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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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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입문 전2. 정치 활동
2.1. 국회의장 시절2.2. 국회의장 시절 이후

1. 정치 입문 전

1945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가 의정부 지역의 대지주로, 교통부 철도공무원으로 18년간 근무하고 1972년 제1대와 1978년 제2대에 걸쳐 의정부 지역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말하자면 금수저. 경복고등학교(38회)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에는 1969년 해군사관후보생(50차) 과정을 거쳐 1970년 7월 11일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1975년 7월 31일 중위로 전역했다.

하지만 전역 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학생운동에 투신, 여러 번 감옥을 들락날락거렸다. 명석한 두뇌 덕에 행정고시[2]에 합격했으나 시위 이력 때문에 임용이 거부되고, 1980년대 반독재 투쟁을 벌이던 김대중 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인다. 의정부시가 전방 지역이고 원래 실향민이 많아서 레드 콤플렉스가 심한 지역인 데다가, 아버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할 정도로 박정희 지지자였기 때문에, 당시 "빨갱이"로 매도되던 김대중 밑에서 일하는 아들의 행동에 대노했다고 한다.

2. 정치 활동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이 총재로 있는 평화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김문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홍문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김대중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대중이 당선된 날 아버지 묘소에 가서 "아버지! 제가 간 길이 옳았죠!" 라고 오열했다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현직 국회의원인 홍문종과의 공천경합에서 이겨서 출마했고 무소속 홍문종, 한나라당 김문원과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3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자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3]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홍문종을 상대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05년에는 전당대회를 통해 열린우리당 의장이 되었으나, 연이은 재보궐선거 패배와 지지율 하락으로 인해 정세균 원내대표에게 의장직을 물려주고 사임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김상도 후보[4]를 상대로 당선되었다. 2010년까지 18대 국회 전반기 부의장을 지냈다.

다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다시 김상도 후보를 꺾고 당선, 5선 의원이 되었다. 이어 열린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 지도부가 사퇴하자[5] 첫 번째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계파색이 옅었기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후문. 이후 2013년 5월 전당대회에서 김한길 체제가 들어서기까지 당을 이끌었다.

이후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이[6] 각종 논란을 일으키고 사퇴하자 두 번째로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정세균 상임고문, 원혜영 전 원내대표와 더불어 당내 여러 인사들과 친화력이 높아 당내 대표적인 관리형 정치인으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셋 다 모두 범 친노계 인사로 꼽힌다.

2014년 말 땅콩회항 사건이 터진 가운데 2004년, 처남의 대한항공 취업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희상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7] # 이후 2015년 전당대회에서 열린 당 대표 경선에서 문재인 의원이 박지원 전 원내대표를 누르고 승리하면서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컷오프됐는데 "도대체 왜 짤린 거지?"가 대체적인 전문가의 의견이다. 취업 청탁 의혹이 있지만 이미 12년이나 지난 문제일뿐더러, 문희상의 지역구에 딱히 대체할 인물도 없어서[8]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조차도 분개했다고 한다. 결국 원래 지역구에 전략공천되었고, 6선에 성공했다.

야권의 승리와 더불어서 2016년 4월 현재 20대 국회의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계파색이 옅고 이제 나이도 많아서 이석현, 정세균보다 정계은퇴에 대한 부담도 적기 때문. 다만 2004년 취업청탁에 대한 구설수가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러나, 의장직을 건 당내 경선에서 정세균에게 패배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일본 특사가 되었다. 사실 일본통까지는 아니어도 일본과 나름대로 연이 있는 인물이다.

2017년 5월 17일날 열린 일본과의 외교회담에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 한일 양국, 한미일 삼국의 긴밀한 연계가 중요함을 강조하였고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박근혜 정부위안부 합의를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특사의 성격을 지닌 만큼 재협상 등의 요구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경우 회담에서 논의 되지는 않았지만, 추후 유지 여부는 새 정부가 정할 일이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아베 신조와의 만남에서 아베는 높은 위치의 의자에 앉고 문희상 특사는 낮은 의자에 앉게 해서, 일부러 이렇게 무시한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MBN 기사 2017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베 신조를 만났는데 여기서도 문희상이 앉았던 의자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고, 이때도 홀대론이 나왔다.

2017년 국회 본회의 출석율 100%를 기록했다. 다선의원들이 대체로 정당 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에 전념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기록이다. 문 의원을 제외하고 출석율 100%를 기록한 의원들이 모두 20명인데 모두 초선이나 재선, 높아봐야 3선 의원들이다. 결국 20대 국회 4년 임기 동안 본회의 출석율 100%를 기록한 40명 중 1명이 되었다.[9]

2.1. 국회의장 시절

20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 박병석과 함께 출마했다. 묘하게 민주당은 재수 성공률이 높기 때문에 차기로 유력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10]

2018년 5월 16일 더불어민주당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 선거에서 총 116표 가운데 67표를 얻어 박병석(47표)을 넉넉하게 제쳤다. 이후 여야 간 상임위 분배 기싸움으로 의장 선출이 연기 되었으나, 7월 10일 여야 원내대표들이 7월 13일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를 합의하면서 13일 본회의를 통해 20대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동시에 국회법에 따라 더불어민주당 당적이 국회의장 임기 동안 소멸되어 무소속이 되었다.

당 차원에서는 문희상의 지역구인 의정부시 갑은 당분간 직무대행체제로 한다고 했으나, 상임부위원장에 당 활동도 없이 서점만 운영하던 아들이 임명되면서 지역구 세습을 하려는 게 아니냔 당 내의 불만이 있는것 같다.#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 합의를 이끌어내며 "의정사에 남을 쾌거"라고 자화자찬했지만, 교섭단체 몫만 폐지하고 의장단 및 상임위원장단 몫 특활비는 반으로 삭감하는 수준에 그쳐 '꼼수 폐지'란 비판을 받았다. 이에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과의 협의를 통해 상임위원장단 몫은 완전 폐지하고 필수적으로 소요되는 의장단 몫 일부만 남기기로 하였다. 문 의장은 이 자리에서 완전 불용을 주장했으나, 유 사무총장이 끝까지 5억 원 정도의 특활비 유지를 주장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독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국민'의 뜻과 등가한 국회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작 두 달 전에는 '국민'의 국회 신뢰도가 바닥임을 인정했다. #

나경원 원내대표의 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 논란으로 국회가 시끄러워졌을 때, 양당의 모습은 공멸의 정치라며 의원들을 진정시키고 말이 안되는 소리라도 경청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며 영국 의회를 예를 들어 국회 질서를 바로잡기를 원하는 명연설을 하며 나 원내대표가 연설을 계속 하도록 했다. 이에 나경원이 '역시 민주당 소속 의장'이라는 발언을 하며 서로 간에 기싸움을 하기도 했다.

정세균에 이어 내각제 개편 내지는 국회 권한 강화에 앞장서고 있다. 국회의 뜻이 국민의 뜻과 동치되어야 한단 주장외에도 국회의원의 개별적인 외교 참여를 장려하고 있으며, 중국에 미세먼지 관련으로 국회차원의 사절단을 파견하려 했다가 중국 쪽에서 거절의사를 밝히기도 했다.#[11] 이미선 헌재 재판관 임명에 대해서도 헌법에 있는 대통령 임명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부적격이란 판단한 결의가 있으면 대통령은 임명을 안 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야 한단 입장을 보였다. 게다가 2019년 제헌절 축사엔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는 것이 촛불의 민심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12]

2019년 5월, 문 의장 발 의원외교 개혁 차원의 12개국 의회외교포럼이 출범했는데# 7월, 일본의 대한국 수출 제재 사태가 불거지며 한·일 의회외교포럼을 가동시키는 등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한일의원연맹과 별도 조직인 한일의회외교포럼은 구성이 화려한데, 문 의장은 그간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가장 오랫동안 맡아오기도 했고,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대일 특사단 단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이 포럼의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회장은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냈던 원내 최다선인 무소속 서청원 의원이 맡고 있다. 또한 현재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더불어민주당 강창일 의원과 경제부총리 출신 김진표 의원 등 중진-원로들이 포진해있다.

또 한일의회외교포럼 자문위원단에는 각각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이명박정부에서 주일대사를 지낸 최상용, 라종일, 신각수 전 대사. 한일협정 관한 한 국내외 최고 전문가인 이원덕 국민대 교수[13],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등이 포진해 있는데, 정파를 떠나 국익을 위해 대일관계에 관한 최고 역량과 경험을 갖춘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다소 감정적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 의장에 따르면 한일의회외교포럼을 중심으로 한 국회 대표단이 7월 말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데, 현재 양국의 갈등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 국회 대표단의 일본 방문에서도 이른바 ‘홀대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90년대 이후 일본의 정치 경제적 위상 축소가 이어지며 양국 정계에서 지일-지한파 정치인이 점점 사라져 왔는데, 원로급 인사들의 움직임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2020년 치러지는 21대 총선에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국회의장 직이 전통적인 정계 은퇴 루트인 만큼 아예 정계를 떠나거나, 혹은 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인 정의화처럼 원외에서 정계 원로로서 정치 행보를 계속할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후술할 아들 지역구 세습 논란 때문에 지역구에서 자신의 명성에 흠을 남기고 국회를 떠나게 되었다.

2.2. 국회의장 시절 이후

퇴임 이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는데, 주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선 송영길 서울시장 후보의 후원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재밌는 점은 1년 앞서 2021년 재보궐선거 중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섰던 박영선 전 장관의 당시 후원회장직도 문희상 전 의장이 맡아준 바 있다는 것.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송 후보가 국민의힘 오세훈 시장에게 참패하면서 빛이 바랬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민주당의 참패로 끝을 맺자, 뒤에 열린 당선자 워크숍에서 더불어민주당문재인 정부 때 특정 세력을 대변해 확증편향으로 기득권화 됐다고 작심한 듯 쓴소리를 했다.#

2023년에는 김어준가로세로연구소가 운영하는 미디어에 출연해서 거기에 휘둘리는 정치인은 국가를 경영할 자격이 없다고 또 쓴소리를 했다. 다만 김어준 미디어나 가세연을 일부러 없애려고 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

70대 후반의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모양인지 2023년 국립 5.18 민주묘지 참배를 위해 광주를 찾았을 때는 휠체어에 의존해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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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장산(長山) 문흥모(文興模,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라서 흥교(興敎)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흥모(興模)는 (字)라고 기재되어 있음.)는 1918년 2월 2일에 파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 전주 이씨 이정희(李貞姬)는 1924년 1월 16일 양주군에서 태어난 관계로 진정한 토박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그의 선조 역시 대대로 양주군에 뿌리를 두었다고 한다. 언론에 따르면 10여대째 토박이라고 한다.[2] 당시에는 3급 공무원 임용시험이었다고 한다.[3] 이후 한나라당 후보로 나온 홍문종이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나온 강성종을 상대로 이겼다.[4] 김상도는 차장검사 출신으로, 그의 일가도 의정부시 지역 유지였다. 형이 신시가지에 큰 예식장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5] 정확히 말해서 당 대표는 이해찬 대표의 조기 사퇴로 인해 대선 이전부터 공석이었고, 문재인 대선 후보가 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박지원 원내대표가 이를 돕는 형국이었다. 대선이 끝나고 문재인 전 대선 후보는 선거가 끝난데다가 패배한 입장에서 동력을 아예 잃었고, 박지원 원내대표도 사퇴하면서 비노계 박기춘 원내수석부대표가 원내대표 겸 비대위원장 직무대리를 하다가, 결국은 원내대표 선출이 끝나고, 박 의원은 원내대표직만 맡고 중립적 인사인 문희상 전 당 의장을 추대한 것.[6] 전임 공동대표인 안철수김한길은 지방선거는 물론 재보궐선거까지 패하자 물러났다. 그 상황에서 박영선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각종 실언으로 되려 새누리당에 도움을 주고 만다.[7] 문희상 의원의 처남은 부동산(재산) 담보 문제로 인해 자형과 사이가 틀어졌음을 언론에서 밝혔다. 이 때문에 이런 사건이 알려진 것은 물론, 2018년에는 아예 자형의 국회의장 선출을 반대하는 기자회견까지 열었을 정도.[8] 기껏해야 의정부시장인 안병용 정도인데, 안병용은 강성종 라인에 가까운 인사이나, 문희상의 권유로 시장에 출마한 인물인 만큼 정황상 3선 끝에 나올 가능성이이 컸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9] 사실 후반기 2년의 경우는 의장이었던지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의사봉을 휘두르러 출석해야 하는 입장이긴 했다. (실제로 문 의장은 타의로 사회권을 주승용 부의장에게 넘겨야 했던 몇 번을 제외하면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음에도 본회의를 직접 개의했다.)[10] 박병석 역시 낙선한 뒤 21대 국회에서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21대 전반기 국회의장에서 낙선한 김진표도 다시 국회의장 선거에 출마해서 21대 후반기 국회의장이 되었다.[11] 중국에서도 국회를 무시한 게 아닌 게, 이미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미세먼지에 대한 논의를 했기 때문이다.[12]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대통령 중심제의 특성 때문에 대통령 중심제를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한다.[13]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경대에서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했다. 한일협정과 관련된 양국의 외교 문서를 모두 해제, 편찬하는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다. 참여정부에서는 징용·징병 피해자 보상을 위한 심사위원회에 참여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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