 원정군은 항해 도중 악천후를 만나면서 목표지인 오스텐트보다 훨씬 서쪽인 필리핀 요새 인근에 상륙해야 했다. 선발대 지휘관인 에른스트 카지미르 반 나소디츠가 먼저 상륙했고, 나머지 군대는 그의 뒤를 따라 행군했다. 솔름스 백작이 중앙을, 베르 백작이 후위를 맡았다. 상륙을 완료한 마우리츠는 전 함대에 적에게 포획될 것을 대비해 분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에른스트 카지미르는 선봉대를 이끌고 필리핀 요새를 공략했다. 그 후 원정군은 오스텐트로 진군했지만, 갈수록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마우리츠는 스페인의 압제를 받는 플란데런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가톨릭을 전적으로 믿는 주민들은 네덜란드군을 이단자이자 반역자로 여기고 적대시했고, 농부들은 식수에 독을 타서 원정군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원정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6월 26일에 에클로를 파괴하고 방화했다. 6월 27일 오덴부르크 요새를 접수한 뒤, 2~3일간 그곳에 머무른 후 오스텐트의 주변 요새인 브레덴과 스나스케르케를 접수했다. 이때 스나스케르케에 주둔하던 수비대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전원 학살당했다.
마우리츠는 원정 중에 피론 대령을 보내 됭케르크와 브뤼허로 가는 길을 정찰하게 했지만, 피론 대령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마우리츠는 여전히 스페인군이 아직 배치되지 않았다고 간주했다. 그 후 오스텐트에 도착해서 군대를 어느 정도 재정비했다. 의회 대표단이 오스텐트에서 머물며 결과를 지켜보기로 한 뒤, 마우리츠는 됭케르크로 진군했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이제르 강어귀를 천천히 이동해야 했으며, 도로를 여러 차례 새로 닦아야 했다. 7월 1일, 원정군은 이제르 강변의 니우포르트 시를 포위했다.
3.2. 스페인군의 반격
이렇듯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악전고투하면서 됭케르크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을 무렵, 루이스 데 벨라스코가 이끄는 일부 스페인군은 스헤르토겐보스를 견제 공격하는 필리프 반 호엔로헤노이엔슈타인을 저지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대규모 함대가 도르드레흐트에서 북해로 출발했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마스트리흐트로 후퇴했다. 사흘 후 적군이 오스텐트 근방으로 항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벨라스코는 5일 동안 약 200km를 행진해 겐트에 도착했다. 그러면서 당시 디스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스페인 장병들과 대치 중이던 네덜란드 총독 알베르트 7세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알베르트 7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디스트에서 버티던 반란군을 설득했다. 그는 병사들이 가톨릭에 경도되어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네덜란드의 침략을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위협으로 묘사했다. 또한 유럽 최강의 국가인 스페인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에 자긍심을 가졌던 그들의 심리를 이용하고자 네덜란드군이 승리한다면 그들의 명성이 추락할 거라고 설득했다. 이에 반란군이 협상할 의사를 전달하자, 알베르트 7세는 반란군 병사들이 급료를 즉시 받고, 장교들의 지휘를 받으며, 최전선에 배치되어 이단자들을 처단하는 역할을 수행할 거라고 선언했다. 이에 디스트의 반군은 알베르트 7세와 함께 하기로 했다.
그 후 알베르트 7세는 겐트로 이동해 벨라스코와 합류했다. 6월 28일, 스페인, 이탈리아, 아일랜드, 왈롱 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보병 6,000명, 기병 1,200명이 겐트에 집결했다. 남편 곁에 선 이자벨은 병사들에게 애정어린 인사를 건네며 그들을 자신의 사자라고 불렀고, 그들의 명예를 기렸다. 6월 30일, 알베르트 7세는 전군을 이끌고 오스텐트로 빠르게 이동해 스네스케를레와 오덴부르크의 보루를 접수했다. 살아남은 수비대는 오스텐트로 후퇴했고, 오스텐트는 곧 니우포르트를 포위하던 네덜란드군과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 스페인군은 7월 1일 저녁에 레핑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웠다.
정찰병으로부터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했던 마우리츠는 7월 1일 적군이 레핑에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처음에는 슬로이스에 2,000 병사와 함께 주둔하고 있던 후안 데 라바스가 기만 작전을 쓰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밤 오덴부르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비로소 대규모 적군이 몰려왔으며 전투가 임박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우리츠는 오스텐트에 있는 의원 대표단에 서신을 보내 레핑에의 다리를 파괴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서신이 도착하기 전, 스페인군은 이미 레핑에를 통과하여 그 일대를 장악했다.
당시 보병 2,500명과 기병 500명으로 구성된 연합군 후위대는 아직 이제르 강을 건너지 않고 있었는데, 마우리츠의 사촌인 에른스트 카지미르 나소디츠의 지휘 아래 오스텐트 인근의 마리아케르케로 파견되어 알베르트 7세를 저지하기로 했다. 그들이 시간을 충분히 끌어준다면, 마우리츠는 그 사이에 주력군을 이끌고 사촌과 합류할 것이었다. 그러나 7월 2일 일출에 벌어진 마리아케르케 전투는 불과 30분 만에 스페인군의 승리로 끝났다. 스페인 보병대는 정면에서 돌격해 강력한 전투력으로 상대를 압도했고, 스페인 기병대는 측면을 빠르게 강타해 적군을 짓밟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북해 인근으로 도망쳤다가 추격받아 800명이 살해당했다. 에른스트 카지미르와 남은 생존자들은 오스텐트로 도주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마우리츠는 패전 소식을 접하자, 병사들이 동요하는 걸 막기 위해 비밀에 부치라고 명령했다.
3.3. 임박한 대결
알베르트 7세는 마리아케르케에서 승리한 뒤 니우포르트로 직접 진군할지, 아니면 오스텐트 외곽에 있는 알베르투스 요새를 점령할지 고민했다. 알베르투스 요새를 접수한다면, 오스텐트와 네덜란드군 사이의 연락망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다. 이때 니우포르트에 있는 네덜란드 함선들이 북해로 떠나는 걸 관찰한 알베르트 7세는 적군의 가장 중요한 장교들을 오스텐트로 피신시키려는 거라고 추측했다. 부관들은 알베르투스 요새는 방비가 강력할 가능성이 높지만, 니우포르트에 있는 적군은 갈수록 약해질 테고, 스페인군은 회전에서 무적이나 다름없으니 니우포르트로 진군해 적군을 섬멸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에 전투를 늦추면 네덜란드군이 프랑스나 잉글랜드에 지원을 요청할 기회를 얻을 테니 서둘러 분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알베르트 7세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니우포르트로 진군하기로 했다.한편, 마우리츠는 7월 2일 아침 이제르강의 수위가 낮아지자, 전군을 이제르강 북쪽으로 복귀하게 했다. 오전 11시경, 그는 군대는 해변의 만조선에서 모래 언덕인 롬바르드지데까지 세 줄로 배치했다. 그는 발이 잘 빠지는 모래와 가파른 모래언덕이 공격자들에게 어려움을 줄 것이라 믿고, 방어 위주의 전투 대형을 형성해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로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은 후방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면서 적절한 지시를 내리기로 하고, 전방에서 적을 맞이할 사령관들에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발적으로 행동하라고 권고했다.
그날 오후, 소규모 스페인 기병대가 연합군에 접근했다가 거센 반격을 받아 일부는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 스페인 주력군은 모래 언덕과 모래 언덕 뒤의 평원을 가로질러 진군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사전에 태양을 등지고 배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태양과 바람에 맞서며 적군에 접근해야 했다. 이 때문에 병사들이 지치자, 알베르트 7세는 전투를 당장 벌이는 대신 참호를 파고 적을 해변에 갇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스페인군 선두 부대는 이단자이자 반역자들을 쳐부수겠다는 열망이 강한 나머지, 그의 통제를 듣지 않고 적군을 향해 계속 진군했다.
한편, 잉글랜드군 사령관 프랜시스 베레는 마우리츠에게 참호를 건설해서 적의 공격을 저지한 후 역습하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네덜란드 기병대 지휘관인 루드비크 군터 반 나소는 자기가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해 적 기병대와 접전을 벌이다가, 일부러 후퇴해서 적의 추격을 유도한 뒤, 해변에 배치된 대포 6문의 일제 사격으로 적 기병대를 물리치자고 건의했다. 마우리츠는 시간을 끌면 레핑에 전투의 참사가 병사들에게 널리 알려질 것을 우려해 참호를 파자는 주장을 기각하고 루드비크 군터의 주장을 따르기로 했다. 이후 스페인 기병대는 적 기병대의 거짓 후퇴 전술에 넘어가서 추격했지만, 네덜란드 포병들이 대포를 너무 일찍 발사하는 바람에 스페인 기병들이 경각심을 느끼고 물러나면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첫 교전이 끝난 뒤, 해변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마우리츠는 루드비크 군터의 기병대와 대포 6문을 좌측으로 보냈다. 프랜시스 베레는 잉글랜드군과 프리지아 출신 보병대를 이끌고 전선을 유지했고, 솔름스 백작은 그 뒤를 이어 독일군, 스위스군, 프랑스군, 왈롱군 보병대를 형성했다. 마우리츠는 전투가 임박하자 완전 무장을 한 채 군대 앞에 서서 격려했다.
"동지들이여! 우리는 지금 당장 전력을 다해 적을 물리치거나, 아니면 바다로 쫓겨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선택하라! 나는 이미 선택했다."
알베르트 7세 역시 병사들 앞에서 행진했는데, 투구도 쓰지 않고 백마를 탄 채 두려움 없이 부하들을 격려했다. 스페인군은 네덜란드군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형을 갖췄다. 스페인군 3개 중대와 이탈리아군 1개 중대가 중앙 부대를 형성했고, 왈롱군 2개 연대와 아일랜드군 1개 연대가 후방을 지켰다. 양 측면에 스페인 기병대가 배치되었으며, 최전방에는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가 지휘하는 선발대가 배치되었다. 양군은 2시간 동안 따뜻한 해변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고, 해안가에 정박한 네덜란드 군함들은 간간이 포격해 적군을 교란하려 했다.
그러는 동안, 조수가 서서히 밀려들면서 전장을 잠식해 갔다. 이에 마우리츠는 오후 2시에 전군에 오른쪽으로 돌아 해변 바로 앞 깊은 모래 언덕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알베르트 7세도 이와 비슷한 명령을 내렸다. 이제 네덜란드군은 전방에 급한 경사지인 모래 언덕 롬바르드지데, 뒤쪽으로 이제르강, 왼쪽으로는 밀려오는 바닷물, 그리고 우측에는 평탄한 평원이 펼쳐진 지대에서 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해변에는 대포 6문을 남겨두고, 프리지아인 4개 중대가 합류해 최좌익을 형성했다. 루드비크 군터의 기병대는 우측 평원으로 이동했으며, 프랜시스 베레는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모래 언덕 사이에 파이크병과 머스킷 부대를 신중하게 배치했다. 그리고 대포 2문을 언덕 정상에 배치해 사격 시야를 확보하도록 했다.
3.4. 전투
7월 2일 오후 3시 30분경,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가 선두 부대에 전진 명령을 내리면서 니우포르트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적 선봉대가 밀려오고 있을 때, 루드비크 군터는 맞은편에 있는 스페인 기병대가 방심하고 있는 걸 보고 전 기병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스페인 기병대는 예상치 못한 적의 급습에 당황했고, 이내 패주했다. 루드비크 군터는 이들을 확실히 쓸어버리기 위해 계속 추격했고, 이 때문에 이후의 전투에 상당 기간 참여하지 못했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프랜시스 베레의 잉글랜드군에 대한 멘도사의 초기 공격은 500명의 화승총병으로 이뤄졌다. 탐색전이 한동안 펼쳐진 뒤, 스페인 선봉대는 파이크를 앞세워 맹렬히 돌격했다. 베레의 잉글랜드군과 프리지아 보병대는 적군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해 첫 번째 파이크 돌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알베르트 7세가 급파한 후방 기병대가 머스킷 병사들과 함께 재차 돌격하면서 전열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베레는 마우리츠에게 여러 전령을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뒤, 본인이 직접 최전선으로 달려가서 적에 맞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여러 부위에 상처를 입었고, 한때는 말에 깔려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의 군대는 지휘관의 독려에 힘입어 스페인 머스킷 부대를 격퇴했다. 하지만 스페인 주력군 일부가 전투에 가세했고, 베레는 점점 모래 언덕에서 밀려났다. 이때, 프랜시스 베레의 형제인 호러스 베레가 이끄는 보병대 200명이 마우리츠의 명령에 따라 형을 돕고자 달려왔고, 프랜시스 베레는 즉시 반격하라고 명령한 뒤 본인은 부상 치료를 위해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마우리츠는 후방에서 상황을 살펴본 뒤,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예비 기병대를 추가로 보냈다. 한편, 알베르트 7세는 네덜란드군이 바람과 태양을 등에 업고 자신들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치른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고, 네덜란드군을 바다 쪽으로 몰아내어 날씨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했다. 스페인군이 그의 뜻에 따라 적군을 밀어붙인 끝에 해안으로 밀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고, 네덜란드군 일부가 적의 강력한 전투력에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다. 스페인군은 진격을 이어가 마우리츠가 지휘하는 지점에 접근했으며, 대포 2문을 노획했다. 하지만 루드비크 군터의 돌격으로 스페인군 기병대가 패주하고 일부 스페인군이 측면을 지키기 위해 분산되면서, 연합군을 분쇄하기 위한 효과적인 공격이 이뤄지지 못했다. 또한 스페인군이 가져온 대포들은 모래에 파묻혀서 무력해졌다. 반면에 연합군 대포는 나무로 만든 가대 위에 설치되었기에 모래의 영향을 덜 받았다.
얼마 후, 추격을 마치고 돌아온 루드비크 군터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우리츠에게 잔여 기병대를 모아서 스페인 본대를 상대로 돌격하겠다고 제안했고, 마우리츠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머스킷 부대의 보호를 받으며 재편된 스페인과 이탈리아 기병대가 역습을 가해 네덜란드 기병대를 격퇴했고, 루드비크 군터는 생포되었다. 눈앞에서 기병대가 도주하자, 네덜란드 보병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용감하게 맞서 싸우던 잉글랜드군과 프리지아군은 전열이 흐트러져 패주 직전까지 몰렸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 끝에 적이 허물어지기 직전까지 몰리자, 알베르트 7세는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믿고, 마지막 대규모 공격을 감행해 적군을 섬멸하려 했다. 알베르트 7세의 지시를 받은 예비 부대들이 명령을 받들어 최전선으로 진군했지만, 가장 높은 모래 언덕 위에 배치된 네덜란드 대포들의 포격을 받자 주춤했다. 그 순간, 마우리츠는 예비로 남겨둔 마지막 예비 기병대, 즉 고데바르트 반 발렌이 지휘하는 3개 중대를 급파했다. 전장으로 향하던 스페인 예비 부대는 갑작스러운 적 기병대의 공격에 놀랐고, 스페인 기병들은 재빨리 후퇴했다. 이에 알베르트 7세가 그들을 막아서서 전투에 재참전하라고 촉구해 수습에 성공한 뒤, 다시 기병들을 몰고 가서 적 기병들과 교전했다. 그때, 한 독일 출신 병사가 휘두른 창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 부상이 심했기 때문에, 그는 전장을 떠나야 했다.
한창 전투를 벌이던 스페인군은 지휘관이 중상을 입고 실려 가는 모습을 보고 이를 후퇴 신호로 간주하고 대거 퇴각했다. 네덜란드군은 짧은 추격전을 벌였지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추격을 중단하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마우리츠는 적군을 격파한 게 분명해지자 무릎을 꿇고 하느님에게 공화국을 파멸의 위험에서 구해준 것에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편,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는 병사 520명과 함께 생포되었다. 마우리츠는 저녁 시간을 멘도사와 함께 보내면서, 그가 4년 동안 군대로 여러 번 시도했지만 못했던 홀란트에 발을 들이는 일을 포로가 됨으로써 마침내 달성했다고 조롱했다. 그 후 마우리츠는 군대에 하루 동안 휴식을 준 뒤, 오스텐트로 후퇴하여 알베르투스 성채 인근 성모 마리아 교회 근처에 주둔했다. 포로들은 오스텐트에 집결한 후 홀란트와 제일란트로 이송되었다.
이 무렵, 오스텐트에 있던 의회 대표단은 전선의 보고를 기다렸다. 그들은 마우리츠가 패배할 것을 대비해 알베르트 7세의 군대로부터 오스텐트를 지키기 위해 기병 600명을 레핑에 다리로 보내 적의 진군을 차단하는 걸 고려했다. 만약 이것이 실제로 이뤄졌다면, 니우포르트 전투 패배 후 퇴각하던 알베르트 7세가 생포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 알베르트 7세는 레핑에 다리를 건너 브뤼허로 후퇴했다. 그러나 뒤늦게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걸 알게 된 오스텐트의 네덜란드 기병대가 적군을 추격해 도망치던 스페인 병사들을 많이 사살했다. 의회 대표단은 마우리츠에게 전사한 네덜란드 병사들을 묻으라고 지시했다.
4. 결과와 이후 전개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사상자는 1,700~2,700명이었으며, 스페인군 사상자와 포로는 4,000명에 달했다. 마우리츠는 전투 다음 날 오스텐트에서 부상자를 돌보게 한 뒤 의원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한때 슬로이스를 공략하는 걸 논의했지만, 적의 방비가 강해서 어렵다고 보고, 니우포르트 시를 재포위하기로 했다. 전투 4일 후 니우포르트 시로 돌아온 연합군은 날씨가 나빠져서 참호를 파기가 더 어려워지고,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고, 새로운 스페인군이 또다시 물려올 것을 두려워했다.결국 마우리츠는 11일간의 포위 끝에 니우포르트 공략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철수하기로 했다. 의회는 그에게 헐스트와 슬로이스를 공격하라고 촉구했지만, 마우리츠는 이를 따르지 않고 철수를 이어갔다. 다만 오스텐트 주변의 여러 요새를 점령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스페인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알베르투스 요새를 완전히 파괴한 뒤, 오스텐트에 군대를 집결한 후 수송선에 실어서 본국으로 귀환했다. 기병대는 브라반트로, 보병대는 제일란트의 겨울 숙영지로 보내졌으며, 마우리츠 본인은 홀란트로 떠났다. 포로가 된 스페인 인사들은 네덜란드 포로와 자주 교환되었지만,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는 매우 저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별도로 협상이 이뤄졌다. 결국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1602년 5월 29일에 멘도사를 스페인에서 갤리선 노예로 잡혀 있던 네덜란드 선원 400명과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알베르트 7세는 브뤼허에서 겐트로 이동해 아내 이자벨과 재회했다. 이자벨은 남편에게 전투에 가능한 한 빨리 복귀하라고 촉구했고, 알베르트 7세는 브뤼허로 돌아와서 생존한 병사들을 모아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한 뒤, 루이스 데 벨라스코에게 니우포르트 주변의 마을과 요새를 요새화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면서도 네덜란드 공화국에 평화 제안을 했고, 공화국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양측 사절단이 베르헌옵좀에서 협상했다. 그러나 종교 문제를 비롯한 여러 요인 때문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니우포르트 전투의 승자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었지만, 당시 네덜란드 의회는 실패로 간주했다. 어떤 영토도 확보하지 못했고, 됭케르크 사략선은 방해받지 않았으며, 병력 피해도 컸다. 그 후 네덜란드 의회는 두 번 다시 같은 공세를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당국은 하마터면 됭케르크가 함락되고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이 고립될 뻔했던 상황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고, 플란데런 내 유일한 친네덜란드 항구 도시인 오스텐트를 반드시 공략해서 플란데런 해안의 안보를 완벽하게 확보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601년, 대규모 스페인군이 플란데런에 도착했고, 기존에 주둔하던 스페인군과 합세한 뒤 오스텐트를 향한 3년간에 걸친 처절한 공방전을 감행했다.
한편, 마우리츠는 자신이 처음부터 됭게르크 진군에 반대했지만,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가 이끄는 의회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으며, 파멸에 이를 뻔한 상황을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구원했다고 여겼다. 그 후 그는 이전과는 달리 의회에 협조하지 않고 자기 의사를 독단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와 갈등을 빚다가 1619년 요한을 긴급 체포한 뒤 반역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후 다음날 즉결 처형했다.
[1] 다만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딸에게 양도하면서도, 네덜란드가 스페인 제국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별도의 조건을 달았다.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새로운 총독을 임명할 권한을 유지했으며, 이사벨과 알베르트 7세 부부가 자녀 없이 사망할 경우, 네덜란드는 스페인 군주에게 다시 복속되었다. 그리고 두 부부의 자녀는 스페인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결혼할 수 있었으며, 딸은 압스부르고 왕조의 왕자와 결혼해야 했다.[2] 대부분은 바지선이었고, 군함은 16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