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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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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시대

원삼국시대삼한마한의 독자적인 거수국이 있었는지는 문헌상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공주 수촌리에 기원전 4~3세기부터,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크게 패배하여 요동과 청천강 이서 일대를 상실할 때 대규모로 발생한 고조선 난민 중 한 부류가 자리잡은 것으로 고고학적으로는 확인된다. 이후 주변 마한 세력과 교류하면서 마한의 일원으로 자리잡은 것인데, 지금이야 백제의 상징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었지만 적어도 개로왕 시기 이전까지의 한성백제에겐 목지국과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제해야 할 다른 마한 거수국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1]

그러나 이 일대는 삼국시대에 들어서 백제 문주왕 때 처음 백제의 수도웅진성이 되면서 백제의 핵심지로 떠오른다. 웅진성은 원래 대성팔족 중 백씨(苩氏)의 근거지로 추정되며 백씨는 특히 동성왕대에 적극 등용되었으나 이후 위사좌평 백가의 난으로 몰락하게 된다. 웅진성은 성왕에 의해 천도할 때까지 5대 63년(475~538)간 백제의 중심지였으며, 이후로도 성왕대 개편된 지방구획인 5방 중 북방의 중심지가 바로 웅진성이었다. 의자왕이 660년 백제멸망전에서 사비성을 떠나 웅진성에서 마지막으로 항거했으나 북방령 겸 웅진성주였던 예식진의 배신으로 사로잡혔고[2] 이후 당나라는 사비성 대신 웅진성을 백제 지역의 중심지로 파악해 이곳을 중심으로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다.[3]

2. 남북국시대 ~ 후삼국시대

남북국시대 신라 문무왕나당전쟁에서 당군을 축출한 이후 신문왕9주 5소경을 정비하며 웅천주(熊川州)를 설치, 경덕왕 때 웅주(熊州)로 개칭했다. 웅주는 13개 군 29개 현, 5소경 중 서원경(청주시)을 관할하였다. 또한 청음현(淸音縣, 신풍면), 이산현(尼山縣, 논산시 노성면)의 2개 현을 직속 영현으로 두었다.

이후 후삼국시대에는 900년대 초반에 홍기라는 호족이 항복하며 궁예의 '고려'에 속하게 되는데, 궁예는 청주 일대를 비롯한 백제계 유민의 정서를 민감하게 신경썼고 오히려 패서 호족을 좀 경계했던 편이기에 궁예의 마진-태봉 국호 변경을 통한 고구려 정체성 초월은 공주 일대 호족에겐 나쁠 것 없는 변화였다. 그러나 918년도에 궁예가 쓰러지면서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되돌리며 고구려 계승성을 분명히 하자 이때부터는 얘기가 좀 달라지게 된다. 왕건도 백제계 호족들을 포용하려고 애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패서 계열 호족들은 궁예에게 받은 탄압이 워낙 막심했기에 궁예에게 아무래도 좀 더 가까웠던 백제계 호족들에게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로 인해 숙청이 끊이지 않게 되자 끝내 918년 말에는 견훤의 후백제로 귀부하게 되어 오랜만에 다시 백제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934년 운주성 전투의 패배로 견훤의 후백제 패망이 돌이킬 길이 없이 가시권에 들어서자 왕건의 고려에게로 다시 귀부했다.

3. 고려 시대

940년(태조 23)에 공주(公州)로 개칭되었으며, 별호는 회도(懷道)였다. 동남쪽 별개의 군현이었던 대전광역시 동북부의 비풍군(比豊郡)[4]이 회덕현(懷德縣)으로 격하돼 공주의 속현으로 편입되었으며, 여타 대전 일대의 현들인 유성현(儒城縣), 덕진현(德津縣), 진잠현(鎭岑縣) 또한 공주의 속현이 된다. 983년(성종 2) 대에 설치된 10도 체제에서는 하남도에 속했으며 12목 중 하나인 공주목으로 격상되었으나, 이후 현종 대 개편된 5도 양계가 적용되며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고 그냥 공주로 다시 격하된다. 속현이었던 회덕현과 진잠현은 명종 대에 주현으로 승격되며 공주에서 떨어져나가게 된다. 또한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걸로 유명한 명학소(鳴鶴所)도 공주의 관할하에 있었다. 충혜왕 2년에는 공주목으로 다시 승격되었다.

4. 조선 시대

조선 시대의 공주목은 충청도 전체를 관할하는 충청감영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명실상부한 충청도의 중심도시였다. 충청도는 이름이 자주 바뀌었다 보니 청주, 홍주, 충주와 이름을 같이 쓴 '공충도', '공홍도', '공청도' / '충공도', '청공도' 등으로 쓰인 적도 있다('홍공도'와 '청충도'는 쓰인 적이 없다). 다 잠깐씩만 썼지만 '공홍도', '공청도', '공충도'는 한 30년씩 썼다. 다 공 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감영 소재지답게 충청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1906년 대대적으로 월경지, 땅거스러미를 정리할 때 구 회덕현 일대는 회덕군으로 넘어갔으나 유성 지역은 계속 공주에 잔류했다.

5. 일제강점기

남은 유성 지역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옆의 진잠군, 회덕군이 통합되어 생긴 대전군에 편입되어 현재의 대전광역시 시역을 형성하게 된다.(대전광역시/역사 문서로.) 같은 해 명탄면, 양아리면 등의 지역이 연기군에 흡수되었고, 금남면으로 개칭되었다.

1931년 충청남도청의 대전 이전이 결정된 직후 공주면이 공주읍으로 승격되었다.

6. 대한민국

1986년에는 공주읍이 공주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행정구역 개편공주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유구면이 유구읍으로 승격되었다.

2012년 7월 1일 장기면 일부, 의당면 일부, 반포면 일부 지역이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었다.


[1] 한성백제는 고구려계 유이민 세력과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의 토돈분구묘제 집단의 연합으로 탄생했기에, 엄연히 마한 주류와는 좀 다른 세력이었다. 개로왕 시대에는 마한 주류 집단과 적극적 융합이 진행된 그 시절에도 200여 년이 넘은 시점이었지만 건국 초기에는 그랬다.[2] 백씨가 몰락한 뒤 무령왕의 근왕세력으로 보이는 예씨가 웅진성 일대를 관리하게 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3] 어차피 도독부를 설치한 거 자체가 군정을 실시했다는 것인데 사비성은 물산은 풍족하나 평지 지형이라 군사적으로는 영 좋지 못했던 반면 웅진성은 뛰어난 요새로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당측도 백제의 수도가 어디였는지 몰랐을 리는 없고 소정방이 이끌던 당군의 약탈과 학살로 인해 백제 유민들의 반감이 극에 달했던 때인데 군사요새가 아닌 곳에 거점을 두긴 어려웠을 것이다.[4]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우술군(雨述郡)이었으며 경덕왕의 한화정책으로 비풍군이 되었다. 둘 다 순우리말로 '비술/비수리' 정도로 발음되었을 동일한 지명을 한자로 다르게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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