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0:26:40

괴베클리 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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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영어 Göbekli Tepe
프랑스어 Göbekli Tepe
국가·위치 튀르키예 샨르우르파
등재 유형 문화유산
등재 연도 2018년
등재 기준 (i)[1], (ii)[2], (iv)[3]
지정번호 1572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조성된 시기4. 유적지의 건설5. 몰락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6. 슈미트 교수7. 기타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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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bibliotecapleyades.net/gobekli_tepe08_01.jpg파일:external/thumbs.media.smithsonianmag.com/gobeklitepe_nov08_11.jpg__600x0_q85_upscale.jpg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튀르키예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의미의 지명으로, 튀르키예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석기 시대의 유적을 가리킨다.

이 유적은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었는데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 내려가다 발견되었다. 이후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교와 튀르키예 이스탄불 대학교가 공동 조사를 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였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4]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하였다. T 자 형태 돌기둥 2백 개 이상이 늘어서 스무 겹으로 원을 이루는 형태가 특징인데, 기둥 중 가장 높은 것은 5.5 m에 달한다.

2018년 6월,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튀르키예의 18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언어별 표기

【언어별 명칭】
<colbgcolor=#CCCCCC,#212121>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튀르키예어 Göbekli Tepe
아르메니아어 Պորտասար (Portasar)
쿠르드어 Girê Mirazan
중국어 哥贝克力石阵
일본어 ギョベクリ・テペ

3. 조성된 시기

2010년 발표된 결과로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기원전 9675년 무렵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구조물은 21세기 기준 약 1만 17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PPNA)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이 정도 크기의 인공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6] 대표적인 대규모 고(古)유적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대략 기원전 2000-2700년 무렵 건설된 유적인데 괴베클리 테페는 이 시기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와 현대까지의 기간(4천 년)보다,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지고 피라미드가 지어지기까지의 기간(7천 년)이 3천 년이나 더 길다. 심지어 최초의 문명 도시라고 하는 수메르 문명보다도 앞선 것이다.

유적이 위치한 아나톨리아 지역은 현재까지 발견된 도시 중 가장 오래되고 초기 밀 농사를 했다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발견되므로, 수렵인들이 이런 종교 시설을 건축하며 모여 살다가 농사를 지으며 정착민으로 변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류가 원시 생활에서 벗어나 일정 규모의 인구가 모여 연대를 붙이는 것이 의미 있는, 즉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고고학적 업적을 만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베클리 테페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1993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지질학자 체사레 에밀리아니(Cesare Emiliani)는 서력기원의 연대에 1만을 더해 홀로세 기원(Holocene era), 또는 인류 기원(Human Era)이라고 이름 지어 약칭 HE라고 쓰자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서기 2022년은 12022 HE라고 하자는 것이다.

2019년, 괴베클리 테페에서 38 km 떨어진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에서 T 자형 기둥이 250개나 발견되는 등 괴베클리 테페보다 더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 이외에도 주변 지역 각지에서 T 자형 기둥 신전이 잇따라 발견되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집단으로 드러났다. 신전 주변에서도 곡식을 빻기 위해 필요한 맷돌과 탄화된 곡물 또한 대량으로 발굴되어 구석기 시대라 여기던 시절에 초기 농업 사회가 탄생했음이 밝혀졌다.

4. 유적지의 건설

파일:external/images.nationalgeographic.com/gobekli-full_35417_600x450.jpg
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운 돌기둥이 특징인데, 기둥들에는 여러 가지 곤충동물 형상이 양각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T 자 형상을 하였는데 사람을 나타낸 듯하다. T 자형 돌기둥의 몸통 부분(ㅣ 부분)에는 손과 인체 형상이 조각되었지만 얼굴 부분(ㅡ 부분)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T 자형 유물은 한국의 솟대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가 앉는 횃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른 유적에는 사람 얼굴을 새겼으므로, 여기서는 얼굴을 조각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돌기둥을 세우고자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하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 적어도 5백 명 이상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한다. 고고학계의 기존 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 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으로 토목 활동이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 농경 생활에 따른 체계화된 사회 조직이 등장해야 한다.

5. 몰락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약 2천 년간 신전으로 사용된 듯하다. 이곳에 세웠던 기둥들을 고의로 땅에 묻은 뒤 새로운 기둥을 다시 세우는 등 몇 번 변화가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8천 년쯤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져 땅속에 묻혔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 자갈과 석기 도구들,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고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 계급에 맞선 반란 등에 휘말렸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 후자의 주장은 돌기둥들이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묻혔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조사로는 인위적으로 묻힌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인위적으로 묻었다면 상대적으로 고르게 묻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 괴베클리 테페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신전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위적 몰락'과 '자연적 퇴적'을 결합하여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말 그대로 괴베클리 테페가 모종의 이유로 방치되던 시기가 있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방치되고 버려졌다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다시 복구되고 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 괴베클리 테페가 고고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존 학설로 예상되던 발전 수준에 비해 놀랍다는 것이지 본격적인 성읍 국가나 문명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관리가 쉽게 끊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굳이 전쟁이나 집단적인 분쟁이 아니어도, 단순히 생태 자원 고갈로 인한 서식지 이동나 재해로 인한 피난 등으로도 인적이 끊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의외로 이런 일은 고대 이후에도 굉장히 빈번한데, 가령 서기 10세기경에 세워진 그린란드에 세워진 바이킹 식민지는 크게 번성하여 가톨릭 교구가 설치되어 주교가 임명될 정도였으나, 소빙하기로 인한 기후 변화로 인해 대부분의 인구가 아이슬란드로 피신하면서 18세기에 바이킹들의 후손인 덴마크인들이 옛 식민지들을 재건할때까지 버려져있었다. 근현대로 가도 19세기까지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다가 1830년경에 가뭄으로 인해 버려진 짐바브웨의 종교 유적인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1995년에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된 뒤로 유령도시가 된 러시아 사할린 섬네프테고르스크의 사례가 있다. 그리고 괴베클리 테페보다 훨씬 규모가 큰 톨텍 문명 등의 문명도 자원 고갈이나 자연재해로 멸망한 사례가 있으니 무리한 추측도 아니다.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nopad>파일:external/thehiddenrecords.com/taurus-lascaux-gobekli-tepi.jpg
마치 황소자리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비슷하여 천문학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성의 가설도 있다.

괴베클리 테페가 시리우스의 위치를 기록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재 시리우스는 북반구 대부분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별이지만, 기원전 1만 년 전에는 1년 내내 지평선 아래에 있는 전몰성, 즉 관측이 불가능한 별이었다. 지구의 세차 운동으로 적위가 증가하여 기원전 9300년 무렵 시리우스는 튀르키예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못 보던 밝은 별이 남쪽 지평선 부근에서 나타난 듯이 보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연도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시리우스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위치는 지구가 세차 운동을 함에 따라 수백 년 단위로 변화하는데, 이들이 돌기둥들이 배치된 방향을 연장한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일 정말로 시리우스 출현이 괴베클리 테페를 건립하는 동기가 되었다면, 시리우스 숭배는 고대 이집트보다도 더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종교적 믿음이다. 하지만 수렵 채집 활동으로 살아가던 원시 부족이 문자도 없이 천문 관측 기록을 어떻게 후세에 전할 수 있었냐는 의문이 남는다.

'떠돌아다니던 수렵민들이 갑자기 어떤 계기로 모여서 신전을 건축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고자 '혜성 소나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린란드의 아이스 코어, 지구 궤도 이심률 변화, 북아메리카 지질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원전 1만 1천 년 무렵에 지구는 황소자리 유성우의 극대기에 돌입했고, 이때 대규모 혜성 충돌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졌는데, 이 사건이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이 주장은 넷플릭스고대의 아포칼립스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는 유사 역사학으로 악명 높은 그레이엄 핸콕이다.

한발 더 나가자면, 혜성 충돌로 인해 전 지구적인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에 종교적인 영감을 얻은 한 무리가 이를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게 되었고, 자연히 농업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 앞의 황소자리의 예와 비슷하게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의 형상과 배치는 별자리와 관련이 깊으리란 추측이 많다.

6. 슈미트 교수

파일:external/www.hurriyetdailynews.com/n_69418_1.jpg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 1953.12.11~2014.07.20)

이 유적의 발굴 시작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는 2014년 7월 20일 수영 중 심장 마비로 만 60세 나이에 급사했다. 이후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의 튀르키예인 아내이자 튀르키예 고고학자 치으뎀 쾩살 교수가 유적을 관리한다.

파일:external/media.licdn.com/1a9e2e0.jpg
치으뎀 쾩살(Çiğdem Köksal)

치으뎀 교수의 페이스북에 발굴 관련 상황과 더불어 남편 클라우스 교수의 일화를 튀르키예어로 설명했다.

7. 기타

  • 1997년에 발견되어 2019년경부터 발굴이 시작된 인근의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의 경우 괴베클리 테페보다도 더 이전의 유물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하나하나씩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 스톤헨지를 세운 사람들이 이 유적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기원전 1만 년 전 아나톨리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흘러흘러 현재의 영국까지 넘어간 것으로 DNA 검사 결과 확인되었다는 것인데, 괴베클리 테페와 직접 관련이 있지야 않지만 아나톨리아 출신이고 비슷한 돌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이 모였다.
  • 이 지역이 시리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시리아 국경 접경 지역이라 발굴에 애로 사항이 생길 우려도 있었다. 2014년 8월 이스탄불 대학의 이희수 교수가 이곳을 방문할 때 난민 수용지 근처라 검문을 받았다고 한다.
  • 그래도 튀르키예에서는 세계적인 유적지가 될 전망을 안고 기대하고 있으며 열심히 발굴 및 연구를 지원한다. T 자 돌탑들도 2016년 중순에 개장될 우르파 고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중무장한 군을 배치하여 학자들을 경호한다. 이희수 교수는 이 돌탑들을 보고 싶어 했으나 박물관에 이동하여 개장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금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서 박물관에 갔지만, 당연히 개장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거절당했다. 그래도 튀르키예 내 인맥을 동원하고 외국인으로서 보고 싶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애원하여 마침내 부관장에게 특별히 개인 관람을 허락받았다. 정해진 시간이나마 직접 보았는데 겨우 10% 수준 발굴되었음에도 상당수 유적이 출토되어, 일부만 봤는데도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적었다. 다만 인근 동네들이 정국이 좋지 않은 터라 문제이다.
  • 2020년 기준으로 유적 위에 돔형 지붕을 설치해 놓고, 관광 안내소와 각종 편의 시설까지 설치해 놓은 것으로 보아 적극적으로 관광객 유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홍보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영어 안내도 잘 갖추어 놓은 것과는 별개로, 관리 직원들에게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해 한 번에 5명밖에 관람을 하지 못한다. 2022년 기준으로는 규제가 완화되어, 티켓만 구매하면 인원 제한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파일:괴베클리 테페 터키1.jpg파일:괴베클리 테페 터키2.jpg
  • 2017년 9월 28일, 튀르키예 언론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와 동시대의 유적이 티그리스강 근처 하산케이프 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다음 뉴스 네이버 뉴스 놀랍게도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수준의 사람들이 천 년간 거주하다 떠나간 도시 유적이다. 튀르키예 정부의 아나톨리아 지역 개발 계획에 의해 댐 예정지 조사를 진행하다 발견된 곳이라 몇 년 뒤 해당 지역이 수몰될 예정인 것이 문제다.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이 원래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살던 영토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된 노아의 5대손 하이크(Hayk)를 민족의 시조로 보며, 대홍수 직후 처음 땅을 밟은 노아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알려진 아라라트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고,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에는 그 유명한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가졌다. 그러다 1915년부터 1918년에 걸친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튀르키예에 여러 영토를 빼앗긴 채 아라라트산 바깥쪽 작은 땅으로 내몰렸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그들의 긍지가 담긴 이 유적지를 원래부터 자신들의 역사인 것마냥 광고하는 튀르키예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다. 반면 지금의 튀르키예 인들의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으로, 중세에 동양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다. 민족적 자부심이 담긴 주장을 다 논외로 하더라도, 이 지역 원주민이 아르메니아 인이라는 건 성경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고, 튀르키예 인들은 이주민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튀르키예 이름인 괴베클리 테페 대신 예전 아르메니아 이름인 '포르타사르(Portasar)'로 불러주길 희망한다. 그래서 포르타사르라는 이름으로 구글에 검색하면 뜨는 사이트들도 죄다 아르메니아 관련 사이트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딱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며, 영어나 프랑스어 등 위키백과를 봐도 괴베클리 테페를 아르메니아 어 명칭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본문에 '아르메니아에서는 포르타사르라고 불린다.' 정도로만 언급할 뿐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논리 때문[7]이 아니라, 이 유적을 만든 이들이 아르메니아 인이라는 증거 또한 없기 때문이다.

괴베클리 테페가 발굴된 지역은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자 문명권이었던 지역인데, 이 지역은 역사가 너무나 오래되고 문명 간 교류도 많이 오고갔던 지라 진짜 토착 민족이 누구인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찾기 힘든 곳이다. 현재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정착 시기는 1만 2천 년 전쯤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아르메니아 인이 이 지역에 이주해 온 시기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기원전 4천 년 전 즈음으로 추정되고 다수 민족이 된 것은 이슬람 발흥 이후인 7세기 즈음부터다.[8] 그리고 설령 아르메니아 인들이 그 이전부터 여기 살았다 하더라도, 1만 2천 년 전 선조들을 민족으로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 정도 시간이면 혈통이 전부 뒤섞였거나 이 지역 근방 토착 민족 모두의 공통 조상이라고 보는 편이 맞지, 현재의 민족 분류를 대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지역으로 막 쳐들어왔던 10세기 시절의 황인종 튀르크족은 괴베클리 테페를 지은 고대인들의 후손으로 보기 어렵겠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며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들에 유전적으로 흡수되었다. 현대 튀르키예 인의 일반적인 유전적 특성은 고대 이래 아나톨리아에 살아온 원주민의 유전자 풀을 주류로 하여, 10세기 튀르크족을 비롯해 지금까지 이곳으로 들어온 다양한 외래인들의 유전자가 소소하게 양념처럼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민족의 유전적 특성은 국경에 따라 딱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라데이션으로 변화한다. 주변국과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은 선대에 인접국 주민과 혼혈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인접국 주민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 게다가 아나톨리아와 주변 일대 민족들은 애초부터 유전적 차이가 크지 않았던 터라, 현대 튀르키예 인은 그리스 인, 아르메니아 인 등과 유전적으로 거의 유사하다. 결국 괴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8년부터 관광객들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8. 관련 문서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이후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로 이직했다가 2014년 작고했다.[5] Dietrich, Oliver & Schmidt, Klaus. (2010). A Radiocarbon Date from the Wall Plaster of Enclosure D of Göbekli Tepe.. Neo-Lithics. 2/2010. 82-83.[6] 어디까지나 이 정도 대규모 유적으로 한정했을 경우다. 소규모 유적이나 사람의 손길이 덜 들어간 유적들 중에는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테오페트라 동굴(Theopetra Cave) 같은 것들이 있다.[7] 오히려, 아르메니아는 프랑스나 서구권에서 더 정치적으로 지지해오고 있다. 물론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땐 물질적으로 도울 수도 없었던 현실이다. 당시 전쟁때, 러시아나 조지아·이란을 통해서만 지원품을 보낼 수 있는데 러시아와 이란은 미국이 경제제재를 하고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 편들어서 아르메니아로 가서 지원품을 항구에서 막아버린다고 했다.[8] 이 지역이 동로마와 이슬람의 분쟁 지대가 된 이후 기존 원주민인 셈 계열 아람-아시리아 인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위협을 피해 동로마 쪽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 인들이 그 공백을 채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