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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시티 FC/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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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85e><colcolor=#ffffff> 산하 구단 맨체스터 시티 FC · 맨체스터 시티 WFC · 맨체스터 시티 FC EDS
역사 역사 · 유니폼 · 응원가 · 유럽대항전 상대전적 · 클럽 기록 · 레전드
역대 시즌 2008-09 · 2009-10 · 2010-11 · 2011-12 · 2012-13 · 2013-14 · 2014-15 · 2015-16 · 2016-17 /리그 · 2017-18 /리그 · 2018-19 /리그 · 2019-20 /리그 · 2020-21 /리그 · 2021-22 /리그 · 2022-23 /리그 · 2023-24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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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시설 에티하드 캠퍼스 · 에티하드 스타디움 | 이전 메인 로드 | 이전 하이드 로드
관련 인물 역대 주장 · 역대 감독 · 역대 올해의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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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체스터 시티의 위대한 인물들
1.1. 1900년대1.2. 1930년대1.3. 1950년대1.4. 1960년대1.5. 1990년대1.6. 2000년대1.7. 2010년대1.8. 2020년대1.9. 현재
2. 그 밖의 맨체스터 시티의 상징적인 인물들
2.1. 1900년대2.2. 1910년대2.3. 1920년대2.4. 1930년대2.5. 1950년대2.6. 1960년대2.7. 1970년대2.8. 1980년대2.9. 1990년대2.10. 2000년대2.11. 2010년대2.12. 2020년대2.13.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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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체스터 시티의 위대한 인물들

파일:CityDressingRoomofDreams.jpg
2018년에 구단에서 제작한 레전드 드레싱 룸 그림.
좌측부터 케빈 더 브라위너, 스테프 하우튼, 숀 라이트필립스, 세르히오 아구에로, 우베 뢰슬러, 야야 투레, 리차드 던, 게오르기 킨클라제,
숀 고터, 파블로 사발레타, 다비드 실바, 뱅상 콤파니, 마이크 서머비, 에릭 브룩, 콜린 벨, 프랜시스 리, 빌리 메레디스, 폴 디코프,
말콤 앨리슨, 토니 북, 펩 과르디올라, 앨런 오크스, 로베르토 만치니, 닐 영, 조 머서, 마이크 도일, 조 하트, 프랭크 스위프트, 베르트 트라우트만, 조 코리건, 마이카 리차즈

1.1. 1900년대

축구가 도래한 19세기 말 영국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통했으며 맨체스터 시티 빠른발과 드리블 돌파를 가졌고, 뛰어난 체력과 이타적인 플레이가 장점이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화려한 활약을 보여주며 1903-04 시즌 FA컵 결승전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빌리 메레디스는 승부조작으로 물의를 일으켰는데, 아스톤 빌라의 주장 알렉스 리크에게 돈을 주며 패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메레디스는 18개월 출전 정지를 당했는데 그 사이에 라이벌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맨유 최초의 전성기를 이끈다. 그는 맨시티에서 393경기를 출장하며 151골을 넣었으며 1958년 향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2. 1930년대

당대 최고의 윙포워드였으며 영국 축구의 간판 스타였던 에릭 브룩은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웨이트 프로그램을 축구계에 접목하여 몸이 단단하였고 강력한 몸싸움을 바탕으로 돌파와 슈팅을 즐겨했으며 맨시티에서 11년간 499경기 177골을 기록하였다. 그 유명한 하이버리의 전투에서 2골을 득점하며 잉글랜드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브룩은 자동차 사고로 두개골 부상을 당하며 은퇴하였고 1965년 향년 5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프랭크 스위프트
    Frying Pan Hands
맨시티, 풋볼 리그, FA 세 기관에서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 모두 헌액된 영국 축구사의 빛나는 골키퍼. 스위프트는 손이 30cm로 상당히 컸으며 그 큰손을 활용한 선방으로 '프라이팬 손'이라고 불렸다. 스위프트는 1933년부터 1949년까지 375경기를 출장하였고 임대 생활을 제외하면 오직 맨시티에서만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스위프트는 1949년 은퇴후 기자 생활을 이어나가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었으나 1958년 일어난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인해 44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1.3. 1950년대

세계에 월드클래스 골키퍼는 단 두 명이 있다. 하나는 나고, 하나는 맨체스터에 있는 독일인 청년이다.
레프 야신[1]
트라우트만은 2차 세계 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었던 병사였는데, 전쟁 중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영국으로 끌려갔다. 영국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 종전이 되고 독일 송환을 거부하고 세인트 헬렌스라는 클럽에서 아마추어 골키퍼로 입단하게 되어 좋은 활약을 보이다 맨시티로 이적하게 된다. 독일군 포로였던 트라우트만을 영국의 팬들은 좋게 보지 않았으며 나치의 앞잡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트라우트만은 실력으로 영국팬들의 비난을 잠재웠으며 맨체스터 시티에서 545경기를 출전하며 당대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았다. 특히 1955-56 시즌 FA컵 버밍엄과의 결승전에서 트라우트만은 75분 피터 머피의 슛을 막다가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끝까지 경기를 뛰었으며 팀은 3-1로 승리하며 FA컵을 우승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에 독일은 국외리그에서 뛰는 독일 선수들을 홀대하였기에 국가대표팀으로는 발탁되지 못하였다. 그는 2013년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4. 1960년대

  • 조 머서
    맨시티의 첫 황금기를 이끌었던 감독
에버튼과 아스날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커리어를 보냈던 조 머서는 은퇴 이후에 셰필드 유나이티드와 아스톤 빌라에서 감독 생활을 하다가 1965년 당시 2부 리그에 떨어진 맨체스터 시티로 부임했다. 부임 첫 시즌에서 바로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팀을 승격시키고 이후 팀을 바꿔놓을 콜린 벨마이크 서머비, 프랜시스 리를 영입한다. 그렇게 1967-68 시즌 구단 역사상 2번째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이끌고, 그 후에 FA컵, 리그컵을 우승하며 맨시티의 황금기를 열었다. 특히 1969-70 시즌 맨체스터 시티 최초의 유럽대항전 우승인 UEFA 컵위너스컵까지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을 완벽히 보좌하며 듀오로 불렸던 말콤 앨리슨과 대립했고 조 머서는 1971년 팀을 떠나게 된다. 그는 1990년 향년 7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말콤 앨리슨
    Big Mal
빅 말이라고 불리었던 말콤 앨리슨은 화려한 성격과 언변으로 선수 생활 유명했으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주장으로 바비 무어 및 젊은 선수들의 멘토 역할을 했다. 선수 은퇴 후 1965년 조 머서는 아스톤 빌라 감독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자기를 보좌해줄 활기찬 남자를 찾고 있던 중 당시 미들즈브러 코치로 부임할 예정이었던 말콤은 머서와의 면담 이후 맨체스터 시티의 수석 코치로 부임한다. 그와 함께 구단의 영광의 시기를 보낸 이후 조 머서와 대립하고 머서는 팀을 떠나고 앨리슨이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맨체스터 시티는 영광을 찾지 못하며 암흑기로 빠진다. 성적 부진을 책임으로 그는 1973년 사퇴하고, 1979년 다시 한번 감독으로 돌아왔으나 또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며 1980년 사임했다. 그는 2010년 향년 8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66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콜린 벨은 맨시티에서 501경기 153골을 기록하며 원조 미들라이커로 활약하며 1966-67 시즌부터 1974-75 시즌까지 매 시즌 리그 두자릿수 골을 기록하였다. 마이크 서머비, 프랜시스 리와 함께 리그 최강의 2선을 구축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당시 구단의 간판스타였다. 하지만 29세라는 젊은 나이였던 1974-75 시즌 다리 혈관이 파열되는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게 되며 전성기를 길게 이어가지 못하며 1980년 은퇴한다. 2004년 팬들의 투표로 에티하드 스타디움의 서쪽 스탠드는 콜린 벨 스탠드로 명명되었다. 이후 그는 2021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별세 후 치뤄진 리그컵 경기에서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은 콜린 벨이 사용했던 8번 유니폼을 입고 입장하며 그를 기리며 추모했다. 그리고 2023년, 구단은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거침없는 돌파로 팬들에게 경보기로 불린 윙어이며 조 머서가 맨시티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첫 영입 선수이다. 서머비는 1965년부터 1975년까지 10시즌 동안 452경기 출전 68골을 기록했고 드리블, 킥, 체력 등 많은 부분에서 완벽했으며 콜린 벨, 프랜시스 리와 함께 리그 최강의 2선을 구축하며 황금기를 함께 했다. 현재는 맨체스터 시티의 엠버서더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2023년, 구단은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 출신으로 그의 집은 메인 로드 가까이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그에게 입단 제의를 했으나 거절하고 그는 맨체스터 시티를 택했다. 1군 데뷔를 한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간 뛰며 416경기 111골을 기록하였으며 콜린 벨, 서머비, 프랜시스 리에 스포트라이트가 가려지긴 했지만 그가 보여준 활약은 맨시티 레전드로 뽑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1968-69 시즌 FA컵 결승전에서 레스터 시티를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며 우승을 이끌었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결승골을 기록하며 첫 유럽대항전 우승을 이끈다. 2010년 말 말기 암 진단을 받았고 맨체스터 시티는 닐 영을 기념하기 위해서 2011년 2월 19일, 64강 레스터 시티와의 2차전에서 맨시티 선수들과 팬들은 1968-69 시즌 결승전에 입었던 유니폼을 입고 입장하였고, 제임스 밀너는 "닐 영에게 FA컵 우승을 안겨주겠다" 라고 말하며 그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정말로 FA컵을 우승했다. 닐 영은 2011년 2월 3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 출신으로 초기에 공격수로 데뷔해 점점 포지션이 내려가며 미드필더,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특히 미드필더에서의 활약이 빼어났으며 공격수였기에 슈팅과 세트피스시의 킥 능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마이크 도일은 항상 경기에서 100% 모든 것을 쏟아붓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맨체스터 더비에서는 더욱더 몸을 사리지 않는 투지를 보여줬다. 그 덕에 팬들은 마이크 도일을 사랑했으며 '블루 블러드'라는 자서전을 내기도 하였다. 1969-70 시즌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와의 결승전에서 골을 기록하며 구단 첫 리그컵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2011년 향년 6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후 손자인 토미 도일이 맨시티 유스부터 시작해 성인팀 데뷔에 성공하면서 대를 잇고 있다.
  • 앨런 오크스
    맨체스터 시티 올타임 최다 출전자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 출신으로 구단 최다 출전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오크스는 기록이 증명하듯 맨체스터 시티의 암흑기부터 함께하며 일관된 경기력을 꾸준히 보여주며 많은 경기를 소화하는 강철몸이였다. 그는 682경기에 출전했고 맨체스터 시티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활약하며 맨시티의 황금기를 함께했다. 그의 프로의식은 팀 동료들과 다른 축구 선수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당시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이었던 빌 샹클리는 "어린 친구들이 모델로 삼아야 할 선수"라고 하며 그의 프로 정신을 칭찬했다.
  • 토니 북
    60년대 황금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주장
    맨체스터 시티 올해의 선수 최초 수상자
토니 북은 벽돌공에서 아마추어 축구팀에 입단하며 하부리그를 전전하던 선수였다. 토니 북은 3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1966년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했는데 당시 감독이였던 머서는 토니 북의 나이 때문에 그의 영입을 꺼렸으나 그의 리더쉽과 재능을 알아본 말콤 앨리슨의 추천으로 입단할 수 있었다. 첫 시즌 토니북은 팀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끌고 그 후에 바로 주장직을 이어받으며 팀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며 그 해에 바로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1967-68 시즌부터 구단 최초로 시행한 맨체스터 시티 올해의 선수의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뱅상 콤파니 이전 맨시티 역대 최고의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며 1974년 콜린 벨에게 주장직을 넘기며 은퇴했다. 그는 은퇴 후 감독으로서도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맨체스터 시티를 이끌며 리그컵을 우승하기도 했다. 후에 토니 북은 맨체스터 시티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맨체스터 시티 공식 서포터즈 클럽의 종신 회장으로도 선정되었다.
빠른 스피드를 통한 드리블을 즐겨했던 프랜시스 리는 콜린 벨, 서머비와 함께 맨시티의 황금기를 열었던 주역 중 하나이다. 그는 맨시티로 오기 이전 볼턴 원더러스의 왕으로 불렸으며 맨시티에 1967년 합류하여 1974년까지 330경기 출전 148골을 기록하였다. 프랜시스 리는 의도성 짙은 다이빙으로 페널티킥 수집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 시즌 최다 페널티킥을 얻은 기록도 가지고 있으며 정확한 킥과 강력한 슈팅도 지녔다. 그는 또한 아구에로와 루니에 의해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맨체스터 더비 최다 득점자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다. 리그 득점왕도 달성하며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고 1974년 더비 카운티로 이적하며 그곳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하며 맨시티에 이어 더비 카운티를 또 다시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구단은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 조 코리건
    Big Joe
빅 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조 코리건은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 출신으로 1967년 1군에 데뷔하였다. 당시 맨시티의 주전 골키퍼 였던 해리 다우드를 밀어내며 메인 로드의 수호신으로 불렸다. 훌륭한 기량으로 과거 맨시티의 황금기를 함께 했으며 구단 올해의 선수에 3회나 선정되기도 했다. 이는 리차드 던, 케빈 더 브라위너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기도 하다.

1.5. 1990년대

1996년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겪던 맨시티에 입단하며 우베 뢰슬러와 공격 듀오로 활약했으나 팀의 승격을 이끌지는 못하였고 1998년 팀 역사상 최초로 3부 리그로 팀이 강등당하며 우베 뢰슬러는 팀을 떠났으며, 새로운 파트너 숀 고터와 함께 활약했다. 그리고 1998-99 시즌 리그 정규시즌이 끝나고 승격팀을 결정짓는 플레이오프 결승전 질링엄과의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였으나 95분 추가시간 코너킥에서 동점골을 기록하며 연장전으로 승부를 끌고갔고 결국 맨체스터 시티는 질링엄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2부 리그로 승격한다. 디코프의 이 동점골은 아구에로의 그 골이 나오기 전까지 2005년 맨체스터 시티 구단 역대 최고의 골로 선정되기도 했다.
  • 숀 고터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들어올린 구세주
1997-98 시즌 후반기에 이적해온 숀 고터는 남은 7경기 동안 3골을 넣으며 분투 했으나 팀 역사상 최초의 3부 리그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이 시작되었고 21골을 넣으며 구단 최고 득점자가 되며 팀을 2부 리그로 다시 승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이었던 1999-00 시즌 숀 고터는 더욱더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29골을 넣으며 팀을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시킨다. 하지만 승격한지 바로 한 시즌만에 팀은 다시 강등당하고 말았고 숀 고터는 이번에는 구단 최초 한시즌 30골을 넘긴 선수를 기록하며 2부 리그 득점왕도 기록하며 팀을 또 다시 승격시킨다. 자칫하면 암흑기에 하부리그에 오래 있을 뻔했던 맨시티를 숀 고터는 뛰어난 활약으로 팀을 빠르게 승격시키는데 정말 중요했던 역할을 한 선수였다. 그는 212경기에 출전하며 103골을 기록했다.
조지아가 배출한 90년대 플레이메이커였던 킨클라제는 1995년 강등권 탈출에 힘을 쏟던 맨시티로 이적한다. 당시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빠져있던 맨시티에서 언터쳐블한 활약을 보여주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킨클라제는 맨시티가 힘들어하던 암흑기에 그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첫 시즌 맨시티의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팀이 강등당하자 수많은 클럽들이 킨클라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뛰어들었고, 맨시티 팬들은 그를 뺏길까 두려워 사비를 투자해서라도 그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였다. 하지만 킨클라제는 맨시티를 다시 승격시키겠다며 구애를 뿌리치고 팀에 잔류하였다. 하지만 팀은 3부 리그로 떨어져 버리며 새로 부임한 조 로일 감독은 팀을 개편하기를 원했고 아약스에서 제의가 오자 킨클라제는 결국 맨시티를 떠나게 되었다.
동독 태생의 공격수였던 뢰슬러는 맨시티에서 152경기에 출전하여 50골을 기록하며 제공권과 터프한 몸싸움의 타겟맨이었다. 그의 전성기를 맨시티에서 보냈으며 PL 출범 후 맨시티가 강등 당하기 전까지 맨시티를 대표하는 공격수였다. 2부 리그 강등 후에도 팀에 남아서 활약했지만 팀의 3부 리그 강등을 막을수는 없었고 뢰슬러는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1.6. 2000년대

1999년 맨시티에서 프로 데뷔해 2005년까지 153경기 26골을 기록했다. 이후 첼시로 이적하면서 남긴 31.5m 유로는 14년 동안 다닐루가 판매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던 맨시티의 판매 클럽 레코드이기도 했다. 이후 2008년에 맨시티로 돌아와 2011년까지 뛰면서 64경기 9골을 기록해 합계 9년 동안 219경기 35골을 기록했다. 라이트필립스를 팀 레전드로 불러야 하는가에 대해 국내에서는 이견도 있었지만 현지 시티즌들은 2000년대 초반 시티를 이끈 선수로 라이트필립스를 인정하고 있으며, 구단이 팀 레전드들만 모아 그려놓은 위 그림에도 당당히 들어가 있다.
  • 리처드 던
    맨시티 구단 역사상 유일한 올해의 선수 4연속 수상자
강골 체격에 터프한 몸싸움을 바탕으로한 파이팅 넘치는 센터백으로, 국내에서는 이런저런 불명예 기록으로 유명하지만 시티에서는 수비진의 축이었던 선수다. 2000년에 자신의 은사 조 로일의 부름에 맨체스터 시티로 입단하였고 2009년까지 296경기 7골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구단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구단 올해의 선수 4연속 수상자이며, 2006년에는 팀의 주장이였던 실뱅 디스탱이 태업을 일으키며 이적을 요청하자 구단 측은 디스탱의 주장직을 박탈, 던이 그 뒤를 이어 시티의 주장을 맡았다. 2008년 만수르가 팀을 인수한 후에 콜로 투레, 졸리온 레스콧 등이 영입되며 던의 입지는 줄어들어 갔으며, 결국 2009년에 아스톤 빌라로 이적해 9년간의 맨시티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자리는 또다른 시티의 레전드인 뱅상 콤파니가 이어받았다.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 출신인 리차즈는 2005년 16살이라는 당시 굉장히 이례적인 나이에 맨시티에서 데뷔하였다. 그는 센터백과 풀백을 오가며 활약했고 괴물같은 몸싸움과 속도로 우직하게 밀고들어가는 그의 오버래핑은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플레이였다. 그의 이런 활약에 잉글랜드는 게리 네빌의 후계자라 평했으며 향후 오른쪽 풀백의 자리는 걱정이 없을거라 생각했다. 같은 시기 스페인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세르히오 라모스에 대한 잉글랜드의 대답이라고 까지 평가될 정도였으면 당시 그의 잠재력과 기대가 어마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 부임 이후 오른쪽 풀백으로 정착하였고, 특히 2011-12 시즌에는 드디어 기량을 만개하며 폭발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월드클래스 반열에 올라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리차즈의 커리어가 크게 꺾이게 되는 2012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여 큰 부상을 당하며 장기 부상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10월 선덜랜드전에서 복귀하며 출전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안가 또 스완지 시티와의 경기에서 또 다시 장기부상을 당하며 그때부터 계속해서 장기부상을 끊으며 커리어가 망가지게 되며 파블로 사발레타에게 주전 경쟁을 밀리고 2015년 맨시티와 작별하게 된다. 현재 리차즈는 은퇴 후 맨시티 앰버서더 BBC 패널로서 활약하고 있다.

1.7. 2010년대

만치니는 2009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마크 휴즈를 대신해 감독으로 부임했다. 빠르게 팀을 재정비하여 챔스권 경쟁을 했으나 5위로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만치니는 2010-11 시즌 정리해야할 선수들은 정리하고 앞으로 맨시티의 중심이 될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불균형적이였던 스쿼드를 빠르게 정리한다. 그리고 43년만에 FA컵 우승을 안기고 그 다음 시즌 구단 최고의 선수가 될 세르히오 아구에로를 영입하며 팀에 44년만의 리그 우승을 안긴다. 2012-13 시즌에 리그는 2위로 끝냈으나 1위와의 승점차가 큰 2위였고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3무 3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안겼기에 결국 만치니는 경질당한다. 만치니는 위태위태하던 팀의 수비력을 올리는데 크게 기여했고 뱅상 콤파니를 수비수로 포지션을 정착시키면서 콤파니를 세계적인 선수로 끌어올렸다. 물론 공격적인 전술면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세부적인 공격은 선수들에게 맡기는 성향이 강했으며 중앙 지향적인 공격을 너무 즐겨했다. 하지만 펠레그리니, 펩까지 이어지는 팀의 레전드가 될 선수들이 대부분 만치니의 영입생들이며 만수르의 부임으로 시작되는 맨시티 전성기의 초석을 다진 감독이다.
  • 뱅상 콤파니
    맨시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
본래 수비형 미드필더 출신으로 함부르크에서의 활약을 통해 맨시티에 입단했다. 입단 후 치열한 경쟁을 뚫고 2010년 즈음부터는 주전으로 자리잡았으며, 2010-11 시즌 맨시티 올해의 선수를 수상, 2011-12 시즌부터는 주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주장 완장을 찬 이후 더욱 원숙한 기량으로 팀의 44년만의 우승을 이끌었고, PL 올해의 선수까지 수상한다. 이후로도 2019년에 팀을 떠날 때까지 8년간 주장직을 수행했으며, 피지컬, 태클, 차단, 패스, 수비 조율 등 수비수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춘 리그 정상급 센터백으로 맹활약했다. 시티 커리어 후반기에 잦은 부상으로 고생한 것이 유일한 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상만 없다면 꾸준히 주전으로 출장할 정도로 기량과 영향력은 말년까지 살아있었다. 이후 2021년, 맨시티는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프리미어리그 2018-19 시즌 37라운드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극적인 결승 중거리포로 리버풀과의 선두 경쟁에서 승리하게 만든 당시의 골 셀레브레이션을 본따서 동상을 세워 그를 기념하고 있다.
  • 다비드 실바
    El Mago, Merlin
    맨시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플레이 메이커
2010년에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 2019-20 시즌까지 10시즌을 활약했다. 처음에는 작고 호리호리한 이 선수가 잉글랜드의 거친 플레이를 이겨낼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도 많았으나, 이러한 우려를 비웃듯 실바는 우아한 플레이로 2010년대 PL 최고의 미드필더로 군림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통하는 절정에 이르는 탈압박 능력을 보유했으며, 이를 통해 압박에서 벗어난 후 주변으로 정교한 패스를 쉽게 넣어주는 선수였다. 일명 '실바 턴' 이라고 불리는 라펠로피냐 턴은 실바의 장기중의 장기. 패스, 탈압박, 드리블, 찬스 메이킹, 세트피스에 때때로 나오는 적절한 득점력까지 키 빼고 모든 것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펩 부임 이후에는 3선 중앙 미드필더로도 맹활약하며 클래스를 입증했다. 한동안 부주장직을 수행하다가 2019년 뱅상 콩파니가 떠난 이후로는 주장을 맡아 한 시즌을 더 활약하고 팀을 떠났으며, 맨체스터 시티는 다비드 실바를 기념하기 위해 2021년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다비드 실바의 동상을 세웠다.
2011년에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 데뷔전부터 교체 돼서 들어와 2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이후 빠르게 팀의 주축으로 녹아들었고, 축구 팬들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프리미어 리그 역사에 남을 극적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 후 다른 클럽들의 구애를 뿌리치며 맨시티에 잔류하며 10년간 구단의 주포로 활약하면서 PL 외국인 최다 득점자와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로 등극한다. 명실상부 2010년대 PL을 대표하는 선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PL 명예의 전당에 선정된다. 숱한 경쟁자들과 바뀌는 감독들 사이에서 스타일 변화를 꾀하며 경쟁에서 모두 이겨낸 아구에로는 명실상부 구단 역대 최고의 레전드 중 하나이다. 2020-21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났고, FC 바르셀로나에서 커리어를 이어갔으나 심장질환 문제로 인하여 아쉽게 선수생활을 은퇴하였으며 현재는 스트리머와 e스포츠 구단주로 활약하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는 아구에로를 기념하기 위해 2022년 에티하드 스타디움맨시티의 44년 만의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이자 첫번째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극적인 결승골 당시 골 셀레브레이션을 본따서 아구에로의 동상을 세웠다.
2010년 FC 바르셀로나에서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야야 투레는 적응 기간도 필요없이 바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특히 첫 시즌인 2010-11 시즌, 긴 세월의 무관을 끝내는 FA컵 결승전 결승골을 뽑아내는 등 투레의 활약은 맨시티가 본격적으로 강팀으로 올라서는 기반이 되기에 충분했다. 투레는 거구의 피지컬에 걸맞지 않는 유연함, 스피드, 킥, 패싱등 육각형 미드필더였으며 한창 잘하던 시기인 2010~2014년까지는 루드 굴리트에 비교될 정도로 임팩트가 엄청났으며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를 4회 연속 수상하는 등 강력한 전성기를 보였다. 실력으로는 레전드로 불리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지만, 경기 외적으로 보여주는 언플과 태도[3], 그리고 팀을 떠난 후 펩 과르디올라는 흑인 선수들에게 차별대우를 했기 때문에 자신을 기용하지 않았다[4]라는 근거 없는 비난 인터뷰 때문에 팬들의 지지도를 많이 잃었다. 선수 시절 펩 감독과 맨시티 보드진에게 행한 진상짓으로 인해 엄청난 구단 기여도에도 불구하고 은퇴 이후에 구단 공식 행사에 초청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5] 더욱이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오랜 기간 동안 구단에 헌신하며 그야말로 맨시티를 PL 최고 구단의 위치로 올려 놓았기 때문에 더욱이 야야투레의 손을 들어줄 이유가 없어지고 있다.2008년 맨체스터 시티로 입단했던 사발레타는 만수르 이전 맨시티의 마지막 영입이었다. 사발레타는 리차즈가 우풀백으로 정착한 후에는 리차즈에게 밀려 좌풀백으로도 나오고 우풀백으로 나오는 등 로테이션 멤버에 가까웠다. 그래도 많은 경기를 소화하고 2011-12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결정지을 38라운드 QPR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2012-13 시즌에는 부주장에 임명되며 모두가 직전 시즌보다 폼이 떨어진 경기력을 보여줄때 사발레타만은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EPL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리차즈를 밀어내며 주전으로 도약한다. 언제나 열정적이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준 사발레타는 경기가 끝나고 라커룸으로 들어올때마다 항상 몸이 다치고 피가 나고 유니폼이 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발레타는 팀을 위해서 100%를 보여주는 선수였으며 이런 사발레타를 팬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발레타는 매우 프로페셔널한 선수이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발레타는 태클, 뛰는 타이밍, 경기를 읽는 능력이 흠잡을데 없었다.
나는 후에 그가 상처와 타박상으로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뱅상 콤파니
  • 조 하트
    맨시티의 심장
    PL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자
조 하트는 2006년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하여 주전 경쟁을 이겨내며 당당히 선발을 차지했다. 2009년 셰이 기븐이 영입되며 선발에서 밀린 하트는 경험을 쌓기 위해 2009-10 시즌 버밍엄으로 임대되어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버밍엄 올해의 선수,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그렇게 2010-11 시즌 맨시티로 복귀하여 이때부터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다. 조 하트는 196이라는 장신과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선방에 능했으며 2015-16 시즌에는 팀의 3주장이였지만 부상으로 거의 시즌을 소화하지 못한 콤파니와, 폼이 너무나도 떨어져 출전을 못하던 투레가 있어 완장을 차며 팀을 이끌며 구단 첫 챔스 4강행을 이끈다. 이렇게 2016년까지 조 하트는 맨시티의 주전 골키퍼로 골든 글러브를 4회 수상하며 활약을 펼쳤지만 펩 과르디올라가 감독으로 부임하며 상황이 변한다. 펩은 골키퍼 빌드업을 중요시하는 감독이였고, 조 하트에게 스타일 변화를 요구했지만 조 하트는 거절했고 결국 클라우디오 브라보를 영입하며 조 하트는 맨시티와 작별을 고한다. 조 하트도 만수르 체제에서 살아남았던 선수이자 탑클래스의 자국 선수라 팬들은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냉정하게는 기대받던 만큼은 성장하지 못했고, 골키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빠르게 기량이 하락했다.[6]
2013년 28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맨시티로 합류한 페르난지뉴는 이적료에 사비를 보태서까지 온 선수였다. 하지만 나이 때문에 선수를 사오는 것에 팬들은 불안감이 있었다. 원래는 공격적인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페르난지뉴는 마누엘 펠레그리니의 442 체제에서 파트너였던 야야 투레가 공격력이 극대화되면서 돌아오지 않았고, 자연스레 투레를 커버했던 페르난지뉴는 강제로 수비력이 스텝업하게 된다. 2013-14 시즌에 공격력이 폭발하며 102득점을 할 수 있었던 뒷배경에는 돌아오지 않는 투레, 스피드가 느려 복귀가 더딘 콜라로프를 커버해낸 페르난지뉴가 있었다. 맨시티의 허리에서 모든것을 책임지며 묵묵히 투지를 보여줬던 페르난지뉴는 2016년 펩의 합류로 한단계 더 성장한다. 펩 체제에서 원볼란치를 맡은 페르난지뉴는 빌드업의 중심이 되면서 활동량, 태클, 저지, 후방 플레이메이킹 등 완벽에 가깝게 보여주었다. 다비드 실바 - 페르난지뉴 - 케빈 더 브라위너로 이어지는 미드필더 라인은 리그 최고의 조합이였으며 2019년까지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2020년 실바가 떠나고 팀의 주장을 이어받으며 2022년까지 주장으로 리더십을 보이며 경기에 나오지 않더라도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페르난지뉴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묵묵히 역할을 수행했던 언성히어로 페르난지뉴는 위 레전드 그림에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레전드로 불림에 손색이 없다.

1.8. 2020년대

2016년 펩 체제의 맨시티에서 첫 영입으로 귄도안은 첫 시즌부터 장기부상으로 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렸고, 17-18 시즌 준주전으로 다비드 실바, 케빈 더 브라위너와 파트너를 이루면서 무난한 활약, 18-19 시즌 페르난지뉴의 노쇠화와 체력적 문제로 인해 홀딩 미드필더로 출전하면서 후반기 공격적인 연계를 보여주었고, 19-20 시즌 다비드 실바의 폼 저하로 인해 다비드 실바 역할을 부여받았으나 뚜렷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 때까지는 그랬다. 20-21 시즌 케빈 더 브라위너의 부상과 칸셀루를 중앙으로 옮기면서 귄도안에게 단점으로 꾸준히 지적받던 기동력 저하로 인한 수비 기여도를 로드리, 페르난지뉴와 함께 서는 투 볼란치 전술로 덜고 좀 더 공격에서 자유롭게 박스 타격을 중점적으로 하는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날아 올랐고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하면서 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21-22 시즌에는 마지막 리그 최종전 교체 출전하여 2골을 기록하면서 경기를 뒤집는 대활약으로 리그 우승에 공헌했고, 22-23 시즌 페르난지뉴의 뒤를 이어 주장직을 받아 팀 선수들을 이끌며 맨시티의 오랜 숙원이던 챔스 우승과 더불어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시즌을 끝으로 7시즌간의 맨시티 생활을 끝내며 바르셀로나로 자유계약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물론 귄도안에게 편의를 많이 봐준 전술을 사용했기에 활약하기 쉬웠던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최고의 클러치까지 보여주었다.

1.9. 현재

2016년 맨체스터 시티에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수많은 우승 트로피와 함께 새로운 시대의 맨시티를 지휘했다. 리그 3연패 및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유일한 도메스틱 트레블과 영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5관왕, 구단 최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및 역사적인 트레블을 달성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이자 긴 말이 필요없는 맨체스터 시티 역대 최고의 감독이다.
2015년 맨체스터 시티로 구단 레코드를 기록하며 입단했다. 입단 당시에는 오버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려가 있었으나 합류하자마자 바로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며 팀을 구단 역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 4강으로 이끈다. 그리고 펩이 시티로 합류한 뒤 펩 체제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과거 실바, 아구에로가 받던 스포트라이트를 자신한테 가져오며 구단의 에이스 자리를 이어받는다. 또한 몇년간 계속해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PL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자리에 오른다. 국내에서는 '김덕배'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 후벵 디아스
    혜성처럼 등장해 맨시티의 수비진을 안정시킨 콤파니의 후계자

2. 그 밖의 맨체스터 시티의 상징적인 인물들

맨체스터 시티 소속으로 공식 경기 200경기 이상 출전, 혹은 단기간이더라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들만 기재할 것.

2.1. 1900년대

  • 찰리 윌리엄스
    축구 역사상 최초로 골을 넣은 골키퍼
축구가 시작되었던 19세기 후반 활동했던 골키퍼로 당시 1894년부터 맨체스터 시티의 골키퍼로 활약하며 8시즌간 맨시티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후방을 책임졌다. 1900년 4월 14일 선더랜드와의 리그 경기에서 그는 공을 걷어내기 위해 길게 찬 공이 그대로 상대편의 골대 안으로 들어가며 축구 역사상 오픈 플레이에서 최초로 골을 넣은 골키퍼가 되었다. 그는 1952년 향년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로트 존스
20세기 초 활약했던 웨일스의 축구 스타 중 한명으로 당대 최고의 축구 스타였으며 같은 팀에서 뛰었던 빌리 메레디스 다음가는 인지도를 자랑했다. 메레디스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떠난 이후 주장직을 물려받고 좋은 활약을 보이며 그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으나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그가 한창 전성기를 보낼 시기에 제동이 걸렸다. 1918년 종전이 되고 1919년 다시 시즌을 재개했으나 그의 폼은 떨어졌고,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로 이적한다. 그는 맨시티에서 301경기를 출장하며 76골을 기록했다. 로트 존스는 1941년 향년 5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2. 1910년대

  • 호레이스 반스
더비 카운티에서 좌측 윙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그는 1914년 맨시티로 이적해와 첫 시즌 리그 25경기에 출전, 12골을 기록하며 좋은 시즌을 보내며 팀이 리그 5등을 거두도록 돕는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리그가 중단되었고, 그는 전쟁 기간 동안 군수공장에서 일을 한다. 1919년 다시 리그가 재개되자 팀은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고, 하향세를 겪는 팀에서 주포로 활약하며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1924년까지 맨시티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활약하다 프레스턴으로 이적하며 시티와 작별한다. 그는 맨시티에서 통산 235경기를 출전하며 125골을 넣었다. 호레이스 반스는 1961년 향년 7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토미 브로웰
헐 시티와 에버튼에서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좋은 활약을 보이던 브로웰은 1913년 맨시티로 이적해온다. 맨시티에서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브로웰은 호레이스 반스와 좋은 합을 보이며 많은 골을 합작해낸다. 전쟁으로 리그가 중단되고 4년 후 1919년 다시 리그가 재개한 후에도 좋은 활약을 보였고, 1920-21 시즌 리그에서 31골을 넣으며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으나 팀은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다. 이후 1926년까지 팀의 주포로서 활약했고, 블랙풀로 이적한다. 그는 맨시티에서 통산 247경기에 출전하며 139골을 넣었다. 브로웰은 지금까지도 맨시티 역대 최다 득점자 8위에 위치해있다. 그는 1955년 향년 6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3. 1920년대

  • 프랭크 로버츠
    맨체스터 시티 최초의 득점왕
1910년대 볼턴 원더러스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로버츠는 1922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첫 시즌 그는 10골을 넣었고, 팀에서 세번째로 많은 골을 넣은 선수였다. 이후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로버츠는 1924-25 시즌 리그에서 31골을 넣으며 맨시티 소속 최초로 리그 득점왕을 수상한다. 그 다음 시즌인 25-26 시즌에는 FA컵 5라운드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 5골을 몰아치며 팀을 결승으로 이끈다. 결승까지 FA컵에서 9골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고, 결승전 상대는 그의 친정팀이였던 볼튼이였으나 아쉽게 1-0으로 석패하며 팀은 준우승에 그친다. 리그에서도 21골을 넣으며 활약을 했으나 팀은 강등당했고 그러나 2부 리그에서 다시 맹활약하며 27-28 시즌 다시 팀을 1부 리그로 이끈다. 그리고 28-29 시즌을 끝으로 맨체스터 시티에서 은퇴한다. 그는 통산 216경기 124골을 기록했다. 프랭크 로버츠는 1961년 향년 6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토미 존슨
조선공이였던 존슨은 달튼에서 파트타임으로 축구를 뛰다 1919년 맨체스터 시티에서 정식 프로계약을 체결한다.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보이며 탁월한 실력을 보였고, 그는 특히 강력한 왼발 슛으로 유명했다. 당시 에릭 브룩, 토미 존슨, 프랭크 로버츠, 프레드 틸손으로 이어지는 4톱은 굉장히 리그에서 굉장히 파괴력있는 라인이었고 그만큼 다득점이 많았다. 특히 1부 리그로 다시 승격한 직후였던 1928-29 시즌 리그에서 38골을 기록했다. 그는 1930년까지 맨시티에서 통산 354경기에 출전하며 166골을 기록했다. 토미 존슨은 1973년 향년 7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4. 1930년대

  • 샘 코완
1924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 하여 바로 팀의 핵심으로 합류한 코완은 1926년 팀이 FA컵 결승에 오르게 한 일원 중 하나였다. 하지만 팀은 볼턴 에게 패배하면서 준우승을 맛보게 된다. 30년대 지미 맥멀런의 뒤를 이어 팀을 주장으로서 이끌며 하나로 모았고 팀은 FA컵 결승에 두번 진출한다. 1933년 FA컵 결승 에버튼 과의 경기에서 3대0으로 패배하며 다시 한번 준우승을 기록하지만, 그는 내년에 다시 와서 기필코 우승하겠다고 한다. 그 말대로인지 1934년 다시 한번 FA컵 결승에 진출한다. 경기 내내 선수들을 계속해서 독려하고 동기부여하면서 몰아붙였고 결국 팀은 삼수만에 FA컵을 우승하게 된다. 그는 1964년 10월 4일 치러졌던 축구 자선경기에서 심판을 맡던 도중 심장마비로 향년 6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2004년 맨체스터 시티 명예의 전당에 등록됐으며 맨시티의 경기장이였던 메인 로드의 거리 중 하나인 샘 코완 클로즈는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 프레드 틸손
1930년대를 이끌었던 맨체스터 시티의 스트라이커 체구는 크지 않았으나 저돌적이였고, 33-34 FA컵 포츠머스와의 결승에서 동점골과 역전골을 기록하며 맨시티의 FA컵 우승에 공헌했다. 틸손은 맨시티에서 통산 275경기 132골을 기록했다. 틸손은 선수은퇴후에도 맨시티에서 수석 스카우터로 일하다 1972년 향년 6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재키 브레이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출신으로 은퇴할때까지 맨체스터 시티에만 있었던 원클럽맨이었던 브레이는 하프백으로 풀백도 소화가 가능했으며 팀동료 였던 맷 버스비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고 36-37 맨체스터 시티의 첫 리그 우승을 함께했다. 계속해서 활약을 하던 도중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사실상 선수생활의 종지부를 찍게된다. 전쟁중에 그는 영국 공군으로 복무했다. 브레이는 맨시티에서 통산 279경기에 출전하여 10골을 기록했다. 브레이는 1982년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 출신이였던 버스비는 공격수로 데뷔했으나 그렇게 출중하지는 않았고 하프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기량이 만개하며 30년대 맨시티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버스비는 윌프 와일드 감독의 총애를 받는 선수였고 맨시티의 FA컵 우승에 공헌하는 핵심 멤버중 한명이였다. 1936년 리버풀로 이적하며 맨시티와 작별한다. 맨시티에서 7시즌간 주전을 차지하며 통산 229경기에 출장하며 14골을 기록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거론되지만, 선수 시절 최고의 전성기는 맨시티에서 보냈다. 버스비는 1994년 향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피터 도허티
북아일랜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거론되는 선수로 플레이메이킹, 결정력 등 다양한 역할을 수준급으로 이행하는 당시 영국 축구에서 눈부신 스타플레이어 중 한명이었다. 1936년 맨시티로 이적해온 도허티는 첫 시즌부터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다.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만족하지 못했고 두번째 시즌부터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며 리그 30골을 넣으며 맨시티의 첫 리그 우승을 이끈다. 그 다음 시즌인 37-38 시즌 리그에서 25골을 넣으며 활약했으나 팀은 강등을 당하고 계속해서 2부 리그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 한창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으나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영국 공군으로 복무한다. 전시중에도 81경기에 출전하며 60골을 넣는 대단한 활약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전시경기는 공식 기록에 집계되지는 않았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재개된 46-47 시즌 도허티는 맨시티를 떠나게 된다. 그는 맨시티에서 통산 131경기에 출전하며 80골을 기록했으며, 1990년 향년 7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5. 1950년대

돈 레비는 1951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했다. 두 시즌 동안 팀은 고전하고 있었고, 53-54 시즌부터 맥도월 감독은 브로드디스를 뉴캐슬로 매각하며, 레비를 중앙 포워드로 옮긴다. 당시 50년대를 지배하고 있던 헝가리의 가짜 9번 전술에 영감을 받아 53-54 시즌 중반부터 레비를 중앙에 위치시키며 깊숙이 내려오도록 하며 상대 수비를 끌어내리는 가짜 9번 역할을 영국 축구에서 최초로 도입했다. 이것은 레비 플랜이라 불렸을 정도로 당시 영국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여 레비는 54-55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한다. 팀도 FA컵 결승전에 올랐지만 아쉽게 뉴캐슬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무르지만, 결국 이 전술을 계속해서 사용해 바로 그 다음해인 55-56 시즌 다시 FA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버밍엄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이 우승을 마지막으로 레비는 선더랜드로 이적한다. 레비는 1989년 향년 6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조 헤이스
맨체스터 시티 유스 출신인 조 헤이스는 1953년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를 한다. 10대부터 두각을 나타내던 헤이스는 54-55 시즌 FA컵 결승에도 선발 출전했으나 팀은 패배했고 그 다음 시즌 다시 결승전에 선발 출전해 돈 레비의 패스를 받아 선제골을 넣으며 활약한다. 당시 팀의 주포로 활약하며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를 오가며 활약했다. 좋은 활약을 보이다 63-64 시즌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며 그의 선수 생활의 전성기가 끝나게 된다. 결국 1965년 맨체스터 시티를 떠나며 반즐리로 이적한다. 그는 12시즌간 364경기에 출전하며 152골을 넣었다. 지금 현재도 맨시티 역대 최다 득점자 5등에 위치해있다. 조 헤이스는 1999년 향년 6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바비 존스톤
1950년대 스코틀랜드를 리그를 주름잡던 명문팀 히버니언 FC에 악명높은 5인조 The Famous Five에 일원중 한명이었던 존스톤은 1955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오자마자 좋은 활약을 보였으며 타겟맨으로 활약하며 좋은 득점력을 보였다. 그는 54-55 시즌 FA컵 결승전, 55-56 시즌 FA컵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기록하며 영국 역사상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FA컵 결승전에서 연속으로 골을 넣은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짧았지만 굵직한 활약을 보인 존스톤은 다시 히버니언으로 돌아간다. 바비 존스톤은 2001년 향년 7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6. 1960년대

  • 글린 파도[7]
    Warm and Gentle
맨체스터 시티 유스 출신으로 공격수로 데뷔한 맨체스터 시티 최연소 출전 기록 보유자다. 그는 조 머서 감독 부임 이후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풀백으로 기량을 만개하며 맨시티의 주전 레프트백이 되며 조 머서 감독 체제에서 팀의 황금기를 함께했다. 하지만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 1970년 12월 맨체스터 더비에서 조지 베스트의 거친 태클로 인해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며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출전하지 못한다. 부상 복귀 후 주전 자리를 빼앗기며 제 폼을 찾지 못하다가 1976년 29세에 은퇴를 선언하며 맨체스터 시티에 유소년 코치로 부임하며 1992년까지 유소년 코치로서 활약한다. 글린 파도는 향년 2020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훌륭한 수비수 였다. 1970년에 다리가 부러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국가대표로 뛰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콜린 벨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내 생각엔 그는 국가대표로 많은승리를 누렸을것이다.
하지만 그 부상으로 인해 다시 경기를 뛰기위해 길게 고생해야 했다.

마이크 서머비

2.7. 1970년대

  • 데니스 튜어트
70년대 리그 탑클래스의 윙어였던 튜어트는 1974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한다. 이후 1976년 리그컵 뉴캐슬과의 결승전에서 멋진 바이시클킥을 성공시키며 리그컵 우승에 공헌한다. 그는 1975-76, 1976-77 PFA 올해의 팀에 2연속으로 선정되는 좋은 활약을 보였다. 그렇게 1978년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며 맨시티 커리어를 끝내는 듯 했으나, 1980년 다시 맨시티로 이적하며 맨시티 2기 생활을 시작한다. 2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1981년 FA컵 결승전까지도 이끈다. 튜어트는 맨시티에서 통산 262경기 73골을 기록하였다.
  • 폴 파워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였던 폴 파워는 레프트백이였지만 미드필더 지역까지 소화가 가능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이후 1975년 맨시티 1군으로 합류하며 수비진의 리더로 활약하며 1981년, 1986년 구단 올해의 선수를 2회 수상하였다. 긴 시간 동안 좋은 활약을 보이며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맨시티는 당시 리그 우승을 하기에는 힘든 상황이였고, 폴 파워는 리그 우승을 위해 1986-87 시즌 에버튼으로 이적하며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폴 파워는 맨시티에서 11년간 445경기 36골을 기록했다.

2.8. 1980년대

  • 폴 레이크
맨체스터 시티 유스 출신으로 80년대 잉글랜드의 신성으로 불렸던 미드필더였다. 놀라운 천재성을 바탕으로 맨시티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로 기대받던 선수였고, 1987년 데이비드 화이트의 부상으로 1군 경기에 데뷔하게 된다. 그렇게 정규 1군 선수로 안착하며 3시즌간 134경기를 출장하였고 1990-91 시즌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며 그의 앞에 꽃길이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1990년 21세의 나이에 전방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고, 그 뒤로 계속해서 무릎 부상으로 고생하며 1996년 27세의 나이로 은퇴를 하기 전까지 4경기 출장에 그쳤다.
  • 데이비드 화이트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였던 데이비드 화이트는 유스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FA 유스컵을 우승으로 이끈 핵심 유스였다. 이후 1986년 1군 경기에 데뷔하며 우측 윙과 스트라이커를 번갈아가며 주전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1992년 프리미어 리그로 개편된 이후에 맨시티의 프리미어 리그 첫번째 골을 기록하며 이름을 남겼다. 화이트는 1993년까지 341경기 96골을 기록하였으며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2.9. 1990년대

1990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해 데뷔 시즌 21골을 기록하며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다. 거구의 피지컬을 활용한 플레이로 우베 뢰슬러와 좋은 모습을 보이며 6시즌간 활약하며 240경기 76골을 기록한다. 나이얼 퀸은 당시 주전 골키퍼 대니 코튼의 퇴장으로 골키퍼를 대신해 PK를 막은 경험도 있으며 이후 1996년 선더랜드로 이적한다.

2.10. 2000년대

  • 대니 티아토
1998년 3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맨시티로 합류한 티아토는 첫 시즌부터 주전을 차지한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두번째 시즌인 99-00시즌 부터 주전을 차지하며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팀의 승격을 이끌었다. 그 다음 시즌인 00-01시즌 맨시티는 강등되지만 티아토는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다. 01-02 시즌 시작 전 그는 EPL팀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루머가 있었지만 팀에 잔류하며 다시 한번 승격을 이끈다.
디스탱은 당시 구단 수비수 클럽 레코드로 2002년 맨시티로 합류하였다. 193cm의 큰 키와 강력한 피지컬을 동반한 저돌적인 수비로 디스탱은 첫 시즌부터 좋은 활약을 펼치며 02-03 시즌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다. 이후 그 활약을 인정받아 2003년 맨시티에 주장으로 임명되며 2006년까지 3년간 주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05-06 시즌 후 디스탱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 하며 태업을 했기에 주장직을 박탈당하며 리차드 던에게 주장직이 넘어간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06-07 시즌 맨시티에서 활약했으나 더 이상 재계약은 하지 않았고 디스탱은 구단과 작별한다.
2001-02 시즌 겨울 이적시장부터 맨시티로 합류한 쑨지하이는 팀의 승격과 함께 04-05 시즌까지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04-05 시즌 6라운드 첼시와의 경기에서 구드욘센에게 거친 태클을 당하며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였고 시즌 아웃을 당한다. 이후 05-06 시즌 열심히 재활을 하며 복귀하였으나 이전의 폼이 아니였고 폼이 떨어지며 2008년 셰필드로 이적한다. 그래도 준주전급의 활약으로 당시 팀에게 도움을 주었고 정말 몇 안되는 순수하게 실력으로 나름의 성공을 거둔 중국 출신 프리미어 리그 선수였다. 꽤 꾸준하게 활약해서 맨시티에서 6년간 130경기에 출전했다. 십자인대 부상만 아니였다면 맨시티에서 더 좋은 활약을 펼쳤을 수도 있기에 아쉬운 부분이다.
맨시티 유스 출신의 미드필더였던 아일랜드는 05-06 시즌 맨시티에 18세의 나이로 데뷔하며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한다. 그의 재능과 창의성은 당시 맨시티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만수르 인수 후 첫 시즌인 08-09 시즌 50경기 13골 13도움으로 맹활약하며 이후에도 맨시티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다. 하지만 09-10 시즌 살짝 기복있는 활약을 보였고 10-11 시즌 다비드 실바의 영입으로 인하여 입지가 줄어들었고, 현금+아일랜드로 제임스 밀너와 트레이드된다.
2007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한 엘라누는 브라질 출신의 선수 답지 않게 강력한 킥력을 바탕으로 정확한 롱패스를 즐겨하는 미드필더였다. 첫 시즌부터 38경기 10골 9도움을 기록하며 맨시티의 세트피스를 전담했던 엘라누는 맨체스터 시티의 매력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08-09 시즌 호비뉴가 맨시티로 합류하며 포지션이 겹쳐 그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준주전으로서 활약한다. 특히 UEFA컵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오모니아 전에서의 중거리 골은 엘라누의 최고의 골 중 하나였다. 2009년 갈라타사라이로 이적하며 짧은 맨시티에서의 커리어 였지만 단기간동안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2007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하며 적응기간도 필요없이 좋은 활약을 펼치며 에릭손 체제하에 엘라누와 함께 팀의 2선을 책임지며 맨시티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첫 시즌 37경기 5골 8도움을 기록하며 괜찮은 활약을 보였지만 2008년 만수르 체제로 팀이 변하며 선수단 개혁이 일어난다. 페트로프는 증명해야할 시기에 시즌 초 부터 부상을 당하며 시즌절반을 날려버린다. 그렇게 시즌이 끝나고 09-10 시즌 선수들이 대거 영입되며 페트로프는 로테이션 자원으로 기용되며 쏠쏠한 활약을 보였으나 계속해서 부상이 발목을 잡았고, 주전으로 뛰고 싶었던 페트로프는 결국 시즌 종료후 볼턴으로 이적한다.
호비뉴는 2008년 첼시로의 이적이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는데 세계를 깜짝 놀래키며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첫 시즌 호비뉴 포지션의 경쟁자였던 엘라누를 후보로 내리며 세계적인 스타라는것을 증명하듯이 엄청난 플레이를 보여주며 활약하였으나, 그것은 단 한시즌일 뿐이였고, 이후 잉글랜드 생활 적응, 만치니 체제로 변하면서 포지션 갈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터지며 09-10 시즌 겨울 산투스로 임대를 떠나며 맨시티와 사실상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10-11 시즌 밀란으로 이적한다. 호비뉴의 활약은 08-09 시즌 단 한시즌이지만 맨시티의 상징적인 영입이라고 볼 수 있다.

2.11. 2010년대

2013년 5월, 로베르토 만치니를 경질한 맨시티의 보드진은 사실 후임으로 계속해서 펩 과르디올라를 원하고 선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펩이 바이에른 뮌헨에 부임하자 대신해서 05-06시즌 비야레알을 챔스 4강으로 이끌고, 당시 말락티코로 불리던 말라가를 12-13 시즌 챔스 8강으로 이끄는 등 좋은 지도력을 선보이던 마누엘 펠레그리니를 선임했다. 펠레그리니는 부임 첫 시즌부터 리그에서 야야 투레의 리그 20골이라는 말 그대로 미친 활약과 리그 102골이라는 화끈한 화력으로 우승, 리그컵에서는 결승에서 선덜랜드를 상대로 3-1로 승리해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고, 15-16 시즌에는 구단 최초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과 리그컵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시한부 감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트로피 3개를 들어올리고 마지막 시즌인 15-16 시즌에는 이미 펩 과르디올라 부임이 확정된 상태에서 챔스권을 수성하고 구단 최초 챔스 4강 진출 등 좋은 성과를 내긴 했으나, 3년 동안 쭉 이어졌던 경기력의 저하, 양아들들의 영입과 기용, 그리고 극심해진 스쿼드 노쇠화 등으로 절정의 성과를 내야 할 펩 임기 3년 중 최소 1년은 스쿼드, 특히 수비수쪽을 갈아엎고 대거 리빌딩을 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점 등에서 여러모로 명암이 극명하게 갈리는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
2008-09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 맨시티로 합류한 데 용은 하드워커 기질이 강한 파이팅 넘치는 수비형 미드필더였으며 상당히 거친 스타일로 유명했다. 08-09, 09-10 시즌은 맨시티 중원에 힘을 불어 넣으며 주전을 차지하였고, 10-11 시즌 야야 투레의 합류로 맨시티의 중원은 투레, 가레스 배리, 데 용으로 상당히 피지컬적으로 강력한 조합이였으며 이 조합은 FA컵 우승과 리그 최소실점에 기여한다. 11-12 시즌 아게로, 나스리의 합류로 투레가 뒤로 내려오면서 투레, 배리 조합이 베스트로 잡으며 데 용은 로테이션으로 밀렸으나, 이후에도 소소하게 활약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12-13 시즌 주전 자리를 위해 떠난다. 아구에로의 고별식 영상에 깜짝 출현했다.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는 PL 레전드이다. 2009년 그는 리버풀의 구애를 뿌리치고 맨시티의 비전을 보고 합류한다. 맨시티 합류 후에도 아스톤 빌라 시절 못지않은 활약을 보이며 FA컵과 리그 우승을 해낸다. 파트너 투레가 조금 더 공격적이라면 배리는 조금 더 수비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며 페르난지뉴 이전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선수였다. 2014년 공식적으로 맨시티와 작별하며 에버튼으로 팀을 옮긴다.
200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갈등 끝에 맨체스터 시티에 둥지를 튼 테베즈는 당시 수많은 영입으로 공격 자원들이 상당히 많은 상태였던 맨시티에서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팀내 공격자원 중 으뜸의 활약을 보이며 주전을 차지한다. 10-11 시즌에는 주장직을 받으며 리그 득점왕에 등극한다. 하지만 11-12 시즌 교체 출전을 거부하거나, 무단으로 팀을 떠나고, 이적 요청을 하는 등 많은 구설수를 일으켰다. 팀을 떠날 것으로 보였지만 괜찮은 조건을 제시하는 팀이 없었고 결국 테베즈는 마음을 고쳐먹고 구단에게 사과하며 후반기에 다시 출전하며 팀의 우승에 조그맣게라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12-13 시즌 팀 내 공격수 중에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활약을 했으나 팀은 무관으로 시즌을 마무리 하였고 테베즈는 유벤투스로 팀을 떠나게 된다.
2009년 맨시티로 합류한 레스콧은 첫 시즌에는 뱅상 콤파니, 콜로 투레 조합에 밀려서 3옵션 센터백이였지만, 투레의 도핑 사건으로 10-11 시즌부터는 주전으로 도약한다. 콤파니와 좋은 호흡을 보이며 11-12 시즌까지 좋은 활약을 보이며 리그 최소 실점에 기여한다. 레스콧은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제공권, 힘 싸움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지만 집중력, 위치선정, 판단력같은 부분이 많이 부족했고 그 단점을 바탕으로 11-12 시즌 QPR과의 최종라운드에서 1-0으로 앞서고 있었으나 시세에게 헤딩 백패스를 하면서 참사를 만들뻔 했으나 나머지 팀원의 고군분투로 승리하며 우승을 해낸다. 결국 이러한 단점들이 점점 부각되며 12-13 시즌에는 나스타시치에게 주전을 빼앗기며 로테이션 자원이 된다. 그래도 콤파니 옆에서 맨시티의 리그 우승을 이끈 주전 수비수였고 맨시티에서 5년간 158경기에 출전하여 9골 4도움을 기록하였다. 팀을 떠난 후에도 맨시티에 애정을 보이고 있기에 시티 팬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세르비아 각도기로 불렸던 콜라로프는 강력한 왼발 킥력에서 파생되는 크로스, 슈팅, 롱패스, 오버래핑 등 공격이 우수한 풀백이였다. 하지만 느린 스피드, 대인 마크 등에 약점을 보여 장단점이 뚜렷한 풀백이였다. 맨시티에 2010년 합류하여 2017년까지 247경기 21골 33도움을 기록하였고 2011년 클리쉬가 합류하며 주전을 빼앗기는 듯 했으나 둘은 항상 오락가락하며 한명이 폼이 우수할 때는 한명이 폼이 안좋아서 시즌을 번갈아가며 출전하였다. 펠레그리니가 부임한 2013년 콜라로프는 왼쪽 측면을 담당하며 그의 오버래핑 후 강력한 크로스는 상대의 두줄 수비를 무너뜨리는 무기였다. 2016년 펩의 부임 이후에는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왼발 킥력에 기반한 반대전환 롱패스는 일품이었다.
2010년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하여 10대 시절 이미 완성된 피지컬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킥, 개인기,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침착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안좋은 멘탈을 가지고 있어 팀 입장에서는 시한폭탄을 가진 느낌이였다. 실로 악마의 재능으로 나오면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경기 외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트러블을 일으켰고, 결국 12-13 시즌에는 실력적으로도 폼이 떨어져 만치니에게 훈련장에서 멱살을 잡힐정도로 트러블을 일으켰고, 안좋은 폼으로 경기 도중 교체를 당하자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버리는 둥 기행만 남았다. 12-13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 자신의 드림클럽이라는 밀란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AC 밀란으로 떠난다. 결국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며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남기는 발로텔리는 맨시티 입단후 2012 유로까지가 최전성기로 꼽힌다.
보스니아 폭격기라고 불렸던 제코는 큰 키의 거구와는 다르게 타겟맨 스타일도 소화가 가능했으나 라인 침투도 즐겨하는 공격수였다. 맨시티로 합류 후에 기복있는 플레이로 매번 잘하는 선수는 아니였지만 시티가 리그 우승을 했던 시즌에는 항상 제코의 활약이 있었다. 11-12 시즌에는 토트넘전 4골, 맨체스터 더비 2골, 리그 38라운드 QPR전에서의 동점골을 기록하며 굵직한 활약을 하였고, 12-13 시즌에는 슈퍼서브로 활약하며 선발로 나오면 다시 골을 못넣는 신기한 플레이를 보였다. 그리고 13-14 시즌에는 아구에로의 부상, 네그레도의 폼 저하로 후반기를 책임지며 맨시티 합류 후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14-15 시즌 좋지 못한 폼을 보이며 펠레그리니는 제코보다 보니를 선택하며 제코는 맨시티와 작별한다. 제코는 공식적으로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맨시티 선수로 활약하며 189경기 72골 23도움을 기록했다.
아스날만큼의 임팩트와 활약은 보여주진 않았지만 무난하게 활약해주었고 2011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하며 2017년까지 203경기 3골 12도움을 기록하였다. 합류한 첫시즌 안정적인 활약을 바탕으로 콜라로프를 밀어내고 12-13 시즌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무난하게 시티의 레프트백 주전을 차지하는듯 했으나 13-14 시즌 콜라로프의 공격력이 폭발하고, 덩달아 클리쉬는 폼이 떨어지며 시즌, 반시즌 별로 왔다갔다 하며 서로 주전을 차지했다. 맨시티에서의 활약은 평범에 가까웠으나 무난하게 6시즌간 활약해주었다.
2011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한 나스리는 실바와 찰떡같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기복이 심하긴 했으나 펩체제 이전 맨시티의 리그 우승시즌이였던 11-12시즌, 13-14시즌에는 항상 나스리의 좋은 활약이 있었다. 맨시티에서 176경기 27골 40도움을 기록하였다. 펩 체제에서도 쏠쏠하게 활약을 해줄줄 알았지만 잔류를 원했던 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비야로 임대를 떠나며 맨시티 생활을 끝냈다.
2013년 맨시티로 합류하며 빠른 스피드와 체력을 바탕으로 한 클래식 윙어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2016년까지 준주전과 주전으로 활약하며 맨시티의 또 다른 옵션이자 윙어로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16-17 시즌에는 후보의 입장에서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시즌 종료 후 친정팀 세비야에서 나바스에게 제의가 들어왔고 세비야로 이적한다. 나바스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183경기 8골 39도움을 기록하였다.
2015년 맨시티로 합류한 스털링에게 팬들은 크랙의 활약을 보여줄 것이라 많은 기대를 했고, 개막 후 리그 5R까지의 스털링이 안쪽으로 들어오며 콜라로프의 오버래핑을 통한 공격은 굉장히 위협적이였으나 딱 거기까지였고 중반기부터는 본인의 폼 저하로 인해 재앙에 가까운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16-17 펩의 합류로 전반기 굉장히 좋은 활약을 보이며 시즌을 시작했으나 후반기에는 살짝 아쉬웠다. 스털링의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시즌은 17-18, 18-19, 19-20 전반기인데 이 시기의 스털링은 드리블, 클러치 능력[8]까지 엄청나게 상승되어 좌측 우측 가리지 않고 명실상부 월드클래스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의 활약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9-20 후반기, 특히 챔피언스리그 8강 올림피크 리옹전을 기점으로 결정력, 드리블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면서 자신감이 크게 떨어지고 그로 인해 앞에 언급했던 능력이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팀이 그를 필요로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크게 임팩트있게 날려먹는 장면들이 늘어나면서 후보로 밀리게 되었으나, 스털링은 계속해서 더 높은 주급과 주전 보장을 요구했고 결국 21-22 시즌 종료 후 첼시로 이적하게 되었다. 스털링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339경기 131골 75도움을 기록했으나 좋은 스탯만으로 팀의 레전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첼시 이적 후 제주스와는 반대로 맨시티에 대해 안 좋은 인터뷰를 하면서 더욱더 지지를 잃고있다.
나는 출전 기회 부족에 불평하지 않았고[9], 최선을 다해 경쟁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줘도 나의 자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10]
축구가 행복하지 않았고 행복을 되찾기 위해 첼시로의 이적은 적절한 시기였고, 행복하다.

라힘 스털링
2015년 맨시티로 합류한 오타멘디는 첫 시즌부터 콤파니의 계속된 부상, 심각하게 못했던 데미첼리스, 하드웨어만 훌륭한 망갈라였던 수비진 중 철강왕의 모습과 좋은 활약을 보여준 유일한 믿을맨이었다. 16-17 시즌 볼 플레잉 센터백을 선호했던 펩의 구상에 오타멘디는 없었으나, 오타멘디는 한단계 스텝업하며 발군의 패스 능력도 보여주며 주전 자리를 지켜냈다. 17-18 시즌에는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며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나 시즌 말미부터 실책성 플레이, 무리한 패스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결국 18-19 시즌에는 주전에서 밀렸으나 4옵션 센터백으로는 좋은 선수였다. 19-20 시즌 주전 센터백들의 줄 부상으로 선발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센터백이 없어 센터백을 대신 서던 페르난지뉴보다 못했고 결국 수비진이 붕괴되며 맨시티는 리버풀과 큰 승점차로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친다. 이후 20-21 시즌 후벵 디아스를 영입하기 위해 오타멘디+현금으로 벤피카로 이적한다. 부상을 항상 가지고 있던 콤파니와 스톤스, 19-20 시즌 장기 부상을 끊으며 시달리던 라포르테와 다르게 오타멘디는 철강왕으로 5시즌간 210경기 11골 4도움을 기록했으며 세계 최고의 센터백인 디아스의 영입에 도움을 주었기에 시티 팬들은 그래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2016년 샬케에서 맨시티로 합류한 사네는 전반기에는 놀리토에게 밀려 주전은 아니였다. 이후 놀리토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에 기회를 잡으며 맹활약을 했고 중원의 다비드 실바와 함께 좌측면에서 강력한 킥력, 엄청난 스피드와 드리블로 휘젓는 소위 크랙 플레이를 보였던 사네의 활약은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17-18, 18-19 시즌 연속으로 리그 10-10을 기록하며 훌륭한 활약을 펼쳤으나 사네를 원했던 뮌헨의 1년간의 끈질긴 구애로 19-20 시즌 뮌헨으로 이적이 기정사실이었으나 커뮤니티 쉴드에서 장기 부상을 끊으며 2020년 이적한다.
2016-17 시즌 겨울 맨시티로 합류하면서 초반 정말 놀라운 활약을 보였던 제주스는 나오는 경기마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전설적인 공격수 아구에로를 잠시동안이나마 후보로 밀어냈으나 부상과 함께 그 활약이 끊기게 된다. 17-18 시즌부터 결정력 문제가 드러났으나, 이타적인 플레이, 넓은 활동량을 장점으로 맨시티에서 계속해서 활약하였다. 비록 스털링과 함께 일명 제주스털링으로 엮이며 심각한 빅찬스미스들을 계속해서 보여주었으나 스트라이커, 좌측, 우측 윙 가리지 않고 플레이가 가능한 범용성 있는 선수였다. 이후 21-22 시즌 펩에게 요청하여 우측 윙으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우측 윙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제주스로는 세르히오 아구에로의 공백을 채우지 못해 정통 9번 스트라이커의 필요성을 느낀 맨시티는 엘링 홀란드를 영입했고, 주전을 원했던 제주스와 스트라이커가 필요했던 아스날과 맞아 떨어져 제주스는 아스날로 이적한다. 제주스는 맨시티에서 6시즌간 236경기 95골 40도움을 기록했다.

2.12. 2020년대

2017-18 시즌 겨울 이적시장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맨시티로 합류한 라포르트는 맨시티에 합류하자마자 정평이 나있던 왼발 빌드업과 롱패스, 그리고 적응도 필요없을 정도로 팀에 녹아들어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였다. 그리고 2018-19 시즌 맨시티의 센터백들 중에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맨시티가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11] 좋은 길만 걸을거라 생각했던 라포르트가 2019-20 시즌 멘디, 진첸코등 수비적으로 불안했던 좌측 공간을 커버하다가 반월판 부상을 당하면서 꺾이게 된다. 그렇게 주전에서 밀렸으나 2021-22 시즌 다시 주전자리를 꿰찼고 시즌 말미에 나머지 중앙 수비수들이 부상으로 신음하는 와중에 라포르트는 진통제를 맞아가면서 시즌 마지막까지 경기를 소화해내는 투지를 보여주었다. 비록 라포르트의 마지막 시즌인 2022-23 시즌 트레블의 주역으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라포르트가 활약했던 2018-19, 2021-22 시즌은 펩 체제에서의 리그 시즌 중 가장 실점이 적은 시즌들이고 이 시즌에서는 라포르트의 활약이 없었다면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을 시즌이다. 하지만 리그에서의 활약은 인정하지만 한번의 실수가 크게 작용하는 챔스 토너먼트에서의 약한 모습 때문에 라포르트는 팬들에게 아쉬움이 남는 선수이다. 라포르트는 6시즌 동안 맨시티에서 180경기 12골 3도움을 기록했다.
2018-19 시즌 맨시티로 합류한 마레즈는 첫 시즌은 부침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었다. 스탯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활약이었으나, 경기에서의 기복이 심했고, 레스터에서는 공격작업에 대부분을 맡으며 공격의 중심이었지만 맨시티에서는 그런 역할이 아니기도 했다. 팀에서 적응기가 끝난 마레즈는 오른쪽 측면에서 아이솔레이션 상황을 잘 이용하여 공격포인트를 많이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많이 보였다. 2019-20 시즌에는 케빈 더 브라위너와 함께 맨시티 공격진에서 가장 좋은 경기를 보였으나 우승은 못했고, 2020-21 시즌 부터는 전반기에는 살짝 주춤하면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다가 겨울이 오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장갑을 끼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좋은 폼을 보이면서 장갑 낀 마레즈는 다르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챔스 토너먼트 시기부터 마레즈는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토너먼트에서의 활약이 좋았다. 챔스 토너먼트에서 공격포인트를 잘 생산해내던 마레즈가 있다보니 맨시티는 챔스 토너먼트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이 많아졌다. 맨시티에서 결국 트레블을 달성하며 우승 커리어를 다 이룬 마레즈는 알 아흘리로 떠나면서 맨시티와 작별을 고했다. 마레즈는 맨시티에서 5시즌 동안 236경기 78골 59도움을 기록했다.

2.13. 현재

아래는 아직은 여기에 기재되지만 추후 활약을 통해 레전드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이다.
반즐리 베켄바워
세계에서 발을 가장 잘 쓰는 골키퍼, 조 하트의 후계자
맨시티 로컬 보이
트레블을 이끈 괴물 스트라이커


[1] 골키퍼의 올타임 레전드이자, 골키퍼로는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받았다.[2] 둘 다 유망주일 당시에 이렇게 평했으나 지금은 비교도 안될정도로 위상과 실력이 벌어졌다.[3]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서 이적할 것이다'라는 황당한 발언부터 '펩은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지 못 한다면 투레에게 사과해야 한다', '펩이 과연 투레 없이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할 수 있을까?' 등의 발언을 에이전트를 통해 수도 없이 많이 저질렀다.[4] 이것도 말이 안 되는게, 정말 투레의 말대로 펩이 흑인 선수들에게 차별대우를 했다면 바르셀로나 때 중용했던 에릭 아비달이나 세이두 케이타, 바이에른 뮌헨 때 중용했던 데이비드 알라바같은 케이스를 설명할 수가 없다.[5] 투레는 은퇴 이후 구단과 펩 감독에게 사과를 시도했으나 한두번 트러블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결국 무시당했다.[6] 사실 하트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하트가 힘, 스피드에 의존하던 골키퍼인 것도 한 몫했다.[7] 토미 도일의 외할아버지다.[8] 17-18 시즌 14라운드 사우스햄튼과의 홈 경기에서 96분에 터뜨린 중거리 감아차기가 대표적이다.[9] 이것도 거짓말인게 전술했다시피 스털링은 재계약 협상 당시 주전 자리 보장 조항을 넣었다. 즉, 출전 시간에 불만이 있었다는 것.[10] 사실 펩은 스털링이 한참 부진했던 20-21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도 스털링을 믿고 선발출전 시켰을 정도로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니라 필 포든과 리야드 마레즈에게 실력으로 자연스럽게 밀린것.[11] 시즌 내내 좋은 모습을 보이던 라포르트가 하필 챔스 8강 2차전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실수로 2개의 골을 실점하게 되어 챔스 탈락의 원흉이 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