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14:31:06

홀거 바트슈투버

바트슈투버에서 넘어옴
독일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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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이름 <colbgcolor=#ffffff,#1c1d1f> 홀거 바트슈투버
Holger Badstuber
본명 홀거 펠릭스 바트슈투버[1]
Holger Felix Badstuber
출생 1989년 3월 13일 ([age(1989-03-13)]세)
서독 바이에른메밍겐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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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90cm / 체중 84kg
포지션 센터백
소속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유스 TSV 로트 (1994~2000)
VfB 슈투트가르트 (2000~2002)
FC 바이에른 뮌헨 (2002~2007)
선수 FC 바이에른 뮌헨 II (2007~2009)
FC 바이에른 뮌헨 (2009~2017)
FC 샬케 04 (2017 / 임대)
VfB 슈투트가르트 (2017~2020)
VfB 슈투트가르트 II (2020~2021)
FC 루체른 (2021)
국가대표 31경기 1골 (독일 / 2010~2015)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클럽 경력
2.1. FC 바이에른 뮌헨
2.1.1. 초기 경력2.1.2. 2009-10 시즌2.1.3. 2010-11 시즌2.1.4. 2011-12 시즌2.1.5. 2012-13 시즌2.1.6. 2013-14 시즌2.1.7. 2014-15 시즌2.1.8. 2015-16 시즌2.1.9. 2016-17 시즌
2.2. VfB 슈투트가르트
2.2.1. 2017-18 시즌2.2.2. 2018-19 시즌2.2.3. 2019-20 시즌2.2.4. 2020-21 시즌
2.3. FC 루체른2.4. 은퇴
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타6. 같이 보기

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선수. 중앙 수비수가 주 포지션이며 경력 초기에는 좌측 풀백 포지션 역시 소화했다. 오랜 기간 동안 FC 바이에른 뮌헨 소속이었고, 잠시 FC 샬케 04에서 뛰다가 계약이 만료되었다. 이후 VfB 슈투트가르트와 계약했다.

과거 독일의 핫한 유망주로 떠올랐던 선수였으나 잦은 부상으로 인하여 전성기 시절 커리어가 꼬여버린 비운의 주인공이다.

2. 클럽 경력

2.1. FC 바이에른 뮌헨

2.1.1. 초기 경력

바이에른메밍겐에서 태어났으며, TSV 로트와 VfB 슈투트가르트의 유소년 팀을 거치면서 축구에 입문하였다. 이후 2002년부터 FC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 팀에 합류하였다. 2007-08 시즌부터 2군에 합류한 그는 주전 선수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008-09 시즌에도 변함없이 2군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바트슈투버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센터백을 두루 소화하는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으며, 시즌 후반기에는 의외의 득점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후반기에 잠시 1군 팀 경기의 교체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으나 같이 활약하던 토마스 뮐러와 달리 출전 기회를 받지는 못했다.

2.1.2. 2009-10 시즌

파일:holger_badstuber_fc_bayern_munchen_.jpg

2009-10 시즌을 앞두고 프리시즌에 뮐러 등과 함께 1군으로 승격되었다. 프리시즌을 거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그는 바이에른의 존 테리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마침 마르틴 데미첼리스가 부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중앙 수비수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바트슈투버는 루이 판할 감독의 선택을 받아 개막전부터 선발 센터백으로 기용됐다. 2군 팀에서는 미드필더로 더 많은 경기에 출전했으나 1군에서는 수비수로 자리를 잡았고, 시즌 극초반은 센터백 자리에서 주전으로 나섰다. 아직 부족한 점은 있었지만, 대체로 나이에 비해 훌륭한 선수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자연스레 출전 기회를 확보했다.

하지만 윌리 사뇰이 은퇴하면서 풀백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크리스티안 렐은 팀 구성 계획에서 완전히 제외되었기에 당시 바이언의 측면 수비진 뎁스는 상당히 얇았다. 본래 바이언은 다니옐 프라니치, 에드손 브라프하이트 등으로 왼쪽 풀백 자리를 메우고자 했으나 이들 역시 합격점을 받지 못했다. 결국 판할 감독은 7라운드 함부르크 SV와의 경기에서 브레누, 다니엘 판바위턴을 센터백 조합으로 내세운 후 바트슈투버를 왼쪽 풀백 자리에 처음 기용하였다. 해당 경기는 1-0 패배로 종료되었고 바트슈투버는 다시 센터백으로 돌아왔지만 왼쪽 풀백 자리는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있었다.

때마침 데미첼리스가 부상에서 복귀하여 서서히 출전 시간을 확보하게 되자, 판할 감독은 다시 바트슈투버에게 왼쪽 풀백 역할을 맡기기 시작한다. 12라운드 FC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다시 풀백으로 나선 그는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이 경기를 기점으로 주전 왼쪽 풀백이 되었다. 스피드는 느린 편이었지만 수비 스킬이 안정적이고 빌드업에서 강점을 보인 바트슈투버는 경쟁자들에 비해 명확한 우위를 점하는 데 성공하였다. 15라운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에는 프리킥으로 프로 첫 득점을 기록했고 이어진 16라운드 보훔전, 17라운드 헤르타전에는 연속 도움을 기록하면서 수비수지만 공격에도 제법 기여하였다.

전반기 내내 주전으로 활약한 바트슈투버는 후반기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 판바위턴, 데미첼리스 등이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자 이번에는 2군 선수였던 디에고 콘텐토, 데이비드 알라바 등이 콜업되어 왼쪽 풀백에 배치됐고, 바트슈투버가 센터백 자리에 돌아오기도 했다. 리그에서 바트슈투버는 31라운드 하노버 96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 선발로 나섰고, 챔피언스 리그도 경고누적으로 결장한 4강 1차전을 제외하면 전부 출전하였다. 8강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빠른 윙어인 나니, 안토니오 발렌시아를 상대로 고전하면서 부진했으나, 이후 경기에서는 평균적으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다. 2010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왼쪽 풀백으로 선발 출전하였으나 끝내 인테르의 벽을 넘지 못했다.

1군 첫 데뷔 시즌부터 센터백, 왼쪽 풀백을 오가며 대부분의 경기를 치렀다. 이 시즌만 한정해서 보면, 왼쪽 풀백 자리에서 붙박이 주전으로 소화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하다.[2] 활약을 인정받아 데뷔 시즌부터 국가대표팀에 들어가고, 월드컵 명단에도 들었으니 선수 개인으로 굉장히 의미 깊은 시즌으로 볼 수 있다.

2009-10 시즌: 49경기(선발 49경기) 1골 3도움
<rowcolor=#fff>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3 33 0 1 2
챔피언스 리그 12 12 0 0 1
포칼 4 4 0 0 0
합계 49 49 0 1 3

2.1.3. 2010-11 시즌

월드컵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판할의 신임을 받아 바이언의 주전으로 기용되었다. 하지만 이 시즌의 바트슈투버는 평이 그리 좋지 못했다. 선수 개인으로는 이전 시즌과 달리 치골 부상으로 전반기의 절반 가량을 날리기도 했고, 출전한 경기에서도 본인의 약점이 부각되면서 안정감을 발휘하지 못한 시즌이었다.

결국 2월 쯤에는 그를 총애했던 판할마저 바트슈투버를 후보로 내리기도 했다. 시즌 최후반부에 안드리스 욘커 대행 체제로 넘어간 후에는 출전 시간이 약간 늘긴 했으나 이미 리그가 거의 막바지로 향해가던 시기였기에 큰 반전은 없었다.

첫 시즌의 활약과 비교했을 때, 두번째 시즌의 모습은 명백히 아쉬웠다. 대부분의 경기를 중앙 수비수로 고정되어 뛰었지만 포지션을 오갔던 지난 시즌보다도 흔들리는 경향이 컸다. 심적으로 부담이 컸는지 판단력도 흔들리고, 언론으로부터 혹평을 듣는 등 이래저래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이 시즌에 보여준 단점을 고치지 못한다면 만년 유망주로 남을수도 있다는 우려가 존재했다.

2010-11 시즌: 32경기(선발 29경기) 0골 2도움
<rowcolor=#fff>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23 21 2 0 0
챔피언스 리그 5 4 1 0 2
포칼 3 3 0 0 0
슈퍼컵 1 1 0 0 0
합계 32 29 3 0 2

2.1.4. 2011-12 시즌

이전 시즌에는 어려움을 겪었던 그였지만, 유프 하인케스가 부임한 후에는 다시금 팀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시즌 초 제롬 보아텡과 주전 수비 라인을 형성한 바트슈투버는 특유의 축구 지능과 빌드업 능력을 살려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바이언은 당시 시즌 초 리그에서 8경기 연속 클린시트를 기록했는데, 그 중심에 있던 선수가 바로 바트슈투버였다.

후반기에도 그의 위상은 여전했다.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은퇴 후에는 파트너 보아텡의 평가가 훨씬 높아졌지만, 당시에는 바트슈투버가 보아텡에 비해 오히려 평판이 좋았을 정도였다.[3] 측면 수비수로 나선 데이비드 알라바, 필립 람과의 호흡도 좋았고, 공격진의 맹활약에 힘입어 바이언은 각종 대회에서 호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바트슈투버와 함께 기용되던 수비 파트너 판바위턴이 부상으로 빠졌고, 리그 순위 경쟁자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카가와 신지 등 주요 선수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최고의 상승세를 이어갔다. 결국 바이언은 리그에서 도르트문트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진 DFB-포칼 결승에서도 도르트문트에게 패배해 또 준우승했다. 바트슈투버는 결승전에 선발 출전했으나, 팀의 5-2 대패를 막지 못했다.

이미 두 차례 준우승을 거둔 바이언이지만, 2012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마지막 우승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바트슈투버 본인은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하던 도중 경고를 받았고, 이로 인해 경고 누적으로 결장해야 했다. 자신의 두번째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출전을 놓친 셈.[4] 심지어 바트슈투버 외에도 알라바, 루이스 구스타부까지 레알과의 치열한 승부로 인해 경고누적으로 빠지게 되면서 팀 입장에서는 아쉬운 상황이 벌어졌다. 상대인 첼시 FC도 전력 누수가 심한 상황이었지만, 실제 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혈전 끝에 첼시가 바이언을 꺾고 우승했다. 결국 바이언은 준우승만 3번으로 일명 콩레블을 달성했고, 바트슈투버도 개인으로 아주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래도 이 시즌이 바트슈투버 개인에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첫 시즌에는 주전이었지만 다소 미숙했고, 두번째 시즌에는 크게 부진했는데 이 시즌의 경우 빅클럽의 주전 멤버로 올라설만한 재능을 입증했다는 평이 많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독일 센터백 중 마츠 후멜스와 더불어 가장 앞서나가던 선수였고, 이 당시엔 보아텡이 바트슈투버보다 아쉬운 평을 받았다. 심지어 국가대표팀에서는 페어 메르테자커도 바트슈투버보다 입지가 좁았을 정도. 종합해보면 나이에 비해 영리하고 빌드업과 수비에 모두 능한 자원이라 고평가를 받던 특급 유망주였다.

2011-12 시즌: 50경기(선발 46경기) 0골 3도움
<rowcolor=#fff>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33 32 1 0 2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챔피언스 리그 10 10 0 0 1
포칼 5 5 0 0 0
합계 50 49 1 0 3

2.1.5. 2012-13 시즌

2012-13 시즌은 시즌 시작 전에 왼쪽 풀백들이 줄부상을 당하는 변수가 생겼다. 이로 인해 하인케스 감독은 바트슈투버를 왼쪽 풀백에 기용하고, 보아텡과 새로 영입한 단테를 센터백 듀오로 내세웠다. 바이언은 시즌 초부터 상당히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고, 바트슈투버 역시 지난 시즌에 이어 준수한 경기력으로 팀에 공헌했다.

바이언이 이 시즌 리그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패배를 기록한 9라운드 바이어 04 레버쿠젠전에 바트슈투버는 선발로 출전했으나 레버쿠젠의 공격을 막지 못했고, 부상으로 인해 일찍 교체되었다. 이때 당한 근육 부상으로 잠시 쉬었고, 그 사이 알라바가 부상에서 복귀하여 알라바-보아텡-단테-람의 포백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보아텡은 이때도 믿음을 완전히 얻지 못했고, 바트슈투버는 부상 복귀 후 보아텡과 판바위턴을 밀어내며 주전 센터백으로 경기에 나섰다.

주전 센터백으로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바이언은 15라운드에 최대의 순위 경쟁자인 도르트문트를 대면하였다. 바트슈투버는 주전 멤버로서 이 경기도 선발로 출전했으나, 당시 도르트문트의 에이스였던 마리오 괴체와 충돌한 후 부상으로 전반 37분만에 교체되었다. 그리고 경기 후 진단 결과 십자인대 부상으로 밝혀졌다. 이 부상은 이후 바트슈투버가 커리어 내내 부상을 달고 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이었지만, 바이언은 그때까지 팀과 독일의 미래를 책임질 수비 유망주로 맹활약하던 그에게 재계약을 제시했고 2013년 2월 3일, 2017년까지의 연장 계약이 발표되었다. 빠르게 복귀하기 위해서 바트슈투버는 공백 기간동안 노력을 거듭했다. 그 기간동안 바이언은 순항하면서 리그 1위를 달성하고, 챔피언스 리그와 포칼 결승전에 나란히 진출하며 이전 시즌에 실패했던 트레블을 다시 노리게 되었다.

그런데 리그 최종전을 마친 직후였던 2013년 5월 19일, 바트슈투버의 십자인대가 다시 파열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팀이 챔피언스 리그와 포칼 결승전을 앞둔 상황에서 전해진 비보기도 했다. 바이언은 남은 결승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이전 시즌 콩레블의 아쉬움을 지웠고, 바트슈투버도 경력에 트레블을 남기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커리어에는 심각한 악재가 발생하였다.

2012-13 시즌: 18경기(선발 17경기) 0골 2도움
<rowcolor=#fff>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12 12 0 0 1
챔피언스 리그 4 4 0 0 1
포칼 1 1 0 0 0
슈퍼컵 1 0 1 0 0
합계 18 17 1 0 2

2.1.6. 2013-14 시즌

시즌 시작 이전에 이미 십자인대 부상 재발로 인하여 시즌의 대부분을 날리는 것이 확정되었다. 재파열로 인해 바트슈투버 본인도 기존 인대를 재건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고, 자가이식을 선택해 왼쪽 다리의 슬개건을 조금 떼어낸 후 우측 무릎의 십자인대 역할을 하도록 이식했다. 수술 자체가 워낙 큰 편이라 처음 두 달 정도는 목발 없이 걷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2014년 3월까지 넘어간 시점에서야 간단한 훈련을 소화했고, 5월부터는 1군 훈련에 참여했다. 하지만 실전 감각이 떨어졌고 무리하게 복귀하면 부상이 재발할 가능성도 있었기에 이번 시즌은 완전히 쉬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시즌 내내 바트슈투버는 벤치조차 한번도 앉지 못한 채 1년을 보냈다. 부상 기간동안 인터뷰를 할 때마다 반드시 이겨내서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팬들도 불운한 부상이 있었지만 복귀 후 기량을 회복할 가능성을 믿으면서 바트슈투버를 기다렸다.

2.1.7. 2014-15 시즌

펩 과르디올라가 부임한 후 첫 시즌을 아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시즌에야 과르디올라 밑에서 사실상 첫 시즌을 소화하게 됐다. 월드컵이 종료된 후 진행된 프리시즌에 바로 참여했고, 7월 FC 메밍겐과의 친선경기에 출전하면서 약 19개월만에 경기를 소화하였다. 근데 머리가 빠박이가 됐다.. 대체 왜..[5]

과르디올라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의 전술 체계 자체는 크게 바뀌었지만, 바트슈투버가 워낙 펩이 좋아할만한 강점을 많이 갖춘 선수였기에 주전 경쟁 전망은 긍정적이었다. 펩은 실제로 바트슈투버의 빌드업 능력을 극찬하기도 했으며, 프리시즌 내내 그를 주전조로 분류하여 많은 기회를 주었다. 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바트슈투버는 포칼에서 프로이센 뮌스터를 상대로 선발 출전하며 공식전에 복귀했고, 리그 개막전 VfL 볼프스부르크전도 선발로 소화했다. 바이언의 수비진은 초반에 다소 흔들렸지만 바트슈투버는 그 기회를 제대로 꿰차면서 바로 주전이 됐고, 장기부상에서 돌아왔다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준수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단테가 노쇠화로 인해 부진하고 있던지라 바트슈투버가 보아텡, 베나티아와 함께 주전 스리백을 형성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리그 3라운드 VfB 슈투트가르트전에서 전반 43분만에 통증을 호소하며 교체되었고, 수술을 필요로 하는 대퇴부 부상이 판명되었다. 부상으로 인해 전반기 아웃은 거의 확실시되는 중. 십자인대 부상까지는 불운의 영역이었으나, 이 부상을 계기로 잔부상이 늘어나 아예 유리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반기를 완전히 쉰 후, 바트슈투버는 1월에 친선경기를 소화하며 복귀했다. 리그가 재개된 후에는 컨디션을 올릴 시간이 필요했기에 단테가 주전으로 나서고, 바트슈투버는 교체 멤버로 대기했다. 21라운드 함부르크 SV전에 바트슈투버는 선발로 복귀했고, 팀은 8-0 대승을 거두면서 기분 좋게 복귀전을 치렀다. 얼마 후에는 챔피언스 리그 16강 샤흐타르 도네츠크전도 교체로 소화하면서 간만에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 복귀했다.

복귀한 후 보아텡과 더불어 주전으로 기용되며 입지를 회복했고,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샤흐타르전에는 득점까지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바트슈투버의 활약상은 그야말로 빛났는데 1차전을 0-0 무승부로 마친지라 다소 위기에 처했던 바이언은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7-0 대승을 거둬 8강에 진출했다. 현재 기량으로는 단테보다 확실히 나은 상태이고, 베나티아 역시 부상이 잦기 때문에 안정적인 입지를 가져갈 듯하다. 베나티아가 복귀하더라도 주전 경쟁에서 밀릴만한 경기력은 아니고, 베나티아까지 포함한 스리백이 가동될 수도 있다.

팀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국가대표팀에도 복귀했지만 차출되어 경기를 치르다가 경미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팀으로 조기 복귀했다. 다행히 이번 부상은 굉장히 짧았기에 한 경기만 쉬고 바로 전력에 복귀했다. 챔피언스 리그 8강 FC 포르투전에 교체로 투입되었으나, 팀이 1-3으로 패배하면서 다소 아쉬운 결과를 냈다. 이후 28라운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전을 교체로 짧게 소화한 후, 29라운드 TSG 1899 호펜하임전에는 풀타임을 소화했다.

바트슈투버가 충분히 컨디션을 회복했다고 판단한 펩은 8강 2차전 포르투전에 그를 선발로 내세웠다. 당시 바이언은 1차전 충격패로 인해 탈락의 위기에 몰렸고, 바트슈투버를 과감히 기용한 이유도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바트슈투버는 그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여 수비적으로도, 전개 면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쳤으며 1도움까지 올려 6-1 대승에 공헌하였다. 덕분에 바이언은 대역전극을 바탕으로 4강 진출까지 확정지었다.

하지만 이 경기를 마친 후 허벅지 근육 부상을 당했고, 또 수술했다. 당연하게도 시즌 아웃 판정이 나오면서 막바지를 또 지켜만 봐야 하는 입장이 됐다. 그가 부상으로 빠진 후 바이언은 남은 리그 5경기 중 3경기에서 패배했고,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FC 바르셀로나에게 1차전, 2차전에 도합 5실점을 당했다. 게다가 포칼에서 승부차기 끝에 도르트문트에게 패배하기까지 했다. 바트슈투버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더 나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챔피언스 리그 16강과 8강 모두 바트슈투버의 복귀와 함께 불리한 전세를 뒤집었던 전례가 있기에 그의 공백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부상을 자주 당해서 팬들 사이에서의 여론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도 결국 리그 우승 축하파티에 참가하지 못하고, 유니폼만 선수들이 대신 들어주었다. 복귀할 때마다 폼은 상당히 좋았고, 재능과 멘탈을 모두 갖춘 선수여서 안타깝다는 반응이 많다. 특히 펩의 눈에 들어온 재능이라는 점은 그의 가치를 잘 보여준다.[6]

2014-15 시즌: 16경기(선발 12경기) 1골 1도움
<rowcolor=#fff>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10 9 1 0 0
챔피언스 리그 4 2 2 1 1
포칼 2 1 1 0 0
합계 16 12 4 1 1

2.1.8. 2015-16 시즌

지난 시즌 막판에 당한 부상의 여파로 이번 시즌 초반까지 결장하였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4차전 아스날 FC전에 교체명단으로 복귀하였고, 리그 12라운드 슈투트가르트전에 교체 투입되어 시즌 첫 경기를 소화했다. 다만 부상이 잦은 선수기도 하고, 실전 감각이 떨어져서 선발보다는 후보 내지는 교체 멤버로 시즌을 치르는 중.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5차전 올림피아코스전을 오랜만에 선발로 소화했지만,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그래도 퇴장과 별개로 경기력 자체가 나쁘진 않았기에 2015년 말미에는 리그 경기를 선발로 소화하였다.

겨울 휴식기에도 부상 없이 컨디션을 유지했고, 리그 재개 후 첫 경기인 18라운드 하노버전을 풀타임으로 소화하면서 팀 승리에 공헌하였다. 하지만 이 경기를 치르던 도중 파트너 보아텡이 장기 부상으로 이탈했고, 훈련 도중 하비 마르티네스까지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이미 베나티아도 장기부상으로 이탈했기 때문에... 졸지에 유리몸인 바트슈투버가 팀 내 유일하게 정상 출전 가능한 센터백이 되었다.

스쿼드가 무너진 상황에서 펩은 궁여지책으로 미드필더 유망주인 요주아 키미히를 센터백으로 내려 바트슈투버와 함께 기용했고, 기술적인 면에서는 완성도가 아주 높은 조합이었기에 생각보다 준수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다시 부상만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번에야말로 바이언의 주전으로 복귀하여 경력을 되살릴 기회가 온 셈이었다.

하지만 포칼 8강 보훔전 출전을 마지막으로 훈련을 소화하던 도중 2월 14일에 발목 골절을 당했다. 또 시즌아웃이 확정되면서 네 시즌 연속으로 시즌을 조기 마감했다. 바트슈투버는 애초에 출전 시간 관리가 필요한 유형이었는데, 모든 수비수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그의 부상 리스크를 커버해줄 선수가 없었고 불운이 계속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바트슈투버가 빠진 이후 팀은 키미히 옆에 알라바를 세워서 전문 센터백이 없는 상태로 경기를 치르기도 했고[7] 새로 급하게 영입한 세르다르 타스치도 일단 가용 자원이기는 했다. 하지만 타스치는 기량 자체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 얼마 출전하지도 못했고, 베나티아는 주기적으로 부상과 복귀를 일삼으며 신임을 얻지 못했다. 결국 하비와 보아텡의 복귀 전까지는 알라바-키미히가 센터백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어떻게든 시즌을 버텼다.

이 시즌을 기점으로 제바스티안 다이슬러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유리몸이라는 평을 듣게 됐다. 지나치게 부상이 잦기 때문에 바이언 팬덤에서도 바트슈투버에게 등을 돌리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스 출신의 상징성,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이탈이 잦으니 더이상 끌고 갈 수 없다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내칠 수 없다는 팬들도 있어서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2015-16 시즌: 9경기(선발 7경기)
<rowcolor=#fff>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7 5 2 0 0
챔피언스 리그 1 1 0 0 0
포칼 1 1 0 0 0
합계 9 7 2 0 0

2.1.9. 2016-17 시즌

바트슈투버의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큰 신뢰를 보여주던 펩이 떠나고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새로 부임했다. 다시 전술적으로 큰 변화가 생길 상황이라 그만큼 자신의 모습을 프리시즌에 각인시켜야 했으나... 이번 프리시즌에도 허벅지 부상을 당하면서 제대로 소화하질 못했다. 10월에 다시 팀으로 복귀하였고, 포칼에서 교체로 복귀전을 치렀지만 안첼로티 감독의 스타일이 아닌지 거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경기를 못 나오다보니 어째 부상은 다시 당하지 않았지만, 부상 후에도 기막힌 기량을 유지하던 바트슈투버의 전성기도 이 때를 기점으로 끝났다고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11월에는 경기 감각을 찾기 위해 2군 팀으로 잠시 내려가서 1경기를 소화하였다.

2017년 1월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맨체스터 시티 FC로의 임대 링크가 뜨고 있다. 맨시티도 수비자원 보강이 필요한 상태고, 뮌헨도 바트슈투버를 당장은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인듯. 펩 감독은 바이언 시절부터 바트슈투버의 재능을 상당히 잘 활용한 감독이라 간다면 서로에게 좋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2016-17 시즌: 3경기(선발 1경기)
<rowcolor=#fff>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1 0 1 0 0
챔피언스 리그 1 1 0 0 0
포칼 1 0 1 0 0
합계 3 1 2 0 0
2.1.9.1. FC 샬케 04 (임대)
여러 이적설이 있었지만, 결국 독일 내 다른 팀인 샬케 04로의 임대가 확정되었다. 수비진의 줄부상으로 인해 샬케에서 중용받을 것으로 보인다. 기간은 2016-17 시즌 종료시까지이다.

당초 영입 당시 불안한 반응이 주를 이뤘으나, 의외로 3월달까지 부상을 당하지 않고 있으며 무난하게 준주전급으로 경기를 소화하고 있다.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상황에 따라 꾸준히 경기에 출전 기회를 얻었다. 아주 빼어난 수준까진 아니었어도 샬케가 그를 영입한 의도에는 적절히 들어맞는 경기력을 보여준 편. 다만 바트슈투버의 기대치를 생각해보면 확고한 주전이 되지 못한 점은 아쉽고, 몇몇 경기에서는 단점을 드러내며 부진하였다. 특히 유로파 리그에서는 단 한 경기 출전에 그쳤다.

최종적으로 리그에서 10경기를 소화했고, 출전하지 못한 다른 경기에는 모두 꾸준히 서브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간만에 건강하게 시즌을 마쳤다. 친정팀인 뮌헨과의 경기는 리가와 포칼, 두 차례 모두 출전했는데 포칼에선 퇴장을 당했다. 파울을 당한 로번이 퇴장감이 아니라고 심판에게 어필하는건 덤.

시즌 후 샬케로의 임대 기간이 만료되어 바이에른 뮌헨으로 복귀하게 되었지만, 바트슈투버 본인도 이제는 새로운 도전을 할 때로 판단하였고, 바이에른이 2017년 여름을 끝으로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것을 발표하였다. 다른 팀으로의 이적이 확실해 보이며, 잉글랜드 팀과 독일 팀들과 링크가 보인다.

2016-17 시즌: 12경기(선발 11경기)
<rowcolor=#fff>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10 10 0 0 0
유로파 리그 1 0 1 0 0
포칼 1 1 0 0 0
합계 12 11 1 0 0

2.2. VfB 슈투트가르트

자유계약으로 풀린 이후 여러 팀과 연결됐는데, 결국 2017년 8월 5일 유스 시절의 친정팀 슈투트가르트와 1년 계약을 맺었다.

2.2.1. 2017-18 시즌

분데스리가 1라운드에서 교체로 투입되면서 슈투트가르트에서 데뷔했으며, 2라운드에서는 결승 골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로도 티모 바움가르틀, 벵자맹 파바르와 주전 쓰리백을 형성하여 주전으로 기용되고 있으며, 경기 감각이 회복됨에 따라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반기 최종 키커 평점은 2.91. 이는 센터백 중 나우두, 장-필립 바맹, 마츠 후멜스의 뒤를 이은 4위의 수치로, 바트슈투버가 전반기 동안 슈투트가르트 수비에서 핵심적인 역할 수행을 했음을 보여준다. 후반기에는 전반기에 비해 다소 페이스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슈투트가르트의 주전으로 활약했고, 슈투트가르트 선수 중 키커 평점 4위, 골키퍼 제외 시 3위에 올랐다. 이 시즌에도 부상은 있긴 했지만 자잘한 수준이었고 큰 부상을 피하면서 몇 년 만에 제대로 시즌을 소화했다.

시즌 종료 후 SS 라치오와 연결되었고, 본인도 해외로 진출해 다시 챔피언스리그에 재도전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결국 슈투트가르트와 2021년까지 재계약을 체결했다. 슈바벤에서 다시 축구 인생에서의 재도약의 기회를 얻은 것이 크게 작용한 듯.

2.2.2. 2018-19 시즌

2018-19 시즌 초에는 여전히 슈투트가르트의 주전 멤버로 출전했지만, 또 다시 부상의 악령이 그에게 찾아왔다. 거기에 그도 나이가 있었으니 전 시즌에 비해서 기량이 다소 저하된 기미도 보였다. 결국 시즌 중반에는 한동안 자리를 비웠고, 복귀 후에도 풀핏을 만들지 못해 벤치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최종전에서 간만에 선발로 출전해 클린시트를 이끌긴 했지만, 팀은 16위로 강등 플레이오프로 갔고, 플레이오프에서 1. FC 우니온 베를린을 만나 1차전 홈에서 2대2로 비기고 2차전 원정에서 0대0으로 비기며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해 강등되었다. 2차전 경기도중 오잔 카바크와 충돌하는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2.2.3. 2019-20 시즌

2019-20 시즌에는 팀이 강등당했으나 팀에 잔류하면서 다시금 의지를 보이는 중. 시즌 내내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하며 2부리그 상위권을 질주하는 슈바벤의 주축 멤버로 입지를 다졌다. 겨울이 지난 후 또 다시 부상을 당해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25라운드에서 복귀하자마자 다시 선발로 나와 풀타임을 소화했다. 팀은 2위로 승격.

2.2.4. 2020-21 시즌

2020-21시즌 미슬린타트 단장과 과도한 급료를 이유로 재계약 협상을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결국 리저브팀으로 강등되었다.

2021년 7월 12일 스위스 슈퍼 리그FC 루체른으로 이적하였다.

2.3. FC 루체른

2021년 12월 17일, 상호 합의 하에 계약 해지 후 팀을 떠났다.

2.4. 은퇴

2022년 9월 5일, 개인 SNS를 통해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 이후 코칭 교육 과정을 밟을 것이라 언급했다.

3. 국가대표 경력

바이에른에서 1군에서 승선된 후 2010 남아공 월드컵에도 승선된다. 다만 그때는 198cm의 거인 페어 메르테자커가 버티고 있었고 왼쪽에도 아르네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조별리그 호주전은 선발출장했으나 그 이후로는 벤치나 교체 출장.

허나 유로 2012때는 상황이 완전 바뀌었는데, 아르네 프리드리히의 국가대표팀 은퇴와 메르테사커의 부상, 그와 대비되는 바트슈투버의 급격한 기량 발전으로 인해 주전으로 뛰었다. 이 당시 중앙 수비 라인은 마츠 후멜스와 바트슈투버가 책임지고 있었으며, 독일 수비진의 미래를 책임질 자원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2012년 말에 안타깝게도 장기 부상을 당한 후 국가대표팀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부상에서 돌아와 좋은 폼을 보인 덕분에 2015년 3월, 일카이 귄도안과 함께 다시 국대에 승선했다. 그러나 돌아온 첫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 때 당한 부상으로 바이언에서의 커리어도 다시 꼬였고, 국가대표팀에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사실 동 나이대 독일산 센터백 중 바트슈투버는 가장 앞서나가는 선수였다. 그보다 1년 먼저 태어난 마츠 훔멜스, 제롬 보아텡조차 바트슈투버보다는 후순위 선수로 여겨졌었고, 이들이 빛을 본 건 바트슈투버가 자리를 비운 이후였다. 보아텡의 경우 소속팀에서까지 바트슈투버에게 밀려있다가 그가 부상당한 후 주전으로 승격했고, 그 뒤로도 불안한 모습을 종종 보여줬으나 경험치를 흡수하면서 결국 월드클래스의 반열에 올랐다. 한편 훔멜스는 2010 월드컵 당시 바트슈투버에 밀려 승선하지 못하는 등 출발은 명백히 뒤쳐진 상황이었으나 그가 부상당한 이후 탁월한 빌드업 능력을 기반으로 주전에 등극했다. 만일 바트슈투버가 괴체와 충돌하지 않아 부상당하지 않았다면 보아텡이 이 정도로 높은 위상에 있지 못했을수도 있고, 훔멜스 역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바이언의 트레블과 독일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주전 멤버는 바트슈투버였을 가능성 역시 높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아쉬운 일.

4. 플레이 스타일

본래 수비형 미드필더 출신으로, 프로에서의 경력은 수비수 자리에서 쌓았다. 센터백이 메인 포지션이고 풀백도 겸업하였는데 몇 차례의 장기 부상을 겪으면서 센터백에 고정되었다.

최대의 강점은 지능적인 수비와 특유의 독특한 빌드업 능력. 경기 전체의 흐름을 읽고 상대의 패스 길목을 차단하거나 경기 조율을 돕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센터백으로는 굉장히 유니크한 강점이었다. 빌드업 역시 수준급으로, 순식간에 전방으로 내지르는 롱패스 하나 하나가 굉장히 날카로웠다. 펩은 롱패스를 즐기는 선수를 그리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바트슈투버는 거기에서 예외가 될 정도로 먼 거리까지 날카로우면서 정확한 패스를 공급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왼발 킥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데뷔 시즌에는 프리킥으로 득점한 적이 있었고, 후방에서 자신의 킥력을 활용하는 플레이가 능숙했다. 왼발 킥력이 뛰어나다는 장점은 바트슈투버가 왼쪽 풀백 자리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전반적으로 미드필더 출신다운 장점을 센터백 자리에서 능숙하게 풀어나갔으며, 여기에 수비 감각도 갖추고 있다는 점이 고평가를 받았다.

뛰어난 면을 많이 갖춘 선수였지만 명확한 단점도 있었다. 신체 능력은 전반적으로 그리 좋지 못했는데, 몸싸움이 아주 나쁜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그의 피지컬에 비하면 경합이나 헤더는 평범하였다. 또한, 발이 굉장히 느려서 빠른 상대를 만나면 고전하였다. 데뷔 시즌에 맨유를 상대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크게 당한 적이 있었고 그 후 리그나 국가대표에서도 종종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장기 부상을 겪은 이후에는 안 그래도 느렸는데 더 느려져서 측면 수비수로는 더이상 뛰지 않았다. 간혹 레드카드를 받는 상황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느린 발을 커버하기 위해 무리한 플레이를 했던 점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지능적인 선수임에도 실수가 나오면 페이스가 무너지면서 흔들리는 경향도 있었다. 2012년 독일의 국가대표 경기 중 스웨덴과 4-4 무승부를 거둔 경기가 있었는데, 독일이 먼저 크게 앞서나가고 있었지만 바트슈투버의 실책을 계기로 급격히 흔들려서 나온 결과였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한때 독일과 바이언의 팬들 사이에서는 못미덥다는 평이 나왔으나 그럼에도 그를 대체하기는 어려웠으며, 부상 이후에는 오히려 멘탈적으로 안정을 찾아 실책에 흔들리는 면모는 오히려 줄었다. 그냥 경기를 못 나와서 문제였을 뿐.

그의 국가대표팀 파트너이자 동 시기에 주목받았던 마츠 후멜스와 비교해보면, 후멜스는 더 능동적으로 경기에 영향을 미치려는 성향이 있었다. 반면 바트슈투버는 라인을 올리지 않고 지정된 구역에서 상대의 공을 뺏는 유형이었다. 당시 가장 주목받던 리베로형 센터백인 후멜스와 비교해보면 훨씬 정적이긴 했지만, 바트슈투버 역시 후방에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플레이가 가능한 선수였기에 큰 기대를 받았다. 수비 안정감에서는 유망주 시절 바트슈투버가 조금 더 나은 평을 받기도 했으나, 두 선수의 조합은 빌드업을 중시한다는 성향이 겹쳐서 유로 2012에서 이탈리아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 다른 파트너이자 경쟁자였던 제롬 보아텡과 비교해보면 빌드업에 능하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신체 능력이 좋아 과감한 플레이를 즐기는 보아텡과 달리 바트슈투버는 정적으로 경기를 풀어나간다는 차이가 확실했다. 오히려 이런 캐릭터성의 차이가 있었기에 바트슈투버와 보아텡은 장단점을 커버하면서 좋은 궁합을 보여줬다.

종합해보면 현대적인 센터백 유망주로 2010년대 초반에 각광을 받았고, 당대 최상위 성적을 거두던 팀인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 국가대표팀 모두에서 주전으로 뛸 정도로 재능이 빛났던 자원이었다. 왼발잡이인데다 지능적이고 빌드업이 능숙한 선수였기에 어느 팀에서나 높은 평가를 할만한 선수였고, 명확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용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한 차례의 큰 부상을 기점으로 부상 빈도가 심각하게 높아졌고, 이로 인해 차츰 기량이 떨어져서 안타까움을 샀다.

확실한 재능을 지닌 선수기는 한 것이, 한 번의 장기 부상으로 폼이 떨어지는 않았다. 애초에 지능으로 승부하는 유형이었기에 19개월의 공백을 거쳐 신체 능력이 저하된 이후에도 바로 바이언의 선발 자리에 들어왔으며, 특유의 빌드업은 여전하다는 평을 받았다. 복귀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팀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기막히게 복귀하여 안정화를 돕고 다음 라운드 진출에 공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이어진 부상 악령을 떨쳐내지 못하면서 기량 저하가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바이언을 떠난 후에는 부상 빈도가 내려가면서 나름 경력을 이어갔으나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5. 기타

  • 축구선수 출신으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코치였던 헤르만 바트슈투버 (1957 ~ 2009)의 아들이다.
  • 독일과 바이에른에서 싱글, 솔로의 아이콘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남들은 여자친구와 모일 때 남자와 같이 커플티를 맞춰 입고 오는 비범함을 뽐냈다. 여타 싱글 축구선수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싱글이 된 축구선수들을 어김없이 포섭하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다.
    • 그런데, 솔로의 아이콘, 이상하게 챙겨주고픈 쩌리같은 이미지로 덕후들을 많이 끌어모으던 홀거는 어느 날 갑자기 같이 다니는 여자가 생겼다. 워낙 SNS에 그런 사생활은 안 올리는 쪽이라 당시에는 연애여부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제 모솔, 싱글의 아이콘은 살짝 탈피하게 됐다.
    • 이후 바이언 공식 홈피의 개인정보란을 통해서 결혼까지 했음이 드러났다.
  • 머리숱이 풍성했을땐 나름대로 훈훈한 외모를 자랑했으나 어느순간부터 탈모가 진행되며 지금과 같은 대머리가 되었다.
  • 뮌헨 성골답게, 모르는 선수가 없고 안 친한 선수가 없다. 뮌헨의 숨은 친목왕.

6. 같이 보기

1 노이어 · 2 얀센 · 3 프리드리히 · 4 아오고 · 5 타스치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 9 키슬링
10 포돌스키 · 11 클로제 · 12 비제 · 13 뮐러 · 14 바트슈투버 · 15 트로호프스키 · 16 ⓒ · 17 메르테사커
18 크로스 · 19 카카우 · 20 보아텡 · 21 마린 · 22 부트 · 23 고메스
파일:독일 국기.svg 요아힘 뢰프

1 노이어 · 2 귄도안 · 3 슈멜처 · 4 회베데스 · 5 후멜스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 9 쉬얼레
10 포돌스키 · 11 클로제 · 12 비제 · 13 뮐러 · 14 바트슈투버 · 15 벤더 · 16 ⓒ · 17 메르테사커
18 크로스 · 19 괴체 · 20 보아텡 · 21 로이스 · 22 칠러 · 23 고메스
파일:독일 국기.svg 요아힘 뢰프

[1] /ˈhɔlɡɐ ˈbaːtˌʃtuːbɐ/[2] 그 당시의 루이스 반 할 감독은 토마스 뮐러와 홀거 바트슈투버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바트슈투버에 대해서 독일 내 최고의 왼발 수비수라고 칭찬한 적도 있다. 2010-11시즌을 대차게 말아먹긴 했으나 디에고 콘텐토다비드 알라바도 그렇고 좋은 인재를 많이 발굴한 건 분명하다.[3] 보아텡은 실수가 잦아 구멍텡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고, 이 시즌에는 판바위턴에게 간혹 자리를 내주는 등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4] 바이언은 그 다음 시즌에도 결승에 진출했으나, 이때도 바트슈투버는 십자인대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데뷔 시즌에 경험한 결승전이 그의 마지막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무대가 됐다.[5]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새 시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길었던 머리를 자르는 것도 그 일환이었던 모양.[6] 펩은 이후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한 후에도 부상으로 기량이 많이 내려간 바트슈투버의 영입을 검토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를 높게 평가했다.[7] 이때는 알라바가 대부분을 풀백으로 뛰었기에 신기하게 보는 반응이 많았지만, 몇 년 후 센터백으로도 많은 경기를 소화하면서 바이언의 두번째 트레블에 공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