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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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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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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 성채

1. 개요2. 역사
2.1. 니코폴리스2.2. 근세
2.2.1. 니코폴리스 / 프레베자 전투 (1798)2.2.2. 알리 파샤 & 오스만 제국
2.3. 근현대2.4. 현대
3. 주변 볼거리

1. 개요

그리스어 Πρέβεζα
영어 Preveza
이탈리아어 Prevesa
튀르키예어 Prevese

그리스 서부 에피로스 주의 도시. 암브라키아 만과 아드리아 해를 구분하는 얇은 반도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2만 3천명이다. 1538년 프레베자 해전이 앞바다에서 벌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시내와 근교에 여러 성채들이 있고, 북쪽 5km 지점에 로마 시기 에피로스 남부의 주요 도시였던 니코폴리스 유적이 있다. 남쪽의 바다 건너편, 약 악티움 자리에는 악티온 국립 공항이 있고 해저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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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소페 유적

상고대 시기 서남부 그리스에는 테스프로티아 계열의 카소피아 부족이 정착했고, 그 중심 도시는 프레베자 북쪽 20km 지점인 카소페 (카마리나 인근)였다. 기원전 290년 경에는 에페이로스 왕국피로스 1세가 현 시가지 근처에 도시를 세우고 장모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베레니케 1세의 이름을 따서 베레니케라 명명했다. 베레니케의 건너편 반도 끝에 아낙토리온 출신 코린토스 인들이 아폴론 악티오스를 기리며 세운 식민도시 악티온이 있었고, 아폴론 축제인 악티아로 유명했다. 기원전 3세기 들어 아카르나니아 인들이 악티온을 점령, 종교 회의 장소로 삼았다. 다만 에피로스 남부의 도시들인 카소페, 베레니케, 악티온, 아낙토리온, 암브라키아 모두 결국 신도시 니코폴리스로 주민들이 이주되어 사라진다.

2.1. 니코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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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온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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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파이온 유적

기원전 31년, 베레니케-악티온 앞바다에서는 로마 해군이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해군을 격파한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다. 2년이 지난 기원전 29년,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온의 건너편 베레니케의 북쪽에 '승리의 도시'란 뜻인 니코폴리스를 세웠다.[1]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온 해전 당시의 진영 자리인 니코폴리스 북쪽 언덕에 자신의 수호신이기도 한 아폴론 성소를 세웠고, 나포한 적함들의 돛으로 장식했다. 또한 그는 악티아 축제를 부활시켜 5년마다 여러 경기와 함께 진행했다. 따라서 니코폴리스는 로마 통합의 상징이었고, 지중해 동서 무역 거점으로써 3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술라의 그리스 원정 당시 폐허가 되어 쇠락했던 그리스 서부 지역에 경제 부흥을 이끌었다. 도시 창건 후 5년동안 니코폴리스의 격자무늬 시가지에는 성벽 및 극장, 경기장, 체육관, 음악당, 수도교 등의 기간 시설이 세워졌다. 여러 기념물 건설비는 전리품 및 헤롯 대왕의 기부로 충당되었다.

니코폴리스는 에피로스 남부, 아카르나니아, 아이톨리아 서부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일대의 주민들이 이주해왔다.[* 아낙토리온 등지에서는 강제로 이주되기도 했다[ 로마 퇴역병들이 정착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도시는 빠르게 발전했다. 이로써 규모가 커진 도시는 암픽티온 의회에 5명의 대표자를 보냈고, 자유도시 및 자치가 가능한 폴리스로써 서기 268년까지 자체 동전을 주조할 수 있었다. 서기 18년, 시리아로 향하던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게르마누스는 니코폴리스에서 자신의 2번째 집정관 임기를 축하했고 30년 경우는 집정관 포파이오스 사비누스가 방문했다. 65-66년의 겨울에는 전도여행 중인 기독교의 사도 바울이 니코폴리스에서 머물렀고, 66년에는 그리스 순행에 나선 네로가 방문해 악티아 게임에서 우승했다. 94년경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에서 철학자들을 추방하자 스토아 학파의 에픽테토스가 니코폴리스에서 학교를 세우고 아리아노스 등의 후학을 양성한 후 135년에 사망했다.

한편 110년경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속주에서 분리된 에피루스 속주가 신설되자 니코폴리스는 그 주도가 되었고, 테살리아 및 아카이아 등지까지 관할하는 자주색 염료 담당관도 배치되었다. 128년, 순행 중이던 하드리아누스 내외가 니코폴리스를 방문했고 제우스와 아르테미스의 현신으로써 축복되었다. 체류 도중 하드리아누스는 죽은 동성애인 안티노우스를 봉헌한 신전을 지었다. 그 무렵 전성기에 이란 니코폴리스의 인구는 15만에 이르렀고, 코마로스 항구로 이어지는 서문이 세워져 대문으로 기능했다. 180년경에는 니코폴리스 출신의 엘레우테리오가 로마 주교, 즉 교황에 올랐다. 193-19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메소포타미아 원정비 충당을 위해 니코폴리스 등지에서 특별 주화를 주조했다.[2] 3세기 초에는 기독교 교부 오리게네스가 니코폴리스에서 그리스어 구약성경의 희귀본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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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시기의 성문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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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시기 바실리카 (성당) 유적

268년 고트족이 대대적인 육해상 침공을 가했으나 니코폴리스는 급조한 성벽 덕에 함락을 피했다.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행정 개편 후 니코폴리스는 에피루스 베투스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3] 4세기 초만 해도 코린토스 주교 산하에 있던 니코폴리스는 330년대에 독자적인 주교구가 되었다. 327년 두 에피로스 속주는 테살로니마케도니아 군구에 소속되었고,[4] 431년 기준 니코폴리스는 일리리쿰 지방에서 테살로니키와 코린토스에 이어 3번째로 중요한 주교구였다. 당시 주교 도나투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배격했고, 이후로도 니코폴리스 주교들은 세계 공의회 모두에 참여했다. 5세기 후반부터 니코폴리스에는 모자이크로 장식된 6개의 모스크가 세워졌다. 474년, 제노 황제와 평화 협상 중이던 반달족은 협상에서의 우위를 얻기 위해 니코폴리스를 함락하고 포로를 잡은 후 몸값을 받아냈다. 이후 6세기 들어 아우구스투스 시기 시가지의 1/6에 달하는 동북 부분이 벽돌, 모르타르의 성벽으로 둘러졌다. 516년에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단성론에 반대하던 니코폴리스 주교 알키손이 처형되었고, 에피로스 남부 주교들이 모여 요안니스를 후임자로 결정했다.

551년 동고트 왕국토틸라나르세스의 보급로 교란을 위해 3백 척의 함대를 보내 코르푸와 니코폴리스를 습격했고, 55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도시의 성벽을 보강했다.[5]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 에피로스는 로마 대주교 관할이었으나, 성상파괴운동 당시의 갈등으로 732년 레온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관할로 귀속시켰다. 787년의 아나스타시오스를 마지막으로 니코폴리스 주교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9세기 들어 주교구 중심지는 나프팍토스로 이전되었다. 조금씩 쇠퇴하던 도시는 1060년대 들어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발칸으로 남하한 오우즈 튀르크 계열의 우제스 부족에게 습격당한 후 버려졌고, 남쪽의 프레베자로 대체되었다.[6]

2.2.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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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지배기에 세워진 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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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에 세워진 성 안드레 성채

슬라브 언어로 '지나감'을 뜻하는 프레베자 지명은 1292년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동맹이던 제노바 공화국 함대가 인근 성 니콜라스 항구를 습격할 때에 처음 언급되었다. 다만 중세 내내 별 족적을 남기지 못하던 도시는 1486년경 오스만 제국령이 되어 프레베제로 불렸고, 1495년에 성채가 세워지며 중요도를 얻기 시작했다. 1538년에는 앞바다에서 오스만 해전사에 길이 남을 승리인 프레베자 해전이 벌어져 악티움 해전에 이어 세계사의 중요한 전적지가 되었다. 2세기간 이어지던 오스만 지배는 1684년 9월, 대튀르크 전쟁 중에 베네치아 공화국 군이 그리스 민병대의 도움으로 레프카다 (산타 마우라) 섬에서 건너와 프레베자 및 보니차를 점령하며 끊겼다. 그 기세를 이어 모레아 원정까지 나선 베네치아는 1699년의 휴전 당시 오스만 측에 두 도시를 반환했다. 그러던 1717년,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잃었지만 대신 프레베자를 재차 점령하고 이번에는 영유에 성공하며 그나마 한숨을 돌렸다. 베네치아 지배 하에서 도시는 유럽과 발칸의 중개 무역을 기반으로 인구가 1만 이상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1779년에는 정교회 수사 코스모스가 프레베자를 방문해 도시의 첫 학교인 그리스어 학당을 세웠다.

2.2.1. 니코폴리스 / 프레베자 전투 (1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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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파샤 테펠레나가 주둔한 아우구스투스의 승전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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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전투가 벌어진 니코폴리스 유적의 극장

1797년의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거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베네치아령 이오니아 제도 및 프레베자를 차지했다. 이후 드 라 살세트 장군 휘하 280의 프랑스 군이 당도하자 프레베자 주민들은 환영하며 친프랑스 민병대를 설립했다. 이 무렵 그리스 본토에 프랑스 혁명군이 진주했다는 소식에 고무된 그리스 계몽주의자 리가스 페라이오스가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베네치아로 향하다 붙잡혀 처형되기도 한다.[7] 1798년 여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감행하며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본래 프랑스와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며 프레베자 등 육상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야니아 (이오안니아)의 총독 알리 파샤 테펠레나는 러시아-오스만 연합 함대의 접근과 아부키르 만 해전의 결과를 접한 후 무력 점령에 나서기로 결심했다.[8] 전운이 일자 프랑스 당국은 주민들과 함께 성벽이 주변 민가보다 낮아 방어에 부적절한 성 안드레 성채 대신 니코폴리스 유적 인근의 좁은 지협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언덕에 포대를 구축하던 프랑스 병사들은 니코폴리스의 옛 무덤들을 파헤쳐 이른바 '수저장이의 다이아몬드'를 얻었는데, 이는 후일 알리 파샤를 거쳐 오스만 황실에 전해져 현재까지 톱카프 궁전 보물고에 남아있다.

1798년 10월, 2만 대군을 모은 알리 파샤는 우선 부트린트를 공격하게 한 후 자신은 아들 무흐타르 파샤와 프레베자로 남하했다. 부트린트는 일주일 간의 전투 끝에 10월 25일, 프랑스 군이 요새를 폭파하고 주민들과 코르푸로 철수하며 점령되었다. 10월 22일, 알리 파샤는 4천 보병 및 3천 기병과 함께 니코폴리스 방어선 앞에 당도했고 아우구스투스의 기념비 유적이 있는 미칼리치 언덕에 사령부를 두었다. 수비 병력은 440의 프랑스 군, 2백의 민병대, 60의 술리오트 부대 등 7백명이었다. 그중 50의 프랑스 군은 질서 유지를 위해 시내에, 다른 50명은 후퇴 시를 대비해 후방에 남겨졌다. 다만 전투 개시 직전에 70여 술리오트 및 민병대가 전선을 이탈해 코르푸 섬으로 도주하며 실질적인 방어선의 수비대는 550여에 불과했다. 10월 23일 새벽, 무흐타르 파샤의 5백 알바니아 부대가 공격에 나섰으나 격퇴되었다. 다만 프랑스 군이 극장 유적까지 추격했다가 장교가 전사하며 혼란에 빠졌고, 알바니아 부대가 반격하자 드 라 살세트는 원위치 복귀를 명했으나 전투의 격화와 불리한 지형 때문에 이행되지 못했다. 프랑스 군이 흩어진 상태에서 아침에 알리 파샤는 총공세를 명했고, 2열로 늘어선 민병대의 활약으로 몇 시간 동안 버티던 방어선은 알바니아 기병대의 돌격에 붕괴되었다. 우측에 이어 좌측의 포대 역시 포위되어 점령되었고, 드 라 살세트 등이 포로가 되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 티소 휘하 80여 프랑스 군이 돌격해 기병대를 돌파했지만, 보병대에 막혀 철수했다.

알바니아 부대는 여전히 방어선 동쪽 끝에서 저항하던 일부 민병대 및 술리오트 들을 남겨두고 프레베자로 남하, 소수의 수비대를 제압하여 성 안드레 성채을 점령했다. 그나마 티소가 잔여 프랑스 군을 모아 프랑스 영사관에서 저항하며 인근에 있던 군함 라 프리메르에 지원을 청했으나, 프랑스 군이 전멸했다는 오보를 접한 군함은 그대로 떠나버렸다. 이후로도 최대한 많은 주민들이 배를 타고 피신하도록 시간을 벌던 티소의 잔여 병력은 오후 3시가 되서야 탄약이 떨어져 항복했다. 프레베자 점령 후 알리 파샤는 친프랑스 주민들을 공개 처형하고 시가지에 불을 질렀다. 그는 이틀 후 (의심하지 않던) 아르타 대주교를 통해 건너편 악티온 및 아카르나니아 산지로 도주한 주민들에게 안전을 보장하며 귀환을 권유했는데, 돌아온 주민 중 170명을 살라오라 항구 세관에서 처형했다. 드 라 살세트 등 157명의 프랑스 포로들은 고문 후 이오안니나로 도보 이동되었는데, 도중 여럿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군중의 야유 속에서 염장된 동료들의 머리를 든 채로 개선 행렬의 선두를 이루는 치욕을 겪었고, 척탄병 9명 및 장교 2명은 사슬에 묶인 채 코스탄티니예로 보내져 심문 후 예디쿨레 성채에 갇혔다. 이오니아 제도에서 온 다른 포로들과 함께 전투 기록을 남기며 옥살이를 버틴 인원들은 1801년 프랑스 군의 이집트 철수 후에야 풀려났다. 한편 알리 파샤의 수중에 있던 장교 루이오귀스트 카뮤 드 리슈몽[9]은 연인인 나폴레옹의 모친 마리아레티치아 라몰리노가 개입해 '수저장이의 다이아몬드'와 교환되어 풀려나 후일 장군에 올랐다. 비록 짧았지만 프랑스 혁명군의 주둔 및 그리스 민병대의 결성은 후일 그리스 독립 전쟁에 영향을 주었고, 실제로 지휘관 중 하나인 오디세아스 안드루초스가 프레베자 출신이었다.

2.2.2. 알리 파샤 &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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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파샤가 도시 남쪽에 세운 히지르 칼레시 (성 요르요스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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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파샤가 도시 서남쪽에 세운 판토크라토르 성채

프레베자 함락 얼마 후 보니차도 알리 파샤에게 항복하며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 중 프랑스 수중에 남은 곳은 파르가 하나로 국한되었다. 1800년의 콘스탄티노플 조약으로 알리 파샤는 프레베자, 보니차, 부트린트에서 철수했고 해당 도시들은 오스만 조정 하의 자치령이 되었다.[10] 다만 러시아-튀르크 전쟁 발발 직후 1806년 11월 알리 파샤는 재차 세 도시들을 장악해 아들 벨리 파샤의 소유로 두었고, 이듬해 히즈르 칼레시 (성 요르요스 성채)와 판토크라토르 성채를 추가해 프레베자를 요새화했다. 오스만 조정은 1820년 알리 파샤 토벌 시에야 기존 지배 체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종교와 사법의 자유 하에서 프레베자는 1835년 그리스어 학교인 테오파네이오스가 설립되었다. 국외 후원자 아나스타시오스 테오파니스의 이름을 딴 이 학교는 1851년에 여학생도 받기 시작했고, 중고등 학교도 설립했다. 1863년 도시는 '프레베제' 산작의 치소가 되었다.

1878년 베를린 회의 당시 프레베자 등 남부 에피로스는 그리스 왕국 령으로 정해졌고, 이에 프레베자에서는 오스만-그리스 대표단 간에 5차례 회담이 벌어졌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자 아베딘 베이 디노를 프리즈렌 연맹의 대표자에 선임했고, 그는 1879년 1월 프레베자에 알바니아 인사들을 모아 무력 투쟁도 불사하겠다며 에피로스의 그리스 병합에 항의했다. 이로써 협상이 지연을 이룬 오스만 조정은 알바니아 인들과 총독을 불러들였고, 아베딘 베이 디노는 1880년 제국의 외무부장을 역임한다. 이스탄불에서 이어진 회담에서 오스만 측은 알바니아 인들의 격렬한 반댈ㄹ 이유로 국경 합의를 거부했다. 그러다 1881년 3월, 오스만 조정은 테살리아 및 아르타 지역의 할양을 제안했고 그리스가 이를 수용했다. 다만 1906년 에피로스 디아스포라 인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인 에피로스 사회는 현지 그리스 인들에 대한 무기 지원을 통한 에피로스 전역의 그리스 병합을 추진했다. 1900년 전후 시기 프레베자는 무역 감소로 경제적 쇠퇴를 경험했다. 그나마 남녀 학교는 유지되었다.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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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의 성 요르요스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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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성 안드레아 성채를 장악한 그리스 군

1차 발칸 전쟁 시인 1912년 10월 21일, 파나지오티스 스필리아디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이 프레베자를 점령했다. 이는 그리스측 발칸 전쟁의 첫 전투였고, 프레베자 전투 대신 '니코폴리스 전투'로 명명되었다. 1913년 2월 8일에느 오스만령 이오안니나 인근 비자니 성채에서 격추된 러시아 전투기가 도시 인근에 불시착했고,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기체를 고칠 수 있었다. 이는 세계사의 첫 전투기 격추 및 수리였다. 프레베자와 에피로스 대부분 지역은 1913년 런던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그리스 령이 되었다. 그리스 왕국 하에서 프레베자는 그리스 서부의 중심 항구가 되었고, 전간기에는 항만 노조가 결성되었다. 2차 대전기 프레베자는 1941년 이탈리아, 1943년에 나치 독일령이 되었다. 그동안 250여 유대인 주민들은 체포되어 절멸 수용소로 보내졌고, 15명만이 생환했다. 1944년 9월, 독일군이 떠난 후에는 그리스 내전의 전초전 격으로 우익의 EDES와 좌익의 EAM-ELAS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16일간 벌어지던 내전은 카세르타 협정 후에야 종식되었다.

2.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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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프레베자 항구 일대. (현재는 사라진) 오스만 시기 모스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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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가지 모습

21세기 들어 프레베자는 상업항이자 관광지로, 많은 주점과 요트가 있다. 2002년에는 악티오-프레베자 해저 터널이 개통하여 악티온 국립 공항 및 레프카다 섬과의 접근성이 매우 좋아졌다. 2022년에는 그리스 산불의 영향을 받았다.

3. 주변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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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성벽과 바실리카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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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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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저장고 유적
  • 니코폴리스 (Νικόπολις) 유적
    로마 제국 건국 시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워 서기 1세기 ~ 8세기간 에피로스 남부 지방의 중심 도시로써 번영한 도시였다. 로마/비잔틴 시기의 성벽, 바실리카, 극장, 오데온, 수도교, 목욕탕 등의 유적이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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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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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일대 유적
  • 카소페 (Κασσώπη) 유적
    카소피아로도 불리며, 카소파이 인들의 중심 도시이자 아이톨리아 동맹 소속 도시였다. 기원전 3세기까지 번영했으나 3차 마케도니아 전쟁 후 쇠퇴했고, 주민들이 니코폴리스로 이주되며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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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요르요스 성채
    1807년 알리 파샤가 시가지 남쪽의 해안가에 세운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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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토크라토르 요새
    1807년 알리 파샤가 프레베자 서남쪽의 아드리아해 연안에 세운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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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티온 성채
    1807년 알리 파샤가 프레베자 건녀편의 옛 악티움 자리에 세운 요새

[1] 이는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아르메니아에 세운 니코폴리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2] 그외 파트라이, 에피다우로스, 아폴로니아, 투리아, 플라우틸라, 테살리아 코이논 등에서 발행[3] 에피루스 북부는 에피루스 노바가 되었고 디라키움이 주도가 되었다. 케팔로니아, 자킨토스, 키테라는 아카이아 속주가 되었다[4] 343년 기준 니코폴리스 주교는 이시도로스[5] 그덕인지 587년 아바르슬라브 부족의 침공 때에는 비켜갔다. 625년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일대의 교통이 불안하다고 서신으로 밝혔다[6] 이후 1065년 우제스는 동로마에 복속해 용병대가 되었고,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도 참전한다[7] 사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나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유럽 질서의 붕괴를 우려했던 오스트리아 측에게 트리에스테에서 체포되어 오스만 측에 송환된 것[8] 이때 알리 파샤는 엄포용으로 육상 영토 뿐만 아니라 코르푸까지 할양하라고 요구했다[9] 우측 포대 함락 후 아직 버티던 좌측 포대로 가려다 사로잡힘[10] 종교와 사법의 자유가 주어지고 세금은 베네치아 시기 이상이 될 수 없으며, 군대 외의 무슬림의 정착 및 토지 소유 등이 금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