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8:33:50

헤라클레이다이

Ἡρακλεῖδαι/ Heracleidae

1. 개요2. 왕국의 원래 주인3. 제1차 침공4. 제2차 침공5. 제3, 4차 침공6. 제5차 침공과 결과7. 그 외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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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라클레이다이란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을 일컫는 말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데이아네이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힐로스의 후손들을 지칭한다.

2. 왕국의 원래 주인

헤라클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미케네의 국왕이 될 예정이었으나 이를 시기한 헤라의 계략[1]으로 인해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미케네의 왕권을 빼앗겼다.

이후 헤라클레스테살리아에 살고 있었던 도리스족의 왕인 아이기미오스로부터 자신들의 영토를 침공하는 라피테스족을 물리쳐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는데, 아이기미오스 왕은 이때 헤라클레스에게 보답으로 왕국의 3분의 1을 줄 것을 약속했다. 헤라클레스는 라피테스 족장 코로노스를 죽이고, 그들을 무찔렀으나 도리스의 왕이 약속한 보상을 자신이 아닌 자기 자식들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한편 헤라클레스는 그를 미워하던 헤라가 내린 광기에 사로잡혀 아내인 메가라와 자식들을 죽이고 말았다. 끔찍한 친족살해의 죄를 씻기 위해 헤라클레스는 에우리스테우스 왕의 노예로서 12가지 과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중 마지막 과제가 지옥에서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는 것이었는데, 막상 그가 케르베로스를 데려오자 에우리스테우스는 겁을 먹고 항아리 안에 숨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킨 뒤 케르베로스가 두려우니 데리고 떠나 달라는 부탁을 했다.

헤라클레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뒤 미케네 왕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여 그의 자손들을 찾아내 해치고자 했고, 결국 트라키스의 왕인 케익스에게 그들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2] 압력을 견디지 못한 케익스는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었고, 이에 힐로스와 틀레폴레모스를 비롯한 많은 헤라클레스의 자손들은 테세우스와 파이드라의 아들이자 아테네의 왕이었던 데모폰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에우리스테우스는 미케네군을 이끌고 아테네의 성문을 포위한 뒤 데모폰에게 그들을 내놓지 않으면 아테네와 전쟁을 하겠다는 협박을 했지만 데모폰은 이를 거부하고 미케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헤라클레스의 자손들 중 한 명을 페르세포네에게 바쳐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신탁을 받게 되었는데 이에 헤라클레스의 딸이었던 마카리아가 자진하여 희생했고[3] 에우리스테우스와 그의 아들들은 패배하여 죽고 말았다. 그의 최후는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마차를 타고 도망치다가 힐로스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4][5][6]

3. 제1차 침공

이후 힐로스와 형제들은 그들의 아버지인 헤라클레스가 원래 얻었어야 할 땅을 되찾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공했고, 도시들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1년 동안 주둔했으나 이후 전염병이 돌자 테살리아로 철수했다.

이에 도리스족의 왕 아이기미오스는 지난날 헤라클레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헤라클레스의 아들인 힐로스를 의붓아들로 삼고, 왕국의 3분의 1을 내어주었다. 이후 아이기미오스가 승하하자 그의 두 아들인 팜필로스와 디마스는 자발적으로 힐로스에게 복종했고, 이로써 힐로스는 도리스족의 지배자가 되었다.

4. 제2차 침공

힐로스는 펠로폰네소스를 다시 침공하기 직전 델포이의 신탁을 받았는데, 신탁은 '세 번째 수확'을 기다리고 '바다 위 좁은 길'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이에 힐로스는 세 번째 수확을 3년 뒤라고 해석했으며, 가장 좁은 길은 코린토스 지협이라고 생각했다.

3년을 기다린 뒤 힐로스는 코린토스 지협을 건너 아트레우스가 다스리고 있었던 미케네를 공격했으나 테게아의 왕인 에케모스와의 일기토에서 패배해 전사했고, 남은 헤라클레이다이들은 모두 철수했다.

5. 제3, 4차 침공

힐로스가 전사한 뒤 그의 아들인 클레이다이오스와 손자인 아리스토마코스가 각각 재침공하여 선조의 땅을 되찾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6. 제5차 침공과 결과

결국 참다못한 헤라클레스현손들이자 아리스토마코스의 아들들이었던 테메노스, 크레스폰테스, 아리스토데모스는 부정적인 결과만 초래하는 신탁에 대해 항의했다. 이에 신탁은 '세 번째 수확'이 3년이 아닌 3세대를 의미하는 것이며, '바다 위 가장 좁은 길'은 코린토스 지협이 아니라 리움 해협[7]을 말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 해석에 따라 헤라클레이다이는 아이톨리아 연안의 나우팍토스에서 함대를 건조하며 펠로폰네소스 원정을 준비했는데, 그러던 중 아리스토데모스가 번개에 맞아 죽고 배들이 부서지며 전염병마저 도는 등 기이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었다. 근심에 찬 헤라클레이다이가 신탁에 이유를 묻자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 중 한 명이 아폴론의 예언자를 죽여 아폴론 신이 격노했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해주었다.[8] 신탁은 테메노스에게 살인을 저지른 자를 10년 동안 추방하고, 원정을 이끌어줄 안내자 역할을 할 '3개의 눈을 가진 자'를 찾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에 테메노스는 살인죄를 정화하기 위해 히포테스[9]를 추방하고, 말을 타고 가던 애꾸눈[10] 옥실로스가 '세 개의 눈을 가진 자'라고 확신하며 안내자로 삼아 펠로폰네소스 원정에 참여시켰다. 헤라클레이다이는 부서진 배들을 수리한 뒤 나우팍토스에서 출항하여 안티리움으로 항해한 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리움 해협으로 향했다.

이후 그들은 미케네 왕 티사메노스[11]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헤라클레이다이는 각각의 지역을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전쟁 전후의 각 지역의 상황과 통치자는 아래와 같다.

6.1. 미케네

티사메노스는 아버지 오레스테스에 이어 미케네 뿐만 아니라 아르고스, 라케다이몬, 메세네 그리고 아르카디아의 일부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헤라클레이다이의 원정 이후에는 미케네가 본디 페르세우스가 아르고스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왕국인 만큼, 아르고스를 다스리는 테메노스의 세력권으로 흡수되어 아르고스에 통합되었다.

티사메노스의 최후는 전승에 따라 갈리는데, 헤라클레이다이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도 하고, 죽지 않은채 살아남아 아들들과 군대를 데리고 아카이아로 이주했다고도 한다.

6.2. 아르고스

아르고스 역시 미케네와 마찬가지로 오레스테스에 이어 티사메노스가 다스리고 있었고, 헤라클레이다이의 침공 이후에는 테메노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테메노스는 자신의 아들들보다 사위인 데이폰테스를 총애했는데, 그가 후계자로 임명될 것을 두려워한 테메노스의 아들들은 티탄족을 고용해 자신들의 아버지인 테메노스를 살해했다. 이들의 잔혹한 존속살해를 혐오한 군대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고, 데이폰테스와 히르네토 부부를 정당한 후계자로 내세웠다.[12]

이후 왕위는 다시 테메노스의 아들인 키소스에게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패륜으로 인해 테메노스 왕조의 권위는 실추된 지 오래였고, 키소스 왕 이후 10명의 왕을 더 거쳐 왕위에 오른 멜타스는 나락에 빠진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으나 민중들이 이를 알아차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멜타스는 처형당했고 아르고스에는 왕정이 무너진 뒤 민주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6.3. 라케다이몬

라케다이몬 역시 메넬라오스 왕 사후 오레스테스가 물려받아 티사메노스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헤라클레이다이의 원정이 성공하고 난 뒤 원정 준비 도중 번개에 맞아 죽은 아리스토데모스의 두 아들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리스토데모스의 두 아들인 에우리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는 너무 어려서 그들의 외삼촌인 테라스[13]섭정으로 대신 다스리다가 둘 다 성년이 된 후 물러났다. 이렇게 스파르타에는 두 명의 왕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에우리스테네스를 시조로 하는 아기스[14] 왕조와 프로클레스를 시조로 하는 에우리폰[15] 왕조, 이 두 왕조가 함께 다스리게 되었다.

6.4. 메세네

헤라클레이다이의 원정 이전 메세네는 여러 명의 군주가 나누어 다스렸는데, 넬레우스의 내손인 멜란토스[16], 파이온[17]의 아들들, 페이시스트라토스[18] 그리고 알크마이온[19] 이렇게 4개의 세력[20]이 다스리고 있었다.

원정이 성공한 뒤 크레스폰테스는 이들을 모두 추방시킨 뒤 메세네를 차지했다. 헤라클레이다이가 아르고스, 라케다이몬, 메세네를 나눠 가질 때 제비뽑기를 통해 누가 어떤 땅을 가질지를 정했는데, 크레스폰테스는 그중 가장 비옥한 메세네가 탐이 나서 사기를 쳤다.[21]

이후 크레스폰테스 왕은 친평민적인 정치를 펼치다가 같은 헤라클레이다이의 일원이자 귀족이었던 폴리폰테스의 손에 아들들과 함께 죽었다.

이때 아르카디아의 왕이자 외할아버지였던 킵셀로스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던 아이피토스만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이후 장성한 그는 메세네로 돌아와 아버지 크레스폰테스를 죽인 자들을 벌하고, 폴리폰테스 왕을 처형한 뒤 메세네의 국왕이 되었다. 이후 메세네의 왕위는 아들인 글라우코스를 거쳐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아이피토스의 후손들은 그의 이름을 따 아이피티데스 왕조로 불리게 되었다.

6.5. 엘리스

헤라클레이다이의 원정 이후 엘리스는 옥실로스에게 할양되었다.[22] 옥실로스는 애당초 헤라클레이다이의 길잡이로서 원정에 동행할 때 그 조건으로 원정이 끝난 뒤 엘리스를 할양받기로 약속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비옥한 엘리스를 보면 자신에게 주기로 했던 것을 번복할까 봐 그들의 길 안내를 할 때 일부러 엘리스 방향이 아닌 아르카디아 방향으로 안내했다.

침공 이전 엘리스는 디오스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 옥실로스의 군대에 저항했다. 결국 양측은 각각 한 명의 전사를 내보내 일기토에서 지는 쪽이 물러나기로 했다. 디오스는 활의 명수인 데그메노스를 내보냈고, 옥실로스 측에서는 투석의 명수인 피라이크메스를 내보냈다. 이 싸움에서 피라이크메스가 이겨 결국 엘리스의 왕위는 옥실로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엘리스의 국왕이 된 옥실로스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아이톨리아에서 이곳으로 사람들을 이주시켜 정착시켰으며, 패배한 디오스 역시 특별한 권한을 주어 계속 이곳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또한 이전에 살고 있었던 엘리스 주민들이 계속 그곳에 살도록 해주었으며, 그들의 기존 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옥실로스는 델포이로부터 펠롭스의 후손과 공동 통치를 하라는 신탁을 받았는데, 그는 이에 부합하는 인물을 물색하던 도중 아카이아의 도시인 헬리케에서 펠롭스의 후손인 아고리오스[23]를 찾은 후, 그를 직접 데려와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옥실로스가 승하한 뒤 아들인 라이아스가 왕국을 물려받았고, 엘리스는 대대로 그의 후손인 옥실로스 왕조가 다스리게 되었다.

6.6. 코린토스

코린토스 방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코린토스는 시조인 시시포스 이래로 계속해서 그의 후손들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헤라클레이다이의 침공 당시에는 시시포스의 후손들인 도리다스와 히안티다스 형제가 다스리고 있었다. 과연 교활한 시시포스의 후예들답게 알레테스[24]가 침공해왔을 때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나라를 넘겨주었고, 이에 두 형제는 코린토스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하지만 두 형제를 제외한 백성들은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코린토스는 알레테스의 후손들[25]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를 바키스 왕조라고 한다. 마지막 국왕 텔레스테스가 같은 바키아다이인 아리에우스와 페란타스에게 살해된 후 바키아다이들은 1년마다 돌아가며 코린토스를 통치하다가 코린토스의 참주가 된 킵셀로스에게 쫓겨났다. 고대 로마 왕국에트루리아계 가문인 타르퀴니우스 왕조마케도니아 왕국린케스티스 왕조가 바키아다이 혈통이었다고 한다.

6.7. 에피다우로스

에피다우로스는 원래 피티레우스[26]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헤라클레스의 후손들 중 한 명이었던 데이폰테스[27]가 쳐들어오자 별다른 저항없이 왕국을 내어준 뒤 백성들을 데리고 아테네로 건너갔다.[28] 데이폰테스는 테메노스의 딸인 히르네토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테메노스의 아들들인 케리네스와 팔케스는 그가 자신들의 여자형제인 히르네토를 데리고 있는 것을 시기하여 히르네토에게 데이폰테스의 곁을 떠나 다시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히르네토는 그것을 거부했고, 결국 그들은 강제로 그녀를 납치하여 데려갔다. 분노한 데이폰테스는 그들을 추격했고, 케리네스를 활로 쏴서 죽였다. 그러나 팔케스는 히르네토를 가까이 붙잡고 있었기에 화살을 쏘지 못했다. 데이폰테스는 전차에 근접하여 그녀를 되찾으려고 했지만 팔케스는 그녀를 뺏기지 않으려고,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써서 그녀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임신 중이었던 히르네토를 죽게 만들었다. 팔케스는 그대로 도망쳤고 데이폰테스는 그녀의 시신을 에피다우로스로 가져와 자식들과 함께 그녀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주고 안장시켰다.

6.8. 시키온

시키온의 경우, 라케스타데스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헤라클레이다이의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헤라클레스의 후손들 중 한 명[29]이었다. 테메노스의 아들들 중 한 명인 팔케스가 밤중에 시키온을 급습했지만 그 역시 헤라클레이다이의 일원이었기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후 팔케스는 라케스타데스와 함께 시키온을 공동 통치했다.

7. 그 외 지역

7.1. 아르카디아

아르카디아의 국왕이었던 킵셀로스[30]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리움 해협을 건너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건너오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들 중 한 명인 크레스폰테스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자신의 딸인 메로페와 결혼시키니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피토스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이는 킵셀로스와 아르카디아인들이 더 이상 헤라클레이다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방법이었다.

이후 메세네에서 반란이 일어나 폴리폰테스가 크레스폰테스와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왕비인 메로페와 강제로 결혼하여 새로운 왕이 되었다. 이때 크레스폰테스의 아들들 중에 아이피토스만이 유일하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이는 그가 아르카디아에서 외조부인 킵셀로스의 손에 길러졌기 때문에 화를 면한 것이었다. 장성한 아이피토스는 외삼촌이었던 홀라이아스의 도움[31]을 받아 메세네로 돌아갔고, 마침내 왕국을 되찾은 뒤 아버지 크레스폰테스의 복수를 실행했다.

이후 아르카디아는 홀라이아스를 거쳐 킵셀로스의 후손들인 킵셀로스 왕조가 다스리게 되었다.

7.2. 아카이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헤라클레이다이에게 밀려난 티사메노스는 아카이아[32]을 이끌고 아카이아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오니아[33]들이 살고 있었고, 아카이아족과 티사메노스는 이오니아 사람들에게 전쟁없이 평화롭게 정착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오니아의 왕들은 티사메노스가 남자다움과 고귀한 혈통으로 인해 자신들의 왕이 될 것이라 두려워하여 결국 제안을 거절하고, 그들을 공격했다.

전투는 아카이아인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티사메노스가 전사하고 말았다. 패배한 이오니아인들은 휴전을 맺은 뒤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티사메노스의 시신은 헬리케에 묻혔으나, 델포이의 신탁에 따라 라케다이몬 페이디티아라는 곳으로 옮겨져 묻혔다.

아카이아족 중에서 큰 권력을 지닌 이들로는 티사메노스의 아들들인 다이메네스, 스파르톤, 텔리스, 레온테메네스가 있었으며,[34] 다마시아스[35]라케다이몬에서 온 프레우게네스[36], 파트레우스[37] 부자도 있었다.

7.3. 테베

당시 테베의 왕은 아우테시온[38]이었으며, 그는 딸 아르게이아를 헤라클레이다이의 일원인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시집보낸 상태였다. 아우테시온은 신탁에 따라 테베의 왕위를 포기하고 도리스인들에게 합류했다.[39] 그가 떠난 뒤 왕위는 다마식톤[40]에게로 넘어갔다. 자세한 것은 테베 왕가 참조.

아우테시온의 아들 테라스는 아리스토데모스의 아들들인 어린 외조카들을 대신하여 라케다이몬을 섭정으로서 다스리다가 칼리스테 섬[41]으로 이주하여 섬의 이름을 '테라'라고 명명했다.[42]

7.4. 아테네

헤라클레이다이의 펠로폰네소스 침공은 아티카 반도의 중심 도시인 아테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아테네 국왕 티모이테스와 테베 국왕 크산토스는 오이노에라는 땅을 두고 분쟁을 벌였는데, 두 왕은 결투를 통해 소유권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티모이테스는 직접 싸우기를 주저하며, 크산토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맞서는 자에게 아테네 왕국을 넘겨주겠다고 말했다. 이때 메세네에서 헤라클레이다이들에게 패배하여 쫓겨난 멜란토스가 나섰다.

멜란토스는 크산토스와의 결투에서 그에게 기만술을 사용했는데, 크산토스의 뒤를 따라오던 사람[43]을 가리키며 크산토스가 결투의 합의[44]를 어겼다고 큰 소리로 소리쳤고, 그가 놀라서 뒤돌아보자 그에게 창을 던져 죽였다. 이렇게 아테네는 오이노에를 차지하게 되었고 멜란토스는 티모이테스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45]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그는 티사메노스와 아카이아족에게 패배한 뒤 쫓겨난 이오니아인들을 대거 받아들여 아테네의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후 멜란토스의 아들 코드로스가 왕이 되었을 때 알레테스가 이끄는 도리스인들이 아테네를 침략해 왔다. 알레테스는 신탁으로부터
'아테네의 왕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원정이 성공할 것이며, 오직 아테네 왕의 죽음만이 아테네의 안전을 보장할 것'
이라는 대답을 받았다. 이 소식은 아테네 왕 코드로스에게도 들려왔는데, 아테네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희생을 결심한 코드로스는 농부로 변장하여 도리스인들의 진영 근처로 다가가 병사들을 도발한 뒤 죽임을 당했다.

이후 도리스인들은 예언된 패배를 두려워하여 퇴각했고, 아테네에서는 그 누구도 코드로스 왕의 뒤를 이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왕정을 폐지[46]한 후 9명의 아르콘(집정관)이 다스리게 되었다.

7.5. 마케도니아

아르고스의 왕 테메노스가 죽은 뒤 테메노스의 아들들은 누가 왕이 될지 다퉜는데 페이든이 다른 형제들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페이든에게 쫓겨난 형제인 카라노스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오늘날의 베르기나에 아이가이라는 도시를 세웠고, 이것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출발이었다. 이렇게 카라노스는 아르게아스 왕조[47]의 시조[48]가 되었다.


[1] 제우스가 '다음으로 태어날 예정인 페르세우스의 자손이 왕국을 통치해야 한다.'라고 선언하자 똑같이 페르세우스의 자식인 스테넬로스와 니키페의 아들인 에우리스테우스가 7개월 만에 조산하도록 하여 미케네의 다음 왕위는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2] 트라키스 왕 케익스 역시 이전에 헤라클레스가 드리오페스족을 물리치는 것을 도와준 적이 있어 틀레폴레모스를 비롯한 헤라클레스의 자손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다.[3] 마카리아는 신탁을 들은 후, 자신의 선택은 지금 제단 위에서 죽거나 에우리스테우스의 손에 죽는 것 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그녀는 자결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4] 이후 틀레폴레모스는 로도스 섬의 왕이 되었지만 절세의 미녀인 헬레네에게 구혼을 했다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사르페돈에 의해 전사하고 말았다. 틀레폴레모스의 아내였던 폴릭소는 메넬라오스 왕 사후 스파르타에서 추방당한 헬레네가 자신에게 의탁하자, 시녀들을 에리니에스로 위장시킨 뒤 헬레네를 죽였다.[5] 여기서도 아트레이드 가문의 저주가 적용되었다. 알크메네나 헤라클레스의 후손들, 에우리스테우스와 그의 아들들은 전부 아트레이드 가문의 방계 후손이었기 때문이다.[6] 헤라클레스의 이부 형제였던 이피클레스의 아들 이올라오스가 제우스와 헤베에게 적들을 무찌를 수 있도록 단 하루만 젊음을 회복시켜달라고 부탁한 일화도 있다. 그리고 헤라도 사생아는 용납하지 못했기에 에우리스테우스를 일찍 태어나게 하여 미케네의 왕으로 만들어주고, 헤라클레스를 일생 동안 지독하게 괴롭힌 것이었지, 기간토마키아 이후로는 헤라클레스와 화해하고, 자신의 딸인 헤베를 아내로 내주었기에 에우리스테우스를 더 이상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7]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 아카이아와 아이톨리아 사이에 위치한 아주 좁은 해협[8] 아카르나니아 출신의 예언자였던 카르노스는 아폴론 신으로부터 점성술을 배웠는데, 그는 헤라클레이다이들에게 신탁을 전해주러 갔다. 하지만 그가 괴이한 말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한 히포테스가 그에게 창을 던져 그를 죽여버렸다.[9] 헤라클레스의 증손자였다. 헤라클레스는 필라스의 딸들인 메다와 아스티오케 자매 둘 다와 결혼했는데 메다와의 사이에서는 안티오코스를 낳았고, 아스티오케와의 사이에서는 틀레폴레모스를 낳았다. 이중 안티오코스의 손자가 히포테스였다.[10] 판본에 따라 그의 눈이 애꾸가 아니라, 그가 타고 있었던 말 혹은 노새가 애꾸였다는 이야기도 있다.[11] 오레스테스와 헤르미오네의 아들이었다.[12] 그러나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데이폰테스는 왕위를 물려받지 않았고, 테메노스의 아들들인 키소스나 페이든이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한다.[13] 당시 테베의 국왕이었던 아우테시온의 아들이었다. 아우테시온 왕의 딸 아르게이아가 아리스토데모스와 결혼하여 에우리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를 낳았다.[14] 에우리스테네스의 아들.[15] 프로클레스의 손자.[16] 네스토르의 형인 페리클뤼메노스의 현손이었다.[17] 네스토르의 손자로, 네스토르의 아들인 안틸로코스의 아들이었다.[18] 네스토르의 손자였다.[19] 네스토르의 증손자로, 트라시메데스의 손자였다.[20] 모두 넬레우스와 클로리스의 자손들이었다.[21] 물이 가득 찬 항아리 안에 각자의 이름이 적힌 도자기를 넣고 하나씩 뽑았는데, 크레스폰테스는 일부러 굽지 않은 도자기를 넣었고 사실상 흙덩어리였던 그의 조각은 물에 녹아서 없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라케다이몬아르고스의 주인이 결정될 동안 크레스폰테스의 이름이 뽑힐 일은 없었고, 그는 소원대로 마지막 남은 메세네의 지배자가 되었다.[22] 옥실로스는 애초에 아이톨리아 사람이었으나 쫓겨난 뒤 엘리스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엘리스가 비옥한 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23] 오레스테스의 증손자[24] 원정 직전, 살인죄를 정화시키기 위해 쫓겨난 히포테스의 아들이었다. 아이기스토스클리타임네스트라의 아들이었던 알레테스와는 동명이인이었다.[25] 일명 바키아다이(bacchiadae)라고 한다. 알레테스의 현손이었던 바키스의 이름을 따왔다.[26] 헬렌의 손자인 이온의 후손이었다.[27] 헤라클레스현손으로, 헤라클레스가 데이아네이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힐로스의 친형제인 크테시포스의 증손자였다.[28] 피티레우스의 아들 프로클레스는 에피다우로스의 유민들을 데리고 이오니아로 건너가 사모스 섬에 정착했다.[29] 헤라클레스현손으로, 헤라클레스의 아들이자 크레타 섬으로 이주하여 같은 이름의 도시를 세웠던 파에스토스의 증손자였다.[30] 제우스와 칼리스토의 후손이었다.[31] 아르고스라케다이몬의 헤라클레이다이들도 도움을 주었다.[32] 재밌게도 이오니아인들이 아닌 이들이 아카이아으로 불리는 이유는 원래 아카이아에 살고 있었던 아카이오스의 아들들인 아르칸드로스와 아르키텔레스가 아르고스로 건너와 다나오스의 딸들인 아우토마테 및 스카이아 자매와 결혼하여 그들과 그 자손들이 아르고스라케다이이몬의 도시들을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다나오이(danaoi)라고도 불린다.[33] 거주하는 곳은 아카이아였지만 이온의 후손들이었기에 이오니아이라고 불렸다.[34] 티사메노스의 큰아들인 코메테스는 이미 함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건너갔다.[35] 오레스테스의 손자이자 펜틸로스의 아들로, 티사메노스의 아들들에겐 사촌형제였다.[36] 라케다이몬의 9대손이었다.[37] 라케다이몬의 10대손이자 아카이아 연안에 도시 파트라이를 세운 인물이었다.[38] 오이디푸스 왕의 현손이었다.[39] 아우테시온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가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의 저주가 그에게 미친 것이라고도 한다.[40] 페넬레오스의 손자이자 크산토스의 조부였다.[41] 아르고호 원정대의 일원인 에우페모스가 트리톤에게 받은 흙덩이를 바다에 던져 만들어진 섬이라고 한다. 참고로 칼리스테는 트리톤의 딸들 중 한 명이었다.[42] 이곳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산토리니 섬이다.[43] 이 사람이 누구인지, 왜 따라 나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정황상 그냥 크산토스의 시종이 뒤따라 나온 것을 멜란토스가 역이용한 것일수도 있다.[44] 결투는 반드시 1대1로 진행한다는 합의였다.[45] 혹은 폐위시켰다고도 한다.[46] 혹은 코드로스 왕의 아들 메돈이 아테네의 마지막 왕이라고도 한다.[47] 플루타르코스카라노스를 통해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가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손이 된다고 말했다.[48] 마케도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은 페르디카스 1세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