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황제 참칭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Clodius Albinu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Decimus Clodius Albinus |
출생 | 150년 |
로마 제국 북아프리카 속주 하드루메툼 | |
사망 | 197년 2월 19일 (향년 48세) |
로마 제국 루그두눔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93년 ~ 197년 2월 19일 (4년) | |
전임자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후임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clearfix]
1. 소개
고대 로마제국의 2세기 내전 시기였던 다섯 황제의 해 당시의 임페라토르 중 한명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최종 제위 경쟁자.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 장군으로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시절,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 반발하며 휘하 군대의 추대 아래 193년 황제를 자처했다.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달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부터 카이사르 직위를 받고, 원로원에게 인정받았지만, 197년 2월 19일 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서 벌어진 루그두눔의 전투에서 세베루스에게 패사해 목숨을 잃고 그 머리가 잘려 로마로 보내졌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150년경 아프리카 속주의 도시 하드루메툼(Hadrumetum) 태생으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태생이다. 알비누스라는 이름은 부친 케이오니우스가 워낙 하얗고 창백한 탓에 붙여진 별명이 클로디우스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부친의 이름이 케이오니우스인 것을 볼 때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가 케이오니우스 가문 내의 알비누스 집안 태생일 수도 있다고 한다. 대대로 하드루메툼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며 막대한 재산을 벌어들인 집안 출신이었고 귀족이었지만, 또래 귀족 자제들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집안 가업을 돕다가 장교로 군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만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추천 아래 재무관, 안찰관을 거쳐 원로원 의석을 받고 법무관까지 추천받아 젊은 나이에 다누비우스에 주둔 중인 2개 군단을 통솔할 수 있는 모이시아 속주 총독까지 올랐다. 이때 그는 3년동안 모이시아에서 근무하다가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 속주 총독에 파견됐는데, 175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알비누스는 동쪽에 있던 카파도키아 속주와 함께 동방 내 속주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까지 지지했으며, 일찍부터 다키아 북쪽에서 장군으로 두각을 나타내 황제에게 큰 신임을 받게 됐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필 편지들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젊은 알비누스가 가진 군사적 경험과 능력, 그 담대한 성격을 칭찬했다. 또 그는 알비누스를 176년 집정관에 직접 추천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뒤를 이은 콤모두스 시대에도 그는 승승장구했다. 콤모두스는 그를 다키아, 레누스 방어선 사령관에 연이어 임명했고, 페르티낙스 이후 비어 있던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와 갈리아 벨기카 일대의 군지휘권을 맡겼다. 하지만 콤모두스는 그에게 온전히 신임하지는 않았는지, 재차 집정관에 추천하거나 로마로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알비누스 역시 세베루스와 마찬가지로 본인 스스로 원로원 의원이자 총독, 장군 신분에서 본인의 일에 최선을 다하던 장군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2.2. 황제 추대와 세베루스와의 동맹
193년 콤모두스와 페르티낙스가 연이어 암살됐고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는 프라이토리아니 부하들과 함께 제위를 경매에 부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한다. 이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스스로 황제를 선언하자, 본인 역시 부하들의 추대 아래 황제를 자처했으며 세베루스처럼 로마로 진군했다.그런데 먼저 움직인 쪽은 세베루스였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수도를 장악하기보다는 루그두눔에 3년 가까이 머물기만 하면서 동맹을 맺었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이렇게 한 이유는 그가 멍청했기 때문이 아니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제안을 받을 때부터 공동으로 제위를 나누고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끈끈하게 한 가족이 되자고 한 약조를 100%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훗날 그가 패배하는 이유가 됐다. 왜냐하면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주고 파트너로 삼았음에도, 처음부터 약속을 던진 것은 지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베루스는 니게르를 제거하고 난 이후 그를 손보려고 마음을 먹었고, 관련 준비를 꼼꼼히 준비했다. 그렇지만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의 지적처럼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세베루스가 교양 넘치고 영리한 법률가로 의리가 있다고 생각해, 세베루스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그리고 이때 세베루스는 자신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근거지 판노니아 일대를 쉽게 차지할 수 있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속이면서, 알비누스 쪽 인사들을 포섭했다. 그와 동시에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의 지원 내지 중립을 바라면서 '카이사르(부황제)'라는 칭호를 주면서 타협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원로원 내 본인 지지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194년 봄, 세베루스는 동쪽으로 진격해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제거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장남 카라칼라와 함께 스스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안토니누스 가문에 스스로 양자로 입적하겠다고 선언한 다음, 카라칼라에게 '카이사르'를 주며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공동 황제이자 동맹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이어 그는 원로원과 각 군대에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달라"고 재차 요구하면서, 원로원의 지지를 받고 있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제거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2.3. 루그두눔의 전투와 몰락
세베루스 부자의 네르바-안토니누스 계보 참칭 선언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과 각 군대에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따라서 싸울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196년 브리타니아 속주에 주둔 중인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갔다.갈리아에 상륙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브리타니아 속주 내 병력을 수비대까지 거의 대부분 끌고 온 뒤[1], 전력으로 맞선 터라 세베루스를 지지한 비리우스 루푸스는 패배한다. 이렇게 루푸스를 격파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브리타니아 3개 군단을 주축으로 스페인에 주둔해 있던 제7군단 '게미나'의 지원도 받았다. 이후 그는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 기지를 두고 추가 병력을 모았으며, 중요한 요새와 주둔군을 중심으로 지금의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베루스 입장에선 다행하게도, 레누스 전선 내 군대는 클로디우스 측의 합류 요청을 따르지 않아 세베루스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세베루스는 새 법령들을 통과시키고 권력을 확고히 다지면서 그 해에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보냈지만, 원로원이 아닌 군을 이용해 알비누스를 ‘로마의 공적’으로 선포하는 새로운 방식의 권위 확보에 치중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197년 1월이 되어서야 옛 동지인 알비누스와 마지막 대전을 치르기 위해 길을 떠났다. 결정적인 전투는 197년 2월 19일 루그두눔(지금의 리옹) 외곽에서 많이 벌어졌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양군은 총 15만명이었다고 하며 오랫동안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투는 후반부가 될 수록 세베루스군이 우세해졌는데, 전투 도중 세베루스가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세베루스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행히 그는 재빨리 황제의 의복을 찢어서 정체를 숨겼고, 때맞춰 기병대가 도착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알비누스의 군대는 결국 패배하였고 알비누스는 루그두눔으로 달아났지만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베루스는 벌거벗겨진 알비누스의 시신을 땅에 내려놓고 그 위로 말을 달려 시체를 훼손했으며, 알비누스의 시신을 수습해 목을 자르고 머리를 로마로 보냈다. 이때 그는 원로원을 조롱하고, 협박하는 서한을 보내며 원로원 내 배신자들에게 명확히 경고했다.
이렇게 내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 제거 이후, 상당히 잔혹하고 무례한 행동을 벌여 큰 질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알비누스의 가족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용서해줬다가 마음을 바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일가를 모조리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의 아내, 아들들의 시신을 알비누스의 몸통과 함께 론 강에 던져버리게 했는데, 더 문제가 된 것은 루그두눔을 무참히 약탈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3. 사후 여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받았고, 세베루스와 대결을 벌이기 전부터 원로원 내 유력자들과 비밀리에 교류를 했던 터라 그 파장이 상당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와 그 가족을 죽인 직후, 루그두눔과 갈리아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정적 숙청에 들어갔다.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두 경쟁자 니게르와 알비누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의 지지자들이 원로원 안에서 자신과 세베루스 가문을 상대로 벌인 일이 상당히 위험하고 자칫 더 큰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알게 됐던 것이 컸다. 그래서 그는 이를 뿌리뽑기 위해 가혹한 보복 조치를 실시하였다.197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이 동료 의원을 직접 재판할 수 있는 특권을 박탈했다. 이어서 세베루스의 숙청 리스트에 오른 29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반역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했다’는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시켰다. 여기에는 페르티낙스의 장인으로 제위를 돈으로 살 뻔 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세베루스는 율리아누스와 본인이 연달아 호의를 베풀고 그 지위를 보장해줬음에도 두 황제에게 그 은혜를 역으로 갚은 술피키아누스를 용서하지 않았다[2]. 따라서 세베루스는 197년 정적들을 대거 숙청할 때, 술피키아누스도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지지자 중 한 명으로 기소해, 유죄판결을 내린 뒤 곧바로 처형했다[3].
이어서 그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사들을 새로운 의원들로 임명해 그 자리를 채웠다. 새로 편입된 의원들은 세베루스에게 호의적인 북아프리카 출신이거나 동방 속주 출신들이 많았다.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 중 상대적으로 우위를 가지고 있던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 기존 원로원파들은 소수파로 추락했다.[4]
물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그 지지자들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인사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전직집정관 출신의 옛 원로원 의원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5]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과거 그가 자신을 가리켜 "국법을 어겼다"며, 로마 진군 행위를 지지하지 않고 불법행동을 강하게 질타한 일을 이유로, 이미 은퇴해 조용히 시골에서 살고 있던 그를 콕 집은 다음 205년 사형을 언도하고 살해했다.[6][7].
4. 여담
- 즉위 전까지 문학가, 농업 전문 경영인으로도 명성이 유명했다. 그는 농업 경영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고 하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적은 밀레시안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모음집도 간행했다.
- 엄청난 부자였고, 전형적인 푸닉 출신 귀족으로, 예의가 바르기로 유명했고, 신의와 위엄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이런 점 때문에 동료 원로원 의원들을 지지자로 많이 거느렸다. 하지만 이런 점은 그가 경쟁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결정적으로 승리할 두 번의 기회를 놓친 원인이 됐다. 따라서 이런 장점은 내전이라는 난세 속에서 그가 끝내 찬탈자로 이름이 남게 된 이유가 됐다고 당대의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 등에게 회자됐다.
[1]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브리타니아 내 거의 대부분 병력을 움직인 행동은 내전 승리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이 일대에 관한 고민을 안겨주게 된다.[2] 세베루스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대항해 황제를 참칭하고 로마로 진군했지만, 의외로 율리아누스의 시신을 정중히 수습해 유가족들에게 전달하고 정식장례 절차를 거치도록 배려했다.[3] 술피키아누스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했던 알비누스파의 핵심 인사였기 때문에, 205년 자살을 강요당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처럼 세베루스가 어거지로 숙청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그래도 세베루스는 예전의 술라처럼 술피키아누스의 아들 티티아누스에게 연좌죄를 적용해 대를 끊거나, 술피키아누스의 아들과 그 가문의 앞길을 막진 않았다. 따라서 티티아누스는 카라칼라 시대동안 황제령 이집트 장관에 올랐다.[4]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그리스 애호가였기 때문에 그리스 출신을 원로원 의원으로 많이 채웠다. 즉 황제의 성향에 따라 변하는게 일반적인 원로원 의원들이었다.[5] 어머니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나 케이오니아 파비아인데, 이 여자가 누구냐하면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양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장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했던 네르바-안토니누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또 그의 아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파딜라였고, 철인황제 생전 마르쿠스 황제가 성품과 재능 등을 이유로 총애한 사위 중 한명이었다.[6] 어거지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한 탓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우스에게는 사형을 언도해 자결하는 방법으로 명예롭게 죽도록 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파딜라와 그녀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고 재산을 몰수하거나 연좌죄로 후손들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7] 플라우티우스도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지지자 제거 당시부터 이후 상황과 그 기미를 눈치채고 있어서, 세베루스가 자신만 죽이고 남은 가족들에게 보복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묵묵히 시골별장에서 사형선고서를 듣고 죽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세베루스가 보낸 이들이 자결을 명하자 “나는 세르비아누스께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위해 하셨던 일과 같은 기도를 한다네.”라고 유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