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그리스어 Ναύπακτος영어 Nafpaktos / Naupactus
이탈리아어 Lepanto
튀르키예어 İnebahtı
그리스 서부 아이톨리아-아카르나니아 주의 도시. 나우팍투스로도 표기된다. 코린트 만 북안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1만 3천명이다. 현재는 작은 어촌이지만, 1571년 레판토 해전이 앞바다에서 벌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독립 이전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 시기에는 각각 레판토, 아이나바흐티로 불렸다. 요새가 있는 야산 밑에,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시가지에는 페티예 모스크 등 옛 건물들이 잘 남아있다.
2. 역사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헤라클레이다이 (헤라클레스의 자손들)가 코린트 만을 건너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공하기 위해 배를 건조한 곳이라 한다. 따라서 나우팍토스는 배를 뜻하는 '나우'와 고치는 것을 뜻하는 '팍트'가 더해진 것으로, '조선소'란 뜻이다.2.1. 고대
페르시아 전쟁 후 도시를 차지한 아테네는 기존 원주민이던 로크리 오졸라이 부족을 내쫓고 기원전 464년의 3차 메세니아 전쟁으로 축출된 메세니아 인들을 정착시켰다.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나프팍토스는 아테네의 서부 그리스 사령부가 되었고, 기원전 429년에 브라시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코린토스 해군이 공격했으나 아테네 해군에게 격퇴되었다. 다만 전쟁 자체는 아테네의 패배로 귀결되었고, 기원전 405년경 스파르타는 메세니아 인들을 축출하며 로크리 오졸라이 부족에게 나프팍토스를 돌려주었다. 다만 기원전 4세기 들어 스파르타의 패권이 약화되자 아카이아 인들이 도시를 차지했다가,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점령했다. 그러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나우팍토스를 아이톨리아 인들에게 주었고, 나프팍토스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기원전 3세기 말엽,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그리스 정복에 나서며 촉발된 1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와 연합했다. 따라서 기원전 209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나프팍토스에 주둔했으나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이후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시작되자 기원전 199년, 아이톨리아 동맹은 나프팍토스 회의 후 중립을 선포했으나 아오이 스테나 전투 후 로마와 동맹했다. 하지만 7년 후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이로써 촉발된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시에 나프팍토스는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이끄는 로마군에 강력히 저항했다. 기원전 191년, 글라브리오는 나우팍토스를 포위했지만 주민들이 2개월간 결사 항전하자 휴전을 맺고 철수했다. 다만 전쟁은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로마 제국은 나우팍토스를 원주민인 로크리 오졸라이 부족에게 되돌려주었다. 2세기의 여행가 파우사니아스는 나프팍토스에 포세이돈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 아프로디테 동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폐허 등이 있다고 기록했다.
2.2. 중세
팍스 로마나 시기 안정을 누리던 도시는 552년에 지진으로 파괴를 겪었고, 748년엔 역병으로 거의 버려졌다. 이후 재건되어 9세기 말에는 아이톨리아 & 에피로스 지방에 설치된 니코폴리스 (니코폴레오스) 테마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교구에서 대주교구로 승격되었다. 10세기 무렵 나프팍토스는 동로마 제국의 해군 기지이자 남부 이탈리아와의 연락항이 되었다. 1025년경에는 현지인들의 봉기로 스트라테고스 (사령관) 게오르기오스가 사망했다. 다만 1040년 페터르 델랸의 불가리아 반란 당시 나프팍토스는 니코폴리스 테마에서 유일하게 반군에게 점령되지 않은 도시였고, 1094년 트라니의 성 니콜라스가 나프팍토스에서 이탈리아의 오트란토로 건너갔다. 1165년에 도시를 방문한 여행가 투델라의 벤자민은 1백여 유대인이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4차 십자군 후 나프팍토스는 에피로스 친왕국에 속했고, 나프팍토스 대주교 요안니스 아포카우코스는 에피로스 남부의 종교계를 주도했다. 당시 나프팍토스는 현지인들에게 '네파토스'로 불렸고, 십자군 측에 네오판트 혹은 레판토로 전해졌다.1294년 에피로스 군주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딸 타마르를 카를루 1세의 아들 필리포와 결혼시키며 지참금으로 나프팍토스 등지를 나폴리 왕국에 할양했다. 그러자 이듬해 테살리아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침공해 도시를 점령했으나, 1296년에 반환했다. 1304년 에피로스 군주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나프팍토스와 부트린트 일대를 점령했으나 1306년 휴전 후 반환했다. 1338년, 동로마 제국은 약화된 에피로스 친왕국을 병합했지만 1348년 스테판 두샨의 세르비아 제국이 일대를 정복했다. 그리고 1355년 스테판 두샨이 사망하자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에피로스 친왕국을 재건했으나, 1361년 이번에는 아테네 공국의 카탈루냐 용병대가 나프팍토스를 점령했다. 그러다 1376년에 아르타의 알바니아 데스포테스인 진 부아 슈파타가 도시를 점령했고, 1378년에 로도스 기사단이 잠깐 점령했으나 곧 수복했다. 이후로도 에피로스 친왕국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던 아르타의 팔 슈파타는 1407년 나프팍토스를 베네치아에 매각했다.
2.3. 근세
베네치아는 나프팍토스의 이탈리아 표기인 네판트 혹은 레판토로 지칭했다. 1449년까지 오스만 제국이 에피로스와 아이톨리아를 정복하며 레판토는 그리스 서부의 몇 남지 않은 기독교 영토로써 고립되었고, 코린트 만의 무역을 통제했기에 베네치아에 있어 중시되었다. 베네치아는 도시를 요새화했으나, 1499년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되었다. 오스만 시기 도시는 아이나바흐티 혹은 히네바흐트로 불렸고, 동명의 산작이 설치되었다. 1521년 기준 주민들은 기독교도 509가구, 유대인 84가구, 로마(집시) 28가구로 구성되었다. 1571년에는 서쪽의 파트라스 만에서 레판토 해전이 벌어졌는데, 당시 신성동맹을 주도한 베네치아 입장에서 가장 친숙한 지명이 레판토였기에 전장에서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그렇게 명명되었다. 베네치아는 대튀르크 전쟁 중이던 1687년에 재차 레판토를 점령했으나,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에 반환했다.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 발발 시에 주민들 역시 봉기했으나, 곧 오스만 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러다 1829년 3월, 그리스 독립과 함께 나프팍토스 지명이 회복되었다.2.4. 현대
1912년 독자적인 시가 되었고, 2007년 그리스 산불 시에 피해를 입었다.3. 여담
- 시내에는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던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