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 흐룬로 공방전 Beleg van Groenlo | ||
| | ||
| 시기 | ||
| 1595년 7월 14일~ 7월 24일 | ||
| 장소 | ||
| 네덜란드 헬러 흐룬로 | ||
| 원인 | ||
| 스페인군이 지배하는 저지대 국가를 탈환하려는 마우리츠의 공세.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보병 6,000명, 기병 200~300명, 포병 16문. | 수비대 600명, 보병 7,000명, 기병 1,300명. | |
| 피해 | ||
| 미상 | 미상 | |
| 결과 | ||
| 스페인 제국군의 승리. | ||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95년 7월 14~24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스페인 제국의 지배를 받는 흐룬로를 탈환하려 했지만 스페인군에게 격퇴된 공성전.2. 배경
흐룬로는 네덜란드 동부 헬러에 있는 작지만 비교적 중요한 도시였다. 이곳은 독일과의 국경에 인접했으며, 데벤테르와 쥣펀과 같은 한자 동맹에 가담한 네덜란드 도시들과 독일 사이의 무역로에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도시는 수 세기에 걸쳐 해자, 보루, 대포가 있는 요새로 확장되어 주변 지역을 통제했다. 다른 도시들은 중세 성벽만으로 만족했지만, 흐룬로는 안트베르펀,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등과 함께 근대 방어 시설을 갖췄다.1580년, 빌럼 1세 편에 가담해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던 레넨베르크 백작 조르지 반 라라잉은 스페인 제국 편으로 돌아서기로 결단하고, 흐룬로를 접수해 스페인 제국에 넘겼다. 1581년 레넨배르크 백작에 사망한 후,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 사령관 프란시스코 베르두고가 이 도시를 관리했다. 이후 흐룬로는 반란군을 진압하러 떠나는 스페인군의 집결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율리히, 클레베, 베르크 공국은 흐룬로의 스페인 수비대에 자금을 지급했다.
1594년, 마우리츠는 흐룬로 요새를 시작으로 트벤테의 도시인 엔스헤데, 올덴잘, 링겐에 대한 공세를 벌이고 싶었다. 그는 이에 대해 사촌인 빌럼 루드비크 반 나시우딜렌부르크와 논의했는데, 빌럼 루드비크는 흐룬로 요새가 너무 강력하니 그곳 대신 링겐을 대신 공략하라고 제안했지만, 마우리츠는 흐룬로 공략을 고집했다. 그러나 자금과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정은 1년 뒤로 미뤘다. 1595년, 그는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흐룬로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3. 경과
1595년 7월 14일, 마우리츠는 보병 6,000명, 기병 200~300명, 그리고 대포 16문을 이끌고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와 함께 흐룬로에 도착했다. 그러나 브라겐데르 인근에서 대포가 수몰해 이를 건져 올리느라 약간의 지연이 있었다. 흐룬로의 총독 얀 반 스티룸은 구르 인근에 병력을 주둔하고 나머지 병력을 소집했지만, 마우리츠의 매복 공격을 받아 최소 40명이 사망했다. 7월 15일, 마우리츠는 요새 서쪽에 진을 쳤고, 사촌 빌럼 루드비크는 도시 동쪽에 진을 쳤다. 포위 공격은 도시로 향하는 참호와 진입로를 구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일주일간의 준비 끝에, 마우리츠는 3발의 경고 사격을 한 후 도시에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얀 반 스티룸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날 때까지 흐룬로를 신과 왕의 이름으로 끝까지 지키겠다."라고 화답했다. 도시에 있던 대포 2문은 포위군을 향해 포탄이 아닌 납으로 덮인 철 조각을 발사했다. 그러는 사이, 92세의 노장 크리스토발 데 몬드라곤이 스페인 연대 2개, 스위스 용병 2천 명, 왈롱 부대, 그리고 윌리엄 스탠리의 아일랜드 연대로 구성된 보병 7,000명, 기병 1,300명을 이끌고 도시를 구원하러 출진했다.
몬드라곤은 라인강을 건너기 위해 브라반트와 헬러를 거쳐 진군했다. 이에 대해 여러 장교가 흐룬로로 곧장 달려가지 않고 라인강을 굳이 건너는 계획에 의문을 제기했고, 병사들은 투덜거렸다. 그러자 몬드라곤은 의자를 가져와 라인강둑에 앉은 채 모든 병력이 강을 건널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밝혔다. 또한 흐룬로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마우리츠가 철수하지 않으면 그와 직접 교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병사들은 입을 다물었고, 선박 다리를 사용하여 강을 건넜다.
7월 21일, 마우리츠는 몬드라곤의 스페인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스페인군이 멀리 돌아서 진군하는 걸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마우리츠는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당황했다. 그는 포대와 아케드를 서둘러 완성하려 했고, 도르스텐의 다리를 해체하려 했지만,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7월 24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흐룬로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뒤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7월 25일, 마우리츠는 빌럼 루드비크와 다른 장교들과 상의한 후, 도시 포위망을 완벽하게 구축하지 못한 마당에 스페인 구원군과 싸우는 건 무리한 짓이니 포위를 해제하기로 했다.
마차가 부족했기에 진영과 즉시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것을 불태웠고, 보르쿨로와 울프트를 거쳐 젤햄으로 철수했다. 전장에는 철갑 창 10,000개가 남겨졌다. 마우리츠의 군대는 기병대와 블러드하운드를 동원해 그 지역을 떠도는 산적 집단을 소탕했다. 이때 몬드라곤은 흐룬로에서 40km 이상 떨어졌다. 이리하여 흐룬로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을 격퇴하고 스페인의 지배에 남았지만, 2년 후인 1597년 마우리츠가 재차 공격해 기어이 공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