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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범근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2. 선수로서의 평가
2.1. 오해와 진실
차범근을 평가하기 앞서 인터넷에 떠도는 잘못된 정보 중 1980년대 분데스리가와 UEFA컵의 위상 및 포지션 관련 내용을 바로잡아 서술한다. 차범근의 선수 시절에 대한 정보는 선수 경력 참조.2.1.1. 1980년대 분데스리가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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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을 폄하하는 논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당시 차범근이 뛴 분데스리가는 최고의 리그가 아니었고 이탈리아 세리에 A가 최고였다는 것이다. 애초에 당시 4대 리그 중 한 곳에서 뛰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대단한 일이지만, 줄 세우며 평가 절하하는 이들의 주장에 반박하고자 정확한 정보를 말한다면 분데스리가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UEFA 리그 랭킹 1위의 리그였다. 대략 현재의 EPL과 비슷한 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세리에 A의 최전성기는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와 사키이즘의 시대부터이다. 차범근이 뛴 시기인 1979년부터 1989년까지의 분데스리가 UEFA 리그 랭킹은 1-1-1-1-1-1-3-2-3-3-2위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막강한 자본을 통해 세계의 뛰어난 선수들을 끌어모은 세리에 A가 UEFA 리그 랭킹 1위를 차지하나 그래도 유럽 리그 3위안에 드는 최상위 리그였다. 즉 차범근은 동양인의 유럽 출전이 극히 드문 1980년대에 유럽 최상위 리그 팀에 속한 두 팀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한 것이다.
2.1.2. 1980년대 UEFA컵의 위상
현재 인터넷 상에는 당시 UEFA컵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동시에 퍼졌다. 과대평가하는 세력은 UEFA컵에 더 많은 팀이 출전해 유러피언컵보다 더 쳐주는 대륙간 컵으로 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와 같은 별들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세력은 UEFA컵이 명목상 3티어 유럽 대항전이라는 점을 들어 1980년대 UEFA컵의 위상을 2000년대까지의 인터토토 컵이나 현재의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와 동일하게 본다. 이는 둘 다 틀린 말이다.우선 가장 큰 오류는 각 대륙컵 대회는 각각 그 의의를 가지기에 이런 비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현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은 각 유럽 리그 우승팀들 간의 경쟁 대회, 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인 UEFA컵은 각 유럽 리그 상위 구단의 경쟁 대회, UEFA 컵위너스컵은 FA컵을 운용하는 유럽 리그의 FA컵 우승 구단 간의 경쟁 대회이다.[1] 유럽의 각 리그를 대표하는 구단 간의 대회는 그 자체로 가치 있고 그 대회의 우승은 분명히 값진 것이다.
그래도 굳이 위상을 따진다면 현재나 과거나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이 제일이긴 하다. 다만 흥행성 면에서는 UEFA컵이 유러피언컵을 앞질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진출팀들이 유러피언컵 보다 더 많아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와 달리 유러피언컵은 각 리그의 1위만 진출했고 UEFA컵은 1위와 컵 대회 우승팀을 제외한 상위 4팀이 진출했다.[2] 간혹 1980년대의 UEFA컵을 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와 같다고 하는 의견이 이와 같은 사실에 기인한다. 현재의 UEFA 유로파 리그보다는 위상이나 진출 구단의 이름값이 분명히 높은 대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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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글에 따르면 선수가 3개의 UEFA 클럽 대항전 중 어느 대회도 참가하지 않았거나 소속팀이 그 대회에서 조기 탈락한 경우 X 표시하였고 당시 월드컵이나 유로 대회 같은 국가대항전이 있는 해에는 그 대회에 참가한 선수에 한해 * 표시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가대항전 성과에 비해 클럽 대항전 성과가 좋지 않은 경우에는 회색으로 처리했으며, 국가대항전에서 잘하고 UEFA 클럽 대항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린 선수는 원래 색대로 표시했다고 한다.
자료를 보면 UEFA컵이 유로피언컵과 현격한 위상의 차이가 있었음을 방증하는 동시에 1979년 발롱도르처럼 월드컵, 유로가 없는 시즌임에도 아예 3개의 유럽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들이 Top 5에 든 것을 보면 지금처럼 유럽 클럽 대항전 출전 및 성적이 발롱도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다소 애매하다는 걸 알 수 있다.[3] 즉,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모두 옳지 못하며 당대의 위상은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1.3. 포지션 논쟁
사실 차범근의 포지션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논쟁거리가 되지 못하나, 국가대표에서는 윙으로 뛰었다더라 클럽에서는 중앙 공격수였다더라 등 여러 난립하는 내용이 많아 이에 대해 한동안 혼란이 있었다.가장 논쟁인 것은 당시 클럽에서 차범근이 어느 포지션으로 뛰었는지인데 중앙 공격수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부터 윙 포워드라는 이야기 등 다양한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 축구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던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로 유럽 축구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 현재는 차범근의 포지션을 정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차범근에 관해 잘못된 과거 지식을 가지고 평가절하하거나 혹은 과대평가하며 논쟁이 계속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정확한 포지션을 고지하고 이에 관련해 몇 가지 정보를 추가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분데스리가에서 뛴 당시 차범근의 주된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 즉, 중앙 공격수가 맞다. 간혹 윙 포워드로 뛴 적도 있고 말년에 세 시즌은 미드필더로 뛰었으나 차범근이 가장 오랜 세월 뛴 포지션은 투톱의 중앙 공격수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중앙 공격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득점에만 전념하는 1970~80년대의 전통적인 공격수와는 달리 차범근은 좌, 우, 중앙 할 것 없이 상대 진영을 활보하는 선수였다. 체격과 속도, 오프 더 볼로 상대 진영을 돌파하여 헤집으며 공간을 만들었으며 특히 2선까지 내려와 공격의 활로를 만들고 볼을 운반하는 등 현재로 따지면 딥라잉 포워드 즉,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각종 경기 기록이나 유튜브 영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당시 차범근의 포지션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문의한 키커 온라인 편집장 알렉산더 바그너(Alexander Wagner)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장 마티아스 토마(Matthias Thoma)의 답변으로 갈음한다.
매우 빠르고 신사적이었던 선수의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도 윙어도 아니었습니다. 혼란스럽겠지만 사실입니다. (중략) 차범근은 전술적인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분데스리가에서 훌륭히 적응한 공격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중략) 당시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선수들의 등장을 지켜보았고 고전적인 센터 포워드보다 유연하고 기동성 있는 선수들에 열광했습니다. 차범근은 완벽하게 유연하지는 않았지만 전통을 무시하고 서포터 능력을 장착해 공격의 흐름을 통제했습니다. 당신에게 말해 주고 싶은 흥미로운 사실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활발히 경기장을 어지럽히며 골라인에 민첩하게 출몰하여 결정지었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놓인 승리를 놓치지 않고 결정하던 주인공의 모습은 꼭대기의 가장 위쪽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특별하게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중략) 3-5-2로 전술적 진보가 시작된 80년대 중반에 차붐 역시 진화했고 공격적으로 성숙했습니다. (중략) 이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차범근은 이전과 달리 주요 해결사는 아니었지만 센터 서클에서 젊은 선수들을 지휘하며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한 기간 중 가장 효율적으로 골을 넣었습니다. (이하 생략)
알렉산더 바그너 (키커 온라인 편집장), 차범근 관련 질문에 대한 답변 중 포지션 부분 발췌[4]
알렉산더 바그너 (키커 온라인 편집장), 차범근 관련 질문에 대한 답변 중 포지션 부분 발췌[4]
위대한 독수리 중 한 명[5]에 관해 말하게 되어 기쁩니다. 차붐은 내가 알기로 절대적으로 중앙 공격수가 맞습니다. 매우 빠르고 신체적으로 강력했던 레전드는 가운데와 측면을 가리지 않고 적을 파괴했으며 우리는 이 선수 한 명이 상대의 공간 전체를 어지럽히는 모습을 즐겼고 환호했습니다.
마티아스 토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장)
마티아스 토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장)
2010~20년대 시점에서 보면 "중앙 공격수가 3경기당 1골은 좀 적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1970~80년대 분데스리가는 경기당 평균 득점이 3.5골에 육박하는 매우 공격적인 축구가 펼쳐진 리그였음을 감안하면 차범근의 득점력에 의문 부호가 붙을 수도 있다.[6] 그러나 차범근은 페널티 박스 안에서 냅다 골만 때려박는 포지션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골을 몰아넣는 스타일의 선수가 아닐 뿐 득점력이 결여된 스트라이커라고는 절대 볼 수 없는 수준이다.
2.2. 축구인과 전문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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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bild지에서 선정한 19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11. 3톱에 같이 선정된 다른 두 명은 그 해 발롱도르 수상자 케빈 키건과 그 해 발롱도르 2위이자 이듬해 발롱도르 수상자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로 이 둘은 각각 2회의 발롱도르 수상자들이다.
1980년 12월 당시 UNICEF가 후원한 FC 바르셀로나 vs 세계 올스타 경기에서 세계 올스타팀에 선정되어 후반전에 교체 출전하였다. 베스트 11을 보면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올레흐 블로힌 등 화려한 선수진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의 레전드 가마모토 쿠니시게 또한 이 경기에 교체로 출전하였다. 경기 결과는 바르셀로나의 3:2 승리. 참고로 이 경기 이후 세계 올스타팀을 지휘한 당시 서독 국가대표팀 감독 유프 데어발은 '공격수 가운데 차범근이 가장 멋진 플레이를 보였다'며 '차범근이 서독 선수였다면 국가대표로 뽑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79-80 시즌부터 마지막 시즌인 1988-89 시즌까지 총 10시즌 동안의 각 시즌 별 Kicker 선정 공격수 부문 분데스리가 평점 순위는 다음과 같다.[7]
1979-80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980 발롱도르
2. 케빈 키건(2.42) 1979 발롱도르
3. 차범근(2.45)
4. 지그프리트 헬트(2.52)
5. 라이너 게예(2.67)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980 발롱도르
2. 케빈 키건(2.42) 1979 발롱도르
3. 차범근(2.45)
4. 지그프리트 헬트(2.52)
5. 라이너 게예(2.67)
1980-81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24) 1981 발롱도르
2. 프리드헬름 푼켈(2.74)
3. 만프레드 벅스뮬러(2.79)
4. 베른트 홀첸바인(2.81)
5. 게오르그 볼케르트(2.83)
6. 차범근(2.85)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24) 1981 발롱도르
2. 프리드헬름 푼켈(2.74)
3. 만프레드 벅스뮬러(2.79)
4. 베른트 홀첸바인(2.81)
5. 게오르그 볼케르트(2.83)
6. 차범근(2.85)
1981-82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4)
2. 뤼디거 벤첼(2.53)
3. 라스 바스트룹(2.59)
4. 로날드 보르허스(2.64)
5. 만프레드 벅스뮬러(2.82)
5. 우베 라인데르스(2.82)
7. 차범근(2.87)
19. 호르스트 흐루베슈(3.13) 리그 득점왕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4)
2. 뤼디거 벤첼(2.53)
3. 라스 바스트룹(2.59)
4. 로날드 보르허스(2.64)
5. 만프레드 벅스뮬러(2.82)
5. 우베 라인데르스(2.82)
7. 차범근(2.87)
19. 호르스트 흐루베슈(3.13) 리그 득점왕
1982-83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 루디 푈러(2.32) 리그 득점왕
3. 차범근(2.52)
4. 위르겐 밀렙스키(2.63)
5. 라이너 게예(2.84)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 루디 푈러(2.32) 리그 득점왕
3. 차범근(2.52)
4. 위르겐 밀렙스키(2.63)
5. 라이너 게예(2.84)
1983-84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1) 리그 득점왕
2. 루디 펠러(2.55)
3. 클라우스 알로프스(2.58)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2.79)
5. 프랑크 밀(2.84)
6. 차범근(2.91)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1) 리그 득점왕
2. 루디 펠러(2.55)
3. 클라우스 알로프스(2.58)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2.79)
5. 프랑크 밀(2.84)
6. 차범근(2.91)
1984-85 시즌
1. 클라우스 알로프스(2.81) 리그 득점왕
1. 프리드헬름 푼켈(2.81)
3. 클라우스 피셔(2.82)
4. 루드비히 쾨글(2.96)
5. 카를 알괴버(2.97)
15. 차범근(3.31)
1. 클라우스 알로프스(2.81) 리그 득점왕
1. 프리드헬름 푼켈(2.81)
3. 클라우스 피셔(2.82)
4. 루드비히 쾨글(2.96)
5. 카를 알괴버(2.97)
15. 차범근(3.31)
1985-86 시즌
1. 카를 알괴버(2.73)
2. 만프레드 벅스뮬러(2.85)
2. 허버트 바스(2.85)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토마스 알로프스(3.13)
6. 위르겐 베그만(3.15)
7. 차범근(3.18)
20. 스테판 쿤츠(3.39) 리그 득점왕
1. 카를 알괴버(2.73)
2. 만프레드 벅스뮬러(2.85)
2. 허버트 바스(2.85)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토마스 알로프스(3.13)
6. 위르겐 베그만(3.15)
7. 차범근(3.18)
20. 스테판 쿤츠(3.39) 리그 득점왕
1986-87 시즌
1. 우베 란(2.50) 리그 득점왕
2. 미로스와프 오콘스키(2.72)
3. 프랑크 밀(2.74)
4. 클라우스 알로프스(2.88)
5. 브워지미에시 스몰라레크(3.03)
18. 차범근(3.38)
1. 우베 란(2.50) 리그 득점왕
2. 미로스와프 오콘스키(2.72)
3. 프랑크 밀(2.74)
4. 클라우스 알로프스(2.88)
5. 브워지미에시 스몰라레크(3.03)
18. 차범근(3.38)
1987-88 시즌
1. 위르겐 클린스만(2.74) 리그 득점왕
2. 프랑크 밀(2.90)
3. 카를 알괴버(3.00)
3.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마크 휴즈(3.18)
6. 차범근(3.21)
1. 위르겐 클린스만(2.74) 리그 득점왕
2. 프랑크 밀(2.90)
3. 카를 알괴버(3.00)
3.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마크 휴즈(3.18)
6. 차범근(3.21)
1988-89 시즌
1. 카를 알괴버(2.66)
2. 루트비히 쾨글(2.93)
3. 헬무트 헤르만(3.04)
4. 차범근(3.11)
5. 위르겐 클린스만(3.12)
9. 토마스 알로프스(3.36) 리그 득점왕
1. 카를 알괴버(2.66)
2. 루트비히 쾨글(2.93)
3. 헬무트 헤르만(3.04)
4. 차범근(3.11)
5. 위르겐 클린스만(3.12)
9. 토마스 알로프스(3.36) 리그 득점왕
1980년대 상반기 1979-80 시즌부터 1983-84 시즌까지 5시즌간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8]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306
2. 차범근 2.72
3. 루디 푈러 2.727 - 3시즌 평균[9]
4. 라이너 게예 2.886
5. 클라우스 알로프스 2.966
6. 카를 알괴버 2.9925 - 4시즌 평균[10]
7. 만프레드 벅스뮐러 3.004
8. 프라이드헬름 푼켈 3.012
8. 위르겐 밀렙스키 3.012
10. 프랑크 밀 3.083 - 3시즌 평균[11]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306
2. 차범근 2.72
3. 루디 푈러 2.727 - 3시즌 평균[9]
4. 라이너 게예 2.886
5. 클라우스 알로프스 2.966
6. 카를 알괴버 2.9925 - 4시즌 평균[10]
7. 만프레드 벅스뮐러 3.004
8. 프라이드헬름 푼켈 3.012
8. 위르겐 밀렙스키 3.012
10. 프랑크 밀 3.083 - 3시즌 평균[11]
1980년대 하반기 1984-85 시즌부터 1988-89 시즌까지 5시즌간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
1. 카를 알괴버 2.90
2. 프랑크 밀 3.078
3. 클라우스 알로프스 3.133 - 3시즌 평균[12]
4. 프라이드헬름 푼켈 3.226
5. 위르겐 클린스만 3.21
6. 차범근 3.238
6. 루트비히 쾨글 3.238
8. 클라우스 피셔 3.335 - 4시즌 평균[13]
9. 허버트 바스 3.338
10. 우베 란 3.35
1. 카를 알괴버 2.90
2. 프랑크 밀 3.078
3. 클라우스 알로프스 3.133 - 3시즌 평균[12]
4. 프라이드헬름 푼켈 3.226
5. 위르겐 클린스만 3.21
6. 차범근 3.238
6. 루트비히 쾨글 3.238
8. 클라우스 피셔 3.335 - 4시즌 평균[13]
9. 허버트 바스 3.338
10. 우베 란 3.35
1980년대 1979-80 시즌부터 1988-89 시즌까지 10시즌간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14]
1. 카를 알괴버 2.946 - 9시즌 평균[15]
2. 차범근 2.979
3. 클라우스 알로프스 3.05 - 8시즌 평균[16]
4. 라이너 게예 3.066 - 7시즌 평균[17]
5. 프랑크 밀 3.08 - 8시즌 평균[18]
6. 프라이드헬름 푼켈 3.119
7. 만프레드 벅스뮐러 3.195 - 9시즌 평균[19]
8. 허버트 바스 3.22 - 7시즌 평균[20]
9. 에발트 리넨 3.266 - 8시즌 평균[21]
10. 토마스 알로프스 3.303 - 9시즌 평균[22]
1. 카를 알괴버 2.946 - 9시즌 평균[15]
2. 차범근 2.979
3. 클라우스 알로프스 3.05 - 8시즌 평균[16]
4. 라이너 게예 3.066 - 7시즌 평균[17]
5. 프랑크 밀 3.08 - 8시즌 평균[18]
6. 프라이드헬름 푼켈 3.119
7. 만프레드 벅스뮐러 3.195 - 9시즌 평균[19]
8. 허버트 바스 3.22 - 7시즌 평균[20]
9. 에발트 리넨 3.266 - 8시즌 평균[21]
10. 토마스 알로프스 3.303 - 9시즌 평균[22]
말 그대로 1980년대 분데스리가의 정상급 공격수로서 차범근의 위상과 현역 시절 독일 현지 전문가들에게 어느 정도로 평가받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포인트다.[23] 특히 리그 평점의 경우 명단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선수들도 포함되어 이 선수들을 제외해 포워드만 놓고 순위를 매긴다면 시즌 별 차범근의 순위는 더욱 올라간다. 위 표를 볼 때 참고할 사항은 독일에서의 축구 평점은 낮을 수록 좋다. 고등학교 내신 등급을 생각하면 쉬운데, 1점을 받으면 최상급 활약을 했다는 평가를 들은 것이고, 2점 또한 단순히 골만 넣는다고 받을 수 있는 점수가 아니다. 3점 역시 현재 무난한 경기력에 대한 평점으로 매겨지는 것과 달리 한 경기 기준 보통 good 정도로 받아 들여졌는데 멀티골을 기록하고도 3점을 받은 선수들이 있을 정도였다.[24]
현재는 경기 평점에 소수점을 추가해 평가하나 당시에는 소수점 점수도 없었을 뿐더러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라도 시즌 평점 3점대를 받을 정도로 점수가 매우 까다롭게 매겨진 시기였다.
그렇기에 시즌 평점을 상위 점수로 유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시즌 평점 1점대는 현재 레전드라 불리는 선수들조차 받기 어려운 점수대로 1980년대를 통틀어 단 두 명의 선수만 평점 1점대를 받았으며[25] 당시 점수가 유독 박한 공격수 중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26] 시즌 평점 2점대 역시 공격수가 받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점수였는데, 당시 득점왕을 차지하거나 상위 득점 순위를 차지한 선수 혹은 이름값 높은 선수들조차 전체 경력에서 1~3회 정도만 시즌 평점 2점대를 기록했으며, 2점대는커녕 3점대 초반만 받더라도 상위급 공격수로 통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런 박한 평가 속에서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다섯 시즌 연속 시즌 평점 2점대를 기록했는데, 이렇게 5연속 평점 2점대를 받은 공격수는 1980년대를 통틀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차범근 단 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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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0 전반기: WK-1(외국인)
1979-80 후반기: IK-5(외국인)
1980-81 전반기: K-4(외국인)
1980-81 후반기: K-7(외국인)
1981-82 전반기: K-7(외국인)
1981-82 후반기: K-6(외국인)
1982-83 전반기: IK-2(외국인)
1982-83 후반기: K-2(외국인)
1983-84 전반기: K-3(외국인)
1983-84 후반기: K-5(외국인)
1984-85 전반기: B(외국인)
1984-85 후반기: B(외국인)
1985-86 전반기: IK-2(외국인)
1985-86 후반기: IK-5(외국인)
1986-87 전반기: X
1986-87 후반기: B(외국인)
1987-88 전반기: B(외국인)
1987-88 후반기: K-12(외국인)
1988-89 전반기: X
1988-89 후반기: K-8(수비형 미드필더)
1979-80 후반기: IK-5(외국인)
1980-81 전반기: K-4(외국인)
1980-81 후반기: K-7(외국인)
1981-82 전반기: K-7(외국인)
1981-82 후반기: K-6(외국인)
1982-83 전반기: IK-2(외국인)
1982-83 후반기: K-2(외국인)
1983-84 전반기: K-3(외국인)
1983-84 후반기: K-5(외국인)
1984-85 전반기: B(외국인)
1984-85 후반기: B(외국인)
1985-86 전반기: IK-2(외국인)
1985-86 후반기: IK-5(외국인)
1986-87 전반기: X
1986-87 후반기: B(외국인)
1987-88 전반기: B(외국인)
1987-88 후반기: K-12(외국인)
1988-89 전반기: X
1988-89 후반기: K-8(수비형 미드필더)
다음은 차범근의 키커 랑리스테로, 평점과는 별개로 키커가 선정하는 포지션별 선수 랭킹이다. 여기서 차범근의 등급은 WK(월드 클래스) 1회, IK(인터내셔널 클래스) 4회, K(리그에서 경쟁력 있는 수준) 9회, B(주목할 만한 수준) 4회로 선정되었다.
키커 랑리스테는 평가 기준이 상당히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특히 가장 높은 등급인 WK(월드 클래스)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한 활약이나 실력을 보여준 선수에게 주는 등급으로 한 시즌에 한 명도 선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가장 평가 기준이 높은 등급이다. 차범근은 이 등급을 무려 데뷔 시즌에 받았는데, 심지어 리그와 국가대표 모두 활약해야지만 WK 등급 심사를 받을 조건이 된다는 기존 키커의 기조에 예외를 둘 정도였다. 당시 차범근은 국가대표 경기를 뛰지 않았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WK 등급을 준 것이다.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IK(인터내셔널 클래스) 역시 세계적 수준의 뛰어난 선수를 말하며 이 분류에만 들어가도 이미 리그의 톱클래스 선수라 할 수 있다. K는 독일 내(분데스리가+DFB 포칼)에서 두각을 나타내 국가대표로 거론될 만한 선수들이 해당하며, B는 기복이 있으나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평균 이상의 선수들이 받는다. 모든 등급은 활약이 동반되어야 받을 수 있는 등급이라 랑리스테 등급 자체를 못 받는 선수들도 허다하다. 물론 랑리스테가 선수들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라 할 수는 없으나 당대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28] 랑리스테 등급 옆에 붙은 숫자는 등급과 별개로 전체 선수들 중 그 선수의 활약 순위를 뜻하는데 (예를 들어 1980-81 전반기 K-4는 전반기에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의 활약을 했으며, 전체 외국인 선수 중 4위로 평가한다는 뜻) 이는 전 포지션을 통틀어 매긴 순위로[29], 공격수만 놓고 본다면 차범근은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기 전인 1985-86 시즌까지 외국인 공격수 중 1위 8회, 2위 1회, 3위 3회를 기록했다.
2010년 골닷컴 인터내셔널이 선정한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TOP 10' 3위에 선정되었다. 2위는 아트 사커의 일원이자 세계 최고의 윙백 중 한명이었던 비셴테 리사라수, 1위는 1977년 덴마크인으론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받은 작은 거인 알란 시몬센이다. 알란 시몬센의 경우 축구 선수들이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뽑는 라우드럽을 제치고 덴마크 최고의 선수로 뽑힌 선수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4위로 평가받았다.[30]
요약하자면 분데스리가에서 선수로 뛸 당시에는 가히 리그 최고 수준의 외국인 선수로 평가받았으며, 세월이 흘러 뛰어난 선수들이 늘어난 현재 시점에의 평가는 살짝 떨어졌을지언정 여전히 분데스리가 역사상 톱급 외국인 선수이자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분데스리가의 레전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2.3. 구단과 팬들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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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분데스리가 40주년을 맞이하여 키커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각 포지션별 역대 분데스리가 선수 랭킹을 투표하여 베스트 11을 선정했는데, 2003년 5월 26일 키커지에 수록된 중앙 공격수 포지션 순위에서 차범근은 9위에 올랐다. 당시 은퇴한지 14년이 흐른 시점에 독일 축구 팬들이 투표했음에도 동양인 선수가 분데스리가 역대 중앙 공격수 순위에 오른 것을 보면[32] 독일 현지 축구 팬들에게 차범근이란 이름이 얼마나 각인되었는지 알 수 있으며 차범근의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함께 순위에 든 선수들의 이름인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게르트 뮐러를 시작으로 우베 젤러, 클라우스 피셔, 울프 키르스텐, 스테판 샤퓌자, 지오반니 에우베르, 호르스트 흐루베슈, 클라우스 알로프스, 카를하인츠 리들레, 디터 뮐러 등 하나같이 분데스리가 및 독일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선수들이다.
참고로 중앙 공격수 목록에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나 루디 푈러, 위르겐 클린스만 등이 없는 이유는 각각 쓰리톱 중 좌우 공격수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고 루메니게의 경우 다음 호에 발표한 위 이미지에 물음표로 나온 왼쪽 공격수 1위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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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는 구단에서 발간한 Adlerträger에 실린[38] 프랑크푸르트 드림팀 27인의[39] 삽화에도 포함되었다. 이 드림팀은 팬 투표를 통해 역대 프랑크푸르트 선수 및 감독들로 풀 스쿼드를 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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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나 레버쿠젠과 달리 단 한 경기만 출전했을 뿐인데 구단의 시즌 출정식에 정식으로 초대할 뿐만 아니라 구단의 회장이 직접 만나러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굉장히 이례적이면서도 새삼 차범근의 대단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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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최근의 선수로 비유하자면 세비야의 레전드 프레데리크 카누테라는 반응이 많다. 카누테 또한 UEFA 유로파 리그를 두 차례 우승했고, 개인 수상으론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클럽 통산 559경기 215골의 준수한 득점력을 가진 만만치 않은 선수다.
2.4. 분데스리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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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19년 11인, 2021년 17인으로 2년 주기로 앰버서더 인원을 추가해 발표하는데, 차범근은 초창기 멤버로서 지속적으로 앰버서더에 포함되어 활동 중이다.
2.5. 기타 일화
독일에서의 현재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분데스리가 2008-09 시즌 바이어 레버쿠젠과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경기를 차범근이 독일로 가서 관람한 적이 있다. 차범근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부인과 같이 경기를 관람했기에 들어갈 때는 사람들이 못 알아봤으나 카메라로 촬영한 모습이 전광판에 나오자 관중이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고, 경기를 진행하던 레버쿠젠과 코트부스의 선수들은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다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파트리크 헬메스와 슈테판 키슬링, 카어슈텐 라멜로프 등의 선수는 직접 차범근을 찾아가 사인과 사진 찍기를 요청했을 정도다.또, 차범근이 수원 감독 자격으로 첼시 FC에 방문했을 당시, 레버쿠젠 출신 미하엘 발락[45]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얘기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한때 귀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는 소문까지 있었을 정도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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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8일 수원 삼성과 첼시 FC의 월드 시리즈 오브 풋볼 경기가 끝난 이후 차범근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주제 무리뉴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
분데스리가 11시즌과 A매치 135경기를 포함한 선수 생활 동안 퇴장 0회, 경고 1회를 기록한 페어 플레이어이기도 한데 현재보다 거친 파울이 잦은 1980년대의 과격한 축구에서 저러한 태도로 경기에 임했다는 것도 존경스러운 부분. 유일한 경고는 슈투트가르트 원정 경기 당시 독일 국가대표이자 당대의 명수비수 칼 하인츠 푀르스터를 상대로 기록한 것인데, 차범근의 술회로는 자신을 10번이나 거칠게 넘어뜨렸는데도 경고를 받지 않았는데, 푀르스터에게 태클을 하자마자 경고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전 독일 대표팀 감독 요아힘 뢰프는 선수 시절 차범근과 같이 선수 생활을 했는데, 주전에 밀려 항상 서브 멤버였다. 차범근이 2006년 독일 월드컵 독일 경기 중계를 하다 당시 수석코치[48] 요아힘 뢰프가 화면에 잡히자 "아, 저 코치가 예전에 저랑 팀 동료였는데...이름이..."라고 말해 옆에 있던 김성주가 "요아힘 뢰프 코치입니다."라고 하자 차범근은 "아, 맞습니다. 선수 시절 제 동료였었죠. 좋은 선수에서 이제는 좋은 지도자가 되었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성주가 "선수 시절 요아힘 뢰프는 어땠나요?"라고 묻자, 차범근은 "제 교체 선수였습니다."라고 발언했다.[49]
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 행사 당시, 차범근이 추첨자가 되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특히 독일에서는 "차붐이 죽은 게 아닌가?"라고 의심했을 정도.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다음 월드컵인 2006년 독일 월드컵 준비 위원회에서 각국을 상징하는 현수막을 거리에 설치했는데 한국을 소개하는 현수막에 차범근을 넣을 정도로 한국=차범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축구협회에 대한 비판 여론은 어마어마했다.[50] 더군다나 추첨자 중에는 축구와 관련 없는 여배우가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MBC 해설을 맡은 차범근은 독일 대 파라과이 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51] 당시 독일 감독 루디 푈러는 이 말을 듣자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을 너무 먹은 게 아니냐?'[52]며 농담을 섞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루디 푈러 또한 바이어 레버쿠젠 출신이라 진지하게 화를 낸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 시민들은 '어떻게 감히 차붐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고 오히려 자국 대표팀 감독 루디 푈러를 깠는데, 너 따위가 차범근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라는 뉘앙스라기보다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이라 농담이어도 정도껏 해야지라고 까인 측면이 크다. 거기에 더해, 독일 국민들도 차범근과 똑같이 독일의 경기력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디 푈러는 차범근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전했다고 하며 차범근도 훈련장으로 찾아가 화해했다고 한다. 당시 뉴스 영상 참고로 루디 푈러는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과 함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을 우승시킨 최고의 스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차두리에게는 푈러 아저씨라고 불린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아르센 벵거가 차범근에게 엄지를 지켜드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리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중계가 끝난 후 나오는 길에 또다시 아르센 벵거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아마 독일이 우승 차지하자 독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차범근에게 축하 인사를 한걸로 보인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는 독일 대 일본전을 VIP석에서 바로 옆에 앉아 경기를 관전했는데 차범근에게 웃으며 말을 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
요아힘 뢰프와 같이 따봉을 선보였다.
은퇴 직전 레버쿠젠 감독을 역임한 리누스 미헬스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리누스 미헬스는 네덜란드 토탈 풋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명장으로, 차두리에게는 리누스 할아버지로 불리었다고 한다.
2014년 1월 대한민국 대 미국의 친선경기 전 당시 미국 대표팀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은 SBS 해설위원으로 온 차범근을 알아보고 다가와 포옹과 환담을 나누는 장면이 찍혔다. #
현역으로 뛸 당시 독일의 시인 에크하르트 헨샤인트[53]가 차범근에게 헌정하는 시가 있을 정도니 그의 독일에서의 평가는 말하면 입이 아픈 수준이다.
헨샤인트의 차범근 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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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프랑크푸르트 동물원에는 차범근의 이름을 딴 호랑이가 있었다. '범근'이라는 이름의 새끼 수마트라호랑이로, 당시 서독 교민회장을 통해 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 호랑이라는 이야기를[54] 들은 프랑크푸르트 구단 측이 시에서 운영하는 프랑크푸르트 동물원과 협업을 맺고 진행한 이벤트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차붐' 혹은 '갈색 폭격기'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온 호랑이'란 별칭이 서독 언론 기사에 많이 애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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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메디신 볼 훈련은 총 3단계로 이뤄졌는데 1단계는 10kg 무게의 메디신 볼을[57] 양손에 하나씩 든 채 하프라인을 따라 왕복 3차례 뛰기, 2단계는 양손에 메디신 볼을 들고 한쪽 발로 메디신 볼을 드리블하며 출발하여 돌아올 때는 반대 발로 드리블하는 식으로 3차례 왕복, 3단계는 볼 없이 3차례 왕복 뛰기로 이뤄진 훈련이었다. 이 3단계를 1세트로 취급하여 10세트를 기본 사이클로 진행하였다고 한다.[58]
사진에 차범근 뒤로 주저앉은[59] 프랑크푸르트 선수들만 봐도 대충 느껴지지만 극악의 훈련 중 하나라 선수들 대부분이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며 훈련을 하거나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차범근은 항상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훈련을 마무리했을 뿐 아니라 정규 훈련이 끝나고도 메디신 볼 훈련을 포함한 추가로 개인 훈련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차범근에게 박힌 한국식 마인드 때문이기도 한데 당시 한국에서는 정규 훈련 외에 남아서 훈련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응당해야 할 덕목처럼 여겨진 시절이었고 차범근 역시 그런 시스템에서 수년을 생활하다 온 것이라 한국에서처럼 추가 훈련을 한 것일 뿐이었다. 이런 차범근의 성실함에 대해 독일에서도 칭찬을 했으나 대한민국보다 축구 수준이 높은 만큼 적절한 훈련량과 휴식 역시 중요하단 걸 고지시키며 계획된 수준 이상의 트레이닝은 자제시켰다.[60] 당시 프랑크푸르트 감독 부크만은 이런 차범근을 만류하기 위해 오버 트레이닝을 할 경우 1천 마르크(현재 기준 약 137만 원 상당)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할 정도였는데 당시 취재를 온 한국 특파원에게 "한국 사람은 모두 저렇게 다부지냐"며 물었다고 한다.
어느 축구팬이 레버쿠젠으로 가서 차범근을 아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을 받은 상대가 젊은 팬이라 잘 모른다는 대답을 하자, 그 옆에 앉은 나이 지긋한 샬케 04팬이 "어떻게 레버쿠젠 팬이라는 녀석이 차붐을 모를 수가 있느냐"고 말하며 젊은 레버쿠젠 팬에게 차붐에 대한 강의를 한 적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 아이러브싸커에 작성했다.
3. 감독으로서의 평가
차범근은 독일에서 은퇴한 후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고 코치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계에서 몹시 희귀한 경우였다. 물론 외국에도 얼렁뚱땅 자격증만 따서 감독하는 얼치기들은 얼마든지 있으나 핵심은 제도권 스쿨을 거쳤냐는 점이다. 차범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라이선스를 취득해 지도자가 되기 위한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주자, 차범근 이후 코칭 방법을 몰라 외국 감독이 하는 걸 어깨 너머로 배우고, 그저 허세 부리기만 하던 기존의 지도 관행은 개선되기 시작했다.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업적은 공과가 크게 갈린다. 가장 먼저 지적할 부분은 세계 축구의 유행과 발전상에 뒤처졌다는 점이다. 차범근의 축구 철학이 1970년대 분데스리가 스타일을 숭상하기에, 감독을 맡은 수원 삼성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재임 기간 동안 트로피는 따줬기에 간과하기 쉬우나, 사실 이 시기 수원은 내부적으로 곪아갔다.
차범근 해임 이후 K리그의 빅5 추세를 본다면 귀네슈-빙가다-최용수로 이어지는 무공해 서울, 김정남-김호곤으로 이어지는 철퇴 울산, 최강희가 구축한 닥공 전북, 파리아스-황선홍으로 이어지는 스틸타카 포항은 모두 고유한 팀 컬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원은 차범근 시절 무전술 뻥축구라는 조롱을 받았다. 과거 김호 시절의 수원이 발레리 니폼니시의 부천 SK와 더불어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를 운용하며 포백 시스템과 존 디펜스 도입 등 선진 축구로 팬들의 찬사를 받은 시절을 떠올린다면 명백한 퇴보다.
또한 당시 수원은 레알 수원으로 불릴 만큼 모기업의 막강한 재력으로 감독이 원하는 만큼 선수들을 영입해 줬기에 소위 선수빨, 돈빨이라는 소리도 들어야 했다. 이렇게 큰 돈을 써 가며 원하는 선수를 시즌마다 영입해 줬음에도 성적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 시즌이 많아 재임 기간 동안 이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ACL을 병행하는 시즌은 성적이 죽을 쒔다. 수원의 최초 두 자릿수 순위 기록도 차범근 때 나온 것이고 10위를 기록한 두 번의 시즌 모두 ACL을 병행한 시즌이다. ACL에서도 성적을 전혀 내지 못했다. 거기에 팀 성적이 죽을 쓰던 와중에 월드컵 해설한다며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 #
차범근 재임 시절 유스팀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이는 프로축구연맹의 지시 사항이기 때문이고 차범근이 퇴임하는 2010년에 첫 유스팀 배출 선수 민상기, 주재현이 입단했으나 이들의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프로팀, 대표팀 감독으로 상당히 앞서가는 면모를 보인 것도 있다.
- 첫째, 국가대표팀에서 처음으로 4백 수비를 시도했다. 1990년대 중반 K리그에서는 김호 감독과 조광래 코치[61]가 이끄는 수원 삼성과 발레리 니폼니시의 부천 유공 등이 4백을 시도했으나 당시 한국 축구계는 내려앉은 스위퍼가 자리 잡는 3백이 주류였다. 특히 대표팀에서 3백을 놓기 어려운 이유는 홍명보 때문이다. 홍명보는 3백에 최적화된 선수로, 4백 시스템의 센터백으론 대단히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때문에 히딩크도 부임 초기 4백을 실험하다 결국 3백으로 돌아갔고, 결국 한국 국가대표팀에 4백이 정착된 건 홍명보가 은퇴한 이후가 됐다.[62] 이는 단순히 수비수의 숫자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포메이션 전체의 압축 정도를 좌우한다.
- 둘째, 일찌감치 체력 집중 트레이닝을 강조했다.
- 셋째, 선·후배 관계는 중요하나 경기장에서는 형·선배 호칭을 빼라 했고, 기자회견 시간을 정해 언론의 무차별 인터뷰를 차단하는 등 여러모로 서구형에 가까운 팀 운영을 보였다.
- 넷째, 대표팀 감독으로 지원 파트를 중요시해 비디오 감독관[63]을 포함한 대규모 지원 스탭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잘 살펴보면 위의 4가지 모두 차범근 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감독들이 일찌감치 지적한 문제들이다. 그러나 한국 축구인들이 한국 실정을 모르는 외국인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K리그 대우의 비츠케이 베르탈란나 올림픽 대표팀의 비쇼베츠는 항상 체격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체력에서 기술과 정신력이 나온다고 이야기했다. 비디오 감독관을 포함한 대규모 지원 스탭도 모두 대한축구협회에서 예산 낭비라는 이유로 거부해버렸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가 대표팀 감독이 부임하며 위의 사항 등이 개선되었고 그것은 4강이라는 성적으로 증명되었다. 즉, 비디오 감독관, 체격 트레이닝, 평등한 선·후배 관계 등 히딩크의 성공 요인으로 꼽힌 요소 대부분은 차범근이 먼저 이야기한 것인데, 2002년 전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해, 2002년 이전까지 한국 축구계는 그만큼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이야기다.
이와는 별개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회 도중 경질은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가혹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네덜란드전 0:5 대패 하나로 축구협회와 언론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어 사람 하나를 중죄인 수준으로 둔갑시켜 차범근은 한동안 한국 축구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차범근과 분데스리가를 함께 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는 차범근의 경질 소식에 "축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차범근 같은 인물을 경질시킨 것은 한국 축구가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
3.1. 선수와의 불화 및 고압적인 부당 지시
감독 재임 당시 선수들과의 불화로 인한 분쟁이 굉장히 많다. 이는 감독으로서 선수 관리 능력과 선수단 장악력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현대 호랑이 감독으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을 당시 선수로 뛴 최강희와의 불화는 축구팬들에게 유명하고 이외에도 지도자 경력 내내 불화와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수원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에는 1998 프랑스 월드컵 감독 당시 대표팀으로 발탁한 고종수와의 불화로 고종수를 임의탈퇴시킨 뒤 트레이드 카드로 써먹는 짓을 저질렀는데 당시 고종수가 일본에서 제대로 뛰지 못해 실전 감각이 떨어진 상황에서 수원으로 복귀하긴 했으나 수원에서 고종수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거기에 고종수는 당시 한국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자 수원에서 코치로 인연을 쌓은 조광래가 자신이 지휘하는 안양 LG로 영입하려 협상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를 들은 수원과 차범근이 고종수는 수원 소속이라며 협상을 방해해 둘 사이 감정의 골이 굉장히 깊어졌다. 이에 선수 생명이 끝날 위기까지 가자 조광래가 협상을 철회해 고종수는 우여곡절 끝에 수원과 재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고종수와 차범근 사이의 불화가 지속되어 결국 고종수가 팀을 무단 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차범근과 수원측은 고종수를 임의탈퇴시키고 시즌 종료 후 전남의 김남일을 영입하기 위한 트레이드 카드로 조병국과 묶어 트레이드시켰다.
안정환도 차범근이 영입한 선수로 영입 초기에는 그동안 많이 뛰지 못해 실전 감각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으나 점점 살아나며 컵대회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내리 5경기를 출전 명단에서 제외시키자 안정환은 이적을 결심했다고 한다. 안정환은 이 내용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 영상으로 몇차례 언급하며 당시 차범근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표했다. 안정환은 당시 나이가 삼십줄이라 수원에서 은퇴할 생각으로 온 것인데 자신을 기용하지 않자 팀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1년만에 이적을 결정한 것이다. 안정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이관우도 2008년 후반기에 이유 모를 명단 제외로 이해가 안간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관우 또한 차범근이 영입한 선수다.
물론 선수 선발은 전적으로 감독의 권한이나 선수의 불만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것, 특히 고종수, 안정환, 이관우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과의 불화가 계속된 것은 그만큼 선수단 장악력이 떨어지고 이름값 높은 선수일수록 기싸움을 통해 강압적으로 제어하려다 실패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차범근은 무명 선수 출신도 아닌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선수 출신이라는 다른 감독들이 넘보지 못하는 위상을 가졌음에도 이같은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2008년에 임대로 영입한 이천수의 경우는 전적으로 이천수의 잘못이긴 하나 이를 무릅쓰고 데려온 것은 본인이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영입했다는 것인데 이천수 또한 제어하지 못하며 또다시 임의탈퇴라는 결정을 내렸다.
고종수와 조병국을 내주며 영입한 김남일은 안정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밝히기를 수원으로 와서 피로골절이 재발해 재활받다 철심을 뺐는데 병원에서 최소 일주일의 회복 기간이 필요하다는 진단에도 차범근이 이틀만 쉬라고 지시해 무리하게 경기에 출전했다 그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차범근과의 관계가 틀어졌는데 이후 탈장이 와서 2~3개월을 참다 차범근에게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얘기를 꺼냈으나 차범근은 수술을 받지 말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고통이 심해 더는 참기 힘들어 수술을 받았는데 그 뒤로 자기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쳐다도 안보고 명단에 제외시켜 경기도 못뛰게 하는 치졸한 처사에 이적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선수 장악 문제나 기싸움으로 선수 길들이기를 넘어 선수 보호 의무가 있는 감독이 해서는 안되는 인성이 결여됐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차범근 본인도 선수 시절 부상으로 고생한 이력이 있음에도 이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선수를 자신의 커리어를 위한 소모품으로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외 조재진, 조성환, 나드손 등도 차범근과의 불화로 수원을 떠난 선수들이고, 서정원에게 플레잉 코치를 시켜 서정원이 오스트리아로 이적해 현역 생활을 하게 만든 것 또한 차범근의 짓이다. 더군다나 차범근은 대표팀 감독 당시 벤피카 이적이 확정적인 서정원의 이적을 반대해 무산시킨 악연이 있다.
국가대표팀 감독을 할 당시에는 홍명보와도 불화가 있었는데 홍명보는 불화가 없는 감독이 없을 정도라 쌍방과실인 케이스나, 1998 프랑스 월드컵 중도 경질 당시 선수단과의 불화가 공공연하게 언급될 만큼 선수단 장악에 실패했다. # #
[1] 리그 우승팀이 컵 대회를 우승하여 컵위너스 컵에 진출 가능하더라도 선택권 없이 유러피언컵에 나가야 했으며, 컵 대회 우승팀이 UEFA컵에 진출 가능한 리그 순위를 기록했다면 선택권 없이 무조건 위너스컵에 나가야 했다. 만약 리그 우승팀이 FA컵까지 우승한 상황에는 FA컵 준우승팀이 위너스컵에 출전했다.[2] 이는 전년도 UEFA컵 우승팀을 제외한 리그 순위만의 진출 숫자로 UEFA 리그 랭킹 3위 리그가 4팀, 4~8위 리그는 3팀, 9~21위 리그는 2팀, 21위~30위 1팀이 출전했다.[3] 물론 1979년이 굉장히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4] 내용이 너무 길어 관련 답변 중 일부분만 발췌했다.[5] 독수리 군단(Die Adler)의 일원이라는 뜻.[6]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는 두 괴물이 비상식적인 골 경쟁을 해 사람들의 눈높이 또한 올라가버린 것도 큰 몫을 했다.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인 2020년대에도 3경기당 1골은 현재 최고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어지간한 중위권 팀에서 붙박이 주전 스트라이커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다. 세 경기당 한 골이면 한 시즌 동안 총 38라운드인 리그를 풀타임 출장한다고 가정했을 때 리그에서만 총 12~13골을 넣는 셈이며 팀당 34라운드를 치르는 분데스리가에서도 11골 가량의 기대 득점이 나오는 수치다.[7]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구분하는 키커 랑리스테와 달리 키커 리그 평점은 공격수 부문(Sturm)에 공격형 미드필더(OFFENSIVES MITTELFELD)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포함되었다. 키커는 평점 숫자가 낮을수록 점수가 높다.[8] 1984-85 시즌을 앞두고 키커지에서 1980년대 상반기를 정리하며 포지션별로 발표한 목록이다.[9] 1979-80 ~ 1981-82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0] 1979-80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1] 1979-80 ~ 1980-81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2] 1987-88 시즌 리그앙 이적[13] 1987-88 시즌을 끝으로 은퇴[14] 분데스리가 7시즌 이상, 한 시즌 50% 이상 경기를 뛴 선수 기준[15] 1979-80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6] 1987-88 시즌 리그앙 이적[17] 1985-86 시즌을 끝으로 은퇴[18] 1979-80 ~ 1980-81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9] 1984-85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20] 1981-82 시즌 데뷔, 2. 분데스리가 소속[21] 1987년~89년까지 코치 라이센스 취득 후 1989-90 시즌 선수 복귀[22] 1986-87 시즌 50% 미만 출전[23] 한 언론사의 평점이 절대적인 지표라고 할 순 없으나 독일에서 키커의 위상과 특수성을 고려하면 굉장히 유의미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분데스리가는 도이체 푸스발 리가(DFL)에서 뽑는 '올 시즌의 선수'가 2019년에 시작되었고, 프로 축구 선수 협회(VDV)에서 선정하는 '올 시즌의 선수'와 '올해의 팀' 역시 1997년부터 시작되었을 정도로 공식적인 수상이나 평점이 없던 리그다. 그런 분데스리가에서 공식적인 평점과 시상으로 취급한 것이 1920년에 창간한 키커의 평점과 랑리스테, 주간 베스트, 올해의 팀 등이었다. 특히 분데스리가 설립 이전부터 매겨진 랑리스테의 경우 독일 국가대표 선발에 활용할 목적으로 매겨지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유의미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독일 축구계에서 공식 시상 중 가장 유서 깊은 상으로 평가받는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역시 독일 기자 협회(VDS)의 투표를 취합하여 키커에서 수여하는 상일 정도로 독일 축구계에서 키커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1970~80년대 키커의 평점은 단순한 언론사의 평점이 아닌 유의미한 지표로써 활용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24] 1979-80 시즌을 일례로 들자면 호르스트 흐루베슈의 경우 팀이 승리한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고도 3점 혹은 4점을 받은 횟수가 6차례나 있고, UEFA컵 득점왕을 차지하며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UEFA컵 준우승을 이끈 하랄트 니켈(Harald Nickel)은 멀티골을 넣고도 3점을 받은 적이 두 차례나 있을 뿐 아니라 해트트릭을 기록하고도 2점을 받은 경우도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공격수에 대해 상당히 까다롭고 박한 평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키커 평점 1점과 2점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 활약을 보여야 했는지 알 수 있다.[25] 1979-80 시즌 파울 브라이트너 1.87점, 1981-82 시즌 베른트 프랑케(Bernd Franke) 1.94점[26] 범위를 1970년대까지 넓혀도 공격수 중 시즌 평점 1점대를 받은 공격수는 단 한 명뿐인데, 1978-79 시즌 1.94점을 받은 케빈 키건이다. 참고로 케빈 키건은 1978, 79년 2년 연속 발롱도르 수상자이다.[27] 1982-83 시즌 키커 평점에서 루메니게와 푈러에 이어 공격수 3위를 기록했는데, 평점으로 시즌 베스트 11을 선정하는 현재 방식이라면 1982-83 시즌도 평점이 낮은 밀렙스키를 제치고 시즌 베스트 11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28] 참고로 랑리스테 등급은 애초에 서독 시절 국가대표를 뽑는 기준점이 되라고 만든 등급으로 K 등급에서 말하는 국가대표에 거론될만한 선수란 건 독일 대표팀을 뜻하며, B 등급의 경우 랑리스테 초기만 해도 번뜩이는 활약을 한 유망주들이 많이 받은 등급이었다. 이런 옛 명칭과 기준을 개선하기 위해 키커는 2020-21 시즌 B 등급을 없애고, K 등급은 기존의 'IM WEITEREN KREIS'에서 내셔널 클래스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29] 1980년대 당시 독일인 외 모든 선수들은 포지션과 상관없이 외국인 부문으로 분류되어 순위가 매겨졌다. 1988-89 시즌부터 독일 선수들과 통합해 포지션 별로 평가했고 이에 따라 경력 막바지인 1988-89 시즌 미드필더로 뛴 차범근도 수비형 미드필더로 8위에 랭크되었다.[30] 이후 레반도프스키, 리베리, 로번 등 기록이나 활약면에서 차범근보다 뛰어난 외국인 선수들이 늘어났기에 현재는 이보다 평가가 떨어질 수 있다.[참고] 이 이미지는 현 독일 키커지 데이터 편집자(Datenredaktion) Christoph Huber로부터 받은 자료에서 센터 포워드 순위 부분만 편집하여 올린 것으로 위키에 사용하는 것을 승낙받았으나 저작권상 이외의 일체 어떤 용도로도 활용할 수 없음을 명시한다.[32] 차범근은 전 포지션을 통틀어 유일하게 순위에 오른 아시아 선수다.[33] 다만, 제일 처음 차범근을 소개할 때 나오는 프랑스 풋볼 선정 세계 4대 축구인, Kicker 선정 1980년대 최고의 선수는 출처가 없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다.[34] 어떤 경기에선 골을 넣었더니 상대방 수비수가 인종차별적 말과 함께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만 이건 독일에서의 일이 아닌 스코틀랜드 클럽 에버딘과의 UEFA컵(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 경기에서 일어난 일로, 독일은 인종차별이 비교적 적은 국가라 볼 수 있다. 프리미어 리그와 세리에 A는 인종차별 관련 기사가 자주 나오는 반면, 분데스리가는 그런 기사를 보기 힘들며, 차범근 또한 자신이 실력으로 보여주니 인종차별을 하는 독일 팬이 없었다고 증언했다.[35] 사실 서양 축구 선수 기준으로도 딱히 작은 키는 아니나, 독일에 왔을 당시 말랐던 탓에 키가 작은 걸로 느껴졌다. 차범근은 독일로 진출한 뒤 서양인들의 체격에 대항하기 위해 징그러울 정도로 육류를 먹으며 몸을 불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 음식을 먹고 경기를 하면 초중반에 벌써 허기져 힘이 떨어졌는데, 스테이크를 두 덩어리 먹고 뛰니 경기 내내 배가 든든해 효과를 봤다고 한다. 스테이크를 먹은건 맞으나 피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를 울면서 먹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36] 사실 이는 뒤의 영어를 전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지는데, 축구 선수가 대학교를 졸업한 사례는 당시나 현재 독일 모두 그리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을 비롯한 대다수 유럽 축구 선수들이 대학을 안 가는 이유는 진학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축구 환경이 개선된 현재의 한국도 비슷한 추세로 프로 레벨에서 바로 뛸 수 있는 선수들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프로로 뛰는 반면 당장 프로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들은 선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차선책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다. 차범근 본인이 우스갯소리로 언급한 내용이니만큼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고, 은골로 캉테가 무명 시절 축구 선수로의 성공을 확신 못해 회계 공부를 한 것이, 한국에는 '회계사 자격증을 딴 엄친아'로 알려진 것과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37] 전문가로 구성한 심사위원단이 뽑은 선수 45명과 감독 4명이 후보 대상으로 15,000명 이상의 프랑크푸르트 현지 팬들이 참여하였으며 영구적으로 존치한다고 한다. 이 선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문서의 레전드 목록 참조.[38]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연대기를 다룬 책으로 단행본으로 출판했다.[39] 선수 24인+감독(코치) 3인[40] 구자철의 말에 따르면 언론에 노출이 안될 뿐 분데스리가 및 독일 축구와 관련된 상당히 많은 행사와 인적 모임에 참석한다고 한다.[41] 총 4,000여 명 이상의 현지 팬들이 참여하였다. 차범근은 공격수 중 3위에 해당하는 득표를 받았으나 베스트 11에는 선정되지 못했는데, 레버쿠젠이 베스트 11의 포메이션을 4-4-2로 정해 서브로 밀려났기 때문이다.[42] 5년 뒤 열린 30주년 행사에도 초청받았으나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43] 레버쿠젠은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1979-80 시즌에 처음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44] 2주 동안 레버쿠젠 서포터즈 약 12,000명이 투표하여 선정하였다.[45]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레버쿠젠에서 뛰었다. 발락의 출생지는 구 동독의 괴를리츠라는 도시이나 발락이 태어날 당시는 서독과의 해빙기였기에 서독 스포츠 채널을 볼 수 있었다.[46] 엄밀히 말하면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코치로서 요청한 건 사실이나 선수로서 요청인지는 확인된 바 없다. # 이 이야기는 1980년 유니세프가 주관한 세계 올스타전에 당시 서독 대표팀 감독이자 세계 올스타팀 감독을 맡은 유프 데어발은 올스타전이 끝난 후 맹활약한 차범근을 극찬했는데 그 내용 중 "현재 서독 대표팀 왼쪽 윙 포워드가 부실하다. 차붐이 독일 선수였다면 당장 기용하고 싶다"는 발언이 와전된 것이다.[47] 물론 경기 자체가 첼시와 삼성전자의 5년 후원 계약 체결을 기념하는 경기인 만큼 무리뉴 역시 특유의 독설보다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수원을 만만치 않은 팀으로 평가하거나 한국 선수들을 첼시에 영입하고 싶다는 등 립서비스 발언을 많이 했다.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한 내용은 역시 삼성전자와 첼시의 협약에 관한 부분으로 자신의 첼시 계약과 삼성전자의 후원 계약 기간이 같다며 좋아하기도 했다.[48] 당시 감독은 위르겐 클린스만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2골을 기록했다. 본프레레호와의 친선전 패배 당시에도 독일 감독이었다. 당시 위르겐 클린스만은 전술을 요아힘 뢰프에게 다 일임했다고 한다.[49] 뢰프의 선수 경력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기 힘들다.[50] 대한축구협회와 차범근은 현재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다.[51]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52] 레버쿠젠의 모기업이 약제 아스피린의 제조사 바이엘이기 때문이다. 팀 엠블럼에도 사자 두 마리가 좌우에서 아스피린을 붙들고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53] 뛰어난 독일 문학가에게 수여하는 Italo-Svevo-Preis를 비롯해 독일의 문학상을 여럿 탄 풍자 작가이다. #[54] 차범근의 '범'자가 호랑이를 뜻한다고 얘기했는데, 사실 차범근의 범은 '법 범(範)'자를 쓰기에 잘못된 정보다. 호랑이를 뜻하는 한자는 '범'이 아니라 '호(虎)'로, '범'은 호랑이의 순우리말이다. 그래도 이런 동음이의어에 따른 의미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2013년에 토니 예보아와 함께 진행한 프랑크푸르트 팬미팅에서 차범근의 통역을 맡은 아내 오은미는 차범근의 이름의 뜻을 호랑이의(범) 뿌리(근) 차라고 설명했다.[55] 1979년부터 1982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과 함께 뛴 동료로 분데스리가에서만 345경기 46골을 기록했으며 포지션은 미드필더다. 프랑크푸르트 이후 FC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200경기 이상을 뛰며 분데스리가 4회 우승을 경험했고, 프랑스 리그에 진출하여 AS 칸에서 당시 떠오르는 천재로 서서히 이름을 알린 지네딘 지단과 호흡을 맞췄다.[56] 의료적인 효과를 비롯해 근력 훈련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만큼 현재 분데스리가에서도 계속 메디신 볼을 이용한 훈련을 하는데 1980년대와 달리 각 구단마다 훈련 방식이나 활용이 다양하다.[57] 메디신 볼은 5~7kg의 무게가 일반적이나 좀 더 크고 무거운 메디슨 볼을 훈련용으로 만들어 이용했다고 한다.[58] 차범근과 같은 시기에 분데스리가를 뛰었고 쾰른 체육 대학에서 지도자 교육을 함께 받은 펠릭스 마가트가 VfL 볼프스부르크 감독을 맡은 2011년에 이런 1980년대식 메디신 볼 훈련을 팀의 피트니스 프로그램에 넣어 진행하였다. 유로스포츠에서 이 훈련을 취재간 적이 있는데 기사에 따르면 언제까지 해야 하냐는 선수들의 질문에 마가트는 '토할 때까지 할 것이다'는 경악스러운 답변을 했다고 한다. #[59] 한 명은 바닥을 보고 주저 앉았고 한 명은 드러누웠는데 관중석에 앉은 사람 때문에 마치 다리를 감싸 쥐고 앉은 것처럼 보인다.[60] 차범근의 이런 마인드는 경기를 뛰는 자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차범근의 회고에 따르면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뒤 감독 및 코치진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90분 내내 온 사력을 다할 필요가 없다.", "페이스를 조절할 줄 알아야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레버쿠젠에서 뛸 시기에 이르러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사실 차범근은 경기에서 죽어라 뛰지 않으면 선배들에게 흔히 '빠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혼나는 한국식 스포츠 문화에 익숙해 '경기 내내 열심히 뛰어야지 저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차범근은 경기가 끝난 뒤 힘이 남아있음을 느끼면 스스로를 자책했다고 한다.[61] 수원 코치 시절에는 4-4-2 전도사로 불렸다.[62] 과거 독일도 마찬가지였는데, 마테우스라는 걸출한 수비수의 존재로 4백 전환이 굉장히 늦었다.[63] 훗날 압신 고트비가 이 보직으로 감독직까지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