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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츠의 1591년 원정



파일:Nederlanden_1590-1592.png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91년 네덜란드 공화국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가 대대적으로 단행한 원정.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 원정을 통해 동부와 남부의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저지대 국가 내 스페인군의 입지를 약화하는 데 성공했다.

2. 배경

파르마 공작이자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군 총사령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1579년부터 1588년까지 스페인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든 도시들을 하나둘씩 공략했다. 그 결과 1588년경,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역은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 헬러 지방 일부, 츠볼레, 캄펜, 베르헌옵좀, 오스텐트에 국한되었다.

1586년, 1584년에 살해된 네덜란드 반군 지도자 빌럼 1세의 아들 마우리츠가 18세의 나이에 네덜란드와 제일란트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2년 후에는 네덜란드 해군 대장으로 승진했고, 1589년에 공식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이자 네덜란드군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이 대실패로 끝난 뒤 스페인군이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자 파업을 선언한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로 해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1590년, 마우리츠는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와 함께 브레다를 기습 공격해 함락한 후, 브레다를 반격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어느 도시를 공략 대상으로 삼을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의회와 마우리츠 모두 네이메헌을 최종 목표로 삼는 건 동의했지만, 의회가 네이메헌 인근의 발 강 주변 지역을 공략하는 데 온 힘을 쏟기를 바랐던 것과는 달리 마우리츠는 네이메헌을 노골적으로 노리면 스페인군이 그쪽에 전력을 투입할 테니, 먼저 다른 도시들을 공략해서 적의 시선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의 끝에 자기 추장이 채택되는 데 성공하자, 마우리츠는 1591년 초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3. 경과

3.1. 쥣펀 공방전

마우리츠의 첫 목표는 아이셀강 동쪽 기슭에 있는 쥣펀이었다. 1572년 빌런 4세 반 덴베르흐가 이끄는 네덜란드 반군이 처음 접수했고, 제4대 알바 공작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나중에 도시를 탈환한 뒤 도시를 반군에게 넘긴 주민들을 처벌했다.[1] 1586년,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휘하 잉글랜드군은 쥣펀 전투를 치른 후 쥣펀의 중요한 외곽 토루를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의 지시에 따라 이곳 수비를 맡은 로랜드 요크가 1587년에 토루를 스페인군에게 넘겨주면서, 쥣펀은 스페인군의 완전한 지배하에 놓였다.

1591년 5월 19일, 마우리츠는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 10,000명(보병 9,000명, 기병 1,000명)을 선박 100척에 싣고 아이셀강을 따라 쥣펀으로 진군했다. 쥣펀을 점령하려면 서쪽 강둑에 있는 토루를 접수해, 쥣펀 마을로 통하는 주요 다리를 장악하고 바지선에 설치된 모든 중포를 육지에 옮긴 후 마을을 포격해야 했다. 마우리츠는 1,000명가량의 병사가 지키고 있는 이 마을의 방어력이 상당하기에, 그냥 공격하면 희생이 크고 적 구원병이 오기 전에 끝내기 힘들다고 여기고, 계략을 써서 토루를 공략하기로 했다. 프랜시스 베레는 로랜드 요크의 배신으로 잉글랜드의 명예를 더럽힌 일을 만회하고 싶다며, 자신에게 작전을 이끌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고, 마우리츠는 흔쾌히 수락했다.

쥣펀을 점령하려면 서쪽 강둑에 있는 토루를 접수해, 쥣펀 마을로 통하는 주요 다리를 장악하고 바지선에 설치된 모든 중포를 육지에 옮긴 후 마을을 포격해야 했다. 마우리츠는 1,000명가량의 병사가 지키고 있는 이 마을의 방어력이 상당하기에, 그냥 공격하면 희생이 크고 적 구원병이 오기 전에 끝내기 힘들다고 여겼다. 이에 브레다 공략에 썼던 것과 유사한 작전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때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가 1587년 자국 장성이었던 로랜드 요크가 토루를 스페인군에게 넘겨주면서 잉글랜드의 명예를 더럽힌 일을 만회하고 싶다며, 자신에게 작전을 이끌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고, 마우리츠는 흔쾌히 수락했다.

프랜시스 베레는 병사 12명을 선발한 뒤 농부로 위장했고, 일부는 여자로 변장하게 했다. 그는 이들과 함께 도스부르크로 이동한 뒤, 네덜란드 기병에 쫓기는 척하면서 토루로 달려갔다. 수비대는 그 광경을 보자 성문을 열어서 변장한 잉글랜드 장병들을 들여보냈다. 이후 프랜시스 베레와 병사 12인은 경비병들에게 버터, 치즈, 달걀을 팔아서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 후 기회를 엿보다가 야간에 경비병들을 해치우고 성문을 열었고, 근처의 큰 둔덕에 숨어있던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곧바로 돌진해 토루를 순식간에 접수했다.

이리하여 토루를 장악한 마우리츠는 다리를 확보한 뒤 대포 30문을 3개 지점에 하륙한 후 쥣펀 마을을 향해 포격을 가하게 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스페인 수비대장 야리히 반 리아우케마는 항복하겠다고 밝혔고, 마우리츠는 5월 30일에 받아들였다. 항복 조건은 가벼웠다. 수비대는 무기와 깃발, 짐을 챙긴 채 떠날 수 있었고, 시민들은 3일 동안에 떠나거나 네덜란드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다. 한편, 프랜시스 베레는 쥣펀 토루를 넘겨준 뒤 1588년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후 쥣펀 외곽에 매장되었던 로랜드 요크의 시체를 파내어 교수형에 처했다.

3.2. 데벤테르 공방전

쥣펀 공략에 성공한 마우리츠의 다음 목표는 아이셀 강변 도시 데벤테르였다. 데벤테르는 1579년 네덜란드 반군의 수중에 넘어갔지만, 1587년 이 도시 수비대를 이끌던 잉글랜드 장성 윌리엄 스탠리가 스페인군에 이 도시를 넘겨줬다. 데벤테르 지휘관 헤르만 반 덴 베르흐는 수비대 1,200명을 지휘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독일인과 왈롱인이었다. 당시 그들은 도시 내 물자 부족으로 곤경을 겪고 있었다. 5월 31일 데벤테르에 도착한 마우리츠는 도시 주변에 군대를 주둔했다. 일부 부대는 아이셀강 서쪽 기슭에 주둔했고, 일부는 북동쪽 갈게벨트에 포진했으며, 나머지는 요새 4개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리하여 데벤테르는 외부와 차단되었다.

마우리츠는 도시의 북쪽과 남쪽에 선박 다리를 건설해, 군대가 아이셀 강을 신속하게 건널 수 있게 했다. 도시를 포위 공격하는 일반적인 절차는 도시의 포격으로부터 피난처로 삼을 임시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우리츠는 이를 미뤄두고 최근 데벤테르에 살았거나 도시에서 탈출한 이들에게 도시 상황을 물어봤다. 그 결과, 수비대에 소속된 독일인은 급여를 받지 못했지만 왈롱인은 급여를 받았고, 이 때문에 두 민족 간 갈등이 심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최근 쥣펀에서 패배한 군대가 데벤테르로 도망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우리츠는 그들의 존재가 도시의 사기를 저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러한 정보에 고무된 마우리츠는 도시를 즉시 공격하기로 했다.

6월 9일, 마우리츠는 일출과 함께 남쪽 도시 성벽에 대규모 대포 사격을 명령했다. 그 결과 데벤테르 시의 남서쪽 성문이었던 잔트포르트가 산산조각 났고, 다른 성벽에도 큰 틈이 생겼다. 마우리츠는 프랜시스 베레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먼저 도시에 진입하도록 했다. 그날 오후, 잉글랜드 군인들은 배를 타고 잔트포르트 인근의 50피트 폭의 항구로 항해했다. 배에 설치된 다리는 도시에서 발사되는 포격으로부터 승객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다리가 제대로 정박하기 전에 배에서 내려 버렸다. 그 결과 작전은 실패했고, 군대는 철수해야 했다.

다음 날 밤, 도시 주민들은 항구에 남은 적선에 불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이 야간 순찰대를 배치해 배를 지켰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후 수비대와 시민들은 적군이 곧 선박 다리를 통해 잔트포르트로 몰려들면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가 뜨기 전에 네덜란드 진영에 북 연주자를 보내 전투 종식을 논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6월 10일 아침, 적의 포격으로 다친 헤르만 반 덴 베르흐가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헤르만과 수비대,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재산을 가지고 무기를 들고 북을 치면서 도시를 떠나는 걸 허락받았으며, 목적지에 대한 제한은 없었다. 이는 그들이 신속하게 항복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 후 마우리츠는 군대가 도시를 약탈하는 걸 저지하고, 칼뱅파로 구성된 새로운 시의회를 임명했다.

3.3. 델프제일 공방전

데벤테르 공략에 성공한 뒤, 마우리츠는 데벤테르 북쪽의 흐로닝언과 남쪽의 네이메헌 중 어느 쪽을 노릴지 고민하다가 흐로닝언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군하던 중 파르마 공작이 흐로닝언을 지원하기 위해 2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보고를 받자, 북쪽으로 좀 더 이동하기로 했다. 그의 새 목표는 돌라트강 인근에 있는 델프제일이었다.

1591년 6월 26일,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이 델프제일 요새에 도착했다. 그들은 수로를 따라 선박 150척을 이용해 중포를 운반했다. 델프제일의 스페인 수비대는 병력 300명과 대포 10문에 불과했다. 공격군은 마을 앞에 진지를 세우고, 포대를 설치한 뒤 요새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수비대는 처음 며칠 동안 맹렬한 포격을 받다가, 구원군이 올 가망이 없어 보이자 7월 2일 항복 협상을 제안했다. 마우리츠는 곧 동의했고, 수비대는 깃발과 짐, 무기를 챙긴 채 떠나는 걸 허락받았다.

이후 마우리츠는 네덜란드 기술공 요한 반 덴 코르푸트에게 요새를 강화하도록 하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출신의 소규모 수비대를 배치했다. 델프제일은 해안에서 흐로닝언으로 향하는 수로의 중간 기착지였기에, 이곳이 네덜란드군의 수중에 넘어가면서 흐로닝언의 스페인 수비대는 보급난에 시달려야 했다.

3.4. 크노첸부르크 전투

델프제일을 공략한 마우리츠는 스틴베이크를 공략하기 위해 진군했다. 그러던 7월 15일, 스틴베이크 외곽으로 진군한 마우리츠는 크노첸부르크 요새 수비대장 게리트 데 용으로부터 파르마 공작이 크노첸부르크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크노첸부르크는 1590년에 마우리츠가 네이메헌을 탈환하기 위해 네이메헌 인근을 흐르는 발강 한 가운데에 있는 섬에 세운 요새였다.

마우리츠는 이곳을 빼앗기면 네이메헌을 공략하는 게 곤란해지기 때문에 조속히 구원하기로 했다. 다만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군대 대부분을 이끌고 이전에 단 한 번도 군대가 건너본 적이 없었던 루빈 습지를 몰래 건너서 적을 급습하기로 했다. 마우리츠의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하셀트, 즈볼레를 거쳐 데벤테르로 향했고, 7월 18일 쥣펀에서 아이셀강 위의 선박 다리를 건너 7월 20일 아른험에 도착했다.

이후 스페인군이 크노첸부르크 요새를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이, 마우리츠는 라인강에 접근한 후 그날 늦게 숙영지를 세웠다. 7월 23일, 파르마 공작은 다시 요새를 공격하려 했지만, 폭우가 내리자 진영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반면에 마우리츠는 바지선을 타고 라인강을 건너서 진을 쳤다. 이제 스페인군과 네덜란드군 사이의 거리는 아른험에서 네이메헌으로 이어지는 두 경로를 따라 4~5마일이었다. 한 경로는 저지대 위로 솟은 제방을 따라 이어졌고, 다른 경로는 더 넓었다.

7월 24일 아침, 스페인 기병 24개 중대가 적진으로 접근했다가 네덜란드 기병대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이후 네덜란드 기병대가 적진을 정찰하다가,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출신의 숙련된 스페인군 파이크병들의 반격을 받자 퇴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적군을 유인하기 위해 마우리츠와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가 사전에 계획한 함정이었다. 네덜란드 기병대는 적 보병대의 추격을 받으며 도주하다가 다리에 도착하자 돌아서서 반격을 가했고, 주변 지역에 은폐 중이던 프랜시스 베레의 잉글랜드 기병 5개 중대와 머스킷 병사 1,000명이 적군을 급습했다.

스페인군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사상자 60명, 포로 500명, 말 500마리, 기발 2개를 내준 채 패주했다. 생포된 이들 중에는 부대 사령관인 페드로 니첼리 프란시스코도 있었는데,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마우리츠는 이 깃발을 프랜시스 베레에게 상으로 줬다. 베레가 이끄는 분견대의 피해는 사망자 2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했으며, 네덜란드 병사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파르마 공작은 아군이 추격을 감행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보고 패주한 것에 낙담했고, 크노첸부르크 요새를 공략할 가망이 없고 장병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으니 후퇴하는 것이 제일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무작정 철수했다간 적군이 추격해서 발강을 건너는 아군의 후미를 강타해 막심한 타격을 입힐 거라는 걸 잘 알았기에, 계책을 쓰기로 했다. 7월 25일, 파르마 공작은 스페인 진영에 불을 지르고 이를 엄폐물로 사용하면서 네이메헌 바로 위의 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때 후위대 2천 명이 퇴각을 엄호하기 위해 초승달 모양의 참호를 팠고, 후퇴는 불과 5시간 만에 이뤄졌다. 스페인군 전원이 모든 포대, 탄약, 짐을 가지고 적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3.5. 1차 헐스트 공방전

마우리츠에게 패퇴한 파르마 공작은 한동안 네이메헌에 머물다가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로부터 앙리 4세의 프랑스 국왕 등극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킨 프랑스 가톨릭 동맹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8월 5일 프랑스로 진군했다. 그러면서도 네이메헌에 강력한 수비대를 남겨두고 프란시스코 베르두고를 지휘관으로 세웠다. 적의 이러한 동향을 확인한 마우리츠는 지금까지 거둔 성과에 만족해 겨울 숙영지로 돌아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베르두고는 적의 동태를 관찰하다가 적군이 올해에는 더 이상 공세 작전을 펼치지 않을 거라고 여기고, 본인 역시 주력군을 후방으로 보내 겨울 숙영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스페인군을 기만하려는 마우리츠의 책략이었다. 9월 중순, 마우리츠는 보병 4,000명, 기병 600명을 선박들에 실은 뒤 크레버빌레에 몰래 상륙한 후 헐스트로 진군했다. 당시 헐스트 시에 있던 수비대 거의 절반이 다른 곳으로 파견되었고, 남은 병사는 400명밖에 없었다. 9월 19일 헐스트에 도착한 마우리츠는 즉각 포위한 뒤, 적 구원군이 오기 전에 헐스트를 빠르게 공략하기로 하고 대규모의 지속적인 포격을 명령했다. 그렇게 닷새 동안 무자비한 포격이 이어지자, 수비대 사령관 카스티요 대령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 협상을 요청했고, 마우리츠는 즉시 받아들였다. 스페인 수비대는 무기, 깃발, 짐을 짊어지고 도시를 떠나는 걸 허락받았다.

헐스트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안트베르펜 인근에서 파르마 공작의 아들 라누치오 파르네세가 주관하는 행사를 벌이던 스페인 수뇌부에게는 실로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파르마 공작은 분노해 카스티요가 병사 절반을 다른 데로 멋대로 보내고 경계를 게을리했으며, 적을 상대로 오래 버티지 않고 항복한 것을 반역으로 간주하고 즉시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3.6. 네이메헌 공방전

헐스트를 공략한 마우리츠는 요새를 강화하고 주위에 방어선을 구축해 스페인군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스페인군은 주력군이 프랑스로 남하한 상황이었기에 반격 작전을 감행하지 못했고, 마우리츠가 헤이르트루이덴부르크를 노릴 거라고 예상하고 그곳의 방비를 강화했다. 마우리츠는 적의 이 같은 움직임을 전해 듣자, 이를 틈타 최종 목표인 네이메헌 공략에 착수하기로 마음 먹었다.

10월 16일, 마우리츠는 발강을 건너 보병 8,500명과 기병 16개 중대를 남쪽으로 수송한 뒤 다음 날부터 네이메헌을 포위했다. 당시 네이메헌에는 네이메헌 시장인 데릭 블렘밍크의 지휘 아래 400명가량의 소규모 수비대가 있었다. 마우리츠는 크노첸부르크 요새를 통해 도시를 포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수비대와 시민들은 항복을 거부했다. 이에 좀 더 가까운 곳에 포대를 설치하여 압박을 가하기로 한 마우리츠는 프랜시스 베레가 이끄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장병들을 파견해 도시 외곽에 있는 모든 토루를 접수하게 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임무를 완수한 후,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은 네이메헌 주위에 참호를 건설하고 팔콘 타워와 홀렌데르 게이트로 알려진 두 위치 사이에 네이메헌 방어선에서 가장 약한 세 지점에 대포 68문을 배치했다. 또한 크노첸부르크 요새의 가장 높은 위치에 설치된 포대는 발강 건너편에서 도시를 포격했다. 연합군의 맹렬한 포격으로 성 슈테판 교회의 첨탑이 파괴되었고, 도시의 많은 건물도 파괴되었다. 10월 20일, 마우리츠는 재차 항복하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모든 포대를 개방하여 맹렬한 포격을 가하게 했다.

10월 21일 아침,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데릭 블렘밍크가 이끄는 공무원들이 마우리츠의 야영지로 가서 항복 협상을 논의했다. 그들은 항복하는 대신 아래의 세 가지 조건을 준수해달라고 요청했다.
1. 네이메헌의 특권을 보장해달라.
2. 가톨릭을 계속 믿는 걸 허락해달라.
3. 현재 시의회를 존중하고 새 시의회를 세우지 말아달라.

그러나 마우리츠는 이 조건들을 단호히 거부하고, 오직 절대적인 사면만 약속하겠다고 답했다. 결국 데릭 블렘밍크 등은 받아들여야 했고, 가톨릭 의원들은 개신교 의원들로 교체되었으며, 네이메헌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도시에 입성한 마우리츠의 명령으로 그로테마르크트 광장에서 많은 성상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고, 많은 가톨릭 신자가 도시를 떠나야 했다. 또한 요새 기술자 아드리안 안토니츠가 네이메헌 수비대 지휘관으로 선임되었고, 오각형 보루를 갖춘 방어선을 새로 건조했으며, 네이메헌의 성벽을 흙벽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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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프레데렉 봄블드 작, <마우리츠의 헤이그로의 승리의 귀환>, 1850년.

마우리츠는 1591년 원정에서 여섯 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고 주요 도시 다섯 개를 공략했으며, 한때 네덜란드 공화국을 멸망 위기로 몰아넣었던 파르마 공작을 격파하는 등 종횡무진했다. 그는 겨울 동안 숙영하고자 헤이그로 돌아가서 시민들의 열띤 환영을 받았으며,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전에 그를 애송이라고 여기고 무시했던 스페인 장성들조차 두려운 적수라고 인정했다. 마우리츠는 이후에도 저지대 국가에 주둔한 스페인군을 몰아붙여 실지를 회복했는데, 특히 1597년에 다시 한 번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서 여러 도시를 탈환했다. 그는 이러한 활약으로 네덜란드 독립 전쟁 최고의 명장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1] 20세기 이전까지 학게에서는 스페인군이 쥣펀 주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고 알려졌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당대 기록을 열람한 끝에 벌금형과 구금형으로 국한되었을 뿐 학살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