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흐스트라텐 반란 Beleg van Hoogstraten | ||
| 시기 | ||
| 1602년 9월 1일~1604년 5월 18일 | ||
| 장소 | ||
| 스페인령 네덜란드 후흐스트라텐 | ||
| 원인 | ||
| 급료 체불에 대한 불만과 연이은 패전에 대한 환멸에 빠진 스페인 장병들의 봉기. | ||
| 교전 세력 | ||
| 후흐스트라텐 연합 | ||
| 지휘관 | ||
| 병력 | ||
| 반란군 3,000명,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14,000명. | 12,000~13,000명. | |
| 결과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승리, 반란군의 네덜란드 공화국 귀순. | ||
| 영향 | ||
| 스페인 제국군의 사기 급락. | ||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602년 9월 1일~1604년 5월 18일, 지속되는 급료 체불과 연이은 패전에 강한 불만을 품은 스페인 장병들이 벌인 대규모 반란.2. 상세
1601년 오스텐트 공방전을 감행한 스페인군은 막대한 재정난에 직면하면서 병사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지급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1602년, 스페인 당국은 130만 두카트에 달하는 급료를 삭감했다. 이에 스페인군에 복무하는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프랑스인, 왈롱인들은 강한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1602년 7월 18일,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2차 그라브 공방전을 벌였다. 스페인군 사령관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는 마우리츠를 격퇴하기 위해 그라브로 진군했지만, 적군이 구축한 강력한 진지에 부딪혀 손실만 보고 펜로 시로 후퇴했다.펜로로 이동한 스페인군 중 1,000~1,800명은 급료를 오랫동안 받지 못해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했고, 연이은 패배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하몽에서 봉기를 일으킨 뒤 브뤼셀의 스페인 총독부에 급료를 제대로 주고 반란에 대한 사면을 요구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가 자기들을 진압하려고 병사 3,7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브레다에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후흐스트라텐 성으로 도망쳤다.
그 후 각지에서 반란의 동기에 공감한 장병들이 속속 모이면서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군인 공화국인 '후흐스트라텐 연합'이 결성되었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에 급료를 받지 못한 스페인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었지만, 이번 반란은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사실 후흐스트라텐 연합에 가담한 병사 대부분은 단지 급료를 받고 반란에 대한 사면을 받은 후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네덜란드 총독부는 이를 용인하지 않았기에, 생존을 위해 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연합은 지도자인 엘렉토(Electo: 선출된 자)를 뽑고, 스페인인 2명, 이탈리아인 1명, 부르고뉴인 1명, 룩셈부르크인 1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의회인 콘실리오(Consiglio)도 두었다. 이들은 스페인군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사이에서 중립을 추구했고, 교황 사절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오스텐트 공방전에 막대한 전력을 쏟아붓던 스페인군은 반란군을 방치했다. 후흐스트라텐 연합은 수입원이 없었기에 약탈에 의지했다. 그들은 브뤼셀, 리에주, 아헨, 뮌스터 일대를 돌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은 전쟁 경험이 많았고, 규율이 엄격했으며, 토벌군이 들이닥칠 것을 대비하고자 방어력을 개선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네덜란드 의회는 이들의 존재를 스페인군을 약화할 기회로 보고, 그들에게 사절을 보내 협력을 제안하고 식량, 탄약, 도구, 건축 자재를 공급해 줬다. 1603년, 후흐스트라텐의 반란군 수는 3,500명에 달했고, 민간인을 합하면 8,500명에서 9,500명에 이르렀다.
1603년 여름,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는 12,000~1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흐스트라텐으로 진군했다. 반란군은 이에 대응해 마르크 강에 3개의 댐을 건설하여 성 주변 지역을 침수했다. 또한 그들은 마우리츠와 협상을 시작해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마우리츠는 그들이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토를 침범해 약탈하지 않는 걸 전제로 도와주기로 했다. 또한 방어를 위해 후흐스트라텐 성에 병사 600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브레다로 이주해 네덜란드군에 합류하기로 했으며, 스페인군이 후흐스트라텐 성을 공격하면 마우리츠가 구원하기로 했다.
7월 26일 후흐스트라텐에 도착한 멘도사는 포위 공격을 시작했지만, 반란군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데다 사방이 침수되어서 성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이에 성 주위를 포위해 포격을 가하면서 고사시키는 전술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8월 8일 마우리츠가 14,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워텔에 진영을 구축해 스페인군을 압박했다. 게다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멘도사는 이대로 전투를 이어가 봐야 답이 안 나온다고 판단하고 8월 10일 밤에 폭우 속에서 신트레나르츠를 거쳐 퇴각했다.
이렇게 해서 토벌군을 격퇴한 뒤, 반란군은 후흐스트라텐이 스페인군의 포격으로 상당 부분 파괴되어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여기고, 네덜란드 의회에 새로운 요새를 부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의회는 바르텐동크를 제공받았고, 자기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종교를 선택할 권리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흐텐동크가 자신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고, 펜로, 루르몬트, 헬러, 슈트랄렌에 있는 스페인 수비대에 둘러싸인 점에 불안을 느꼈다. 그들은 라인베르크를 선호했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은 라인베르크가 라인강 무역을 통제하는 데 전략적으로 중요하기에 수용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타협안으로, 1년 전인 1602년 9월 20일 네덜란드군이 접수한 그라브를 반란군에 넘기기로 했다. 마우리츠는 그라브를 넘기겠다는 약속을 봊으하기 위해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왈롱인에서 각각 2명씩 총 8명의 인질을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그라브는 스페인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 1603년 말까지 그들의 지배를 받다가 네덜란드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후흐스트라텐 연합은 1604년 5월 18일까지 이어지다가 반란군이 네덜란드군에 정식으로 편입되면서 해산되었다.
남부 네덜란드의 귀족 집안인 크로이 가문 출신 장성 카렐 알렉산더 반 크로이는 후흐스트라텐 반란군 사이에서 11개월 동안 인질로 지냈다. 그는 1600년에서 1606년 사이의 경험을 회고록에 기록했는데, 이 회고록은 17세기 초 전쟁의 양상과 후흐스트라텐 반란군 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