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31 01:51:57

파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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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라스 성채와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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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기 오데온과 시가지
그리스의 도시
파트라
Πάτρα
Pat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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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서그리스 아하이아현
면적 334.9 km2
인구 213,984명 (2011년 기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시간대 UTC+02:00 (EET)
1. 개요2. 역사3. 경제4. 관광5. 출신 인물6. 자매 도시

1. 개요

그리스의 제3의 도시이자 서그리스주의 주도로 그리스의 서쪽으로 가는 관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스어 발음은 '파트라'지만, 라틴-영어식 파트라스로 더 알려져 있다.

2. 역사

기워전 3000년경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했고 미케네 문명 시기 들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트리폴레무스에게 경작법을 배운 에우멜루스가 세운 아로에, 안테이아, 메사티스의 세 도시들을 세웠고 아르테미스 트리칼라 성지에서 화합했다 한다. 또한 도리아인의 침략 후 시조 파트레우스가 이끄는 라코니아 출신의 아카이아인이 아로에를 확장, 왕성을 세워 '파트라에'라 부른 것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파트라에는 아카이아 동맹의 12대 도시 중 하나로써 곡창 지대였고, 상업 항구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기원전 419년,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피레우스 성벽을 모방하여 항구와 도시를 긴 성벽으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들어 파트라에는 디메, 트리테이아, 파라이와 함께 아카이아 동맹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기원전 146년, 그리스 전역은 로마령이 되었고 도시는 쇠퇴했다.

2.1.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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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기 성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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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기 오데온 (음악당)

그러던 기원전 30년경, 악티움 해전아우구스투스는 아로에 이름을 부활시키고 제10 및 12 군단 퇴역병들을 정착시켰다. 또한 리파이, 디메 등의 주민들도 일부 정착하며 도시는 다시 옛 규모를 회복했다. 로마 제국 설립 후 아우구스투스는 '콜로니아 아우구스타 아카이아 파트렌시스' 이름을 선사했고, 조폐소가 세워져 적어도 고르디아누스 3세 때까지 이어졌다. 서기 1세기에는 기독교의 사도 안드레아스네로 황제의 치세에 포교하다가 체포되어서 이 도시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를 기려서 안드레아스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었고, 도시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1]

로마 시기 파트라스는 기름 램프 등의 특산물을 제국 각지로 수출했고, 여러 도로와 경기장 및 신전들이 세워졌다. 로마 문학의 걸작인 황금 당나귀의 원작을 쓴 루시우스가 파트라스에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번영하던 파트라스는 300년 경 펠로폰네소스 북동부 전체를 강타한 강진으로 인해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다만 도시 자체는 유지되었고, 자체적인 대주교가 있었다. 후자는 347년 가르디카 공의회에 참가했다. 파트라스는 551년에도 대지진이 덮쳐 파괴를 겼었지만 재건되었고, 동로마 시기 파트라스는 모레아 서부의 주요 상업 도시이자 주요 항구였다.

2.2. 중세

파일:파트라 5.jpg
동로마 시기에 세워진 파트라스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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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기 기둥들을 재활용한 성벽

807년 슬라브 인들이 도시를 포위했지만 대주교 하의 주민들이 외부 지원 없이 격퇴해냈고, 성 안드레아스의 가호라 믿었다. 이에 니키포로스 1세는 성당에 전리품을 기증해 치장했고, 파트라스 대주교에게는 메토니와 코로니 등에 대한 관할권을 주었다. 860년에는 당대 동로마 최고의 사상가인 카이사레아의 아레타스가 탄생했고, 그 무렵 부동산과 카펫 등 직물 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현지인 과부 다니엘리스가 바실리오스 1세의 즉위를 돕기도 했다.

1205년, 4차 십자군이 모레아를 정복하고 아카이아 공국을 세웠다. 1209년 파트라스는 남작령이 되어 기욤 알레망이 영주가 되었고, 정교회 대주교는 대성당에서 축출되었다. 1220년대 들어 파트라스 영지는 신설된 라틴 대주교 안틀렘에게 양도되어 대주교령이 되었고, 아카이아 공국 내의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317-37년간 이어진 기욤 프랑기파니의 지배기에 파트라스 대주교령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으로 사실상 독립했다. 1337년 그의 사후 나폴리 왕국 출신 아카이아 공국의 바일리 (섭정) 베르트랑 드 보가 파트라스를 포위했으나, 교황 베네딕토 12세가 도시를 '로마 교회의 땅'이라 선포하며 공국 전체에 파문을 내리자 태후 카트린 드 발루아가 승복하며 파트라스 대주교는 사실상 자립했다. 이에 유력 가문들이 대주교 위를 두고 다투었다.

한편 14세기 말엽부터 동로마령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위협이 가속회되자 대주교들은 베네치아의 보호를 청했고, 1408년에는 아예 매년 1천 두카트의 연공을 대가로 종교권 만을 유지한 채로 행정권을 넘겼다. 이로써 파트라스를 줄곧 노리던 마누일 2세의 야욕을 저지할 수는 있었다. 다만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항의로 1413년 베네치아는 통치권을 반납했고, 1418년 재차 시도했지만 역시 교황청의 반대로 철회했다. 1428년, 마누일 2세의 아들들인 모레아의 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와 (미래의) 콘스탄티노스 11세 형제가 파트라스를 점령했으나 곧 축출되었다. 하지만 결국 1430년, 근처 찰란치차에서 농성하던 아카이아 공작 첸투리오네의 항복과 함께 파트라스는 동로마 령으로 환원되었다.

1453년 가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모레아에서는 무능한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에 대한 알바이나-그리스인 반란이 벌어졌다. 반군 지도자로 추대된 마지막 아카이아 공작의 아들 조반니 아센 자카리아 (첸투리오네 3세)는 파트라스를 포위했으나, 12월에 오스만령 테살리아 총독의 아들 투르하노을루 오메르 베이의 원군이 당도하자 아에토스로 철수했다. 이듬해에는 투르한 베이의 오스만 대군이 당도해 반란을 진압했고, 1458년 도시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했다. 이로써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더욱 축소되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가 내전을 벌이다 결국 1460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2.3.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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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년에 묘사된 파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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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토크라토르 성당을 개조한 페티예 (쿠르숨) 모스크의 옛 모습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옛 파트라스'란 뜻인 '발리아바트라'라 불리게 된 도시에 대해 여러 특권과 세금 감면을 부여했다. 하지만 도시는 종종 벌어진 베네치아-오스만 전쟁, 지중해 무역의 쇠퇴 등의 이유로 발전하지 못했다. 1571년 10월 7일, 바로 북쪽의 파트라 만에서 벌어진 레판토 해전 때에도 파트라스 대신 나프팍토스 (레판토)의 이름이 붙은 것에서도 서유럽 측의 무관심이 내비친다. 한편 레판토 해전에서 신성동맹의 승리는 파트라스에서도 기념되었고, 5명의 원로와 대주교 게르마노스 1세 등이 봉기를 계획했으나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다시 한세기가 지나 대튀르크 전쟁 시기 베네치아의 제독 프란시스코 모로시니는 1684년 레프카다프레베자를 점령한 후 1685년부터 모레아 재정복에 나서 코로니를 시작으로 이듬해 나바리노, 메토니, 나플리오를 점령했다. 이로써 모레아 대부분을 정복한 모로시니는 1687년, 메흐메드 파샤 휘하의 1만 오스만 군이 배치된 파트라스를 노렸다. 7월 22일, 모로시니는 1만 4천의 병력을 도시 서쪽에 상륙시킨 후 해상 보급을 차단했다. 2일 후 쾨니히스마르크가 이끄는 포위군은 오스만 진영의 약한 지점을 공격했고, 오스만 군은 2천의 병력과 160문의 포 및 장군기까지 뻇긴 채로 패퇴했다. 사기가 꺾인 메흐메드 파샤는 파트라스 성채를 버리고 동북쪽의 리오 성채로 도주했다가, 7월 25일에 그곳마저 포기했다.

이로써 베네치아는 파트라스와 리오 뿐만 아니라 해협 건너편의 안티리오, 나프팍토스까지 점령했고 메흐메드 파샤는 테베에 이르러서야 도주를 멈췄다. 1699년의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베네치아는 해협 북안의 영토는 반환했으나 모레아 영유권은 인정받았고, 신설된 모레아 왕국 하에서 파트라스는 4개 주 중에 아카이아 주의 치소가 되었다. 1715년, 오스만 제국은 대군과 함께 모레아를 공격해 코린토스와 나플리오를 연달아 함락했다. 당시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파트라스는 손쉽게 점령되었다. 2차 오스만 지배기에 도시는 농산품을 판매하는 무역의 부활과 함께 발전했고, 트리폴리스 및 나플리오와 함께 모레아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1770년 오를로프 봉기 당시 그리스 봉기군이 파트라스 성채를 포위했으나 결국 진압되었고, 이때 알바니아 민병대에 의한 보복 학살이 벌어져 한동안 도시가 비어 있을 정도였다. 다만 이후 재건되어 모레아의 주요 도시로 이어졌다.

2.4. 그리스 독립 전쟁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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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트라 2.jpg
요새화된 파트라 성채의 내성

1821년 기준 파트라스의 인구는 약 1만 8천명으로, 그중 2/3이 그리스 정교도였다. 그중 일부 부유한 상인들은 유럽 각국의 영사로 임명되었고, 러시아 영사 블라소풀로스는 그리스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인 필리키 에테리아의 일원이었다. 1821년 2월부터 주민들은 알리 파샤 토벌에 나선 오스만 군대의 보급을 위한 중과세에 반발하며 납세를 거부했고, 이러한 갈등 속에서 오디세아스 안드루초스 등 필리키 에테리아 회원들은 돈과 화약을 모으는 등 봉기를 준비했다.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한 오스만 당국은 2월 28일 무기를, 3월 18일 튀르크 주민들을 성채로 대피시켰다. 3월 23일 오스만 병사들은 시가지에 산발적인 공격을 가해 의심이 가는 건물들에 방화하자, 신발장이 파나기오티스 카라차스가 이끄는 민병대가 발포하여 격퇴했다.
그리고 3월 25일, 파트라스 대주교이자 필리키 에테리아 회원인 게르마노스 3세가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 예배당에서 십자가 깃발[2]을 내걸며 반오스만 봉기를 선포했다. 같은날 독립군이 성채를 제외한 파트라스를 점령, 무슬림 구역을 파괴했다. 3월 26일에는 아카이아의 봉기 지도자들이 영사들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서류를 보냈다. 다만 이오아니나에서 에우보이아로 향하던 유수프 파샤 휘하의 3백 오스만 기병대가 진로를 바꿔 4월 3일, 파트라스에 당도했고 성채의 수비대와 합류해 도시를 탈환했다. 이때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스웨덴, 프러시아, 러시아, 프랑스 등의 영사관들로 대피했다.[3] 비록 그리스 봉기군 스스로 파트라스를 해방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3월 25일은 현재까지도 그리스 독립 기념일로 남아있다. 한편 파트라스는 종전인 1828년까지 모레아의 주요 오스만 거점으로 남았고, 오스만 해군 기지로써 중시되었다.

1821년 가을에는 메흐메드 알리가 보낸 이스마일 지브롤터 휘하의 이집트 함대가 파트라스에 보급품을 전하고 코린트 만의 그리스 함대를 전멸시키며 제해권을 확보했다. 1822년 2월, 그리스 독립군 사령관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파트라스를 포위했으나 강력한 성채를 뚫지 못했고 수비대는 해상 보급을 받으며 버텼다. 그러던 7월, 모레아 총독 마흐무드 드라말리 파샤가 아르고스까지 남하하자 테오도로스는 그에 맞서기 위해 동진하며 파트라스는 구원될 수 있었다. 8월, 게릴라 저에 시달리다가 코린토스로 철수하던 드라말리 파샤는 데르베나키 고개에서 테오도로스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고 3천여 패잔병이 파트라스로 향했으나 추격을 당해 일부만 생한했다. 10월에는 오메르 브리오니 휘하 오스만 군대가 메솔롱기를 포위했고, 이때 파트라스 주둔 함대도 동원되었으나 결국 격퇴되었다. 1823년 기준 오스만 제국은 모레아에서 파트라스 정도만을 유지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1825-27년 이브라힘 파샤의 이집트 군대가 나바리노, 트리폴리스, 메솔롱기, 아테네 등을 점령하며 나플리오의 그리스 임시 정부를 압박했다. 하지만 유럽 열강들의 개입으로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이집트 제해권이 붕괴되며 이브라힘 파샤는 모레아에 갇혀버렸고, 1828년 가을에 프랑스 군이 상륙하여 그의 퇴거를 압박했다. 협상 끝에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로 철수했고, 프랑스 군은 모레아 해안을 하나 하나 접수해갔다. 이브라힘 파샤가 떠나기 전날인 10월 4일에 이미 파트라스로 파견된 프랑스 군에게 최후 통첩을 받자, 수비대장 하지 압둘라는 다음날 항복했다.[4] 근처 리오 (모레아) 성채의 수비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10월 30일에 결국 항복하며 오스만 제국의 모레아 지배는 종식되었다. 이로써 파트라스는 그리스 령이 되었고, 재건되었다.

2.5.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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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에 세워져 요르요스 1세의 이름이 붙은 게오르기우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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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72년에 게오르기우 광장 동쪽에 세워진 아폴론 극장

1829년부터 그리스 수상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프랑스 공병 장교 스타마티스 불가리스의 도움으로 폐허이던 파트라스에 근대적인 도시 계획을 수립했다. 다만 광장 외에는 제대로 재건이 진행되지 못했고, 19세기 중반에야 지주들의 요구가 반영된 형태로 장방형 신시가지가 조성되었다. 그리스 왕국 하에서 파트라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난 농산물을 수출하는 주요 항구로서 유럽 건포도 생산의 중요 거점이었고, 아테네 다음가는 제2의 도시였다. 항구를 주위로 창고, 은행, 보험 건물들이 들어섰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과의 해상 무역도 활발했기에 파트라스는 그리스의 주요 무역 도시로 알려졌다. 하지만 1893년 코린트 운하가 개통하고 1894년 과잉 생산으로 국제 건포도 가격이 급락하며 도시는 경제 침체를 겪었다. (대 건포도 위기)

2.6.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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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 파트라 성채 서쪽 끝에 세워진 성 니콜라스스카일라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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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안드레아스의 순교 추정 장소에 세워진, 성 안드레아 성당, 발칸 반도 최대의 정교회 성당이다.


20세기 초엽 파트라스는 빠르게 발전하여 가로등과 트램을 도입한 첫번째 그리스 도시가 되었다. 다만 1차 대전 시기 국제 무역이 정체되며 도시 발전이 저해된 상황에서 그리스가 튀르키예 독립 전쟁 때 패배하자 소아시아 출신 그리스인 난민들이 유입되자 인구는 늘었지만,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여 교외 지방에 주택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2차 대전 시기 파트라스는 1940년 10월부터 이탈리아 왕국군의 주요 공습 표적이 되었고, 1941년 5월에 결국 이탈리아 군에게 점령되었다. 1943년 9월에는 독일군이 일대를 장악했고, 그해 12월 13일 근처에 위치한 칼라브리타 마을에서 독일군이 주민 752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독일군이 철수한 후 파트라스는 해방되었다. 다만 이후 아테네에 가려져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3. 경제

파트라의 경제는 주로 서비스 부문에 의존하지만, 전통적인 산업도 남아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시멘트 회사인 티탄 시멘트 회사의 공장이 파트라 외곽에 위치한다. 한 때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유 기업인 페이라이키-파트라이키가 위치해 있었지만 1996년 파산하였다.

또한 식품 산업이 발전하였으며 코카콜라 및 아테네 브루어리의 공장이 위치해있고 그리스의 유명한 와이너리가 위치해있다. 또한 요거트 공장 및 지중해에서 가장 큰 어류 사료 공장,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제분소인 케페누 밀스도 위치해있다.

4. 관광

파트라는 고대 그리스 시절 부터 존재한 역사적인 도시로 그리스와 로마 시절의 유적들이 많다. 또한 매년 2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축제인 카니발인 파트라스 카니발이 열려 연간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파트라를 방문한다.
파일:파트라 4.jpg
파일:파트라 3.jpg
* 파트라스 성채 (Κάστρο Πατρών)
고대 파트라에의 아크로폴리스 자리에 동로마 제국 시기에 세워진 성채로, 551년부터 1973년까지 그리스 서남부의 가장 강력한 군사 요새 중 하나였다. 해발 800m에 달하는 파나차이코 산의 기슭에 세워진 삼각 꼴의 성채로, 551년의 대지진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기에 고전기 자재들을 활용해 성채를 세웠다. 건설에 활용된 자재들 중 한 대리석 흉상은 주민들에게 도시의 수호신인 파트리넬라로 존숭되기도 했다. 4차 십자군 후 아카이아 공국 시기에 더욱 요새화되었고, 기존에 내성에만 있던 해자를 외성에도 둘렀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모레아 데스포티스 시절 성채를 보수했고, 오스만 시기와 베네치아령 모레아 왕국기에도 더욱 증축되었다. 독립전쟁기인 1821년과 1822년에 전투가 있었고, 1828년 오스만 수비대는 프랑스 군에게 항복했다. 그리스 령이 된 후로도 군사 기지로 활용되다가, 1973년에야 민간에 공개되어 현재는 공원으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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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라스의 판토크라토스 교회 (ι ερός να ντοκράτορος)
고대 그리스 시기의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이었으나,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후 파괴되었다. 그 폐허 위에 900년경에 그리스 정교회의 성당이 세워져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5]에 헌정되었다. 15세기 초엽 베네치아 지배기에는 성 마르코 성당이 되었다가, 15세기 후반 오스만 정복 후 모스크로 개조되어 '납 지붕 사원'이란 뜻인 쿠루숨 모스크 혹은 '정복자 사원'이란 뜻인 페티예 모스크라 불렸다. 그러다 1821년, 독립전쟁 시기 파트라스의 오스만 수비대에게 처음으로 발사된 총알이 모스크 지붕의 납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828년 프랑스 군의 점령 후 병원으로 쓰이다가 1832년 경에 헐렸고, 1835-40년에 걸쳐 현재의 성당 건물이 세워졌다.

파일:파트라 1.jpg
* 파트라스의 성 안드레 성당 (ι ερός να ός α νδρέου γίου)
1908년 ~ 1974년간 그리스 비잔틴 양식으로 건설된 성당으로 성 안드레의 유골 및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파일:아기우 니콜라우.jpg
* 아기우 니콜라우 계단 (Σκάλες Αγίου Νικολάου)
1934년에 파트라스 성채와 시가지 중심부를 이어주는 계단으로, 석양 전망 명소이다.

파일:파트라 극장.jpg
* 아폴론 극장 (θέα τρο "α πόλλων)
1872년 독일 건축가인 에른스트 질러가 설계한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극장.

파일:파트라 7.jpg
* 오데온 (ᾠ δεῖον)
노래, 음악 공연, 시 경연 대회와 같은 음악 활동을 위해 지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건물.

5. 출신 인물

콘스탄티노스 스테파노풀로스: 그리스의 제5대 대통령
안드레아스 사마리스: 그리스의 축구선수
코스타스 카추라니스: 그리스의 축구선수

6. 자매 도시



[1] 15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토마스 팔레올로고스가 로마로 망명하면서 함께 가져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했다. 이후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정교회와의 화합을 위해 유골을 반환하여 다시 파트라스로 돌아왔다.[2] 빨간 바탕의 검은 십자가[3] 다만 영국 영사관은 중립을 표방하며 주민들의 대피를 거부했다[4] 이는 나바리노가 항복하기 전날이었다[5]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정한 형상이다. 그리스어 "παντοκράτωρ" (pantokrator)에서 유래했으며, "전능하신" 또는 "우주를 다스리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