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그라브 공방전 Beleg van Grave | ||
| 시기 | ||
| 1602년 7월 18일~9월 20일 | ||
| 장소 | ||
| 브라반트 공국 그라브 | ||
| 원인 | ||
| 스페인군의 오스텐트 공세를 약화하려는 마우리츠의 반격 작전.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20,000명. | 수비대:1,500명. 구원군:8,000명. | |
| 피해 | ||
| 알려지지 않음.. | 1,000명 이하 생포. | |
| 결과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승리. | ||
| 영향 | ||
| 후흐스트라텐 반란 초래. | ||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602년 7월 18일~9월 20일, 오스텐트 공방전을 단행한 스페인군을 유인하기 위한 마우리츠의 공세로 발발한 공성전.2. 배경
1601년 7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인 알베르트 7세가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플란데런 내 유일한 친네덜란드파 항구도시인 오스텐트를 포위 공격했다.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총사령관 마우리츠는 오스텐트를 포위한 스페인군을 유인하고자 2차 라인베르크 공방전을 벌여 함락했지만, 알베르트 7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스텐트를 포위 공격했다. 하지만 오스텐트 수비대를 지휘한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는 꿋꿋이 버텨냈다.1602년 초, 네덜란드 의회는 오스텐트에 갇힌 노련한 잉글랜드군을 홀란트로 데려와서 더 나은 환경에서 역량을 발휘하게 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오스텐트 수비대는 새로운 총독 프레데릭 반 도프와 신병으로 교체되었고, 프랜시스 베레는 그해 3월에 오스텐트를 떠나 8,000명에 달하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전장으로 돌아왔다. 이 중 많은 수가 오스텐트 공방전에서 활약한 숙련병이었다. 베레는 즉시 마우리츠의 군대에 합류했고, 마우리츠는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오스텐트를 포위한 스페인군을 압박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네이메헌에서 발강을 건너 무크에서 마스강을 건넌 뒤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부로 진격했다. 그러던 중 티에넨에서 스페인 장성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의 스페인군을 발견하고 이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멘도사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야전에서 맞붙는 걸 거부했다. 이후 마우리츠는 그라브 또는 펜로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북상했고, 이중 그라브를 택했다. 그라브는 마스강변의 중요한 도시였으며, 1586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함락한 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동안 그라브의 방어는 꾸준히 개선되어 야전 요새로 완전히 둘러싸였기에, 정면 공격은 불가능해졌다.
3. 경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7월 중순까지 그라브를 향해 진군했다. 우익은 프랜시스 베레가 이끄는 잉글랜드 보병이 맡았고, 중앙에는 빌럼 루드비크 반 나소딜렌부르크가 지휘하는 네덜란드군이 맡았으며, 좌익은 에르네네스 카시미르 반 나소디츠가 지휘했다. 그라브를 지키는 수비대는 안토니오 곤잘레스가 지휘하는 스페인관 이탈리아 군인 1,500명이었으며, 2개월 이상 버틸 수 있는 식량이 갖춰져 있었다. 한편, 멘도사가 북쪽으로 이동한 마우리츠를 추격하며 도발했지만, 마우리츠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라브를 향해 꿋꿋이 진군했다.7월 18일, 연합군이 그라브에 도착한 뒤 포위한 후 도시 주변에 참호를 파고 참호 체계를 구축했다. 포위 진지는 규모가 컸으며, 요새마다 자체적인 습식 도랑과 도개교가 있었고, 도개교를 완성하는 데 거의 5시간이 걸렸다. 도시에 주둔한 스페인 수비대는 인근의 펜로 시에서 지원군이 올 것이며, 멘도사의 스페인 야전군도 도와줄 거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멘도사는 선봉대가 강력한 진지에 부딪혀 손실을 보고 퇴각한 걸 보고, 적군의 규모가 무척 크고 포위망도 견고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비대는 여러 차례 포위망을 풀려고 돌격했지만, 병력과 보급품 손실만 입고 퇴각했다. 8월 말, 멘도사의 군대가 펜로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비대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한편, 프랜시스 베레는 잉글랜드 참호를 검사하던 중 스페인군의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맞서 싸워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적이 쏜 총알이 눈 아래 부위를 관통해 두개골에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그 후 리스베이크로 보내져서 총알 제거술을 받은 뒤 연말까지 요양했고, 당시 18세였던 마우리츠의 이복동생 프레데릭 헨드릭이 잉글랜드군의 명목상 지휘를 맡았고, 프랜시스 베레의 형제인 호러스 베레가 전장에서 잉글랜드군을 통솔했다. 레스터 백작 로버트 시드니는 베레가 부상을 회복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자기가 지휘하려고 8월 말에 그라브 공방전에 참여하려 했지만,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9월 초, 포위군은 폭우 때문에 마스강의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어려움에 부닥쳤다. 마우리츠는 포위망을 완전히 해제하고 철수하는 걸 심각하게 고려하면서, 수비대에 항복을 요청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구원군이 올 가망이 없고 역병이 창궐하며, 심각한 식량 부족에 직면했던 그라브 수비대는 항복하기로 하고 9월 20일에 백기를 들었다. 수비대는 무기와 깃발을 들고 떠날 수 있었고, 네덜란드군과 잉글랜드군은 다음 날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그라브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그라브 공방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이후
마우리츠는 그라브에 입성한 뒤 9월 28일 그라브 교외에 있는 건물에서 그라브 백작으로 취임했다. 이 건물은 1559년에 그의 아버지인 빌럼 1세가 구매했던 건물이었는데, 이제 그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한편, 펜로에 있던 스페인군은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라브 구원에 실패하자 더 이상 싸우기를 거부하고 집단 탈영한 뒤 후흐스트라텐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마우리츠는 스페인 반란군과 협의한 끝에 그라브를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이후 그라브는 1603년 말까지 반란군의 지배를 받다가 네덜란드 공화국에 되돌아갔고, 1648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덜란드의 영역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