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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동의대학교 사태 5·3 東義大學校 事態 5·3 Dong-Eui University Incident | |
사태 이후 합동영결식을 보도한 대한뉴스 영상 | |
기간 | |
1989년 5월 1일 ~ 5월 3일 | |
장소 | |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가야동 464-121번지 동의대학교 가야캠퍼스 | |
사건 주체 | |
부산직할시 경찰국 기동대 3,6,90,91중대[1] 등 경상남도 경찰국 기동대 80중대[2] 가야3파출소[3] | 동의대학교 재학생 |
지휘관 | |
김정웅 경찰국장 그 외 | 이종현 전 학생회장[4] 정성원[5] 그 외 600여명 |
인명피해 | |
7명 순직 11명 부상 | 불명 |
결과 | |
91명 구속, 75명 기소[6] | |
영향 | |
전대협의 성명서 발표 문교부 장관 정원식의 5.6 조치 발표 |
[clearfix]
1. 개요
1989년 5월 1일부터 3일까지 부산광역시 동의대학교에서 입시비리에 항의하던 학생들이 전경 5명을 납치 및 감금한 것도 모자라, 이를 구출하려던 경찰관 7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당한 참사. 참혹하게 사망한 7명의 경찰관들은 외면한 채 끝내 2009년에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나, 화재의 원인과 당시 경찰의 대응체계, 자백의 진위 여부 등에 대해 현재까지 의혹 제기와 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한국 학생운동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 노태우 정부 출범 후 최다 구속자와 제적생, 그리고 최대 형량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변호를 맡았던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2. 배경
1988년 12월 5일 문교부 장관으로 부임한 정원식은 취임하자마자 사학분규 등 각종 학원문제에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단적인 예로 그는 1989년 3월 11일 민정당 학원문제특위에서 "소수의 과격/폭력세력이 주도하는 학원소요는 이들이 학교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계속할 시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밝혔으며 15~16일 대구/경북/충남지역 대학 총학장 및 보직교수와의 간담회에선 "학생들이 총장실 파괴 등 기물 파손 시 학생들에게 반드시 배상 책임을 묻도록 하며, 학외의 문제 행사가 학교 안에서 열리거나 문제 인사가 학교에 들어와 학생들을 선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또 정 장관은 4월 11일 서울 동부와 남부지역 18개 대학 보직교수와 학부모 간담회에서 '학원안정 4단계 방안'을 마련했는데 학내 점거농성 사태가 장기화될 시 계고-임시휴업-전원유급-폐교의 단계적 조치를 취해 이를 교수와 학부모들에게 경고시킨 뒤 이에 따라 경기대와 한림대 등에 계고 조치를, 고려대와 서울교대에 임시휴업 조치를 내렸다. 동의대 사태는 이런 시대배경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3. 경과
1989년 5월 1일 동의대학교 학생들은 전날 국제노동절 대회의 원천 봉쇄에 항의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정오경 학교 밖으로 진출해 인근 가야3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했다. 이에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카빈 소총으로 14발의 공포탄을 발사한 후 주동자 정성원을 체포했고 학생들이 항의하자 150m를 따라가 공포탄을 10발 더 쐈다.5월 2일 14시 30분경 동의대생 600여 명이 자연대 앞 건물에서 '총기난사 규탄 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이면서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재차 화염병을 투척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8명을 추가로 검거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학내 집회 뒤 교문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경남도경 기동대 80중대 소속 전경 5명을 납치하여 도서관 7층 전산실에 감금하고 17시 30분경부터 정성원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농성에 돌입했다. 동의대학교 캠퍼스는 전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가파른 경사지에 형성돼 있기 때문에 작정하고 방어하면 진입하기 굉장히 까다롭기로 악명 높았다. 한편 학생 대표들은 전날 파출소 습격 중 연행된 정성원 및 이날 시위로 연행된 학생 8명과 전경 5명을 맞바꾸자고 경찰 측에 제의했으나 경찰은 정성원은 이미 구속된 상황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도서관 점거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했는데 학생들의 요구는 더욱 강경해졌다. 학생들은 전날의 총기난사에 대한 책임자 처벌까지 요구하고 나섰고 협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5월 3일 오전 5시 30분경 부산시경은 김정웅 경찰국장의 지휘 하에 5개 중대 700여 명을 동원해 진압 작전에 나섰다. 경찰은 1층 사무실 유리창에 걸린 쇠창살을 절단기로 자르고 현관의 대형 유리창을 부순 후 바리케이드를 제거했다. 당시 2층과 4층에서 자던 학생들은 최루탄을 쏘면서 올라오는 경찰들에게 의자 등을 던지며 저항하다가 납치한 인질들을 데리고 7층으로 피신했다.
학생들은 7층 세미나실에 화염병 상자를 쌓았고 경찰이 계속해서 진입을 시도하던 순간 바로 그 7층 도서관에서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하여[7] 최동문 경사와 조덕래 순경 2명이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숨졌고 박병환 순경, 정영환 순경, 모성태 수경, 김명화 수경, 서원석 수경 등 총 5명은 불길을 피해 창문을 깨며 뛰어내리거나 창틀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했다. 이 외에 경찰 12명이 화상을 입었고 5월 26일 서원석 수경이 사망하여 사망자는 7명 (현직 경찰 4인, 전투경찰 3인)[8], 부상자는 11명으로 기록되었다.
사건 직후 연루자 91명이 구속, 75명이 기소되었고, 당연하게도 이들은 전원 제적되었다. 검찰은 5월 3일로 예정되었던 동의대 총학생회장 선거와 관련해서 부산/울산 지역 총학생협의회가 지지했던 후보와 당시 총학생회 간부들의 권력 다툼으로 사건이 터졌으며 학생들이 7층 세미나실 복도 중앙에 화염병 40개가 들어 있는 소주상자 두 개를 쌓아 두고 그 위에 두루마리 화장지 50개와 천 조각을 놓은 뒤 석유와 시너를 뿌렸다고 주장했고 덧붙여 화재로 인해 경찰관들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을 가능성을 예측하고서도 사전에 치밀한 모의로 화재를 냈다고도 했다.
4. 의혹 및 반론
4.1. 의혹 1: 구출 지연
경찰관 4명이 건물 7층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기 까지 다른 경찰관들이 이를 분명히 목격하였음에도 신속하게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지휘관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처음 세 명의 경찰관들이 추락할 때까지 총 약 15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매트리스는 커녕 그물망조차 설치하지 못했다고 가해 학생들이 증언하였다.
4.1.1. 반론
일부 언론의 이와 같은 의혹 제기에 대해 현장에 참가했던 유병은 부산진경찰서 경우회장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는 동의대 사태 당시 부산진경찰서 공안분실에 경위로 근무했는데 현장에 직접 출동했고 검거된 동의대생들의 수사를 맡았으며 모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의 작전일지를 보여주면서 그 날 불상사를 대비해 여러 준비를 하였으며 안전설비도 충분히 준비하였다고 주장하였다.4.2. 의혹 2: 화재 원인
재판 과정에서 법원은 피고인이 고문을 당하여 허위자백을 하였다고 증언한 것을 묵살하였다. 화재원인이 화염병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였는데 법원은 이를 무시하였고 1심 재판부는 '경찰이 분사한 소화기의 분사 압력으로 불길이 근처의 석유와 천 조각 등으로 옮겨 붙었다'는 결론을, 2심 재판부는 '유증기현상에 의한 급속 발염'으로 화인을 달리 판정하였다.4.2.1. 반론
하지만 사건 당시인 새벽 5시의 기온이 유증기가 발생하기에는 낮다는 반론이 있었다. 경찰은 1990년 2월 2일 화재현장의 1/300 축소 모형으로 유증기 발생 실험을 했으나 비현실적 조건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경찰과 검찰이 화인감정서를 제출하지 않고 사건현장과 비슷한 조건에서의 모의실험도 거부하기도 했다. 이런 정황으로 인해 재판부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특수공무방해치사상죄는 결과적가중범으로서 행위자가 그 결과의 발생을 예견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할 것인바, 피고인들이 도서관에 농성 중인 학생들과 함께 경찰의 진입에 대항하여 건물현관 입구에는 빈 드럼통으로, 계단 등에는 책상과 걸상으로 각 장애물을 설치하고, 화염병이 든 상자 등 가연물질이 많이 모여있는 7층 복도 등에는 석유를 뿌려놓아 가연물질이 많은 옥내에 화염병이 투척되면 화염병이 불씨에 의하여 발화할 가능성이 있고 행동반경이 좁은 고층건물의 옥내인 점을 감안하여 볼 때, 불이 날 경우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반경험칙상 넉넉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므로 피고인들에게 위와 같은 화재로 인한 사망 등의 결과발생에 관하여 예견가능성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90도767]
5. 이후
사건 이후 파장에 놀란 전대협 측은 5월 6일에 "학생운동에서 비폭력 평화시위 원칙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취지로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당시 문교부 장관 정원식은 전국 35개 대학 총/학장 회의를 긴급 소집해 이른바 '5.6 조치'라고 불리는 강력한 학원대책을 발표했는데 이날 모임에서 "조속한 시일 내에 책임을 지고 학내에서 제작/보관되는 화염병 및 유류, 각목, 유인물 등 각종 시위물품을 제거하라"면서 "학생들이 불응할 경우 문교부가 직접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이어서 그는 "일부 대학신문 등의 대학 간행물이 본래의 목적을 이탈하여 운동권의 선전/선동 매체로 바뀌었으며 북한 주장까지 노골적으로 싣고 있다"고 지적하고 "대학 쪽이 순수한 교육 지면이 되도록 지도한 뒤에도 학생들이 이를 거부할 시 5월 20일 이후부터 총장은 물론 학장, 지도교수가 발행인/주간직을 맡지 않게 하여 제작/편집의 책임을 학생들이 맡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훗날 발생할 이철규 의문사 사건이 발생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KBS와 MBC 노조는 동의대 사건 순직경찰관 합동장례식 생방송 긴급편성에 대해 정권과 방송사에 대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 MBC 노조 측은 이 성명서에서 "경찰관 6명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어느 누가 눈물을 안 흘리겠는가"라고 전제하면서도, "영결식을 방영 18시간 전에 긴급 편성한 것은 괴벨스적 선전 선동을 일삼는 후진국적 방송문화의 예이다."라며 "MBC는 군중 1백만명이 모인 이한열 열사 영결식과 우순경 사건 희생자 영결식은 외면해왔다"고 주장하고 "경영진은 시청자를 더 이상 우매한 군중으로 여기지 말고 희생된 경찰관들을 욕보이게 하는 현 정권의 악용에 편승되지 말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한편 사건 이후 법원은 관련 학생들에 대해 현존건조물방화치사상, 살인, 살인미수,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국가보안법,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등을 적용하여 이들 중 30명에게는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했고 나머지 26명에게는 1심과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해 석방시켰다.(대법원 판결 1990. 6. 22, 90도767 판례) 해당 판례는 공무집행방해죄에서의 정당한 직무집행의 적법성으로 인정되는 리딩케이스다.
문민정부 출범 후 1993년 3월 16일 특별사면 때 10여명이 가석방, 6명은 감형을 각각 받았고 5월 27일 부처님오신날 특별사면 때 70여 명이 사면/복권된 후 상당수는 복적 절차를 거쳤다. 1995년 광복절 특사 때 2명에게도 사면을 내렸다.
사건의 도화선이었던 입시비리 사건은 1993년 10월 재수사에서 사실로 드러났으며[10]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2년 4월 29일 동의대 사건에 관련된 학생 4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고, 1인당 평균 2500만원의 보상금 지급까지 하는 결정을 내렸다.당연하게도, 이러한 동의대 사건 관련자의 민주화 유공자 결정에 대해 사건으로 희생된 경찰 유가족과 경찰, 보수 언론은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반면 전교조 등 재야 진보단체들은 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했다. 논란이 증폭되자 5월 2일 청와대는 본 안건의 재심을 요구하였으며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아무리 목적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죽은 것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재심을 요청하였지만, 5월 11일 보상심의위원회는 법률 불소급의 원칙에 따라 재심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특히, 이들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은 경찰 측 유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으며, 7월 26일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서 해당 조치를 '미친 짓'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당시 경찰 유족들이 "국가 공권력인 경찰에 대한 살인자들을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한 것은 위헌이다"라며 헌법소원을 청구[11]했으나, 2005년 10월 각하 의견 5, 위헌 의견 4로 이마저도 각하되고 말았다. 다수의견은 “동의대 학생들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바로 순직경찰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므로 기본권 침해의 자기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다.”고 설시했다. 반면 소수의견인 위헌 4명의 재판관[12]들은 "동의대 학생들을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하는 것은 그에 대항한 경찰관들을 민주화에 반대되는 세력으로 인정한 것이므로 유족들의 자기 관련성이 인정되며, 경찰관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정당한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민주화운동으로 불릴 수 없다."고 했다.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 중 한 명인 주선회 재판관[13]은 이후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그럼 사망자가 직접 소송 제기를 하란 말이냐"고 일갈하였다.
5.1. 문부식의 칼럼
2002년 7월 12일에는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자 문부식이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동의대 사건 관련자의 민주화운동가 인정에 대해 "진상 규명에 앞서 순직 경찰관들도 배려했어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 다음날엔 동 신문 측은 <한 지식인의 자기성찰>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도 문부식의 자기성찰 내용을 다루면서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8월 2일에 류근일 주필도 '트렌드&아젠다' 칼럼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5.3동지회 측은 <문부식 선배에게 보내는 편지>란 서한을 써 반박했고 민주운동가 출신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7월 13일 <오마이뉴스> 기고문에서 "40대의 자신으로서 20대의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설가 정도상도 7월 14일 동일 언론에서 "국가폭력부터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윤기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도 <한겨레> '왜냐면' 코너 16일 및 23일자 칼럼에서도 문부식의 폭력에 대한 관점 및 국가주의 문제에 대해 각각 비슷한 요지로 지적했다. 반면 미디어평론가 변정수나 연세대 비교문학과 석사 김보경도 해당 이론을 각각 재반박했다. 강준만은 7월 31일 <한겨레> '언론비평'에 실린 칼럼에서 문부식의 주장에 공감과 비판을 동시에 하였다.
5.2. 전여옥 폭행 사건
2009년 2월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동의대 사건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려다가 이에 반대하기 위해 국회를 찾았던 부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대표 이 씨 등이 전 의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5.3.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6년 ‘동의대 5·3 동지회’ 회원들은 “동의대 사건 이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 등 인권침해가 있었다”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이로 인해 진실화해위 소위원회는 “구타 등 인권침해가 있어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 보고서를 심의·의결, 2010년 1월 19일에 열린 진실화해위 전원위원회에 상정했으나 “진실화해위는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일어난 일을 조사 대상으로 삼는데, 동의대 사건은 노태우 정권 시절에 일어난 일이므로 조사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며 재적위원 과반수가 이 사건을 각하하기로 의결해 사건이 각하되었다. #, #, #, #, # 다음날인 1월 20일에는 조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힘으로서, 보고서 내용은 논의조차 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이의신청마저도 기각되었다.#, # 이후 2기 진실화해위가 위원회의 조사 대상과 범위를 규정하는 '권위주의 통치' 기간을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이 끝나는 1993년 2월 24일까지로 규정해 다시 길이 열리게 되었다.5.4. 피해 경찰관들에 대한 보상
2009년 ‘5·3 동의대 사건 등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발의됐고 우여곡절 끝에 2012년 2월에서야 이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희생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보상의 길이 열렸다. 2월 보상금심의위원회에서는 국가가 순직 경찰관 1인당 최고 1억 2700만원을 보상할 것을 최종 의결하였다.5.5. 피해 경찰관 흉상 제막
2013년 5월 3일 부산경찰청 동백광장에 조성된 '부산경찰 추모 공간'에서 5.3 동의대 사태 때 희생된 경찰관들의 흉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사태가 벌어진 지 장장 24년만이다. 이 제막식에는 순직한 경찰관들의 유족들과 유정복 (구)안전행정부 장관, 이성한 경찰청장, 전몰군경 유족회 등이 참석하였으며 경찰청은 이날 보상 관련 법률의 입법에 노력을 기울인 이인기 전 의원 등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였다.이성한 경찰청장은 “그 동안 남몰래 흘렸던 유가족들의 눈물을 이제 닦아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고 정유환 유족대표(피해자인 고 정영환 경사의 형)는 “부산경찰청에서 흉상 제막식과 추모행사를 해준 데 대해 매우 고맙다.”며 “경찰관들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편 흉상이 건립된 ‘부산경찰 추모공간’은 동의대 사태 발생 20년 만인 2009년에 마련됐고 2년 뒤인 2011년 6월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6. 기타
- 중앙경찰학교에 있는 충의선양탑은 이 사태에서 순직한 7명의 경찰들을 위한 추모시설이다.
7. 참고/관련 문헌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4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p90~94.
-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편: 노무현 시대의 명암 1권 - 저자/출판사 동일. 2011. p118~120.
-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전자문화대전 항목
[1] 부산은 90단위 중대가 직원사복중대이다[2] 당시 전경사복중대[3] 현 가야지구대.[4] 도서관 점거 농성 주도.[5] 파출소 습격 주도.[6] 무기징역 1명, 징역 20년 1명, 징역 15년 2명, 징역 13년 1명, 징역 12년 1명, 징역 7년 4명 등 30명 중형, 26명 집행유예.[7] 일단 시너가 뿌려져 있었다는 것은 거짓임이 법원에서 증명되었다.[8] 전투경찰 3명의 경우 수경에서 상경으로 1계급 특진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최동문 경사는 2019년에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고 그의 아들도 현재 경찰관으로 근무중이다.[90도767] [10] 해당 입시비리를 폭로한 김창호와 이를 지지한 박동혁 교수는 해직되었고 법정 투쟁 끝에 1990년 복직 판결이 내려졌으나, 대학 측은 1991년 10월 재임용 심사 탈락 형식으로 내쫓았다. 2000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이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고 2004년 동의대에 복직을 권고했지만 대학 측이 이를 외면해 오다가 2006년 1월 교육인적자원부 소청심사위원회에서 학교의 재임용 제외가 부당하다고 판정하면서 복직되었다.#[11] 2002헌마425[12] 권성, 김효종, 송인준, 주선회[13]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인 2004헌나1의 주심재판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