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9 21:04:18

게토

수용구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
2.1. 전근대
2.1.1. 동유럽
3. 나치 독일의 게토
3.1. 역사3.2. 이야깃거리
4. 오늘날의 변화한 의미
4.1. 미국
5. 여담6. 동음이의어
6.1. PC방 클라이언트6.2. 코드 기아스의 지역6.3. 주술회전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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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Ghetto.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가리킨다. 게토라는 명칭은 1516년경 베네치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어원은 미상이라고 한다.

2. 역사

2.1. 전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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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모로코에서 처음 등장했지만[1] 유럽 전역에도 14~15세기부터 이런 거주 제한 규정이 생겼다. 모로코에는 게토와 비슷한 멜라가 있었는데 게토보다는 한결 자유롭고 번화했다. 베네치아 이전의 유대인 거주지는 차이나타운 류에 가까웠다.

널리 알려진 사실과 달리 게토의 원래 목적은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1090년대 말 십자군의 광기에 (하인리히 4세의 유대인 보호 칙령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 곳곳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12세기 슈파이어의 주교가 유대인 주거지에 성벽을 두르고 자치권을 주어 학살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십자군은 주교궁에 숨은 유대인까지 가차없이 죽였기 때문이다. 다만 게토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베네치아 공화국의 게토는 유대인 강제수용 지역이 맞다.

게토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 사회와 격리되어 있었다. 게토에서는 유대인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했으나 시민권을 절대 주지 않았으며 게토를 나갈 때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노란색 옷과 챙달린 뾰족모자를 걸치고 마크까지 달아야 했다. 해가 진 후에는 게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고 기독교인들이 보초를 서고 게토를 감시했다.[2] 거주제한 때문에 게토의 유대인들은 건물을 높이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19세기부터 점점 없어져 1870년 로마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2.1.1. 동유럽

비슷한 개념으로 전근대 동유럽의 유대인 집중 거주 지대가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showing_percentage_of_Jews_in_the_Pale_of_Settlement_and_Congress_Poland%2C_c._1905.png

러시아에서는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던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강역을 따라 이른바 "정주제한선(Черта́ осе́длости(체르타 오세들로세티))"이라는 유대인 '집중거주구역'[3]을 설정하는 선을 긋고 이 지역 바깥으로의 유대인의 거주를 제한했으나 러시아 혁명 후 유대인들의 거주지 제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이를 이디시어로 슈테틀(שטעטלעך)이라고 했다.[4] '정주제한선' 안쪽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의 3/4가 슈테틀에 살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어려움과 러시아 제국포그롬 때문에 2백만 명이 동유럽을 떠났고 결정적으로 홀로코스트 때문에 슈테틀은 사라졌다.

3. 나치 독일의 게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 게토. 바르샤바의 여타 구역과는 벽으로 격리되어 있었다.[5]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유대인은 이쪽 길로 다닐 수 없다!”[6]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통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영상에 등장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폴란드 총독부를 비롯한 동유럽 점령지의 도시들에서 부활시켜 유대인을 몰아넣을 수용구역으로 이용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바르샤바 게토가 수용인구 45만 명에 달해 가장 컸고 우치에 20만, 르비우에 15만, 빌뉴스에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이들 대도시 외에 여러 중소도시에도 수백에서 수천명 규모의 소규모 게토들이 세워졌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USHMM)에 따르면 폴란드와 소련에만 나치 독일이 세운 게토가 1,000곳 이상 존재했다고 한다.

이 게토와 이전의 역사적 의미의 게토의 다른 점은,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유럽의 다른 토착 기독교도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좁은 구역에서 거주하게 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이후에 있을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위해 세웠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치의 게토는 이전의 게토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인구 밀도가 높았고,[7] 비위생적이었으며, 의약품은 거의 없었고, 식량 배급량도 일일 250-300kcal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질발진 티푸스가 기승을 부려 특히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는데, 1940년 중순부터 1942년 7월까지 바르샤바 게토에서는 76,000명이, 우치 게토에서는 43,800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인해 '자연사'했다.

3.1. 역사

대부분의 '나치 게토'는 1940-1941년에 설립되었다. 대부분은 도시의 다른 구획과 장벽으로 갈라진 봉쇄 게토였으며, 소수의 개방형 게토들도 질서경찰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게토에는 새로운 유대인들이 들어오는 일은 있어도 나가는 일은 없었다. 게토에 있는 유대인들은 가혹한 환경 속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형편없는 보수만을 지급받았으며, 탈출하는 자는 총살당했다. 심지어 우치 게토처럼 그나마 주는 급료조차도 게토 내부에서만 쓸 수 있는 대리통화(게토 마르크)로 주어 탈출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2년, 홀로코스트의 절정기를 알린 라인하르트 작전의 시행으로 인해 게토에서 공식적으로 나가는 인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각 게토마다 정기적으로 다수의 노동 부적격 인원들이 차출되어 기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이송되었다. 이들의 도착지는 트레블랑카, 헤움노, 소비보르, 베우제츠 등의 절멸수용소였고, 도착 즉시 거의 산업화된 절차에 따라 가스실이나 총살장으로 보내졌다.

1943년 1월부터는 지속적인 절멸수용소 이송에 반발하여 바르샤바, 빌니우스, 비아위스토크, 체스토호바 등 여러 게토에서 집단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밀수하거나 훔친 총기와 화염병 등의 급조 무기를 가지고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부역자유대인 경찰들을 척살했다. 가장 큰 규모의 게토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봉기인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유명하다. 이들은 철저한 준비를 거쳐 독일군의 초기 진압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독일군은 게토를 포위하고 수도, 가스, 전기 공급을 끊어버린 뒤, 화염방사기와 전차를 앞세워 게토 내에 위치한 모든 건물을 부수고 태우는 시가지 초토화 전술로 이들을 진압했다. 게토 봉기의 성공 사례는 전무하며, 봉기를 일으킨 게토는 모두 폐쇄되었고 해당 게토의 수용자들은 모두 현장에서 죽거나 절멸수용소로 끌려갔다.

질병과 기아로 수만 명이 죽고, 정기적으로 병자와 노약자들이 절멸수용소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1943년까지 대다수의 게토에는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나 1943년 6월, 하인리히 힘러가 모든 게토를 청산하고 생존자들은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이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다. 거주 인원들이 전부 절멸수용소로 끌려가 비워진 게토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일부 게토는 '절멸 게토'로 전환되어 게토 자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정말 운이 좋았거나 게토의 어딘가에 숨어서 소개령을 피한 극소수만이 소련군이 도착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봉기가 일어났던 게토의 생존자들 중 일부는 절멸수용소로 끌려갔으나, 다수는 폴란드 루블린 지구에 있는 여러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3년 10월 말,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의 존더코만도 봉기를 계기로 하인리히 힘러는 유대인들의 저항의 싹을 아예 짓밟기 위해 루블린 지구에 있는 유대인 강제노동자들을 전부 죽이라 명령했다.

그리고 1943년 11월 3-4일 단 이틀 간 수확제 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루블린의 수용소와 게토에 있던 39,000-43,000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이들은 독일군의 명령으로 하루 동안 '방공용 참호'를 팠고, 다음 날 차례로 총살당해 자신들이 판 참호에 쌓였다. 11월 5일, 다른 지역의 수용소에서 유류품 수거와 시신 소각을 위해 150명의 유대인들이 차출되어 도착했으나, 이들은 극도로 참혹한 광경에 작업을 거부했고 이튿날 모두 총살되었다. 이후 시신 처리 작업은 우크라이나인 부역자들에게 할당되었는데, 이들마저도 약 일주일 뒤에 견디지 못하고 작업을 거부했다. 결국 이런저런 곳에서 불려온 존더코만도들이 시신 처리를 완료하는데에 6주가 소요되었으며, 이들도 시신 처리가 끝나자 모두 총살당했다. 수확제 작전을 끝으로 라인하르트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특출나게 높은 생산성 등의 이유로 1944년 중순까지 절멸을 피한 게토들도 있었으나, 나치는 이러한 게토의 생존자들도 소련군이 도착하기 전에 철저하게 학살했다. 예시로 폴란드에서 마지막으로 해방된 우치 게토의 경우, 초기 수용 인원은 20만 명이었고 1944년 6월까지도 7-8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남아있었으나, 1950년 1월에 소련군이 도착했을 때 발견한 생존자는 숨어있었거나 게토의 정리를 위해 남겨졌던 877명에 불과했다.

3.2. 이야깃거리

게토 외곽의 감시는 상술하였듯 질서경찰이 맡았는데, 나치는 갈라치기 정책의 일환으로 고분고분한 몇몇 유대인들에게 완장을 채워주고 게토 내부에서 다른 이들을 감시하는 유대인 경찰로 임명했다. 이렇게 완장을 찬 부역자 유대인들은 독일인 질서경찰들보다도 훨씬 잔인하고 악랄하게 동족들을 괴롭혔다.

게토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독일의 '비인간화' 시도에 맞서 무장 봉기 외에도 다양한 상징적, 논쟁적, 방어적 저항을 이어갔다. 대표적으로 우치 게토에서는 비공식적인 학교와 탁아소를 운영하며 부족한 식량을 아이들에게 더 먹였고, 감시를 피해 연극, 콘서트, 종교집회를 활발히 열면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8]

게토가 있는 도시는 보통 구획이 분할되었는데, '유대인(게토)', '현지인', '독일인' 구역으로 분할되는게 보통이었다. 게토가 있는 도시에 사는 현지인이나 독일인은 유대인이 아니라는(=조부모 대까지 유대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신분증인 일명 '아리아 서류'를 소지해야 했다. 폴란드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자유 폴란드군과 협력하여 이 서류를 대량으로 위조해 유대인들을 도왔는데, 나치는 이렇게 유대인들을 도운 것이 발각되면 국적이나 인종에 관계 없이 모두 사형에 처했기 때문에 대단히 영웅적인 행동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게토는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도 있었다. 상하이(上海) 등 일본군의 점령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도 일정 구역의 게토에 강제로 수용되었는데 이곳의 주거 환경은 유럽의 게토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그나마 전쟁 막바지에 홀로코스트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는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슈필만이 게토에서 생활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은 도저히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나치 독일군들에게 핍박을 받거나[9] 돈을 별로 못 받아 먹을 걸 먹지 못한 나머지 아사(餓死)한 사람들도 많고 도리어 유대인들끼리 서로의 음식을 훔쳐먹거나[10] 나치군에게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광대같은 짓을 하는 등 게토에서의 생활을 잘 표현했다. 당시 게토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를 찍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실제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였기 때문에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같은 시기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 에서도 초반에 비중있게 나온다. 독일인 군수사업가로서 유대인 인력을 이용하러 온 상황에서 고급 숙소를 제공받는 오스카 쉰들러와 열악한 환경에 내던져진 강제 이주 유대인들의 상황이 대비된다. 그나마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은 한 집을 단독으로 배정받았지만 여기선 아예 한 집에 서로 연고도 없는 여러 가구가 쑤셔넣어진 상황이 묘사된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독일은 게토를 끝장내고 여러번에 걸쳐 수색해 소개령에 응하지 않고 숨어있던 유대인들까지 철저히 학살했다.

4. 오늘날의 변화한 의미

현재는 그 의미가 "외국 출신 이민자들, 또는 특정 인종이 모여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즉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특정 민족이 사회의 주류 민족과 고립되어 살아가게 되면 게토로 불린다. 역사적 게토로부터 유래한 만큼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북미의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 등의 소수 민족 커뮤니티와 게토의 차이점은 주류 사회로부터 철저히 백안시당하고 주류 사회로 편입될 기회가 사실상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다.[11] 그런 면에서 슬럼과도 공통 분모를 지닌다.

대표적인 사례로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에서의 무슬림 공동체가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던 흑인 거주 지역인 반투스탄도 특정 인종의 격리라는 측면에서 게토와 비슷하다.

4.1. 미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Chicago_ghetto.jpg

파일:external/th05.deviantart.net/ghetto___istanbul_by_nadersantina-d5calzc.jpg

보통 미국에서는 빈민 거주 지역을 의미하며 갱스터 랩 애청자들은 많이 들어 보았을 용어다. 일종의 속어지만 미국의 흑인 밀집 빈민가가 흑인 특유의 스웨거 문화와 맞물리며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했기에 미국에선 이미 고유명사화되었다. 이 게토 문화권에서 비롯된 독특한 음악 장르와 문화도 많은데 예를 들어 뉴욕 게토 브롱스에서 유래된 힙합이나 시카고 게토에서 유래된 게토 하우스-주크 하우스, 풋워크 등이 게토 문화권에서 창출된 음악 장르다.

싸구려 음식 앞에 "게토~"라는 접두사를 붙이거나[12] 허접한 물건으로 스웨거를 나타낸 경우 "that's ghetto"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미국의 래퍼 XXXTENTACION은 시끄럽고 음산한 느낌의 앨범을 만들어 제목을 “A Ghetto Christmas Carrol”이라고 짓기도 했다.

UC 버클리가 위치한 버클리에는 아시안 식당들이 모인 골목길인 아시안 게토가 존재한다.

파일:external/www.ghettofail.com/ghetto-wedding-dress1.jpg

위 사진처럼 앨런 아이버슨 유니폼을 리폼한 웨딩 드레스, 딸이 찍어준 매춘부 사진, 차체를 무지하게 올린 차 그리고 흑인들이 많이 피운다는 담배 브랜드 뉴포트 등의 게토 문화가 일종의 으로 자리잡아 아예 관련 자료들만 모아 둔 사이트가 있기도 하다.

5. 여담

  • GD&TOP이 2010년에 발표한 곡 ‘High High’에서는 게토의 알파벳을 하나씩 끊어 읽는다.
    "G H E T T O E L E C T R O

    미칠지 모르죠 말리지 마 HERE WE GO"

6. 동음이의어

6.1. PC방 클라이언트

대한민국의 PC방 클라이언트.

GETO라고 표기하며 트위치 대한민국 사업 철수 사건 이후 클라이언트 업데이트가 끊겼다.[13]

게토 애플리케이션도 존재한다.

6.2. 코드 기아스의 지역

코드 기아스의 등장하는 가상의 지역. 상위 항목의 의미 그대로 사용된다.[14] 다만 여기에서의 게토는 일정 지역을 지정한 게 아니라 조계 외부의 모든 지역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개념이다.

브리타니아-일본 전쟁의 승전으로 일본을 식민지화한 브리타니아는 구 일본의 주요 대도시 일부를 새로 개발하여 브리타니아인 전용 거주 지역으로 복구하였다. 이를 조계(租界)[15]라고 칭하는데 구 일본 국민들은 브리타니아에 충성을 맹세한 소수의 인원 외에[16] 조계 외부에 있는 게토로 쫓겨나 살아가게 되었다.

조계는 전쟁으로 초토화 된 도시 폐허를 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도시를 지어 신 시가지가 구성되어 있지만[17] 게토는 전쟁 당시 폐허가 된 모습 그대로, 심지어 여러 종류의 잔해조차 치워지지 않은 상태. 이렇다보니 조계와 게토의 생활 수준 차이는 처참할 지경이다.

6.3. 주술회전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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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집단이주하기 전까지 남아 있었다.[2] 베네치아에서는 보초를 세우는데 필요한 돈을 유대인들이 내야 했다(...).[3] 물론 유대인 '집중거주구역'이라고 해서 유대인들 사는 동네는 절대로 아니었다! 이 지역도 러시아인, 폴란드인 등 슬라브인이 엄연히 다수 민족이었다. 독립 민족국가가 세워지면 유대인 거주구역이 죄다 쪼개져 버리니까. 유대인들의 이러한 불안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현실이 되었다.[4] 슈테틀은 정확히 말하면 읍 정도 되는 개념이었다. 렘베르크 같은 큰 도시는 슈토트(שטאָט), 작은 유대인 마을은 도르프(דאָרף)라고 불리었다. 독일어 비슷한 느낌이 들 텐데 동유럽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이디시어가 그 계통이라서 그렇다.[5] Das Judenviertel ist mit Mauern vom Übrigen Warschau abgesperrt.[6] “Benutzung dieser Straßenseite für Juden verboten!”[7]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3.4㎢의 면적에 45만 명을 수용하여 인구밀도가 ㎢ 당 13만명을 넘겼다. 참고로 대한민국 기초자치단체 인구밀도 1위인 서울시 양천구의 인구밀도가 24,850명/㎢이다. 현대처럼 고층 아파트가 가득한 것도 아니고 저층 빌라 정도만 있는 지역에서 물리적으로 저 수준의 인구밀도가 가능한가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나치는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거주 환경을 보면 여러 대가족이 방 하나를 공유하는 수준의 막장이었다.[8] 우치 게토의 생존자 877명 중 한 명인 헨리크 로스의 공로로 이러한 사실이 알려졌다. 우치 유데란트(유대인 협의회)의 사진작가였던 그는 나치가 증명사진을 찍으라고 배급한 필름 일부를 빼돌려(한번에 여러 사람을 촬영하는 식으로 필름을 절약했다) 게토의 일상을 촬영했고, 게토의 해방 이후 이 사진들을 공개했다.[9] 영화 중 슈필만의 아버지가 감자를 가지고 돌아오던 도중에 나치 장교가 인사를 안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10] 한 노파가 먹으려고 한 죽을 노인이 훔치려다가 그만 바닥에 쏟았는데 노인은 그것마저도 먹으려고 엎드려서 흙투성이인 죽을 먹으려고 핥았고 노파는 울며 막으려다가 울면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11] 사실 차이나타운도 초창기에는 화교들을 몰아넣는 게토였다. 반화교 폭동과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12] 싸구려 냉동 부리토를 보통 Ghetto Burrito라고 부른다.[13] 대부분 PC방 클라이언트는 이 사태 이후 트위치가 치지직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으로 피카플레이.[14] 다만 에리어 11 일본 외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인지는 불명.[15] 19세기~20세기 초 중국에 있던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16] 이들을 '명예' 브리타니아 인으로 분류한다.[17] 심지어 조계 중앙부는 도시 구획을 몇 개 층으로 설계해두었다. 도시 면적만한 구조물이 수십 미터 솟아오른 모습은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