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5 15:49:07

스기하라 지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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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의인이 되다2.2. 전후
3. 기타4. 참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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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출생1900년 1월 1일, 일본 제국 기후
사망1986년 7월 31일, 일본 가나가와
별명[1] 열방의 의인

일본 제국리투아니아 영사관 영사로서 나치 독일로부터 수 천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린 인물. 욘 라베, 오스카 쉰들러와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스기하라 지우네 생존시의 다큐멘터리 영상 1부(일본어) 2부

2. 생애

1900년 기후 현 야오츠 정(八百津町)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가 되기를 희망한 부친의 의사에 반하여, 1918년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예과에 입학했다. 1919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대학을 중퇴하고 중국 만주 공관에서 근무했으며 독일어러시아어를 배워 對러시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39년리투아니아로 발령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만주에서 활동했는데 1935년에는 만주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처사에 반대하며 사퇴했다고 한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조선에서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위. 1937년에는 핀란드 주재 일본 공사관 공사로 부임됐다.

2.1. 의인이 되다

1939년, 리투아니아 영사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는데, 그의 임무는 소련군독일 국방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소련이 독일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지 상황을 살펴보고 자세한 정보를 일본 정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1940년, 소련군이 리투아니아를 급습해 점령하고 각국 영사관을 폐쇄하자 나치 독일을 피해 외국으로 빠져 나가려던 유대인들은 유일하게 남아 있던 일본 영사관으로 몰렸다. 그러자 스기하라는 소련 당국과 접촉해서 유대인들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대피시키는 것에 동의를 얻어낸 뒤 그들을 위해 일본 비자 수천 장을 정부의 허락도 없이 불법으로 발급했는데 그것도 직접 일일이 손으로 썼다(!)고 한다. 심지어 발급 자격에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임의로 자격 요건까지 완화해 가면서 일본 영사관마저 폐쇄당할 때까지 2달 동안 하루에 무려 20시간이나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비자를 만들었고, 영사관 폐쇄 이후 리투아니아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도 비자를 만들었으며, 기차가 떠나기 시작하자 자기 서명이 담긴 서류 뭉치와 도장을 창밖으로 던져 피난민들이 스스로 비자를 완성하도록 조치했다.

일본 비자를 받은 유대인 난민 6000여 명은 무사히 시베리아를 건너 일본을 거쳐 상하이미국으로 대피한다.[2] 명백한 정부의 훈령 무시이자 불법 행위였으므로 일본 만주 공관은 이들을 다시 쫓아내려 했으나 놀랍게도 당시 외무대신 마츠오카 요스케(松岡洋右)는 이를 묵인하고 유대인들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괘씸죄가 적용되었는지 스기하라는 전후 1947년 외무성 직원의 정리해고 과정에서 면직되었다.

1941년, 그는 리투아니아를 떠나 독일의 보호령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총영사로 부임하여 계속 독일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런데 하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참모본부 장교와 협력했다가 독일로부터 간첩으로 의심받아 게슈타포의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3] 2차 대전 막바지 무렵 그는 가족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에 진군한 소련군에게 8개월 동안 구금되었다가 일본으로 귀국했다.

2.2. 전후

상술하였듯이 스기하라는 1947년 해고되었으며 이후 무역상, 번역가 등의 활동을 하며 살았다.

1969년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후, 1985년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야드바셈 상을 수상하고, 예루살렘에 기념 현판이 설치되는 등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졌다. 정작 일본 내에서는 명예 회복이 매우 늦었는데 이스라엘의 유대인 협회가 처음 스기하라라는 성을 가진 외교관의 소식에 관해 문의했을 때 일본 정부는 당시 그 성을 가진 외교관이 3명 있었음에도 그런 사람 없다고 답변하며 시큰둥하게 넘어갔고, 이후 정체가 밝혀져 공로를 인정받았음에도 오히려 외무성을 중심으로 법을 어긴 사람이라며 비판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거기다 일본정부와 일본 우익 단체들은 유태인 단체에서 스기하라를 찾는 것을 대놓고 방해를 하거나 스기하라를 배신자로 몰아붙이는 온갖 패악을 부려서 결국 그가 죽은 지 14년이 지난 2000년에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나 우익 단체들에서 일본의 위안부 문제를 물타기 목적으로 스기하라 지우네를 이용하는 것 같기도 하는데, 정작 그놈들은 스기하라가 만주 중국인들의 처사에 반대해서 만주 외교관에서 사퇴한 것이나 일본 정부가 그를 홀대접한 건 무시한다...

3. 기타

  • 참고로 유럽에서는 그를 센포 스기하라(sempo sugihar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우네(chiune)가 발음이 어려워서 유대인들한테 자신을 센포 스기하라라고 부르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4]
  • 스기하라는 1924년에 소련 여성과 결혼했다가 1935년에 이혼했는데, 이때 기독교 교파중 하나인 정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세례명은 바울로(パウェル-파웨르). 리투아니아 및 일본의 정교도를 중심으로 그의 시성을 추진하는 여론이 있다.
  •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유대인 협회들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일본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하여 기부하기도 했다.
  • 메탈 밴드 사바타지(Savatage)의 정규 8집 Handful of Rain의 3번 트랙 Chance가 지우네의 일화를 소재로 사용했다.


4. 참조


[1] 별명보다는 존칭 또는 명예 칭호에 가깝다. 이스라엘 정부에서 홀로코스트 때 유대 민족에 속하지 않으면서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수여하는 칭호이다.[2] 이후 독소전쟁 중 나치의 수중에 떨어진 리투아니아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20만 명이나 희생당하게 된다.[3] 1941년 8월 17일 만들어진 "독일 제국 내의 일본인 간첩에 관하여"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영사 스기하라가 독일의 군사 정보에 남다른 관심을 표시했다며 "폴란드와 영국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게슈타포는 영사관 맞은편 건물 지하에 비밀 감시소를 차리고 미행 자동차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4] 센포는 지우네의 한자인 千畝를 음독으로 읽은 것이다.[5] 2003년판 하얀거탑에서 주인공 자이젠 역을 맡은 배우이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 주연 마에다 토시이에를 맡아 평균 22%의 고시청률을 이끌었다. 닛케이 남배우 Top30에도 20위권에 꾸준히 드는 연기파 인기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