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2:46:50

물산장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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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결과4. 각종 패러디5. 기타6. 같이 보기

1. 개요

파일:jAjRHj7.jpg
우리가만든것우리가쓰자

광목태극셩[1]

그다음 農具(농구) 不老草(불로초) 山蔘(산삼) 三神山(삼신산) 내공으로[2] 天桃(천도)[3]

무엇보다 값이적고 물건조흔 조선광목

갓튼값이면다홍치마로
팔기나사기나이왕이면
조선사람 조선광목

우리손으로맨든
광목
당시 경성방직주식회사의 광고로, 사실상 한국 애국 마케팅의 시초격이자 물산장려운동을 대표하는 광고.[4]

물산장려운동()은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이 펼친 경제 자립 운동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과 함께 1920년대 민족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실력 양성 운동 중 하나이다.

2. 전개

3.1 운동 이후 1920년대 일제는 기존의 무단 통치로는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방향을 문화통치로 바꾸어 유화책과 회유책을 사용해 식민통치의 안정화를 꾀하기로 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 불황을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대에는 회사령이 폐지되고 회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자본력이 우위였던 일본 기업들이 조선으로 진출하려고 했다.[5]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조선 내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2년을 즈음해서 일본이 관세를 철폐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운동은 조선 물산 장려회를 중심으로 본격화되었고, 자작회나 부인회 등이 참여하였다.

운동 내용은 4글자로 요약하면 신토불이 되겠다. ‘조선 사람 조선 것’, ‘우리 것으로 살자’ 등의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조선 사람은 일본 등 타국의 물건 대신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는 운동이다. 평양에서 조만식 등의 조선 내 자본가들이 주도하여 시작되었으며 서울에 지부가 설치된 뒤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한반도 내 언론사들도 공조해서 앞다투어 물산장려광고를 실었는데 이 자쓰가리우...가 바로 그런 광고들 중 하나로 오늘날 물산장려운동의 면모를 소개하는 예시로 쓰이면서 유명해졌다.

물산장려운동의 행동강령 3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6]
  • 둘째, 우리 손으로 만든 토산품은 우리 것을 이용하여 쓴다.
  •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3. 결과

물산 장려 운동의 사상적 도화수가 된 것이 누구인가? 저들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계급적 의식으로 보나 중산 계급임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적어도 중산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대변인인 지식 계급, 또 솔선하여 물산 장려의 실행적 선봉이 된 것도 중산 계급이 아닌가.
실상을 말하면 노동자에게는 이제 새삼스럽게 물산 장려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네는 벌써 오랜 옛날부터 훌륭한 물산 장려 계급이다. 그네는 자본가, 중산 계급이 양복이나 비단옷을 입는 반면 무명과 베옷을 입었고, 또 저들 자본가가 위스키나 브랜디나 정종을 마시는 반면 소주나 막걸리를 먹지 않았는가?
....(중략)....
이리하여 저들은 민족적, 애국적이라 하는 감상적 미사로서 눈물을 흘리며 저들과 이해가 전연 상반된 노동 계급의 후원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으로 자각한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저들도 외래 자본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저들의 전략에 빠져 계급 전선을 몽롱케는 못할 것이다.
ㅡ 이성태.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 동아일보 1923.3.20
그러나 당시 조선의 공업은 대부분 기계화되지 않은 수공업이었기 때문에 생산성과 공급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물산장려운동 시작 이후 수요만이 늘어나자 공급자들은 생산을 늘리는 대신에 그냥 가격만 올려서 국산물품 가격이 폭등하였고 결과적으로 국내 자본가와 상인만 이득을 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우리는 외국 사치품 같은 거 쓴 적 없는데 이 운동 때문에 오히려 국산품 값이 오른다."라고 비판하였다. 이쪽 계열의 주장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면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와 '우린 이미 물산장려파다' 정도다. 전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오던 말이다. 일본인 자본이든 조선인 자본이든 결국 똑같이 농민들을 수탈하는 부르주아라는 것. 민중들은 이미 국산품마저 살 돈도 없었다.[7] 그리고 후자는 국산 기업이 만든 고무신 신을 것도 없이 이전부터 그냥 짚신 꼬아서 직접 만드는 등 이미 국산 임노동의 재화는 소비되고 있다는 것.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웬만한 물건들은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술은 직접 술 담가서 마시고 신발도 직접 짚신 만들어서 신었다. 당연히 이들 눈에는 그저 자본가를 위한 정책으로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일본 본토에 대한 쌀 이출이 증가하여 지주층이 흥했는데 이 지주층 중 대다수가 일본인 아니면 조선인 부호들이었다. 지주층이 산미증식계획으로 쌓아 놓은 돈으로 회사를 세웠고 관세가 철폐되고 경쟁이 심화되니까 조선인 기업이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운동을 벌인 것이다.

이런 점이 지적되어 1920년대 후반에는 민중의 외면을 받으면서 쇠퇴했다. 하지만 그나마 이어진 명맥도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인해 끊겨 버렸다.

부정적인 면이 많이 지적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의 영향으로 조선물산장려회와 사회주의 청년단체 서울청년회와 결합하여 '조선민흥회'가 만들어졌고 이 조선민흥회가 사회주의 단체장 모임인 '정우회'와 결합하여 1920년대 한국 독립운동 최대의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된 뿌리가 되었다.

4. 각종 패러디

맨 위의 경방 광고 이미지는 근현대 국어 표현과 쓰여진 방향이 현대 한국어와는 반대인 우횡서우종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많이 패러디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의 이름과 배경은 몰라도 저 광고와 '자쓰가리우것든만가리우'라는 문장만큼은 아는 사람도 많다. 또한 "물산"이 벤틀리 뮬산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벤틀리 장려운동"이라고 하기도 한다.

파일:attachment/korea-k2.jpg
K2 소총. '우리가 쓰자'가 아니라 '우리가 쏘자'라는 차이점이 있다.

파일:attachment/1839D9584E1E85D122EDB3.jpg
AVA로도 패러디되었다. 캐릭터는 목긴스나.

파일:attachment/kor_ani_main.png
한애갤에서도 패러디했다. 캐릭터는 롤링스타즈수지.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08619632db1g2SJV33y2ShNOS72tChC64.jpg
마이 리틀 포니 투니버스 더빙 관련 패러디도 등장했다.

한 트위터리안이 위상수학 관련 패러디도 만들어냈다.

파일:239e56ba632d42494d11e13e3fdbc0112c650247bbdce69d389c18545a5d299c.webp
에어소프트 갤러리 채널에서도 패러디되었다.

2017년 10월 대성마이맥 사설모의고사에도 패러디가 등장했다.

5. 기타

6. 같이 보기



[1] 옛 한글 표기법으로, 태극'성(星)'을 의미한다. 다만 이 경우는 상표, 즉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태극셩이라고 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올바른 표기는 '오뚝이'지만 '오뚜기'는 회사명이라 괜찮은 것처럼.[2] 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내공이란 옷의 안감(안쪽에 덧대는 천)을 말하는 것이다. '안감용 천은 천도(天桃)라는 우리 브랜드 제품을 쓰라'는 의미로 보인다.[3] 경방에서 낸 광고임을 고려하면 불로초와 산삼을 포함해서 이들은 모두 경방의 제품 브랜드명으로 추정된다. 즉 경방 광목의 브랜드명이 태극셩인 것처럼 경방에서 취급하는 또 다른 상품들의 브랜드명이라는 것. 해당 항목들을 괄호로 묶고 아래에 “무엇보다 값이적고 물건조흔 조선광목”이라고 표기한걸 보면 저 이름들이 전부 광목 제품 이름임을 짐작케 한다.[4] 이와 함께 ‘今日부터 實行’이 쓰인 신문 기사도 자주 보이는 사료 중 하나. 당연하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5] 일반적으로 회사령의 목적은 조선인 자본 성장 방해로 이야기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총독부는 자신들의 통제가 닿지 않는 민간 회사의 난립 그 자체를 싫어했고 그 일환으로 회사령을 제정했다. 그래서 회사 설립 허가제는 일본 중소기업들도 싫어했다.[6]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된 후 그동안 무명옷으로도 만족했던 사람들이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온 수입품에 혹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사치를 부린 바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순수 국내 기업에서 생산되던 옷감과 의류제품의 다양성과 품질이 좋을 리 만무하므로 만약 소비자들이 품질 좋고 알록달록 예쁜 옷들을 찾는다면 필시 국산품을 비껴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국내 생산 기술/설비로도 생산 가능했던 무명옷을 입도록 전파한 것.[7] 어린이용 경제사 만화인 《아하! 그땐 이런 경제생활을 했군요》에서도 언급된다. 80% 이상이 국산이든 일제건 소비할 능력이 전무한 가난한 소작농이나 노동자들인데 자신들이 무슨 돈이 있냐며 피로에 쩌든 상태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8] 국산 아코디언은 경북 구미에서 생산하는 민들레뮤직 아코디언과 세창 아코디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