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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진행하며 갖가지 방법으로 유대인을 학살하였는데, 이는 단순 학살을 제외하고도 여러가지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학살 전 강제 노동을 하기도 했다.2. 추방과 집단 수용
바르샤바 게토에 도착한 독일 유대인들. 이들은 1942년 7월경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가스실에서 대부분 살해당했다. |
아트: "소스노비에츠에서 다들 증명서에 도장을 받아야 하던 때 얘길 하던 중이었어요."
말라: "스타디움 말이지? 그래... 그때 우리 어머니도 끌려갔지. 어머닌 추방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네 채의 아파트로 끌려 가셨는데 일종의 감옥이었어... 거기에다 수천 명을 집어넣었지. 너무 답답해서 일부는 질식했어.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고... 끔찍했지. 사람들은 비참한 처지를 끝내고 싶어 창밖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했어."
- 홀로코스트 생존자 말라 슈피겔만(폴란드 유대계 미국인)의 증언.[1]
말라: "스타디움 말이지? 그래... 그때 우리 어머니도 끌려갔지. 어머닌 추방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네 채의 아파트로 끌려 가셨는데 일종의 감옥이었어... 거기에다 수천 명을 집어넣었지. 너무 답답해서 일부는 질식했어.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고... 끔찍했지. 사람들은 비참한 처지를 끝내고 싶어 창밖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했어."
- 홀로코스트 생존자 말라 슈피겔만(폴란드 유대계 미국인)의 증언.[1]
점령 지역에서 총살과 함께 벌어진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나치의 집권 초기인 1934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통과된 후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유대인들의 모든 권리와 재산을 몰수하고 거주지에서 강제적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독일 국적이 박탈되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나치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은 주로 국외추방되었다. 또는 유대인들이 박해를 견디다 못해 인근 국가들로 이주해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이때 영국이나 미국으로 피난간 독일 유대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2]
그러나 전쟁이 벌어진 후 해외 이주가 막히고 독일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점차 극단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일 본토와 점령지의 유대인들은 주로 다른 민족 거주지와 유리된 별도의 구역인 게토에 강제 수용되었다. 게토는 서유럽과 독일 영내에는 없었지만 동유럽과 남동유럽, 특히 독일령 폴란드 지역에 여러 곳이 세워졌으며, 동유럽 유대인들이 주로 수용되었다.
게토에 모인 유대인들은 끔찍하게 높은 인구 밀도와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살아야 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많았다. 많은 수의 독일 사업가들이 게토의 유대인 노동력을 착취하곤 했는데 이것이 유대인들의 거의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허가받지 않고 나갈 수는 없었고, 이를 시도할 시 경계병에게 총살당했다. 또한 갑작스런 검속 등을 통해 절멸수용소로 잡아가는 등의 행위도 이루어졌다.
1942년까지는 나치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명확하지 못했기에 게토에 수용해두었다. 그러나 때때로 집단 총살이 벌어졌으며, 우치 게토의 주민들은 1941년 말부터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시험적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던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처리 방침이 절멸로 확정된 이후, 폴란드 총독부 지역에서 친위대 주도 하에 온전히 학살을 목적으로 하는 절멸수용소들이 가동되면서 게토들은 해산되었다. 말이 해산이지 독일군과 친위대가 이주를 명목으로 주민들을 조금씩 기차편으로 실어와 그대로 절멸수용소의 가스실에 남김없이 처박는 끔찍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노동가능한 극히 일부의 인력들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강제적인 노동과 게토보다도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전쟁 후기인 1944년에 들어서면 폴란드를 비롯한 독일 점령지들의 유대인 대다수가 이미 가스실에서 살해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탈리아와 헝가리에도 독일군이 강제적으로 진주하면서, 그전까지는 안전했던 두 국가의 유대인들도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들은 잡히는 즉시 일종의 허브라 할 수 있는 집결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일부는 독일 각지의 노동수용소들로, 대다수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 및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집결수용소들은 가스실과 같은 시설은 없었지만 허브의 특성 상 수용 인원의 밀도가 심각할 정도로 높았던데다 환경도 그에 비례해 더욱 열악해서, 많은 수의 인원들이 수인성 질병으로 죽어갔다. 대표적인 집결수용소가 바로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와 베르겐 벨젠 수용소이다. 베르겐 벨젠은 그 불결한 환경으로 악명높았으며 독일계 네덜란드 유대인이었던 안네 프랑크도 이곳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한편 테레지엔슈타트는 중부 유럽에 위치했기에, 서남유럽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거쳐간 곳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결국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의 경험을 주제로 만든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1부와 로만 폴란스키가 자신의 경험과 생존자 슈필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대략적인 게토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오스카 쉰들러의 이야기를 다룬 《쉰들러 리스트》 또한 게토 생활을 다루고 있다.
3. 집단 처형과 빨치산 토벌
▲ 1942년 우크라이나 빈니차의 유대인 구역인 예루살림카에서 찍힌 사진. 아인자츠그루펜 D 대원이 유대인 남성의 후두부에 권총을 사격해 살해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앞에는 먼저 살해된 사람들이 묻혀 있는 구덩이가 있다. 뒤에 모인 사람들은 친위대나 국방군 병사,[3] 독일 노동대 등 구경꾼들이다. 이 사진이 들어 있던 앨범은 1944년 3월 20일 소련군에 노획되었다. 뒷면에는 빈니차의 마지막 유대인이라 적혀 있다.
"러시아에서 봤습니다. 친위대가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어느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겨우 빨치산이 독일군 한 명을 죽였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 책임이 없었지요. 친위대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여자와 아이들을 쏴 죽였지요."
- 독일 육군 마이어[4] 보병소위의 증언.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229p에서 발췌.
- 독일 육군 마이어[4] 보병소위의 증언.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229p에서 발췌.
가장 일반적이며, 또한 가장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방식.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절반 가까이가 이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2차 대전 최초의 전역이었던 폴란드 침공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동부전선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 그리고 발트 3국 지역에서 벌어졌지만, 사실상 독일군이 있는 모든 지역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해당 지역이 소련 지역이나 유고슬라비아, 북부 이탈리아[5]같이 민간과 파르티잔의 저항이 강력한 곳일수록 더욱 심각해지는 양상을 띄었다. 한편 최초 시작지였던 폴란드 지역의 유대인들 또한 이 방식으로 많이들 살해당했지만, 이 지역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절멸수용소 가스실의 희생자들이 절대다수이다.
가해 주체는 이동 학살 특임대라 할 수 있는 친위대 특무대(아인자츠그루펜 Einsatzgruppen)가 가장 유명하며, 또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하지만 동부전선의 특임대는 도합 3000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200만 가까이 되는 희생자들을 전부 총살할 수는 없다. 실제로는 그 외에도 국방군과 친위대, 무장친위대, 경찰, 반유대주의적 지역민들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특히 '반덴베캠풍(Bandenbekämpfung)', 즉 '도적 토벌'로도 불리는 나치의 치안전쟁은 집단군 후방 지역에 소속된 국방군 보안사단들과 아인자츠그루펜,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부대, 그리고 현지인 보조부대들에 의해 주로 수행되었다. 그들은 빨치산 토벌이란 명목으로 마을에 쳐들어가 보이는 대로 다 불사르고 쳐죽이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또는 1명의 독일군이 죽을 때마다 수십의 주민들을 보복으로 살해하기도 했으며,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 경우 바비야르 학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마을 주민들을 이주 행렬이라 속인 뒤 일렬로 끌고 가 기계적으로 총살한 뒤 구덩이에 그냥 파묻어버렸다. 학살 전담 병사들은 총살하기에 앞서 희생자들의 귀중품들을 따로 모아 약탈하거나, 집단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니까 구덩이마다 기관총 사수가 여섯 명씩 배치되었습니다. 구덩이는 대략 길이 24미터, 너비 3미터였지요. 구덩이 안의 사람들은 통조림의 고등어처럼 누웠어요. 머리를 가운데로 두고 말이죠. 그 위에는 기관총 사수 여섯 명이 있었고, 그 사람들 목덜미에다 총격을 가했죠. 제가 도착했을 때는 구덩이가 벌써 가득 찼어요. 그래서 아직 살아 있던 사람들을 시신 위에 눕히고 다시 총격을 가했죠. 구덩이 안의 공간을 잘 활용하려고 그 사람들을 켜켜이 잘 눕혀야 했어요. 그러나 그 전에 그들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았죠. 여기 숲 변두리에 구덩이 세 개가 있었어요. 일요일이었죠. 사람들은 1.5킬로미터로 줄을 섰어요. 줄은 조금씩 움직였죠. 처형 대기자들이었습니다. 구덩이로 다가가면서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죠. 대충 이 정도 아래 지점에서 장신구와 짐 가방을 내놓아야 했지요. 그러면 사수들은 쓸모없는 물건은 그냥 무더기로 쌓아 놓고 괜찮은 물건은 짐 가방 안에 챙겼어요. 그걸로 헐벗은 우리 민중들에게 옷을 사 주겠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조금 더 걸어와서 이제 옷을 벗었죠. 숲 앞 500미터에 이르면 발가벗어야 했어요. 속옷이나 팬티는 입도록 했고요. 여자와 아이들뿐이었죠. 두 살 짜리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대고 그런 야비한 말을 하다니! 기관총 사수들은 그 일이 무리가 되어서 매시간 교대를 했죠. 차라리 그자들이 억지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이었다면! 아니었습니다. 그자들은 추잡한 말을 내뱉었죠. "자, 또 예쁜 유대인 계집이 온다."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네요. 새빨간 내의를 입은 예쁜 소녀 말이에요. 인종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요? 리가에서는 그녀들과 너도 나도 동침한 뒤에 총살해 버렸다니까요. 그래야 여자들이 어디 가서 그 얘기를 못 할 테니까요."
- 발터 브룬스 독일 육군 소장의 증언. 브룬스 소장은 1941년 5월 1일부터 이듬해 5월 1일까지 독일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81~182p에서 발췌.
- 발터 브룬스 독일 육군 소장의 증언. 브룬스 소장은 1941년 5월 1일부터 이듬해 5월 1일까지 독일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81~182p에서 발췌.
'토벌'의 대표적인 사례는 특히 막스 폰 솅켄도르프 대장의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의 관할 구역이었던 벨라루스에서 벌어졌다. 당시 벨라루스는 울창한 숲과 늪지대로 구성되어, 파르티잔들에게 있어 아주 이상적인 활동 지역으로 기능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 지역의 파르티잔들에게 지원을 보내면서 독일의 후방을 교란했고, 이는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의 신경을 제대로 긁어댔다. 또한 폴란드 국내군 또한 지하에서 암약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속했다. 때문에 히틀러는 벨라루스 파르티잔의 위협을 그가 주장하던 유대인의 위협과 결부시키면서 독일 군대에 '가혹한 대응'을 주문했다. 또한 파르티잔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 결과가 바로 벨라루스 점령 기간 동안 자행된 수없이 많은 토벌전들과 바르샤바 봉기 진압작전이다. 히틀러의 명령을 들은 독일군은 더욱 열성적으로 빨치산 의심 지역을 파괴하고자 했는데, 솅켄도르프 대장은 이를 위해 1941년 9월 24일에 모길레프 회의를 열었다. 솅켄도르프 본인과 휘하 부대장들, 그리고 중부집단군 관할 구역의 고위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친위중장, 아인자츠그루펜 B의 아르투어 네베 친위중장, 그리고 무장친위대 기병여단[6] 사령관 헤르만 페겔라인 친위중령 등이 참여한 해당 회의는 약 이틀간 진행되었으며, 대 파르티잔 작전의 기본 원칙으로 "적들의 완전한 절멸"을 채택하였다. 여기서 적이라 함은 파르티잔 뿐만 아니라 의심 가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며, 심지어는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까지 전부 포함한다. 솅켄도르프는 이 원칙을 휘하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 병력들 전체에 배포했고, 독일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이에 대해 "대 파르티잔 작전의 교본"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2년 8월 18일, 히틀러는 그 해 말까지 벨라루스 빨치산들을 전부 소탕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 군대는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결과는 참혹했다. 중부집단군의 벨라루스 점령 기간 동안 독일이 벌인 파괴로 인해 수백만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과 벨라루스인들, 그리고 그들이 쌓아올린 민족 문화는 송두리째 뽑혀나갔다. 국방군과 질서경찰 부대는 말 그대로 고삐가 풀린 채 의심 가는 주민과 마을을 전부 학살하고 불태웠다. 아인자츠그루펜 B는 가스 트럭을 몰고 돌아다녔고, 친위대는 말리 트로스테네츠 수용소를 세워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산하의 백루테니아 일반인민위원회는 민스크 게토를 '해산'하며 남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바흐-첼레프스키는 1942년에 파르티잔 진압 작전의 총책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에는 학살 전담 부대인 디를레방어 여단이 무장친위대 산하에 신설되었다. 1944년 국방군과 친위대가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한 이후 바르샤바는 완벽히 잿더미가 되었다.
중부집단군 관할 지역만 해도 이 정도였으며, 그 외 지역을 포함하면 학살의 규모는 더욱 거대해진다. 북부집단군 후방 지역의 사령관 프란츠 폰 로케 육군대장과 해당 구역 친위대의 한스-아돌프 프뤼츠만 친위대 및 질서경찰 중장은 발트 지역과 러시아 북서부 지역에서의 대량 학살에 큰 책임을 진다.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이들의 학살 행위를 보고받고도 방임했다. 한편 남부집단군 후방 지역의 사령관 카를 폰 로케 육군대장과 프리드리히 예켈른 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은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지역에서의 학살에 책임을 진다. 남부집단군의 학살 행위 또한 매우 거대한 규모였는데, 상술한 것처럼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부터가 유대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비야르 학살이 벌어진 곳도 바로 남부집단군 구역이다.
초틀뢰터러: 프랑스 놈 하나를 뒤에서 쏴 죽였어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놈이었죠.
베버: 아주 가까이에서요?
초틀뢰터러: 그렇죠.
호이저: 그놈이 당신을 잡아가려 하던가요?
초틀뢰터러: 뭔 헛소리예요. 그 자전거가 탐났거든요.
- 영국 정보부에 도청된 독일 병사들의 대화 내용.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237p에서 발췌.
베버: 아주 가까이에서요?
초틀뢰터러: 그렇죠.
호이저: 그놈이 당신을 잡아가려 하던가요?
초틀뢰터러: 뭔 헛소리예요. 그 자전거가 탐났거든요.
- 영국 정보부에 도청된 독일 병사들의 대화 내용.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237p에서 발췌.
"우리가 여자를 흔들어 깨우자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고 여자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어...... 여자는 독일군이 자기와 자기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들려줬어. 놈들이 여자의 다섯 아이들을 총살시키겠다며 헛간으로 끌고 갔어. 하지만 헛간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면서 아이들을 먼저 쏘아 죽였지. 놈들은 아이들을 쏘면서 재미있다는 듯 낄낄댔어...... 젖먹이 막내아들만 남았는데, 파시스트가 '아이를 위로 던져라. 그러면 내가 총으로 쏘아 맞히겠다'고 몸짓을 해 보였지.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렸어. 아이가 죽어버릴 만큼 세차게...... 자기 자식을...... 독일군 손에 죽게 두느니 차라리 그렇게 한 거야...... 여자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얼굴을 들고 사느냐며 자기가 갈 곳은 저세상뿐이라고......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 벨라루스 고멜 지역의 소련군 제225빨치산연대 정치위원 알렉산드라 니키포로브나 자하로바의 증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47p에서 발췌.
- 벨라루스 고멜 지역의 소련군 제225빨치산연대 정치위원 알렉산드라 니키포로브나 자하로바의 증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47p에서 발췌.
또는 위와 같이 수용시설 경비부대나 소수 병사들이 개인적 유희나 약탈을 목적으로 지나가던 민간인들에게 트집을 잡고 죽인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은 매우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수많은 목격자들, 더 악질적으로는 '관람객들'이 이 범죄 현장을 목격하거나 시시덕거리며 참관했다. 상부에서는 정보가 유출되지않게 사진 촬영을 금지했지만, 학살이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빈번했기에 통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병사들이 개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소장하거나 집으로 보내서 자랑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경우였다. 또는 지역 주민들이 학살 현장에 구경오거나[7] 심지어는 독일 본토에서 관광 형식으로 '놀러' 오는 경우까지 있었다. 일부 예술가들은 오로지 학살에 참여해보고 싶어서 동부전선을 찾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시각자료나 증인들 역시 많은 편이다. 이 사례는 독일 국방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이며, 200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총살당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 홀로코스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크다. 그 외 다른 민족 희생자들의 숫자까지 더하면 이는 더욱 늘어난다.
하지만 아무리 인종주의에 물들고 현지인 보조부대의 협력을 받더라도, 수천 명의 사람을 계속해서 총살하는 것은 학살을 수행하는 병사들로서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이는 전쟁 와중에 소중한 탄약과 무기를 낭비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최대한 학살을 은폐하고자 했던 독일 수뇌부로서도, 통제되지 않은 학살 현장에 대한 목격자들과 기록들이 계속해서 생산되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심지어 친위대 특무대 C와 D는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이 너무 많다며, 이들을 한번에 총살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보고를 올렸다.
그렇기에 나치는 죽이는 이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더 효율적이고 통제가 용이한 학살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바로 하술할 발터 라우프 대령이 개발한 가스실 방식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살 집행과 파르티잔 토벌작전은 나치 독일이 점령지에서 전부 물러나고 패퇴할 때까지 계속된다.
소련 영화 《컴 앤 씨》나 폴란드 영화 《증오》, 독일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등이 당시 벌어졌던 광적인 집단 학살 행위를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영상 매체이다. 학술 서적으로는 죙케 나이첼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이 이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쳤다.
4. 수탈과 기아
식량 수탈과 의도적인 기근 유발 역시 홀로코스트의 주된 방식이었다. 1942년 들어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모스크바 방어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임에 따라 단기전을 예상했던 독일의 경제 능력은 급작스러운 위기에 봉착했다. 원자재 비축분은 동이 났고, 넓은 점령지에서는 독일인들이 식량 획득의 우선권을 획득함에 따라 프랑스와 폴란드 등 피지배 민족은 기아에 시달렸다. 이는 다시 점령지의 생산성을 감소시켜 불러일으켜 나치 독일의 경제력을 감소시켰다. 제대로 먹지 못한 피지배민족 노동자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던 것이다.정상적인 정책 입안자들이라면 피지배민족에 대한 동등한 식량 배분 정책을 추진했겠으나, 인종적 우열 논리는 나치당의 근본 이념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들은 이를 포기하지 못했다. 독일 내의 식량 비축분 역시 동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대 독일 국민 대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순무의 겨울을 생생하게 기억했고, 기근에 대해서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가졌다. 따라서 독일인들 사이에 기근이 발생한다는 것은 나치당의 지도력에 금이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독일 국민들 역시 인종적 우열 논리를 강하게 믿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독일인들 자신들은 굶주리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은 배급을 잘 받고 있다고 보인다면 국민들이 보일 반응은 뻔했다. 결국 국민의 손으로 선출되었던 나치당 입장에서는 이러한 상황만큼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따라서 나치는 '열등 인종'에 대한 훨씬 가혹한 착취를 통해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제국 농업식량부의 실질적 총책이었던 차관 헤르베르트 바케다.[8] 그는 열등한 슬라브 인종 2천~3천만을 아사시킨다면 그 남는 식량을 독일인들이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하였고, 4개년계획부 장관을 맡고 있던 헤르만 괴링은 1942년 8월에 이 계획안을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이후 프랑스부터 우크라이나까지 독일 점령지 곳곳에서 독일군이 식량을 징발했다. 유럽 최고의 곡창 지대인 프랑스에서는 파리 시민들까지 기아에 시달리다 못해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지경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훨씬 상황이 심각하여 독일 점령군은 각 농가에 생산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미달될 경우 최대 화형으로까지 보복했다. <독일인의 전쟁>을 저술한 니콜라스 스타가르트는 이 방식이 1930년대 소련의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유사하면서도 더욱 심각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적어도 스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늦게나마 정책을 수정했지만, 독일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독일인들은 1942년의 식량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나 다른 민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피지배민족들 중 노동자들만이 전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배급을 받았으며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은 훨씬 사정이 악화되었다. 한편 열등 인종 중에서도 최고로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던 유대인들은 가장 낮은 순위의 식량 배급의 대상이었다. 괴링부터가 유대인 절멸이 식량 분배 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을 지경이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수용되었던 게토에서는 인구 밀집과 식량 부족으로 암시장이 창궐했고 이마저도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릴 수 없어 길거리에는 시체가 넘쳐났다. 그나마 게토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고, 수용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5. 강제 노동
▲ 독일 바이마르 근교에 위치한 부헨발트 노동수용소의 수감자들. 1945년 해방[9] 직후 찍힌 사진이다. 다들 극한의 기아로 뼈가 드러난 비참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제 자유라는 생각에 밝은 표정이다. 자세히 보면 베개가 아니라 식기로 사용한 작은 냄비를 베고 있다.
일명 Vernichtung durch Arbeit, 노동을 통한 절멸. 이 방식은 다양한 권위주의 국가들과 식민제국들에서 수행해왔고, 또 지금도 벌이고 있는 강제 노동과 궤를 같이한다.[10]
4개년 계획이 실행되고 독일 내에 완전고용이 달성되자,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었던 건축업 쪽으로 일손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전쟁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독일은 물자를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강제수용소를 이용하고자 했다. 일종의 독일판 굴라그인 셈이다. 기존에도 재소자들에게 노역형을 내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끔찍한 것으로, 현대판 노예 노동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주로 석재 등의 건축자재를 생산했다.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가 대표적으로, 이들 수용소들은 친위대 소속 기업에 통제를 받으면서 재소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해 각종 물자를 생산해냈다. 이후 탄약 생산, 각종 부품 생산 등에도 점차 수용소 인력들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전쟁 말에 가서는 수용소 인원들이 전체 노동가능 인원의 3%나 차지하는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해졌다. 독일의 웬만한 도시 옆에는 각 주요 수용소들의 부속수용소들이 설치되어 민간 업자나 친위대, 또는 독일 정부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대표적인 시설이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마우트하우젠-구젠 강제수용소나 부헨발트, 다하우 등이며,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제1수용소는 이런 노동수용소였다.[11] 독일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나 로켓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 그리고 IG 파르벤과 크루프같은 산업 관련 종사자들이 전후에 기소되거나 처벌받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12]
당연히 이 과정은 강압적이었고, 수용소 재소자들의 인권은 매우 낮았다. 유대인들은 일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당하거나 비르케나우의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당하곤 했다. 그나마 각종 기술이 있거나 신체가 강해서 끝까지 버텨낸 이들은 전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이 바로 이런 사례.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바로 이런 노동수용소 재소자들이다.
빅토르 프랑클의 저서인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고 상술한 만화 《쥐》, 또는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등이 나치의 강제 노동 시설을 다루고 있다.
6. 생체 실험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의사 요제프 멩겔레.
나는 1쌍의 쌍둥이를 기억하는데, 그들은 한 방울의 피도 더 이상 뽑아낼 수 없을 때까지 피를 뽑아내야 했다. 그들은 빈 비닐봉지나 맥주병처럼 땅바닥에 쓰러졌다.
ㅡ 이츠하크와 체라흐 타우브,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ㅡ 이츠하크와 체라흐 타우브,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수용소 소속 의사들이나 독일 각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실행했다. 아우슈비츠의 의사였던 요제프 멩겔레의 사례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환자를 살려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재소자들을 그저 실험쥐 정도로나 여기고 끔찍한 인체실험들을 자행했다. 심지어 쌍둥이나 모자 등 가족을 대상으로 한 실험 사례조차 만 단위를 가볍게 넘어간다.
그 엽기적인 행각들로 인해 전후 의사 재판이 따로 열렸을 정도이며, 과학계에는 뉘른베르크 강령이라는 연구윤리 강령을 새로 제정했다.
7. 가스 처형
▲ 마이다네크 노동 및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푸른 얼룩은 치클론 B 독가스의 흔적이다.
총살법은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전쟁 통에 귀한 총알을 사형에 쓰느라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쏴 죽인 SS대원은 PTSD 증상을 호소했고, 지휘부는 이들의 고충을 받아들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마침 당시 독일에는 T4 작전이라는 장애인 학살 계획이 이미 실행 중이었다. 독일 정부는 장애인들이 열등 유전자를 가졌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들을 요양원과 병원에서 안락사시켰다. 해당 과정은 우생학적이고 산업적인 학살이란 측면에서 홀로코스트와 대단히 유사한데, 실제로 이때의 경험은 가스실과 수용소를 통한 유대인 학살의 청사진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친위대원이 끔찍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1942년 6월 5일 베를린.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현재 사용중이며 생산중인 특수차량(spezialwagen)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
1941년 12월 이래로 세 대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97,000명을 처리했고 차량에 별다른 결함은 없었음. (중략) 이전의 사례들로 판단컨데, 다음의 사항들이 개선되면 좋을 것임.
1)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2)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사우러(Saurer) 사[13]의 더 커다란 차량에도 그리 많이 적재하진 않음. 과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해 보임. (중략) 이를 위해 지금껏 했던 것처럼 화물의 양을 줄여선 안됨. 화물의 양이 줄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반면 적재공간이 줄면, 공간이 완전히 화물로 가득찬 상태이므로 '가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음. 제작자들과의 회의에서 적재공간을 줄일 경우 무게중심에 문제가 생겨 앞 차축에 과부하가 걸릴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사실 적재공간의 화물들이 가동 중에 언제나 뒷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무게중심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음. 따라서 앞 차축 과부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음.
4)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배수구의 지름은 20~30cm로 하고 여기에 사이펀을 설치해 '가동 중에' 액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함. 파이프 위에는 거름망을 설치해 오물에 의해 막히는 것을 방지해야 함. 큰 오물들은 가동 후 차량을 청소할 때 배수구의 뚜껑을 열어 제거할 수 있음.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6)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에 철망을 씌워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 램프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리자는 말도 있음. 하지만 관찰 결과,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화물'들은 언제나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이는 화물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의 빛이라도 드는 곳으로 향하려 하기 때문임.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화물'들이 소음을 일으킴. 따라서 가동 초기엔 램프를 켜 두는 것이 더 적절함. 또한 야간 운영과 차량 내부 청소에도 도움이 됨.
상기한 사항들은 수리를 위해 입고될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 이미 주문한 10대의 사우러(Saurer) 사 차량들에는 가능한 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임. 제작사는 회의 때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 개조가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함. 따라서, 10대 중 최소한 한대의 개조를 위해 다른 제작사를 알아본 결과 호헨마우트에 있는 회사가 적격이라고 제안함. 현 상황에서 이 차량의 개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임.
II D 부서장 SS 상급돌격대지도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귀하.
-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베를린의 가스실 총책임자 발터 라우프에게 자신들이 사용 중인 학살용 가스 트럭의 개선점을 보고한 서한. 서신 전문, 독일어 원문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현재 사용중이며 생산중인 특수차량(spezialwagen)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
1941년 12월 이래로 세 대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97,000명을 처리했고 차량에 별다른 결함은 없었음. (중략) 이전의 사례들로 판단컨데, 다음의 사항들이 개선되면 좋을 것임.
1)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2)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사우러(Saurer) 사[13]의 더 커다란 차량에도 그리 많이 적재하진 않음. 과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해 보임. (중략) 이를 위해 지금껏 했던 것처럼 화물의 양을 줄여선 안됨. 화물의 양이 줄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반면 적재공간이 줄면, 공간이 완전히 화물로 가득찬 상태이므로 '가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음. 제작자들과의 회의에서 적재공간을 줄일 경우 무게중심에 문제가 생겨 앞 차축에 과부하가 걸릴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사실 적재공간의 화물들이 가동 중에 언제나 뒷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무게중심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음. 따라서 앞 차축 과부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음.
4)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배수구의 지름은 20~30cm로 하고 여기에 사이펀을 설치해 '가동 중에' 액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함. 파이프 위에는 거름망을 설치해 오물에 의해 막히는 것을 방지해야 함. 큰 오물들은 가동 후 차량을 청소할 때 배수구의 뚜껑을 열어 제거할 수 있음.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6)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에 철망을 씌워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 램프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리자는 말도 있음. 하지만 관찰 결과,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화물'들은 언제나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이는 화물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의 빛이라도 드는 곳으로 향하려 하기 때문임.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화물'들이 소음을 일으킴. 따라서 가동 초기엔 램프를 켜 두는 것이 더 적절함. 또한 야간 운영과 차량 내부 청소에도 도움이 됨.
상기한 사항들은 수리를 위해 입고될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 이미 주문한 10대의 사우러(Saurer) 사 차량들에는 가능한 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임. 제작사는 회의 때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 개조가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함. 따라서, 10대 중 최소한 한대의 개조를 위해 다른 제작사를 알아본 결과 호헨마우트에 있는 회사가 적격이라고 제안함. 현 상황에서 이 차량의 개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임.
II D 부서장 SS 상급돌격대지도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귀하.
-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베를린의 가스실 총책임자 발터 라우프에게 자신들이 사용 중인 학살용 가스 트럭의 개선점을 보고한 서한. 서신 전문, 독일어 원문
▲ 헤움노 절멸수용소 근방에서 불태워진 채 발견된 마기루스 도이츠(Magirus-Deutz)의 트럭이다. 이 사진은 헤움노의 가스바겐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가스바겐과 동일한 차량 모델이지만 가스바겐으로 개조되지 않은 상태의 평범한 수송용 트럭이다. 현재 남아있는 헤움노의 실제 가스바겐 사진은 없다.
어느 날,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14] SS대령은 한적한 교외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는 시동 끄는 것을 깜빡 잊었고, 문득 잠에서 깨보니 배기가스에 중독되어서 사지가 굳어 있어 꼼짝 못하고 죽을 뻔 했다. 그는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가스실 방식 살해 방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사용했다. 이후 가스실은 홀로코스트의 상징과도 같은 처형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만 라우프가 최초의 개발자는 아니었다. 또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가스형 자체는 홀로코스트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생각보다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1920년대부터 미국의 일부 주와 리투아니아에서는 공식적인 사형 집행 방식으로 가스형을 실시했고, 그 중에서도 미국은 1999년까지 가스형을 집행하다 온갖 반발에 시달린 끝에 약물형이나 전기의자형으로 거의 대부분 전환했다. 다만 캘리포니아 주 등지에서는 여전히 법적으로는 남아 있다. 집행을 하지 않을 뿐이다.
형벌이 아닌 집단 학살로써의 가스 처형도 나치의 등장 이전과 이후에 여러 사례가 있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군은 아이티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10만에 가까운 아이티 흑인들을 배에 짐칸에 태운 뒤 이산화황 가스로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1937년 대숙청 당시 스탈린의 소련 NKVD는 모스크바 주 주민들을 대상으로 가스 밴을 이용한 학살을 자행했다. 나폴레옹의 흑인 학살에 대해서는 학술적인 공방전이 오가고 있으며, 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NKVD의 학살의 경우 모스크바 시 외곽의 부토보 처형장에서 외상 없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시신들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15] 그 외 2012년 폐쇄된 북한 함경북도의 22호 관리소(회령 수용소) 또한 생체실험 목적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다만 이들 중 그 어떤 곳도 나치의 가스 학살과 비교될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돌아와서, 독일에서는 라우프의 등장 이전인 1939년과 1940년에 폴란드와 바르테란트 제국대관구에서 폴란드인들을 대상으로 가스 학살을 벌였다. 주로 배기가스 호스를 화물칸에 연결하곤, 희생자들을 실은 채 차를 몰아 한동안 이리저리 쏘다니다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학살은 총살로 집행되었다. 그러던 1941년 친위대 국가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동부전선 시찰 도중 총살 장면을 목격하곤 구역질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신을 차린 힘러는 아인자츠그루펜 B의 사령관인 친위중장 아르투어 네베에게 개선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네베 중장은 1940년에 졸다우 강제수용소에서 1500명의 장애인들을 살해할 때 썼던 가스 밴을 가져와 소련인 정신질환자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실험'했으며, 결과가 만족스럽자 자신의 휘하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들에 가스 밴을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최초의 가스실은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으로,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한 뒤 열심히 공회전을 돌려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산소부족으로 질식해 죽은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 한동안 유지되었다. 또는 상술한 대로 트럭 짐칸에 배기가스가 들어가도록 개조한 뒤 희생자들을 싣고는 공회전시켜 살해하기도 했다. 이것이 'S바겐[16]', 또는 '가스 밴'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아인자츠그루펜에서 사용하거나 최초의 절멸수용소였던 헤움노 및 크로아티아의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에서 사용되었다. 세르비아인들과 동슬라브계 소련 주민들은 이 트럭을 영혼 살해자라는 뜻의 'Dušegupka/душегубка(두셰구프카)'라고도 불렀다.
▲ 친위대 대위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소장이며, 가스실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인물.[17]
하켄홀트 하사[18]는 엔진을 움직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르트 대위[19]가 다가왔다. (중략) 나는 스탑워치를 보았는데 50분, 70분이 지나도 엔진은 가동되지 않았다. (중략) 분노한 비르트 대위가 하켄홀트 하사를 돕던 우크라이나인 경비병 얼굴에다 12, 13회 채찍질했다. 2시간 49분 후 디젤 엔진이 가동되었다. (중략) 28분 뒤 소수만이 살아 있었고 32분 뒤 모두 사망했다. 치의사들이 들어와 금니와 치관을 빼냈다. 그 시체들 한가운데에 비르트 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가 되어 희생자들의 금니와 귀금속으로 가득한 통을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 황금의 무게를 느껴보시오! 이게 어제랑 그제 얻은 것들이오. 당신은 우리가 매일 얼마나 얻는지 모를 거요. 돈, 다이아몬드, 황금들 말이오. 직접 와서 보시오!"
- 게르슈타인 보고서
- 게르슈타인 보고서
한편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절멸로 확정되고, 라인하르트 작전이 벌어지며 폴란드 지역의 유대인 학살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세워진 트레블링카[20], 베우제츠[21], 소비보르 절멸수용소[22]에서는 가스 밴 방식을 더 대량의 살인이 가능하도록 개량한 '가스실' 방식을 사용했다. 말이 수용소지 사실상 완벽히 산업화된 살인 공장의 기계나 다름없던 이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철도를 통해 이송된 유대인들 중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특수임무반)이라 불린 최소한의 보조 인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넘겨받는 즉시 바로 살해하여 화장해버렸다. 그러나 기존에 쓰던 가스 밴의 작은 용적으로는 이송되는 희생자들을 전부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나치는 가스 밴을 개량하여 가스실을 개발하게 된다. 이 아이디어를 최초로 내놓은 이는 베우제츠의 소장이었던 크리스티안 비르트 친위대 대위, 그리고 설계자는 로렌츠 하켄홀트 친위대 하사였다.
우선 간수들은 희생자들에게 이곳이 환승역이라 속인 뒤, 위생 검사를 핑계로 희생자들이 자발적으로 탈의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는 좁은 길을 통해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에 희생자들을 인솔하곤 가스를 주입해 살해하였다. 다만 이들은 후술할 치클론 B 가스를 도입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일산화탄소를 사용했다. 가스실 외부의 엔진실에 소련군 전차에서 떼어낸 디젤 엔진을 부착했고, 갖가지 연료(주로 석유)를 이용해 엔진을 공회전시켜 나온 가스를 배기 파이프를 통해 각 방에 흘려넣음으로써 희생자들을 질식시켰다. 이 4개 절멸수용소에서만 약 200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작전이 단 몇 개월만에 폴란드 유대인들을 거의 절멸시키면서 이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은 효율적인 학살방법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한 번 '개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디어가 일산화탄소 대신 '치클론 B'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치클론 B는 밀폐된 공간에 터트려서 방역을 하는 살충제로, 당시 독일 국방군은 마구간[23] 방역용으로 종합화학회사인 I.G 파르벤에서 대량의 치클론 B를 납품받아서 석유보다 공급이 넉넉했다.[24][25] 어찌되었든 치클론 B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였고,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치클론 B의 치명성을 본 나치들은(출처: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 값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다만 치클론 B는 아우슈비츠(희생자 110만~120만), 마이다네크 수용소(희생자 최소 8만)에서만 사용되었다. 특히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경우, 부속 수용소인 모노위츠에 거대한 이게파르벤 공장이 들어서서 치클론 B를 공급했다.
전쟁 중기 이후 치클론 B의 납품이 대규모로 가능했음에도 각 수용소마다 가스실의 작동방식이 달랐고 그것을 바꾸기 싫었던 수용소장들은 기존의 일산화탄소 방식을 고수했다. 루돌프 회스의 표현에 따라 덜 효과적인 일산화탄소를 이용하는 절멸수용소들은 대부분 1944년 이전에 폐쇄되었고, 남아있던 절멸수용소들, 더 효과적인 치클론 B를 쓰는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는 1944년 7월까지, 아우슈비츠에서는 1945년 1월까지 학살을 지속했다.
독일 언론들은 수용소에 대량의 방역용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보고 나치 수용소가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기사를 쓰는 짓을 저질렀다. 어차피 당시 독일 언론은 히틀러와 괴벨스에 의해 검열 중이었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밖에 기사를 쓸 수 없었다.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공간이었던 이들 절멸수용소(Todeslager, Vernichtungslager)들은 나치 독일에서조차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으며, 이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특히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 세워졌던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등의 수용소들은 작전 종료 직후 증거 인멸을 위해 철저히 파괴되어 현재는 그 터만이 남아있다. 심지어 트레블링카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의 증언에 따르면 나치 정부는 여기서 일한 간수들마저 목격자로 취급했고, 그들이 사라지길 원했다고 한다. 때문에 라인하르트 작전 종료 직후, 수용소 간수들은 주로 위험 지역이었던 발칸 반도의 대 파르티잔 전선으로 보내져 소모되었다. 각종 서류 등의 증거 자료들 또한 다수가 파기되거나 암호화되어 있으며, 학살 공정을 찍은 사진은 비르케나우에서 찍힌 단 4장만이 남아있다. '존더코만도 사진'이라 명명된 이 네 장의 사진은 수감자였던 그리스 유대인이자 그리스군 장교였던 알베르토스 에레라(추정)가 카메라를 밀수해 간신히 찍은 것이었다. 집단 총살에 대한 증거 자료가 차고 넘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가스 밴들도 마찬가지로, 도합 수십 대가 넘었으나 전부 파괴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차량은 없다.
그나마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네크는 노동수용소도 겸하여 그 크기가 굉장히 컸고, 시간이 촉박하였기에 미처 파괴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소련군이 이 지역을 접수하고 나서 전세계에 실상이 밝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 맞먹는 희생자들을 낸 라인하르트 작전 수용소들은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울의 아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또한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에서는 바르샤바 게토와 아우슈비츠 외에도 헤움노와 트레블링카 등의 잊혀진 절멸수용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8. 죽음의 행진
전쟁 말기,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물밀듯이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독일은 폴란드 지역에 있던 학살 증거를 은폐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수용소 재소자들이 독일 영내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주된 방식은 열차 한 칸에 수백명씩 화물 수송하듯 넣은 뒤 별다른 식사도 주지 않고 이송하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멈춰 설 때마다 죽은 시체를 밖으로 던질 때 외에는 열차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철로가 끊긴 곳에서는 감시병의 감시 하에 수십~수백 킬로미터를 걷게 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기력이 쇠한 상태였던 수용소 재소자들을 이렇게 다뤘으니 당연히도 수 만 명이 죽음을 맞았는데, 사망자 수에 대한 정확한 추산은 아직까지도 불명확하다.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은 자신이 탔던 화물칸의 200명 중에서 8분의 1인 25명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1]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한국어 역본 98p[2] 대표적인 예시가 음악감독 한스 짐머의 어머니로 2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영국으로 도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이런 이유로 인해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경우였는데, 이쪽은 반대로 네덜란드가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참화를 겪게 되었다.[3] 검은색 히틀러 유켄트 혹은 전차병 군복을 입은 사람 좌측을 보면 오른쪽 가슴에 국가수리가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4] 이름은 미상.[5] 1943년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붕괴하자 북이탈리아에는 독일군이 진주했다. 그러자 반 무솔리니파 이탈리아인들 다수가 파르티지아노가 되어 독일군 및 독일의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에 대한 독일의 진압 방식은 매우 잔혹했다. 당장 폴란드에서 라인하르트 작전으로 절멸수용소를 운영했던 친위대 부대가 파르티잔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을 정도였다.[6] 무장친위대 제8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전신이다.[7] 또는 저항의지를 꺽기위해 강제로 참관하게 시키기도했다.[8] 장관은 프리츠 자우켈이었다.[9] 1945년 4월 초 패전을 앞둔 독일은 부헨발트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때 수감자들 또한 죽음의 행진을 통해 같이 끌려갈 위기에 처하자 4월 8일 수감자 중 한 명이었던 폴란드인 기술자 그비돈 다마진(Gwidon Damazyn)이 몰래 숨겨 들어온 단파 송신기로 그의 러시아인 동료 수감자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레오노프와 함께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로 SOS 요청을 송신했다. 그리고 고작 3분 후 조지 패튼 대장의 미 3군이 그곳으로 튀어가는 중이다(Rushing to your aid)라며 답변을 보내왔다. 이 답변을 듣고 열광한 수감자들은 바로 반란을 일으켜 무기를 탈취해 잔여 간수들을 제압했고, 3일 뒤인 4월 11일 도착한 미 3군에게 해방되었다.[10] 2차 대전 이후에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이 딱 '노동을 통한 절멸'에 가장 완벽히 부합하는 곳으로 꼽힌다. 완전통제구역도 온전히 반체제 인사의 말살만을 위해 강제노동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치의 노동수용소와 판박이다.[11] 비르케나우로도 불린 2수용소는 절멸수용소였다.[12] 다만 폰 브라운의 경우 페이퍼클립 작전의 수혜를 입어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13] 스위스의 차량 제작 회사. 사우러 사가 직접 가스 밴을 제작한 건 아니었고 사우러 사의 트럭을 독일의 Gaubschat Fahrzeugwerke사가 가스바겐으로 개조했다. 사우러 사의 제품 외에 르노, 오펠 사의 트럭이 가스바겐으로 개조되었고 이렇게 전쟁 중에 개조된 가스바겐의 수는 약 20여 대로 추정된다.[14] 이 사람은 나중에 칠레로 탈출한다.[15] 다만 소련의 가스 밴은 대숙청 와중인 1938년에 주동자인 이사이 베르그가 NKVD에 의해 반동 혐의로 처형되면서 중단되었다.[16] 특수차량(Spezialwagen)의 준말.[17] 비르트는 1944년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에게 처단 당한다.[18] 라인하르트 수용소들의 가스실을 설계한 친위대 하사 로렌츠 하켄홀트를 의미. 1945년 적인 이탈리아 파르티지아노들에게 몰래 무기를 팔아넘기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고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죽음을 위장하고 위조 신분으로 도피했다고 여긴다.[19]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소장이었던 친위대 대위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의미.[20] Treblinka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70~90만.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상당수가 이곳으로 보내졌다.[21] Bełżec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약 60만. 르부프 게토의 유대인 대부분이 보내졌다.[22] Sobibór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약 20만.[2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물자 수송에 있어 말의 비중은 매우 컸다.[24] 당시 치클론 B의 주 원료인 메탄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연료로 활용되었다.[25] 훗날 전범 재판에서 이게파르벤은 치클론 B를 학살용으로 공급한 것 아니냐는 추궁에 자신들은 살충제로 팔았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이 변명은 씨알도 안 먹혀서 이게파르벤은 해체되었다. 전술했다시피 다른 참여 기업들과 Degesch(1986년 Detia Freyberg에 합병되어서 Detia-Degesch라는 사명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사는 살려두었지만 Tesch und Stabenow사는 주요 인물인 브루노 테슈의 죄질이 너무나도 흉악했으므로 아예 강제로 청산시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