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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2001a> 국가 | ||
지역 | ||
공동체 | ||
주 | ||
행정구 | 몽스 행정구 | |
데모님 | Montois(e)(몽투아/몽투아즈)[1] | |
면적 | 146.53 km2 | |
사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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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스 홍보 동영상 | 몽스시청 |
네덜란드어 명칭은 Bergen(베르헌)이라 네덜란드어 명칭과 프랑스어 명칭이 크게 달라서 언어의 비효율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도시 중 하나다. 다만 나름 규모가 큰 도시이고 해석하면 같은 뜻이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편.[3]
2. 역사
몽스는 북서쪽에 위치한 아트와 마찬가지로 에노 백작 보두앵 4세에 의해 요새 도시로 건설되었다. 그러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무역이 번성하고 여러 상업용 건물이 세워졌다. 그렇게 발전하던 몽스에도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상인들을 중심으로 신교가 퍼지자 상업 도시였던 몽스에도 자연스럽게 신교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남부 네덜란드에 불고있던 신교도들을 탄압하려고 했다. 그러자 몽스의 신교도들은 프랑스의 신교도 지도자였던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콜리니가 가톨릭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자 신교도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결국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에 의해 완벽하게 제압당한다.몽스는 상업의 중심지이자 당시 상업적으로 번영하였던 플랑드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프랑스가 호시탐탐 노리던 곳이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기 몽스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번갈아 지배하였다. 결국 말플라케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과 영국군에 패배해서 몽스는 오스트리아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는 또 다시 몽스를 노렸지만 실패했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92년 몽스가 포함된 에노 지역은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몽스는 에노의 주도가 되었다.
원래 몽스를 포함한 왈롱 지역은 플랑드르에 비해 부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 혁명이 일어나자 그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왈롱은 석탄이 많았고 이를 이용해 공업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몽스는 벨기에 중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왈롱은 부유해져도 왈롱 시민들은 부유하지 않았다. 결국 몽스를 비롯한 벨기에 전역에서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서 모든 남성에게 선거권을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몽스는 독일군과 영국군이 처음 맞붙은 전투였다. 영국군은 용맹하게 싸웠지만 프랑스군이 후퇴하자 영국군도 1,6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전쟁 마지막 날 캐나다군에게 해방되기 전 까지 몽스는 독일의 지배 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프랑스를 빠르게 해방하자 독일군들은 라인강너머로 후퇴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마른강과 솜강에서 맞서 싸우라고 했고 결국 몽스에서 독일군과 미군이 싸우게 되었다. 연이은 패배로 독일군은 지치고, 무질서하며,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고 미군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 결국 몽스에 포위된 독일군 25,000여명은 항복하였고 몽스는 다시 해방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몽스는 재건의 중심축이 되었다. 하지만 벨기에의 제조업이 몰락하면서 몽스도 몰락하고 현재는 그저 그런 평범한 도시가 되었다.
3. 경제
왈롱의 주들이 그렇듯 탄광 산업이 발달했으나 몰락 이후에는 공공 서비스, 관광, 상업 등의 서비스업 위주로 전환했다. 마이크로소프트 혁신 센터가 몽스에 소재하고 있다.4. 관광
매년 성삼위일체 대축일에 열리는 두두 축제(Ducasse de Mons)는 14세기 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종교 및 민속 축제이다. 몽스의 수호성인인 성 왈트루드의 유해를 모신 황금마차가 몽스 시내를 도는 행렬이 시작되면서 축제가 시작된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루메콩마라 불리는 용과의 전투로 성 게오르기우스가 용과 싸운 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용의 꼬리에 달린 말총을 잡으면 1년 동안 행운이 온다고 한다.* 몽스 종탑 (Beffroi de Mons)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 벨기에에서 유일한 바로크 양식의 종탑. 내부에는 몽스의 역사와 종탑의 역할을 소개하는 박물관이 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 종탑을 보고 '네 개의 작은 주전자가 나란히 놓인 커피 주전자'라고 묘사하였다.
* 그랑 플라스 (Grand-Place de Mons) : 몽스 시청사가 위치한 중심 광장으로 시청사 앞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원숭이 (Singe du Grand Garde)' 동상이 있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 생 왈트루드 대학 교회 (Colégiale Sainte-Waudru) : 1450년에 지어진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고딕 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
* 몽스 기념 박물관 (Mons Memorial Museum) : 5,000여개 이상의 유물이 전시된 몽스의 대표적인 박물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지역의 군사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아브레 성 (Havré Castle) : 1226년에 지어진 성으로 현재 폐허가 되었다.
* 몽스 기차역 (Gare de Mons) : 유명한 스페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설계한 현대적인 디자인의 기차역으로 독특한 곡선 구조와 개방적인 공간이 인상적이다.
* 그랑 플라스 (Grand-Place de Mons) : 몽스 시청사가 위치한 중심 광장으로 시청사 앞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원숭이 (Singe du Grand Garde)' 동상이 있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 생 왈트루드 대학 교회 (Colégiale Sainte-Waudru) : 1450년에 지어진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고딕 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
* 몽스 기념 박물관 (Mons Memorial Museum) : 5,000여개 이상의 유물이 전시된 몽스의 대표적인 박물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지역의 군사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아브레 성 (Havré Castle) : 1226년에 지어진 성으로 현재 폐허가 되었다.
* 몽스 기차역 (Gare de Mons) : 유명한 스페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설계한 현대적인 디자인의 기차역으로 독특한 곡선 구조와 개방적인 공간이 인상적이다.
5. 자매도시
6. 여담
- 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 현재 몽스역이 재건축 중이다. 원래 2015년에 완공되어야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예산은 예산대로 불어나고 기간은 지체되었다. 2023년에 완공 예정이었으나 2024년으로 또 연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몽스역 재건축 논란 문서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