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 강 동편에서 바라본 미냐 시가지 | |
미냐 시내의 거리 | 근대 구역의 고급스러운 모습 |
1. 개요
아랍어 المنيا콥트어 ⲧⲙⲱⲛⲏ
영어 Minya
이집트 중부의 도시.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200여 km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 100km 더 가면 나오는 아시유트처럼 나일 강 서안에 시가지가 위치한다. 지명은 고대 이집트 시기 지명인 메나트 쿠푸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지인들은 상하 이집트를 이어주는 미냐를 '상이집트의 신부'라 지칭한다. 비슷한 입지를 지닌 아시유트와 마찬가지로 미냐 역시 60만의 주민 중 절반이 콥트 기독교도이다.
남북으로 길쭉한 시가지 북쪽 끝에는 미냐 대학교가, 서쪽에는 교도소와 공군 기지가 있다. 강 건너편에는 아케나톤 박물관이 있고 그 너머 황무지를 신도시로 개발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인구가 2012년에서 9년만에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경제적으로는 석회암이 풍부하여 암석 채굴 및 시멘트 산업이 발달하였다. 남쪽 40km 지점의 나일 강 동안에 파라오 아케나톤의 수도였던 아마르나 (아케타텐) 유적이 있다.[1]
2. 역사
메나트 (미냐)를 뜻하는 이집트 상형문자
철도역을 기준으로 그 남쪽은 구시가지, 그 위쪽은 이른바 '식민 구역'인 근대 도시. 전자의 남쪽에는 서민 구역인 아르드 알 모울레드, 후자의 북쪽은 부촌인 아르드 술탄. 미냐는 이렇게 약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과거 혹은 현재의 부촌인 도심 북부 일대는 상이집트 지역에서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미냐는 상이집트에서 룩소르 (테베) 다음으로 고대 역사가 풍부한 곳이고, 아시유트보다 근현대사가 풍부하다.
2.1. 고대 이집트 (메나트 쿠푸)
베니 하산의 고분 벽화. 힉소스 인들의 이집트 도래를 묘사하여,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선왕조 시절 메나트로 불린 도시는 이집트의 16번째 노미에 해당되었고, 기원전 3100년 메네스의 통일 전까지 자치적인 도시 국가였다. 고왕국 시절에 일대는 오릭스 주로 불렸는데, 부근에 서식하는 오릭스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메나트는 나일 강을 통한 수운 외에도 홍해 연안에 상품을 하적하는 시리아 상인들과 교역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기원전 2550년 무렵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 쿠푸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후 메나트 쿠푸 (쿠푸의 요람)로 불리게 되었다. 고왕국의 멸망 후 1차 중간기 때에 메나트 쿠푸는 남쪽의 사우트 (아시유트) 처럼 사실상 독립하였다. 헤라클레오폴리와 테베 왕국의 다툼 속에서 현지 '오릭스 왕공'들은 중립을 유지하였는데, 바케트 3세에 이르러 테베의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와 동맹을 맺었다. 따라서 테베 주도의 통일과 중왕국 설립 후에도 해당 가문은 계속해서 오릭스 주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권력은 11왕조 무렵 가장 흥성하였다.
메나트 쿠푸의 왕공들은 나일 강을 굽어보는 동안의 석회암 절벽에 무덤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현대 미냐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베니 하산에 9기가 남아있다. 12왕조 들어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가 중앙 집권화 정책을 펴며 메나트 쿠푸 왕공들은 권력을 잃었다. 이후 2차 중간기 때에 일대는 나머지 하이집트와 함께 힉소스 인들에게 점령되었다. 현지 귀족들은 힉소스 15 왕조를 도와 테베의 16, 17 왕조에 맞섰다. 기원전 1552년 반격에 나선 테베 왕국이 힉소스와 처음으로 주요 전투를 벌인 곳도 메나트 남쪽 교외였다. 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는 메나트를 '아시아인들의 둥지로 만든' 페피의 아들 테티를 격파하였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카모세의 동생 아모세 1세가 북진하여 기원전 1540년경 힉소스 인들을 이집트에서 영구히 축출한다. 신왕국 때에는 사우트에 밀려 별 주목을 받지 못한 메나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들어 많은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2.2. 로마-비잔틴기
미냐 남쪽에 있던 헤르마모폴리스 (الأشمونين) 유적
로마 시대에 메나트는 이집트 목화 거래의 중심지였고, 그리스/로마인 목화 지주나 상인들이 거주하였다. 현 미냐에서 남쪽으로 30km 지점에는 당시 주도이자 토트 숭배 중심지이던 헤르모폴리스 마그나 (크메누) 유적이 남아있다. 다시 서남쪽으로 8km 가면 그 네크로폴리스 (공동묘지) 유적이 나오는데, 제사장 페토시리스 무덤이 유명하다. 서기 130년, 이집트를 순행하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동성 연인 안티노우스가 나일 강에서 익사하자 그를 기리고자 헤르모폴리스 건너편 나일 강 동안의 마을을 안티노폴리스로 명명하고 도시화하였다. 기독교가 전래된 후 328년에는 현 미냐에서 북쪽 10km 지점, 예수의 이집트 도피 시절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들 중 하나인 나일 강 동안의 바위 위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친 헬레네가 후원한 게벨 엘 테이르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 세워져 일대의 주요 성지가 되었다. 동로마 시기에는 현 미냐의 북쪽 30km 지점 옥시린쿠스가 주도였다.
2.3. 중세 이슬람기
10세기에 세워진 엘 라마티 모스크 | 11세기에 세워진 엘 아므라위 모스크 |
7세기 사산 제국에 이어 이슬람 정복 후 일대는 점차 아랍화되었고, 메나트의 발음도 무나야트로 바뀌었다. 압바스 왕조 들어 9세기 초엽 이집트의 명사인 이븐 카시브는 미냐를 매우 좋아했고, 후일 칼리파가 선행에 대한 보상을 물어보자 미나를 영지로 청하였다. 미냐로 은퇴한 이븐 카시브는 도시 발전에 힘을 기울인 후 몇년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도시를 그의 자식이라는 뜻인 '무나야트 이븐 카시브'로 불렀다. 파티마 왕조 시기 미냐는 대사원과 학교, 바자르, 공중 욕탕을 지닌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중 엘 라마티 사원과 엘 아므라위 사원이 두드러진다. 1326년 도시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상이집트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라 기록하며, 특히 그 학교를 칭찬하였다.
2.4. 근대
20세기 초엽 건설된 미나 철도역. 고대 이집트 건물을 모방한 장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메흐메트 알리의 지배기에 미냐는 그 비옥한 토지와 생산량 덕에 중시되었다. 특히 미냐 주변에 목화와 사탕수수 농장을 소유하던 이스마일 파샤의 시기에는 더욱 중시되었다. 그는 미냐에 행궁을 세우고 1870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시에 대한 근대화에 착수하였고, 도시 확장이 개시되었다. 1873년에는 그가 소유한 농장의 관개를 위해 아시유트까지 이어지는 이브라히미야 운하가 개통되었고, 이로써 도시 서부가 더욱 발전하였다. 운하에는 여러 다리가 놓였고, 운하 양편으로 시가지가 확장하였다.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1879년에는 무슬림 페미니스트이자 이집트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후다 샤라위가 미냐에서 출생하였다. 한편 19세기 중반 터진 미국의 남북 전쟁으로 질과 양 모두 높았던 이집트의 목화의 가치는 크게 올랐다. 이로써 미냐에는 지주나 관리, 상인 출신 재력가 가문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도심 북부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설계한 고전/로코코 양식의 저택을 세워 부촌을 이루었다.
20세기 들어서도 미냐의 건설붐은 계속되었고, 카이로와의 철도 건설도 시작되었다. 그 무렵 목화 무역을 위한 영국 영사관이 세워졌고, 1907년에는 그 경제력을 확인하듯 오스만 은행의 지점 역시 들어섰다. 1927년에는 법원, 1931년에는 소방서, 1937년에는 시의회와 시청이 세워졌다. 도시의 중심은 기존 구도심에서 북쪽 신시가지에 놓인 넓은 신작로 방면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1952년 군부 '혁명'과 1956년 수에즈 위기로 국유화가 진행되며 미냐의 그리스, 아르메니아 공동체는 국외로 떠났다. 이로써 '식민 구역'은 구도심과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60년대 들어서는 공공 주택 정책의 일환으로 구도심에 밀집된 저소득층을 위한 도시 남부의 아르드 알 모울레드가 개발되었다. 한편 부촌은 기존 북부에서 더 위에 세워진 계획도시인 아르드 술탄으로 옮겨졌고, 특히 타하 후세인 (1889년 미냐 북쪽 50km의 마가다에서 출생) 거리가 그 중심이다.
3. 참고
상이집트의 주요 도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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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데라 퀴나 | → | 키프트 쿠스 | → | 카르나크 룩소르 | → | 에스나 | → | 에드푸 | → | 콤옴보 | → | 아스완 아부심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