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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Hrvatska Republika Herceg-Bosna | ||
국기 | 국장 | |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영역 [1] | ||
1992년 ~ 1996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SR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 |
위치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
수도 | 모스타르(명목상) 그루데(사실상) | |
정치체제 | 공화제 | |
국가원수 | 1992년~1993년 마테 보반 1993년 ~ 1994년 크레시미르 주바크 | |
언어 | 크로아티아어 | |
민족 | 크로아티아인 | |
종교 | 가톨릭 | |
주요사건 | 1992년 공동체 선포 1993년 공화국 선포 1994년 실질적 멸망 1996년 7월 1일, 헤르체고비나주 및 나머지 주 정부 해산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편입으로 완전 멸망 | |
통화 | 크로아티아 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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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인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부(헤르체고비나 지방) 영토 내에 존재했던 크로아티아의 괴뢰국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수도는 모스타르였으나, 보스니아 전쟁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스릅스카 공화국이 모스타르에서 삼파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수도는 그루데였다.
2. 역사
1980년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이끌던 티토 사후, 연방공화국 내 각 구성국에서는 민족주의적 열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중앙정부는 유고슬라브인 통합주의자들이 밀려나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의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장악되기 시작했으며, 각 구성국 역시 구성국 내 주 민족의 민족주의를 내거는 정치인들이 권력을 장악했다.그런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확고한 주 민족이 없었다. 보스니아 지방(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에는 보슈냐크인(지도 초록색), 헤르체고비나 지방(남부)에는 크로아티아인(지도 푸른색)이 많기는 했으나, 세르비아인(지도 붉은색)도 곳곳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고 내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림에 따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을 위주로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에 반대했다.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을 합하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인구의 과반이 넘기 때문에(약 64%) 1992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물론 세르비아인들은 국민투표를 보이콧했고, 이미 세르비아인이 장악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맞서 독립을 희망하던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암묵적인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인들의 무력 투사에 맞섰다. 이것이 보스니아 전쟁의 시작이다.
하지만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동맹은 어디까지나 강대한 세르비아인에 맞선 오월동주나 나제동맹에 가까운 성격의 동맹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 민족 사이의 관계 역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독립 직후에는 세르비아계가 너무 강대하니 죽기 싫어서라도 손잡고 맞서싸울 수밖에 없었지만,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서는 보슈냐크인들 역시 세르비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고까운 존재였다.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비중은 보슈냐크인 50%, 크로아티아인 15%, 세르비아인 35%로 크로아티아인은 보슈냐크인에 비해 열세였지만,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과의 대립에서는 크로아티아인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보슈냐크인과 달리 크로아티아인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독립국 크로아티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이끈 프라뇨 투지만과 그의 정당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은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 이전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라는 지부를 세웠다. 이 정당은 후에 보슈냐크인 정당인 민주행동당과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을 이뤄냈지만, 일단 어느 정도 세르비아인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자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은 각자 장악한 지역의 통제권과 전쟁 범죄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이 많은 지역에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동체(Hrvatska Zajednica Herceg-Bosna)를 선포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주 거주지인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넘어 은근슬쩍 보슈냐크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중부 보스니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보슈냐크계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는 등 제노사이드를 벌이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불리한 크로아티아인이 보슈냐크인들을 몰아세우고 학살할 수 있었던 것은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계 지역을 노리던 크로아티아는 이 때 보슈냐크계에 대한 지원을 끊고 보슈냐크계를 공격하는 크로아티아인을 지원했다. 크로아티아 역시 독립 당시 유고 내전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실질적으로는 세르비아계 위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공격을 받아 자기 앞가림하기도 힘든 처지였지만, 일단 1992년에 크로아티아와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의 휴전이 성립되고 난 후 1992년에 투지만 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 및 스릅스카 공화국의 라도반 카라지치 대통령과 함께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보슈냐크인을 척살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영역으로 나누자는 그라츠 조약에 합의했다.
1993년 5월 헤르체그보스니아 최대 영토. 이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토의 25%를 차지하였다. 당시 세르비아인의 스릅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전체 영토의 71%를 차지한 상태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사라예보, 고라즈데, 비하치 딱 세 곳만 차지하고 있어서[2] 전 보스니아 영토의 4%에 불과했다.
이렇게 보스니아 전쟁이 심각해지자, 1992년 8월 보스니아를 민족별로 3개 공화국으로 재편하는 내용의 중재안인 오웬-스톨렌텐베르그 안이 제시되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여기에 동의하고 1993년에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동체를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Hrvatska Republika Herceg-Bosna)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보슈냐크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이 오웬-스톨렌텐베르그 안을 거부하면서 파토가 났다. 이윽고 보슈냐크인들은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인정을 거부했다. 그리고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동맹은 완전히 결렬되었고 이윽고 서로를 공격하면서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는 사상자가 1만 명 이상이 나왔는데 62%가 보슈냐크인이었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였다. 이 전쟁 중에 크로아티아인들은 보슈냐크인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이 크로아티아인들을 지원한 크로아티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도 전쟁범죄자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은 1993년 9월에 간신히 정신차린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보슈냐크군이 헤르체그보스니아의 점령지 상당부분을 수복하기 시작하면서[3] 크로아티아한테 불리해졌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1993년 10월부터 크로아티아인들은 모스타르, 제니차 등 헤르체그보스니아 점령지 내 보슈냐크인 학살에 더욱 열을 올렸다.[4] 이런 무슬림 학살은 헤르체그보스니아에 대한 국제 여론 악화만을 불러일으켰다. 크로아티아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면서 보슈냐크인은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우위에 섰고, 1994년 3월이 되자 헤르체그보스니아는 헤르체고비나주 이외의 영토를 모두 상실했고, 헤르체그보스니아의 수도로 선포했던 모스타르[5]까지 보스니아군이 장악하게 된다.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을 모두 지원해주던 미국은 크로아티아인의 보슈냐크인 학살에 놀라 투지만 대통령을 워싱턴 D.C.로 불러내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즉각 멈출 것을 요구했다. 당시 막 출범한 유럽연합 역시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을 브뤼셀로 소환해 투지만의 제노사이드를 규탄하고 헤르체그보스니아의 보스니아 반환을 요구했다. 투지만 대통령과 크로아티아 정부는 미국과 EU의 압력에 굴복해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1994년 7월 워싱턴 협정과 스플리트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수립되면서 보스니아 전쟁의 하위 전쟁인 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명목상 그 뒤로도 존속했으나 의미를 잃었으며[6] 1996년에 완전히 해체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내 각 주로 개편되었다.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2000년대에 차례대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되어 민족 학살에 대해 유죄를 인정받고 복역하고 있다.[7]
여담으로 보스니아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도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서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인들 중에서는 이 공화국을 보스니아내 구성국으로 다시 부활시키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세르비아인들도 스릅스카 공화국을 꾸려서 1국가 2체제로 살고 있는데 우리라고 스릅스카 같이 못 할 게 있냐"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분리독립 과정에서 벌어진 보스니아 전쟁이라는 대재앙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고, 미국과 러시아 및 EU 등의 강대국이 개입해 전쟁을 봉합한 데이턴 협정을 파기하거나 또는 데이턴 협정 자체를 전면수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어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1] 지도의 빨간 부분[2] 이외에 제파, 스레브레니차, 투즐라 등 보슈냐크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은 좀 더 있었지만, 세르비아계 및 크로아티아계에 의해 봉쇄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본국에서 통제가 닿지 않았다. 당장 비하치조차 1993년에는 본국에서 연락이 닿지 않아 보스니아 본국은 비하치를 세르비아의 점령지로 보고 있었다. 고라즈데는 1993년 9월 세르비아계가 본국으로 연결되는 회랑을 절단함으로써 봉쇄됐지만, UN 안전지대를 지정하면서 UN 평화유지군에 의해 보스니아 본국의 통제가 간신히 유지됐다.[3] 보슈냐크인들은 중화기 등 좋은 무기가 별로 없었기에,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공격을 할 때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방식을 썼다. 이외에는 인해전술이나 우라돌격같은 구시대적 전법을 이용해야 했다.[4] 이는 1995년에 세르비아인도 똑같아서, 1995년에 세르비아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파 학살, 스레브레니차 학살같이 점령지 내 보슈냐크인 학살에만 집중하는 짓을 벌여서 국제 여론 악화를 불러왔다.[5] 여기는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인까지 3파전이 벌어졌던 곳이라 헤르체그보스니아의 실질 수도는 그루데였다.[6] 보슈냐크인 학살을 이끌었던 마테 보반 헤르체그보스니아 초대 대통령은 보슈냐크인들의 보복 학살을 피해 크로아티아로 도주했고, 스플리트 협정 이후 보슈냐크인에 우호적이던 스테판 메시치(이후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됨)가 대리인을 내세워 헤르체그보스니아를 이끌었다.[7] 이 중 슬로보단 프랄략은 항소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직후 판결에 항의하면서 음독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