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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야나가라 제국 ವಿಜಯನಗರ ಸಾಮ್ರಾಜ್ಯ Vijayanagara sāmrājya | |||||
국기[1] | |||||
15세기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최대강역. | |||||
1336년 ~ 1646년 | |||||
위치 | 인도 아대륙 | ||||
수도 | 비자야나가라 (1336~1565) 페누콘다 (1565~1592) 찬드라기리 (1592~1604) 벨로르(1604~1646) | ||||
언어 | 칸나다어, 텔루구어 말라얄람어, 타밀어 | ||||
통화 | 드라비다인 (칸나다인, 텔루구인, 타밀인, 말라얄람인) | ||||
종교 | 힌두교 | ||||
통화 | 바라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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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 [ 펼치기 · 접기 ] | ||||
현재 국가 | [[인도| ]][[틀:국기| ]][[틀:국기| ]] |
언어별 명칭 | |
힌디어 | विजयनगर साम्राज्य |
말라얄람어 | വിജയനഗര സാമ്രാജ്യം |
타밀어 | விஜயநகரப் பேரரசு |
텔루구어 | విజయనగర సామ్రాజ్యము |
산스크리트어 | विजयनगरसाम्राज्यम् |
영어 | Vijayanagara Empire |
러시아어 | Виджаянагарская империя |
중국어 | 毗奢耶那伽罗王朝 |
일본어 | ヴィジャヤナガル王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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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남인도의 마지막 힌두 왕국.[2]1336년 하리하라 1세와 그의 동생들의 협력에 의해 건국되었고, 1565년 1월에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배할 때까지 남인도를 지배했다. 인도의 이슬람화를 저지하여 힌두 문화의 수호국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였던 비자야나가라(함피)는 지금도 거대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2. 역사
2.1. 건국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일단 당시 인도의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 당시 인도는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무슬림 침략자들이 북쪽으로부터 쏟아져들어오고 있던 상태였다. 무슬림들은 기존의 힌두계 소왕국들을 밀어버린 다음 델리를 중심으로 하는 델리 술탄국을 세웠다. 델리 술탄국의 여러 왕조들 중에서도 투글루크 왕조는 인도 최남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인도 지방을 장악할 정도로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쳤고, 이때문에 기존에 남인도를 다스리던 야다바 왕조, 판디아 왕조, 카카티야 왕조 등의 힌두계 왕국들 역시 죄다 쓸려나가던 상황이었던 것이다.기존에 남인도 패권을 장악하던 힌두 왕국들이 몰락하자 반란, 독립 세력들도 활발히 일어났다. 야다바 왕조가 1294년 델리 술탄의 군대에게 작살나자, 야다바 왕조의 데칸 사령관이던 신게야 나야카 3세는 바로 야다바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신게야 나야카 3세는 카르나타카 북동부 지방에 새로 '캄필리 왕국'을 세워 델리 술탄국에 저항했다. 하지만 한창 기세가 올랐던 델리 술탄국을 막아내기는 무리였던지 캄필리 왕국은 세워진지 몇십년도 못되어 1327년 멸망하고야 말았다. 캄필리 왕국마저도 무너지자 힌두계 유민들은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새로운 힌두 제국의 등장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세력이 바로 비자야나가라 제국이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시조인 하리하라 1세와 부카 1세에 대해서는 출생과 기원이 확실하지가 않다. 둘은 형제 사이였는데, 호이살라 왕조와 연관이 있다는 말도 있고 카카티야 왕조의 영주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원래 남인도 왕국의 북부 국경을 지키는 사령관들이었는데, 델리 술탄국의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와랑갈 지역을 정복할 때에 포로로 잡혀 델리로 강제로 끌려가게 된다. 두 형제는 델리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 강요를 받았다. 형제는 어쩔 수 없이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조용히 술탄에게 순종하는 척을 하며 그의 신임을 얻게 된다. 하리하라와 부카는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나중에는 퉁가바드라 계곡 일대와 해안가까지 담당하는 상당한 권력을 갖추는 데까지 성공한다.
당시 델리 술탄국은 남인도를 어느 정도 정벌했지만 반란 세력들은 넘쳐났다. 1300년경 옛 판디아 왕국의 수도인 마두라이에서 잘랄 웃딘 아산 칸이 독립을 선언했고, 마이소르의 호이살라 왕조도 이에 호응하자 델리의 술탄은 두 형제에게 이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진압군으로 파견된 형제들은 되려 그 지역의 무슬림들에게 심한 배척을 받았다. 개종한 신분이라 제대로 명령도 따르지 않았던 것. 이에 반감을 품은 형제들은 기회다 싶어 지역의 성인이자 스승이던 비다야란야를 찾아갔다. 형제는 비다야란야의 도움을 받아 다시 힌두교로 개종했고, 그의 명성을 등에 업고 옛 힌두 유민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하리하라와 부카는 1336년 일곱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단단한 도시 비자야나가라를 수도로 정했고, 형 하리하라 1세를 왕으로 옹립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이것이 남인도 마지막 힌두교 국가인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시작이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초창기부터 마이소르 지역의 호이살라 왕국 및 마두라이 술탄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마두라이의 기야스 우딘 샤 술탄이 호이살라 왕국의 발라라 3세를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자 하리하라 1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호이살라 왕국을 공격하여 그들의 영토를 차지하고 아예 멸망시켜 버렸다. 물론 잔존세력들이 존재했으나 1346년 하리하라 1세는 부카 라야를 포함한 다섯 형제들과 친족들의 도움으로 호이살라의 전 영토를 안정화시켜나갔다.
호이살라를 멸망시키면서 최대 난적은 남쪽의 마두라이 술탄국과 북쪽 데칸에서 델리 술탄 왕조로부터 갓 독립한 신생 왕국 바흐마니 술탄국이 되었다. 이중 남쪽에 존재한 마두라이 술탄국과는 14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약 40년 동안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동안에 하리하라 1세가 사망하고 동생인 부카 라야 1세가 즉위했다. 부카 라야 1세는 마두라이 술탄국을 압박했고, 결국 멸망시켜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남인도 최강국으로 완벽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2.2. 바흐마니와의 경쟁
한편 북쪽으로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데칸의 강국 바흐마니 술탄국과 퉁가바드라 강 유역, 크리슈나 강과 고다바리 강 사이의 델타 지역, 그리고 마라트와다 지역을 놓고 충돌했다. 퉁가바드라 지역은 부와 경제의 원천이 이루는 곳이었고, 델타의 경우 땅이 비옥하고, 해외 무역이 성행되는 항구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마라트와다의 경우, 남부 고아를 중심으로 비옥한 도시들이 즐비하거나 전략적 요충지로써 큰 가치가 있었다.[3] 이미 고대 중세 때부터 찰루키아 왕조, 촐라 제국, 야다바 왕조, 호이살라 왕국 등이 이곳들을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였었고 비자야나가라와 바흐마니 또한 자신들의 국가를 성장시키기 위해 서로 엄청나게 치고박고 싸우게 된다.이들의 전쟁은 단순히 치열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367년 비자야나가라의 부카 라야 1세는 퉁가바드라 유역의 무드칼 요새를 점령했을 때 딱 1명을 제외하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다 몰살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바흐마니의 무함마드 샤 1세는 당연히 엄청나게 대노했고, 100,000명의 힌두교도들을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칼을 칼집에 넣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할 정도였다.
결국 복수를 위한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고, 비자야나가라 군대는 이 분노에 찬 바흐마니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부카 라야 1세는 정글속에 숨어버렸고 무함마드 샤 1세는 이를 찾기 위해 7개월 동안 정글을 뒤지고 다녔으나 실패하고, 수도 비자야나가라 공략 또한 실패했다. 결국 바흐마니 술탄국은 적당히 협정을 맺어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종전하게 되었다. 이때 바흐마니의 군대 역시 비자야나가라의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다녔는데, 이 충격으로 남인도에서는 전쟁이 벌어져도 무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 묵계가 성립되었다.
물론 바흐마니 술탄국과의 싸움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퉁가바드라 지역을 둘러싼 전쟁은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는 비자야나가라의 데바라야 1세 그리고 바흐마니의 피루즈 샤 시기였다. 이 시기의 전쟁때 비자야나가라는 패배하여 수많은 재물들은 물론이고 데바라야 1세의 딸마저 바흐마니의 술탄에게 억지로 시집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패배는 다시 되갚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피루즈 샤는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기기도 했다.
이후 데바라야 2세는 바흐마니 군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군대는 궁병과 기병이 상당히 막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데바라야 2세는 궁술에 능한 무슬림 군인들을 스카우트해오고 이들로 하여금 비자야나가라 군인들을 교육시키게 했다. 이런식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데바라야 2세는 1443년 바흐마니에게 전쟁 선포를 했다. 그러나 바흐마니의 군대는 여전히 강력했기에 막상막하의 상태가 이어지게 되었고 양측은 다시 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로는 바흐마니 술탄국 내부의 문제가 커져 데칸 술탄국으로 여러갈래 나뉘어지게 되었고 이들과의 경쟁은 여기서 마무리되었다.
2.3. 후기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16세기 크리슈나 데바 라야 왕 시절 절정에 이르렀는데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퉁가바드라 지역의 지배권을 되찾시 위해 전쟁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굴바가와 오릿사를 침공하고 수많은 요새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데칸 술탄국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던 비자푸르 술탄국의 영토 일부를 챙기기도 했다.[4][5]
한편 이 시대는 서양에서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가 개척되는 시기였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인들이 인도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크리슈나 왕은 이들에게 우호적이었으며 보다 활발하고 안전한 무역을 위해 해군력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나라의 부강을 위해 군대의 힘을 강화하는 한편 당시 어지러운 법과 질서를 개편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크리슈나 왕이 사망하면서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혼란 속에 빠지는데 뒤를 이은 아츄타 데바 라야의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이다. 왕이 어리자 주변의 친족들이 왕위를 노리게 되었고 이에 대한 계승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아츄타 왕이 1542년 사망한 뒤 아들 벤카타 1세가 즉위했다. 하지만 벤카타 1세는 즉위한지 6개월 만에 암살당했고, 아츄타의 조카 시다시바 라야 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1565년 데칸 술탄국들이 서로 연합하여 탈리코타 근처에 있는 락샤시탕가디로 쳐들어왔다. 이 전쟁에서 비자야나가라군은 대패했고, 수도 비자야나가라까지 함락당했다. 결국 수도를 페누콘다로 옮기게 되었고 데칸에 대한 투쟁을 계속했다. 벤카타 2세때 잠시나마 예전의 영광을 찾은 적도 있었지만 그가 죽은 뒤에 왕국내에서 수많은 '나야크' 국가들이 독립하게 되었다.
1646년 비자푸르 술탄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때 마이소르 왕국[6]의 나라사 라자 1세가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이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마지막 왕 스리랑가 3세가 마이소르 왕국으로 망명하여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3. 나야크 체제
14세기와 15세기 전반까지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여러 지방에는 행정관으로 왕족들이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때 이들은 직접 지방군을 관리하지 않고 '아디카리'(Adikari)로 불리는 지방군 지휘관의 보좌를 받았다. 그런데 이 아디카리들은 지방군에 뿌리를 둔 자들이었고, 중앙에서 파견된 행정관을 유명무실하게 만들며, 자신들이 실세 역할을 하면서 마음대로 지방 세금을 걷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15세기 전반에는 과중한 세금과 지주들의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지방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이러한 폐단을 고치기 위해 15세기 말 살루바 왕조(Saluva dynasty, 1485~1505)의 군주들은 '나야크'(Nayak) 또는 '나야카'(Nayaka)로 불리는 지방 군사령관을 임명해 각 지방을 이들이 직접 관리하게 했다. 살루바 왕조가 도입한 나야크 체제는 이어진 툴루바 왕조(Tuluva dynasty, 1491~1570)에서 보다 성숙해지게 되었다. 나야크들은 평소에는 중앙으로 매년마다 세입 일부를 바쳤고, 중앙에서 군사를 동원하면 이에 응해야 했다. 중국의 절도사와 비슷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크리슈나데와라야, 아츠유타데와라야 등 중앙 군주가 충분한 권위를 갖추고 있을 때는 이에 복종하는 지방관이었다. 또한, 적어도 처음에 나야크들은 그 지역에 기반을 두지 않았고, 중앙에서 임명해 내려간 군사령관에 불과했으며 나야크의 권위는 비자야나가라 제국 중앙의 권위에 의존했다.
그러나 1565년 탈리코타 전투에서 데칸 술탄들에게 비자야나가라군이 대패하고 중앙의 권위가 실추되자, 나야크 상당수가 독자적인 나야크국으로 독립해나가게 되었다. 비자야나가라의 조세 체계는 나야크들에게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비자야나가라가 군사적, 경제적으로 무력해졌음을 뜻했다. 하지만 비자야나가라의 중앙이 무력해진 후에도 많은 나야크들은 권위의 근원을 비자야나가라의 군주들에게 두었고, 그들에게 상징적으로 복종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인도에 도래한 유럽인의 기록에 따르면 17세기 초까지도 세력권이 큰 나야크들의 일부조차 비자야나가라 중앙에 여전히 연공을 바치기도 했는데, 특히 1608년 예수회의 기록에 따르면 탄자우르 나야크와 마두라이 나야크는 중앙에 연공을 바치고 있었던 반면, 센지 나야크는 연공을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17세기 전반 비자야나가라에서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탄자우르 나야크가 지지하는 왕이 승리함에 따라 탄자우르와 대립한 마두라이 및 센지는 완전히 중앙에서 떨어져나갔다. 비자야나가라의 말기 군주들은 탄자우르 나야크의 보호와 과거의 봉신국 마이소르의 호의에 의존했는데, 17세기 중반 탄자우르가 아딜 샤히(비자푸르 술탄국)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마침내 비자야나가라 중앙 정권이 붕괴했고 왕은 마이소르로 망명했다.
비자야나가라 영내에 존재한 나야크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고, 시대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했다. 16세기 전반, 특히 탈리코타 전투 직전인 1525년부터 1550년 사이에 나야크의 수는 중앙의 추가 임명 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늘어 비문 연구로 오늘날 확증 가능한 것만 100명이 넘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탈리코타 전투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7]
세력권이 거대했던 일부 나야크는 이하와 같다. 이들이 세운 나야크국은 비자야나가라 중앙의 멸망 후에도 존속한 경우가 많았다.
- 마두라이 나야크 (타밀나두)
- 탄자우르 나야크 (타밀나두)
- 센지(Senji, Gingee) 나야크 (타밀나두)
- 펨마사니(Pemmasani) 나야크 (안드라프라데시)
- 칼라하스티(Kalahasti) 나야크 (안드라프라데시 남부, 타밀나두 북부)
- 치트라두르가(Chitradurga) 나야크 (카르나타카)
- 켈라디(Keladi, 또는 이케리Ikkeri) 나야크 (카르나타카)
'나야크'는 비자야나가라 멸망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마두라이 나야크국, 켈라디 나야크국 등에서는 일종의 군주 명칭이 되었다. 나중에는 비자야나가라와의 아무런 행정적 접점도 없었지만 '나야크' 칭호를 취한 경우도 생겨났다. 18세기 중반 스리랑카 동부의 캔디 왕국에서 왕이 후계자없이 죽자 처남에게 왕위가 넘어갔는데, 이 처남은 마두라이 나야크 가문에 속했다. 이에 따라 캔디 왕국에서는 '나야크 (왕)조'가 수립되어 캔디가 멸망할 때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4. 사회문화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바흐마니 술탄국을 비롯한 북쪽의 이슬람 왕국들과 자주 다툼을 벌였는데 그로 인하여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힘을 키워나가면서 한때 100만의 병력을 거느릴 정도로[8] 군사적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질 좋은 면직물과 향신료를 다른 나라에 팔아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여러 항구는 향신료, 면화 등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북적했다. 수도 비자야나가라는 명나라와 페르시아의 상인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인들도 찾는 무역도시로 이름을 날린다. 이 도시는 일곱 겹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왕궁 주변에는 커다란 시장들이 4개 있었는데, 이는 고대 로마 제국의 규모보다 컸다고 한다.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배 3척을 이끌고 중서부 해안의 캘리컷에 나타나는데, 그는 6개월 가량 여기저기 돌아다닌 끝에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들을 가득 싣고 돌아갔다. 이후 포르투갈 상인들이 몰려와 고아에 무역 기지를 만들고, 인도와의 향신료 무역을 이끌었다.
16세기 초, 크리슈나 데바 라야 치세때는 남인도내에 대대적인 수로 개편 작업을 실시했다. 데바 라야는 곳곳에 물길을 뚫고 물을 저장하는 저수 시설들을 만들어 백성들이 가뭄 걱정없이 면화와 곡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시와 학문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었는데, 특히 언어에 관심이 많아 텔루구어, 산스크리트어 문학을 지원하는 한편 스스로 텔루구어 서사시를 씀으로써 텔루구 문학을 크게 부흥시켰으며, 타밀어 저술가들도 보호했다.
또한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힌두교 국가로서 힌두 문화를 바탕으로 한 문학 작품들과 건축물, 사원들을 많이 제작했으며, 힌두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비자야나가라 시대는 칸나다어 문학과 텔루구어 문학이 크게 융성한 시대였다. 사원의 경우 이전 팔라바 왕국이나 촐라 제국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만든 것 중 유명한 사원이 바라다라자 사원이다. 바라다라자 사원은 비자야나가라 제국 시대에 건축된 사원으로 비슈누를 바탕으로 한 3대 사원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또한 예캄바라나타 사원은 칸치푸람에서 가장 큰 사원으로 높이 60m의 백색 고푸라는 칸치푸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 사원 자체는 팔라바 왕조 시대에 건축되었지만 당시에는 매우 작은 사당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비자야나가라 제국 시기에 이르러 거대한 고푸라를 지닌 오늘날의 규모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9] 이처럼 바자야나가라 제국은 16 ~ 17세기에 걸쳐 힌두교 사원 제작에 많은 후원을 했고, 덕분에 고푸라가 가득한 도시가 형성되기도 했다.
바라다라자 사원
5. 기타
-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델리 술탄국과 같이 하나의 왕조로만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었다. 즉, 국가명은 그대로둔채 지배층 가문만 바뀐 것이다. 총 4개의 가문들이 비자야나가라를 다스렸는데 상가마 왕조(1336~1485), 살루바 왕조(1485~1505), 툴루바 왕조(1491~1570), 아라비두 왕조(1542~1646)였다.
- 패러독스에서 제작한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초반 시나리오에서 인도 내 탑 수준에 속하는 강국이다. 여기서도 바흐마니 술탄국이 초반의 난적이지만 실제 역사랑 달리 생각보다 쉽게 제압할만하다. 물론 이후 동•서•북으로 초강대국들이 기다리지만...[10]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문서를 참조.
6.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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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EE8AA>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하리하라 1세 | 부카 라야 1세 | 하리하라 라야 2세 | 비루파크샤 라야 | |
<rowcolor=#EEE8AA>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부카 라야 2세 | 데바 라야 1세 | 라마찬드라 라야 | 비라 비자야 부카 라야 | |
<rowcolor=#EEE8AA>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데바 라야 2세 | 바크한주 라야 | 말리카주나 라야 | 비루파크샤 라야 2세 | |
<rowcolor=#EEE8AA> 제13대 | ||||
프라우다 라야 | ||||
살루바 왕조 | ||||
<rowcolor=#EEE8AA>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살루바 나라시마 데바 라야 | 팀마 부팔라 | 나라시마 라야 2세 | ||
툴루바 왕조 | ||||
<rowcolor=#EEE8AA>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툴루바 나라사 나야카 | 비라 나라시마 라야 | 크리슈나 데바 라야 | 아츄타 데바 라야 | |
<rowcolor=#EEE8AA> 제21대 | 제22대 | |||
벤카타 1세 | 사다시바 라야 | |||
아라비두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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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툴루바 나라사 나야카 (149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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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마 데바 라야 (1617 ~1632)
- 벤카타 3세 (163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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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국기라고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2] 이후에 마이소르 왕국이 힌두 왕국을 자처했지만 하이다르 알리가 즉위하면서 이슬람 왕국으로 바뀌었다.[3] 참고로 고아는 이란, 이라크 등 아랍 및 페르시아 세력들로부터 말을 수입하는 등 무역 거점지 및 군사적 요충지로서 정말 중요한 항구도시였다.[4] 이로 인해 비자푸르 술탄국과는 끝까지 앙숙관계가 되었으며 이들은 멸망의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까지 했다.[5] 16세기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주변국들의 세력권[6] 마이소르 왕국은 비록 나야크 체제에서 기원하지는 않았으나 과거 비자야나가라의 봉신국이었다.[7] 이상 네 문단의 출처는 이하와 같다. Noboru Karashima, 《A Concise History of South India》(New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194-227.[8] 아무리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강하기로서니 인도 전체가 아니라 남부만을 지배했던 나라가 100만의 대군을 거느렸다는 것은 과장의 여지가 있다.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무굴 제국도 아우랑제브 때 50만 대군을 동원하느라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대략 20만 명에서 24만 5천 명 사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링크[9] 이러한 힌두 사원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은 《이거룡의 인도 사원 순례》에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가 있다.[10] 오스만, 티무르, 명나라, 러시아, 서양 열강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