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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벨 테올로지[1]Nouvelle Théologie란 20세기 중반, 프랑스와 독일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가톨릭 신학 운동이자 사조를 말한다. 이 운동은 과거의 전통적인 신학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성경, 교부학, 전례 등 원천 자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신학적 통찰을 얻고자 했다. 즉, 누부 테올로지앙[2]nouveaux théologiens은 20세기 가톨릭 교회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기를 추구했다.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자 누벨 테올로지를 따르던 신학자들은 공의회 작업에 큰 족적을 남겼다.
2. 이름
1926년, 예수회 사제였던 에리히 치바라가 독어권 신학자들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42년 프랑스에서인데, 이때는 비판적 의미로써 사용되었다. 또한 학파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다소 긴밀하게 접촉하는 독립된 신학자들을 총칭하는 말에 가깝다.3. 역사
3.1. 유래
20세기는 모더니즘과 함께 열렸기에, 이 운동은 가톨릭 신학의 깊은 쇄신에 대한 요구를 드러냈다. 그럼으로써 가톨릭 신학으로 하여금 현저한 반(反)모더니즘과 더불어 숨어 있던 게토로부터 나오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교황 비오 10세는 회칙 『Pascendi Dominici gregis』[3]와 더불어 신학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으로 다시 데려갔다. 여하튼 신학의 일정한 쇄신과 모더니즘을 향한 나름의 개방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참된 사상에 대한 재발견에 힘입어 동일하게 일어났다. 전통적인 토미즘, 초월적인 토미즘과 더불어 많은 유능한 신학자들은 커다란 신학적 열정으로 수십 년간 신학에 새로운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이의 시기를 말한다.3.2. 논쟁
누벨 테올로지에 관한 논쟁은 두 국면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국면은 1938-1946년에 해당되며, 이 시기는 셰뉘, 샤를리에 같은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의 작품 출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로마의 신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두 번째 국면은 1946-1950년에 해당되며, 이때부터 더 분명하게 누벨 테올로지가 언급되었으며, 이는 특히 비판자들의 자격으로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인 라부르데트, 가리구-라그랑주와 리옹-푸르비에르 학파를 주도했던 예수회 신학자들인 다니엘루, 드 뤼박, 부이야르, 폰 발타사르 사이에서 진행되었다.3.3. 비판과 박해
1942년 바티칸의 개입은 당시 시도된 이 운동이 내포한 위험의 위중함을 강조했다. 당시 나폴리 신학교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피에트로 파렌테[4] 주교는 2월 9-10일자에 기고된 논설에서 그 당시 출간된 2개의 출판물에 대한 교황청의 단죄를 설명하며 새로운 신학적 경향을 단죄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계속 진행중이라는 것이었다. 또 파렌테가 지적하길, 이 경향은 스콜라 신학의 삼단논법적 형태와 과정을 명백히 무시하고 스콜라 신학에 대한 전체적인 불신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 그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교의 정식들에 대한 상대화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셰뉘는 신학은 '시대와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거기서부터 자신의 시대에 현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교회의 현재 삶과 그리스도교의 현재 희망 가운데 계시된 사실에 현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샤를리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연역주의와 개념주의를 바탕으로 한 '결론들에 대한 신학'으로 규정된 스콜라 신학을 격렬하게 고발했으며 이와 함께 '쇄신 신학'을 옹호했다.
결국 셰뉘와 샤를리에의 이 작품들은 금서 목록에 올랐으며, 이와 함께 누벨 테올로지의 발전은 종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3.4. 새로운 국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마자 누벨 테올로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 새로운 국면에서 드러난 광채의 중심은 예수회 신부들로 구성된 리옹 신학 연구소였다. 이 시기에 여기서 활동하던 신학자들로는 다니엘루, 부이야르, 폰 발타사르, 그리고 특히 드 뤼박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추진을 통해 리옹 학파는 '교부들에로 회귀'로 돌아섬으로써 신학 연구 쇄신의 중심이 되었다.신학적 쇄신은 다니엘루의 소논문을 통해 계획적인 표현을 갖게 된다. 거기서 다니엘루는 전망을 확장하고 신학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현대 세계를 향한 최대한의 개방을 요청했다. 더 나아가, 다니엘루는 영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삶과 최대한 접촉을 갖도록 요청했다. 그는 같은 소논문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단죄 이후에, 그리스도교적인 탐구 작업을 마비시키는 일련의 고발에 대한 의혹과 두려움 그리고 실천의 분위기를 비판했다.
다행히 한동안 누부 테올로지앙[5]에게는 호의적인 분위기가 이어졌다.
3.5. 암흑기
도미니코회의 라부르데트[6](M. Labourdette) 신부는 자신의 소논문에서 누벨 테올로지의 위험스러운 경향을 고발했다. 특히 그는 드 뤼박과 부이야르를 상대주의라고 비난하고, 다니엘루가 조직신학을 평가절하 했다고 고발하며, 교부학과 스콜라 신학을 활용하는 대신에 교부학을 스콜라 신학에 대립시킨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누벨 테올로지 운동이 상대주의로 깊이 물들어 버렸다는 주장과 함께 신랄한 비판으로 마무리했다. 또한 같은 해에 가리구-라그랑주는 자신의 소논문에서 누벨 테올로지는 모더니즘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신랄한 질문을 던졌다.이와 같은 논쟁에는 당시 가장 존경받는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이 엮여 있었다. 때문에 교황청의 개입이 불가피해졌다. 1950년 8월 12일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Humani generis』[7]를 반포했다. 교황은 회칙에서 새로운 신학의 위험들에 대해 주의하도록 경고하고 전통신학의 가치를 재확인했다.
이러한 회칙 『Humani generis』[8]에 대한 수용과 평가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났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회칙을 열렬히 환영한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통렬히 비판했다. 오늘날에는 이른바 말하는 누벨 테올로지가 분명히 과소평가되었다고 점점 더 확신해 가는 추세에 있다. 다니엘루, 셰뉘, 드 뤼박, 부이야르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야기된 불안은 상당 부분 허구적이었다.
누벨 테올로지의 지지자로 추정된 모든 신학자들에게 이후로의 10년은 상당히 많은 시련과 괴로움이 수반된 어려운 시기였다. 셰뉘, 드 뤼박, 콩가르는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활동 중심지로부터 멀리 떠나야 했다. 프랑스의 여러 신학 분야에서는 상당히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3.6. 복권
1958년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자 모더니즘 논쟁은 점차 잦아들었고, 누벨 테올로지를 지지했던 신학자들이 점차 복권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페리투스[9] 자격을 가지고 공의회에 참여했다.공의회 이후, 누벨 테올로지의 보다 보수적인 지지자들은 교회에서 중요한 경력을 쌓았다. 폰 발타사르, 다니엘루, 콩가르 및 드 뤼박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라칭거는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되었다. 다만 극단적인 견해로 인해 점차 소외된, 보다 자유주의적인 지지자들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는 없겠다. 한스 큉은 교황무류성에 의문을 제기한 혐의로 1979년 신앙교리성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스힐레벡스는 그리스도론과 성찬례에 대한 이단적 견해로 인해 신앙교리성과 심지어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반복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93년 회칙 『Veritatis splendor』[10]는 『Aeterni Patris』[11]와 『Humani generis』[12]의 입장을 완화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우선시되지만, 교회의 이익을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1] 새로운 신학[2] 새로운 신학자들[3] 주님 양떼의 사목[4] Pietro Parente[5] 새로운 신학자들[6] 1908-1990, 도미니코회 수사신부이자 윤리신학자[7] 인류[8] 인류[9] 공의회에 참석하여 조언을 할 수 있는 신학자에게 붙는 칭호.[10] 진리의 광채[11] 영원하신 아버지[12] 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