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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돈덕전 德壽宮 惇德殿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건축시기 | 1902년 ~ 1903년 (최초 창건) 추정 1921년 ~ 1926년 (철훼) 2023년 9월 26일 (복원 및 개관) |
<colbgcolor=#e3ba62> 돈덕전[1] |
돈덕전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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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의 건물. 석조전의 뒤에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돈덕전도 그 중 하나이다. 러시아 제국의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2. 이름
'돈덕(惇德)' 뜻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이다. 《서경(書經)》의〈순전(舜典)〉에서 유래했다.#현판 글씨는 당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모아서 만들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2]
3. 역사
<colbgcolor=#e3ba62> 1900년대 돈덕전. 멀리 보이는 뾰쪽한 탑이 돈덕전이다. 덕수궁 주요부 영역에서 벗어나있는 모습이다.[3] |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다. 근대화를 주도해 큰 성과를 거둔 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다.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이다.#[8]
그러나 공사의 진척 속도가 많이 더뎠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옥헌이 불타자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02년(광무 6년) 5월 경에야 다시 진행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후 언제 완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황성신문》 1903년(광무 7년) 4월 6일 자 기사에 칭경예식 장소와 관련하여 돈덕전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완공했고 이름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치렀어야 할 칭경예식 행사를 1903년(광무 7년) 4월까지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원래 계획한 날에 열지 못했다. 이후에도 전국에 전염병 창궐, 러일 관계 악화등으로 미뤘다가 결국 영원히 개최하지 못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경운궁 대화재 때 다른 주요 건물들은 불 타 사라졌지만 돈덕전은 무사했다.# 이후 돈덕전은 황실과 정부에서 수옥헌과 함께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고## 연회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한 예로, 1906년(광무 10년)에는 황태자 이척(순종)과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외국의 국빈급 귀빈들이 묵는 일종의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다. 궁궐에 외국인 숙소가 있는 게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애당초 외국인과 교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생각하면 크게 의아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1905년(광무 9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등이 여기서 머물렀다.
1905년(광무 9년) 11월 을사조약 이후에는 일본 경관들이 머물며 경운궁을 감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colbgcolor=#e3ba62> 순종 황제 즉위 기념 엽서. 돈덕전의 사진이 실려있다. |
<colbgcolor=#e3ba62> 1910년 이후 돈덕전. 덕수궁 담장이 돈덕전 밖을 두르고 있다. |
1919년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은 비었고, 돈덕전은 방치되었다. 그 후 없어졌는데 정확한 때는 모른다. 다만, 1921년 7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저 때까지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26년에 경성부 시내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돈덕전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 사이에 철거된 듯하다.[10]
1930년대에는 돈덕전 터에 아동 유원지가 들어섰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덕수궁관리소와 강당이 세워졌다.
<colbgcolor=#e3ba62> 돈덕전 복원 조감도 |
비용 때문인지 몰라도 원래의 석조가 아닌 철골로 공사 중이다. 사실 내부 구조가 평면도 하나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훗날 더 자세한 설계도라도 발굴된다면 내부를 수정할 수 있게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석조가 내부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이면 아예 건물을 다시 해체한 후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복원은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다보니 논란은 있다. 따라서 '복원'이 아니라, '재현'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11]
<colbgcolor=#e3ba62> 2023년 1월 23일에 촬영된 돈덕전 외관 |
<colbgcolor=#e3ba62> 돈덕전 개방을 다룬 〈연합뉴스〉의 보도 영상 |
4. 구조
4.1. 외부
- 돈덕전 외관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만들었으며, 벽돌 쌓기 양식은 중명전, 구성헌과 동일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은 중명전과 달리 붉은 벽돌은 창문 사이의 벽에만 쌓고, 주로 회색 벽돌의 비율이 높았다.
- 문화재청에서 2016년에 제작한 《덕수궁 돈덕전 복원 조사 연구》에 따르면, 길이 약 127척, 폭 95척, 건평 약 350평, 연 700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함석지붕으로 앞뒤에 서로 크기가 다른 튜렛[13] 3개를 세워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을 절충한 형태를 띄게 했으며, 남면에는 1, 2층 모두 발코니에 아케이드를 장식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4.2. 내부
<colbgcolor=#e3ba62> 용도가 적힌 돈덕전 평면도 |
1층 평면도[14] | <colbgcolor=#e3ba62> 2층 평면도[15] |
<colbgcolor=#e3ba62> 돈덕전 내부[16] |
- 《조선병합사》에서 돈덕전 내부를 묘사한 기록이 있다. '100평 넓이의 홀에 대원주 6본이 서있으며, 대원주마다 금색 용 조각이 새겨져있고, 서벽과 창은 홍색 및 황색 금수로 치장해두었으며 옥좌, 탁자, 교자 등은 금색찬란했다.'고 적혀있다.[17]
- 최근 연구에 따라 돈덕전 내부에 있던 가구들 중 일부는 현재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920년 희정당 중개축 당시 돈덕전에서 가구들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가구를 배치했던 방의 위치까지 자세하게 적혀있다고 한다.출처
5. 여담
- 순종의 황제 즉위식 장소와 날짜가 각각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1907년(융희 원년) 8월 27일 돈덕전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광무 11년)[18] 7월 19일의 중화전이다. 그런데 중화전에서 거행한 것은 즉위식이 아니고, 대리청정을 맡은 순종에게 진하(陳賀)하는 예식이었다.# 당시 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게 퇴위 압박을 받고 있어서, 절충안으로 양위 대신 황태자였던 순종에게 대리청정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저 예식을 치른 것. 그런데 일제는 이를 슬그머니 즉위식으로 포장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를 기정 사실화 해버렸다. 그렇게 얼결에 순종은 황제에 올랐고 정식 즉위식을 같은 해 8월 27일 돈덕전에서 거행했다.#
- 돈덕전 건물이 얼마나 화려했던지 1908년(융희 2년) 3월 29일에 일본인 목수 마츠우라 신사부로(松浦真三郞)와 타마쇼 테이타로(玉署貞太郞)가 담을 넘어 돈덕전을 보려다가 경찰서로 잡혀가는 일도 있었다.[19]
5.1. 오해
<colbgcolor=#e3ba62> 아관파천 당시 촬영한 것으로 오해받는 사진들 |
<colbgcolor=#e3ba62> 위에 있는 왼쪽 사진의 사람 부분을 확대한 모습 |
러시아 공사관이 아닌 근거도 튼튼하다. 구 러시아 공사관의 사진을 보면, 현재까지 남아있는 탑을 제외하고 전부 1층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건물은 2층이다. 그리고 높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대포를 끌고 시위할 만한 평지도 주변에 없었다. 그러므로 확실히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오류가 밝혀진 후에는, 아관파천과 관련된 설명은 많이 없어졌다. 그런데 또 한 동안 고종의 강제퇴위 당시 일본군이 대포를 끌고 무력 시위하는 모습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이 사진의 정체는 훗날 초대 조선총독을 지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육군대신이 1907년(광무 11년) 6월에 고종황제에게 대포를 헌납하면서 대포의 사용법을 설명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영상문화사(사장 박종수)가 해제, 번역과 함께 5일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한국병합' 관련 일본측 사진 자료집인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서 드러났다.#[20] 다만, 사진집을 감수한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 시위 효과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로써 저 사진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왜 앞서 말한 낭설들이 퍼졌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 이유에 대해 추론한 포스팅.
[1] 사진 출처 - 뉴시스(《조선일보》에서 재인용)[2] 복원하면서 새로 걸린 현판은 원본을 복제한 복제품이다.[3] 사실 이 사진은 돈덕전을 찍은 것이 아니라 미국공사관 진입도로를 촬영한 것이다. 지난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한 독일인 장교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의 기증사진전 도록에 실렸다.[4] 석조전을 짓는데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5] 海關. 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 오늘날의 세관.[6] 오다 쇼고(小田 省吾)의 《덕수궁사》를 보면 '회극문(會極門)밖 즉 현재 영국 영사관의 서쪽에 해당하며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돈덕전의 구획이 있었다. 회극문과 더불어 집하문(緝門)은 곧 이 작은 길을 나서 동전(同殿)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나, 나중에 석조전의 건축에 즈음하여 이 작은 길은 돈덕전 부지와 더불어 본 궁역내에 들어가 현재 보는 바와 같은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적혀있다.[7] 오다 쇼고의 《덕수궁사》는 덕수궁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류도 많고, 일본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8] 현재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있는 칭경비전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칭경비전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광무개혁의 일환인 한성개조사업 중 하나로 본래 넓은 영역의 공원이었지만 다른 문화재들처럼 훼철된 상태다.[9]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한 후 태상황 고종이 사는 궁이란 뜻에서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10] 1933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최근에 돈덕전이 헐려버렸다’고 나오는데 그 최근이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저 기사에서는 1933년 이전에 철거했다는 사실만 유추할 수 있다.[11] 다만 유럽에서도 완전히 소실되었던 건물을 복원 하는데에는 철근콘크리트로 건물을 짓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벽돌과 석조만으로 건설할 경우 예산도 많이 들지만, 유지관리가 매우 힘들어지기 때문. 철근 콘크리트로 골조와 내림벽을 세운 뒤, 외벽과 내벽을 고증대로 벽돌, 석조, 스투코 등으로 마무리하는 식으로 복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으로 복원한 대표적인 건물의 예로 베를린 성이 있다.[21] 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구조물을 현대기술인 철근콘크리트로 만든다는 개념일 뿐이지, 복원 전의 광화문처럼 아예 겉모습까지 시멘트로 본을 따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12] 정관헌의 창틀과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창틀을 녹색으로 지은듯하다.[13] 작은 탑 모양의 부속 건물.[14]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6]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7] 출처: 《덕수궁 돈덕전 복원 조사 연구》, 2016, 문화재청.[18] 1907년 8월 2일까지는 연호를 '광무'로, 8월 3일부터는 '융희'로 사용했다.#[19] 출처: 1908년(융희 2년) 4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 기사.[20] 기사에는 1906년으로 되어있으나, 데라우치의 방한을 언급한 당시의 관보나 신문, 그리고 그가 남긴 일기를 종합해보면 1907년이 맞다. 일본에서 대한제국, 조선을 담은 사진들의 내용을 표기할 때 이런 오류가 많이 보인다. 한 예로, 1898년 치러진 흥선대원군의 장례식 사진 연도를 1899년이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