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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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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오해와 진실
2.1. 1980년대 분데스리가의 위상2.2. 1980년대 UEFA컵의 위상2.3. 포지션 논쟁
3. 선수로서의 평가
3.1. 축구인과 전문가들의 평가3.2. 구단과 팬들의 평가3.3. 분데스리가의 평가3.4. 기타 일화
4. 감독으로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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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범근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오해와 진실

차범근을 평가하기 앞서 인터넷에 떠도는 잘못된 정보 중 1980년대 분데스리가와 UEFA컵의 위상 및 포지션 관련 내용을 바로잡아 서술한다. 차범근의 선수 시절에 대한 정보는 선수 경력 참조.

2.1. 1980년대 분데스리가의 위상

파일:70-80년대 UEFA 리그 랭킹.png
파일:70-80년대 UEFA 리그 랭킹2.png

차범근을 폄하하는 논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당시 차범근이 뛰던 분데스리가는 최고의 리그가 아니었고 이탈리아 세리에 A가 최고였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 당시 4대 리그 중 한 곳에서 뛰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대단한 일이지만[1], 줄 세우며 평가 절하하는 이들의 주장에 반박하고자 정확한 정보를 말한다면 분데스리가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UEFA 리그 랭킹 1위의 리그였다. 대략 현재의 EPL과 비슷한 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세리에A의 최전성기는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와 사키이즘의 시대부터이다. 차범근이 뛰던 시기인 1979년부터 1989년까지의 분데스리가 UEFA 리그 랭킹은 1-1-1-1-1-1-3-2-3-3-2위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막강한 자본을 통해 세계의 뛰어난 선수들을 끌어모으던 세리에 A가 UEFA 리그 랭킹 1위를 차지하지만 그래도 유럽 리그 3위안에 드는 최상위 리그였다. 즉 차범근은 동양인의 유럽 출전이 극히 드물던 1980년대에 유럽 최상위 리그 팀에 속해 있는 두 팀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한 것이다.

2.2. 1980년대 UEFA컵의 위상

현재 인터넷 상에는 당시 UEFA컵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동시에 퍼져 있다. 과대평가하는 세력은 UEFA컵에 더 많은 팀이 출전할 수 있었으므로 유러피언컵보다 더 쳐주는 대륙간 컵이었고 현재의 챔피언스 리그와 같은 별들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세력은 UEFA컵이 명목상 3티어 유럽 대항전이었다는 점을 들어 1980년대 UEFA컵의 위상을 2000년대까지의 인터토토 컵이나 현재의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와 동일하게 보기도 한다. 물론 둘 다 틀린 말이다.

우선 가장 큰 오류는 각 대륙컵 대회는 각각 그 의의를 가지기 때문에 이런 비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현재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은 각 유럽 리그 우승팀들 간의 경쟁 대회, 유로파 리그의 전신인 UEFA컵은 각 유럽 리그 상위 구단의 경쟁 대회, UEFA 컵위너스컵FA컵 대회를 운용하는 유럽 리그의 FA컵 우승 구단 간의 경쟁 대회이다.[2] 유럽의 각 리그를 대표하는 구단 간의 대회는 그 자체로 가치 있고 그 대회의 우승은 분명히 값진 것이다.

그래도 굳이 위상을 따진다면 현재나 과거나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이 제일이긴 했다. 다만 흥행성 면에서는 UEFA컵이 유러피언컵을 앞지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진출팀들이 유러피언컵 보다 더 많아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와 달리 유러피언컵은 각 리그의 1위만이 진출했고 UEFA컵은 1위와 컵 대회 우승 팀을 제외한 상위 4팀이 진출했다.[3] 간혹 1980년대의 UEFA컵을 현재의 챔피언스 리그와 같다고 하는 의견이 이와 같은 사실에 기인한다. 현재의 유로파 리그보다는 위상이나 진출 구단의 이름값이 분명히 높은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20/21 시즌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4대 리그 진출팀을 따진다면 다음과 같다.

첼시 FC, 토트넘 홋스퍼 FC, 아스날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세비야 FC, 레알 소시에다드
SSC 나폴리, 유벤투스 FC, SS 라치오, AS 로마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바이어 04 레버쿠젠, 1. FC 유니온 베를린
파일:72-99 발롱도르 TOP 5 분포도.png
간혹 UEFA컵이 발롱도르에 영향을 못 미친다며 평가 절하는 의견도 있는데 역시 잘못된 정보이다. 위 표는 1971/72 시즌부터 컵 위너스컵이 UEFA컵에 통합되기 전 마지막 대회인 1999년까지 발롱도르 5위에 들어간 선수들이 당시 뛰었던 대회를 표시한 것이다. 출처: ITALIA10

원 글에 따르면 선수가 3개의 UEFA 클럽 대항전 중 어느 대회도 참가하지 않았거나 소속팀이 그 대회에서 조기 탈락한 경우 X 표시하였고 당시 월드컵이나 유로 대회 같은 국가 대항전이 있던 해에는 그 대회에 참가한 선수에 한해 * 표시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가 대항전 성과에 비해 클럽 대항전 성과가 좋지 않았던 경우에는 회색으로 처리했고 국가대항전에서 잘했으나 UEFA 클럽대항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린 선수는 원래 색대로 표시했다고 한다.

자료를 보면 UEFA컵이 유로피언컵과 현격한 위상의 차이가 있었음을 방증하는 동시에 1979년 발롱도르처럼 월드컵, 유로가 없었던 시즌임에도 아예 3개의 유럽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들이 Top 5에 든 것을 보면 지금처럼 유럽 클럽 대항전 출전 및 성적이 발롱도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에도 다소 애매하다는 걸 알 수 있다.[4] 즉,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모두 옳지 못하며 당대의 위상은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3. 포지션 논쟁

사실 차범근의 포지션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논쟁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국가대표에서는 윙으로 뛰었다더라 클럽에서는 중앙 공격수였다더라 등 여러 난립하는 내용이 많아서 이에 대해 한동안 혼란이 있었다.

가장 논쟁인 것은 당시 클럽에서 차범근이 어느 포지션으로 뛰었는지인데 중앙 공격수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부터 중앙 공격수가 아닌 윙 포워드였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 축구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던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로 유럽 축구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 현재는 차범근의 포지션은 정립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차범근에 관해 잘못된 과거 지식을 가지고 평가 절하하거나 혹은 과대평가하며 논쟁이 계속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정확한 포지션을 고지하고 이에 관련해 몇 가지 정보를 추가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당시 차범근의 주된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 즉, 중앙 공격수가 맞다. 간혹 윙 포워드로 뛴 적도 있고 말년에 세 시즌은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차범근이 가장 오랜 세월 뛴 포지션은 투톱의 중앙 공격수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중앙 공격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득점에만 전념하는 1970~80년대의 전통적인 공격수와는 달리 차범근은 좌우 중앙 할 것 없이 상대 진영을 활보하는 선수였다. 체격과 속도, 오프 더 볼로 상대 진영을 돌파하여 헤집으며 공간을 만들었으며 특히 2선까지 내려와 공격의 활로를 만들고 볼을 운반하는 등 현재로 따지면 딥라잉 포워드 즉,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각종 경기 기록이나 유튜브의 영상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1980년대 당시 차범근의 포지션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문의한 키커 온라인 편집장 알렉산더 바그너(Alexander Wagner)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장 마티아스 토마(Matthias Thoma)의 답변으로 갈음한다.
매우 빠르고 신사적이었던 선수의 포지션은 센터포워드도 윙어도 아니었습니다. 혼란스럽겠지만 사실입니다. (중략) 차범근은 전술적인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분데스리가에서 훌륭히 적응한 공격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중략) 당시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선수들의 등장을 지켜보았고 고전적인 센터 포워드보다 유연하고 기동성 있는 선수들에 열광했습니다. 차범근은 완벽하게 유연하지는 않았지만 전통을 무시하고 서포터 능력을 장착해 공격의 흐름을 통제했습니다. 당신에게 말해 주고 싶은 흥미로운 사실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활발히 경기장을 어지럽히며 골라인에 민첩하게 출몰하여 결정지었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놓인 승리를 놓치지 않고 결정하던 주인공의 모습은 꼭대기의 가장 위쪽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특별하게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중략) 3-5-2로 전술적 진보가 시작된 80년대 중반에 차붐 역시 진화했고 공격적으로 성숙했습니다. (중략) 이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차범근은 이전과 달리 주요 해결사는 아니었지만 센터 서클에서 젊은 선수들을 지휘하며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한 기간 중 가장 효율적으로 골을 넣었습니다. (이하 생략)
알렉산더 바그너 키커 온라인 편집장, 차범근 관련 질문에 대한 답변 중 포지션 부분 발췌[5]
위대한 독수리 중 한 명[6]에 관해 말하게 되어 기쁩니다. 차붐은 내가 알기로 절대적으로 중앙 공격수가 맞습니다. 매우 빠르고 신체적으로 강력했던 레전드는 가운데와 측면을 가리지 않고 적을 파괴했으며 우리는 이 선수 한 명이 상대의 공간 전체를 어지럽히는 모습을 즐겼고 환호했습니다.
마티아스 토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장

2010~20년대 시점에서 보면 "중앙 공격수가 3경기당 1골은 좀 적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1970~80년대 분데스리가는 경기당 평균 득점이 3.5골에 육박하는 매우 공격적인 축구가 펼쳐지던 리그였음을 감안하면 차범근의 득점력에 의문 부호가 붙을 수도 있다.[7] 그러나 차범근은 패널티 박스 안에서 냅다 골만 때려박던 포지션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많은 골을 몰아넣는 스타일의 선수가 아닐 뿐 득점력이 결여된 스트라이커라고는 절대 볼 수 없는 수준이다.

3. 선수로서의 평가

3.1. 축구인과 전문가들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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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회자하기로는 로타어 마테우스를 포함한 독일인들이 차범근을 처음 봤을 때 크고 튼실한 다리 근육 덕에 허벅지밖에 안 보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차범근 자신도 전성기 시절 허벅지를 보면 감동을 받는다고 하니 체격은 자타공인으로 대단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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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메니게 차범근 평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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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bild지에서 선정한 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11. 3톱에 같이 선정된 다른 두명은 그 해의 발롱도르 수상자 케빈 키건과 그 해의 발롱도르 2위이자 그 이듬해 발롱도르 수상자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그리고 이 둘은 각각 2회의 발롱도르 수상자들이다.

1980년 12월 당시 UNICEF가 후원한 FC 바르셀로나 vs 세계 올스타 경기에서 세계 올스타팀에 선정되어 후반전 교체 출전하였다. 베스트 11을 보면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올레흐 블로힌 등 화려한 선수진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의 레전드 가마모토 쿠니시게 또한 이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였다. 경기 결과는 바르셀로나의 3:2 승리. 참고로 이 경기 이후 세계 올스타팀을 지휘한 당시 서독 국가대표팀 감독 유프 데어발은 '공격수 가운데 차범근이 가장 멋진 플레이를 보였다'며 '차범근이 서독 선수였다면 국가대표로 뽑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79/80 시즌부터 마지막 시즌인 1988/89 시즌까지 총 10시즌 동안의 각 시즌 별 Kicker 선정 공격수 부문 분데스리가 평점 순위는 다음과 같다.[8]
1979/80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980 발롱도르
2. 케빈 키건(2.42) 1979 발롱도르
3. 차범근(2.45)
4. 지그프리트 헬트(2.52)
5. 라이너 게예(2.67)
1980/81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24) 1981 발롱도르
2. 프리드헬름 푼켈(2.74)
3. 만프레드 벅스뮬러(2.79)
4. 베른트 홀첸바인(2.81)
5. 게오르그 볼케르트(2.83)
6. 차범근(2.85)
1981/82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4)
2. 뤼디거 벤첼(2.53)
3. 라스 바스트룹(2.59)
4. 로날드 보르허스(2.64)
5. 만프레드 벅스뮬러(2.82)
5. 우베 라인데르스(2.82)
7. 차범근(2.87)
19. 호르스트 흐루베슈(3.13) 리그 득점왕
1982/83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 루디 푈러(2.32) 리그 득점왕
3. 차범근(2.52)
4. 위르겐 밀렙스키(2.63)
5. 라이너 게예(2.84)
1983/84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1) 리그 득점왕
2. 루디 펠러(2.55)
3. 클라우스 알로프스(2.58)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2.79)
5. 프랑크 밀(2.84)
6. 차범근(2.91)
1984/85 시즌
1. 클라우스 알로프스(2.81) 리그 득점왕
1. 프리드헬름 푼켈(2.81)
3. 클라우스 피셔(2.82)
4. 루드비히 쾨글(2.96)
5. 카를 알괴버(2.97)
15. 차범근(3.31)
1985/86 시즌
1. 카를 알괴버(2.73)
2. 만프레드 벅스뮬러(2.85)
2. 허버트 바스(2.85)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토마스 알로프스(3.13)
6. 위르겐 베그만(3.15)
7. 차범근(3.18)
20. 스테판 쿤츠(3.39) 리그 득점왕
1986/87 시즌
1. 우베 란(2.50) 리그 득점왕
2. 미로스와프 오콘스키(2.72)
3. 프랑크 밀(2.74)
4. 클라우스 알로프스(2.88)
5. 브워지미에시 스몰라레크(3.03)
18. 차범근(3.38)
1987/88 시즌
1. 위르겐 클린스만(2.74) 리그 득점왕
2. 프랑크 밀(2.90)
3. 카를 알괴버(3.00)
3.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마크 휴즈(3.18)
6. 차범근(3.21)
1988/89 시즌
1. 카를 알괴버(2.66)
2. 루트비히 쾨글(2.93)
3. 헬무트 헤르만(3.04)
4. 차범근(3.11)
5. 위르겐 클린스만(3.12)
9. 토마스 알로프스(3.36) 리그 득점왕
1980년대 상반기 79/80 시즌부터 83/84 시즌까지 5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9]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306
2. 차범근 2.72
3. 루디 푈러 2.727 - 3시즌 평균[10]
4. 라이너 게예 2.886
5. 클라우스 알로프스 2.966
6. 카를 알괴버 2.9925 - 4시즌 평균[11]
7. 만프레드 벅스뮐러 3.004
8. 프라이드헬름 푼켈 3.012
8. 위르겐 밀렙스키 3.012
10. 프랑크 밀 3.083 - 3시즌 평균[12]
1980년대 하반기 84/85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5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
1. 카를 알괴버 2.90
2. 프랑크 밀 3.078
3. 클라우스 알로프스 3.133 - 3시즌 평균[13]
4. 프라이드헬름 푼켈 3.226
5. 위르겐 클린스만 3.21
6. 차범근 3.238
6. 루트비히 쾨글 3.238
8. 클라우스 피셔 3.335 - 4시즌 평균[14]
9. 허버트 바스 3.338
10. 우베 란 3.35
80년대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10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15]
1. 카를 알괴버 2.946 - 9시즌 평균[16]
2. 차범근 2.979
3. 클라우스 알로프스 3.05 - 8시즌 평균[17]
4. 라이너 게예 3.066 - 7시즌 평균[18]
5. 프랑크 밀 3.08 - 8시즌 평균[19]
6. 프라이드헬름 푼켈 3.119
7. 만프레드 벅스뮐러 3.195 - 9시즌 평균[20]
8. 허버트 바스 3.22 - 7시즌 평균[21]
9. 에발트 리넨 3.266 - 8시즌 평균[22]
10. 토마스 알로프스 3.303 - 9시즌 평균[23]
말 그대로 1980년대 분데스리가의 정상급 공격수로서 차범근의 위상과 현역 시절 독일 현지 전문가들에게 어느 정도로 평가받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포인트.[24] 특히 리그 평점의 경우 명단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던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선수들을 제외하고 포워드만 놓고 순위를 매긴다면 시즌 별 차범근의 순위는 더욱 올라간다. 위 표를 볼 때 참고할 사항은 독일에서의 축구 평점은 낮을 수록 좋다. 고등학교 내신 등급을 생각하면 쉬운데, 1점을 받으면 최상급 활약을 했다는 평가를 들은 것이고 2점 또한 단순히 골만 넣는다고 받을 수 있는 점수가 아니었다. 3점 역시 현재 무난한 경기력에 대한 평점으로 매겨지던 것과 달리 한 경기 기준 보통 good 정도로 받아 들여졌는데 멀티골을 기록하고도 3점을 받은 선수들이 있을 정도였다.[25]

현재는 경기 평점에 소수점이 추가되어 평가되지만 당시에는 소수점 점수도 없었을 뿐더러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라도 시즌 평점 3점대를 받을 정도로 점수가 매우 까다롭게 매겨지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즌 평점을 상위 점수로 유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시즌 평점 1점대는 현재 레전드라 불리는 선수들조차 받기 어려웠던 점수대로 1980년대를 통틀어 단 두 명의 선수만 평점 1점대를 받았으며[26] 당시 점수가 유독 박하던 공격수 중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27] 시즌 평점 2점대 역시 공격수가 받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점수였는데, 당시 득점 왕을 차지하거나 상위 득점 순위를 차지한 선수 혹은 이름값 높은 선수들조차 전체 경력에서 1~3회 정도만 시즌 평점 2점대를 기록했으며, 2점대는커녕 3점대 초반만 받더라도 상위급 공격수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런 박한 평가 속에서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다섯 시즌 연속 시즌 평점 2점대를 기록했으며 이렇게 5연속 평점 2점대를 받은 공격수는 1980년대를 통틀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차범근 단 둘뿐이다.
파일:79-80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png
파일:85-86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png
특히 키커가 선정한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에 무려 '36회'나 선정되었는데 이는 분데스리가에서 뛴 역대 아시아 선수 중 독보적인 1위 기록이다. 또한 과거 키커는 주간 베스트 11 횟수로 시즌 베스트 11를 선정했기 때문에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11에도 두 차례 선정되었다.[28] (1979/80, 1985/86)
79/80 전반기: WK-1(외국인)
79/80 후반기: IK-5(외국인)
80/81 전반기: K-4(외국인)
80/81 후반기: K-7(외국인)
81/82 전반기: K-7(외국인)
81/82 후반기: K-6(외국인)
82/83 전반기: IK-2(외국인)
82/83 후반기: K-2(외국인)
83/84 전반기: K-3(외국인)
83/84 후반기: K-5(외국인)
84/85 전반기: B(외국인)
84/85 후반기: B(외국인)
85/86 전반기: IK-2(외국인)
85/86 후반기: IK-5(외국인)
86/87 전반기: X
86/87 후반기: B(외국인)
87/88 전반기: B(외국인)
87/88 후반기: K-12(외국인)
88/89 전반기: X
88/89 후반기: K-8(수비형 미드필더)
다음은 차범근의 키커 랑리스테. 평점과는 별개로 키커가 선정하는 포지션별 선수 랭킹이다. 여기서 차범근의 등급은 WK(월드 클래스) 1회, IK(인터내셔널 클래스) 4회, K(리그에서 경쟁력 있는 수준) 9회, B(주목할 만한 수준) 4회로 선정되었다.

키커 랑리스테는 평가 기준이 상당히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평가를 받는 것 자체도 어렵다. 특히 가장 높은 등급인 WK(월드 클래스)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한 활약이나 실력을 보여준 선수에게 주는 등급으로 한 시즌에 한 명도 선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가장 평가 기준이 높은 등급이다. 차범근은 이 등급을 데뷔 시즌에 바로 받았는데, 심지어 리그와 국가대표 모두에서 활약해야지만 WK 등급 심사를 받을 조건이 된다는 기존의 키커의 기조에 예외를 둘 정도였다. 당시 차범근은 국가대표 경기를 뛰지 않았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WK 등급을 준것이다.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IK(인터내셔널 클래스) 역시 세계적 수준의 뛰어난 선수를 말하며 이 분류에만 들어가도 이미 리그의 톱클래스 선수라 할 수 있다. K는 독일 내(분데스리가+DFB포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국가 대표로 거론될 만한 선수들에 해당하며, B는 기복이 있지만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평균 이상의 선수들이 받는다. 모든 등급이 활약이 동반되어야 받을 수 있는 등급으로, 앞서 말했듯 랑리스테 등급 자체를 못 받는 선수들도 허다하다. 물론 랑리스테가 선수들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대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29]
랑리스테 등급 옆에 붙은 숫자는 등급과 별개로 전체 선수들 중 그 선수의 활약 순위를 뜻하는데 (예를 들어 80/81 전반기 K-4는 전반기에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의 활약을 했으며, 전체 외국인 선수 중 4위로 평가한다는 뜻) 이는 전 포지션을 통틀어 매긴 순위이고[30], 공격수만 놓고 본다면 차범근은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기 전인 1985/86 시즌까지 외국인 공격수 중 1위 8회, 2위 1회, 3위 3회를 기록했다.

2010년 골닷컴 인터내셔널이 선정한 '분데스리가 용병 TOP10'에서 3위에 선정되었다. 2위는 아트사커의 일원이자 세계 최고의 윙백 중 한명이었던 비셴테 리사라수, 1위는 1977년 덴마크인으론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받은 작은 거인 알란 시몬센. 알란 시몬센의 경우 축구 선수들이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뽑는 라우드럽을 제치고 덴마크 최고의 선수로 뽑힌 선수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인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4위로 평가 받았다.[31]

요약하자면 분데스리가에서 선수로 활동할 당시에는 가히 리그 최고 수준의 용병으로 평가받았고 세월이 흐르고 뛰어난 용병이 늘어난 현재 시점에의 평가는 살짝 떨어졌을지언정 여전히 분데스리가 역사의 톱급 용병이자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분데스리가의 레전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3.2. 구단과 팬들의 평가

파일:2003 분데스리가 40주년 키커 구독자 역대 센터포워드 투표.png
[참고] 2003년 분데스리가 40주년을 맞이하여 키커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각 포지션별 역대 분데스리가 선수 랭킹을 투표하여 베스트 11을 선정했는데, 2003년 5월 26일 키커지에 수록된 중앙 공격수 포지션 순위에서 차범근이 9위에 올랐다. 차범근이 은퇴한지 14년이 흐른 시점이었고 독일 축구 팬들이 투표했음에도 동양인 선수가 분데스리가 역대 중앙 공격수 순위에 오른 것을 보면[33] 독일 현지 축구 팬들에게 차범근이란 이름이 얼마나 각인되었는지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론 차범근의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함께 순위에 든 선수들의 이름인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게르트 뮐러를 시작으로 우베 젤러, 클라우스 피셔, 울프 키르스텐, 스테판 샤퓌자, 지오반니 에우베르, 호르스트 흐루베슈. 클라우스 알로프스, 카를하인츠 리들레, 디터 뮐러 등 하나같이 분데스리가 및 독일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선수들이다.

참고로 중앙 공격수 목록에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루디 푈러, 위르겐 클린스만 등이 없는 이유는 각각 쓰리톱 중 좌우 공격수 목록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고 루메니게의 경우 다음 호에 발표된 위 이미지에 물음표로 나와 있는 왼쪽 공격수 위치에 1위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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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역사를 통틀어 봐도 흔치 않은 대우를 받기도 했는데 바로 '한글 전광판'이다. 차범근이 맹활약하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는 홈구장 발트슈타디온에 한글이 표기되는 새로운 전광판을 설치했고 이로 인해 홈경기에서 스타팅 멤버를 소개하거나 차범근이 골을 넣을 때마다 전광판에 차범근의 이름이 한글로 명시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로마자로 'BUM KUN CHA' 혹은 'CHA BUM'이라 먼저 뜬 뒤 한글로 '차범근'이라는 글자가 등장했으며 구단 선수들 중 유일하게 차범근에게만 적용되었다. 단순 1회 성 이벤트가 아닌 차범근이 구단을 떠날 때까지 유지되었는데 단 한 선수만을 위해 그 선수의 이름을 그 선수의 언어로 띄워주는 일은 분데스리가뿐 아니라 세계 축구 리그에서도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선수 시절 차범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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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현지에서의 차범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SBS에서 기획한 차범근 다큐멘터리. 국내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에 독일에 진출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34]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낸 성적인 만큼 정말 대단한 것.[35] 국내에선 '갈색폭격기', 독일에선 '차붐'이라 불리며 유명세를 탔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이 조그만[36] 동양인 축구 선수에게 세 번이나 놀랐는데, 하나는 축구를 너무 잘해서, 또 하나는 Korea University 출신이라서[37] 마지막으로 대학교 출신인데 영어를 전혀 못해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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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5 프랑크푸르트 드림팀 27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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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지하철 '빌리-브란트-플라츠'역에 '프랑크푸르트의 기둥'(Säulen der Eintracht)이라고 불리는 12개의 기둥이 존재하는데, 각 기둥에는 2013년에 선정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역대 베스트 11을 지칭하는 '아인트라흐트 레겐덴 11'(Eintracht Legenden 11)과 감독의 사진이 새겨져 있다.[38] 차범근 역시 이 레전드 11에 선정되었기 때문에 역사 기둥에 차범근의 현역 시절 사진이 새겨져 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홈구장인 도이체 방크 파르크에도 차범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구장의 지하 주차장에는 구단 역대 베스트 11이 벽화로 그려져 있으며 79/80 시즌 UEFA컵 우승 멤버, 80/81 시즌 DFB-포칼 우승 멤버의 벽화가 새겨져있다.

2015년에는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하는 Adlerträger에 실린[39] 프랑크푸르트 드림팀 27인의[40] 삽화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 드림팀은 팬 투표를 통해 역대 프랑크푸르트 선수 및 감독들로 풀 스쿼드를 구성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차범근이 선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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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국제 브랜드 홍보대사 6인에 위촉되었다.(Eintracht unveil six international brand ambassadors) 이외에도 프랑크푸르트 구단 관련 각종 행사에 초청되는 등 현재까지도 여전히 레전드 대우를 받는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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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어 04 레버쿠젠 역시 차범근을 레전드로 대우한다. 2004년 레버쿠젠 구단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팬 투표를 통해 선정한 레버쿠젠 세기의 팀(Bayer 04-Elf des Jahrhunderts) 18인에 선정되었으며[42] 애초에 차범근이 들어 올린 UEFA컵 자체가 레버쿠젠 구단 자체적으로 각별한 트로피로 여겨지기 때문에 2013년 UEFA컵 우승 25주년 기념 행사에 우승 멤버로서 초청을 하기도 했다.[43] 2019년에는 분데스리가 승격 40주년을 기념하여[44] 40인의 구단 역대 올스타를 뽑았는데[45] 그중 한 명이 차범근으로, 40주년 기념 책자에는 차범근의 영입을 '최고의 영입 중 하나'라고 표현하며 레버쿠젠 홈 경기장 바이아레나 기둥에 당당히 벽화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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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바이어 04 레버쿠젠 모두 은퇴한지 30년이 넘은 차범근의 생일을 공식 SNS를 통해 축하해 주는 등 아직까지 각 구단의 레전드로 예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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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문제로 단 한 경기만을 뛰고 계약을 해지해야 했던 SV 다름슈타트 98에서조차 차범근을 기억하고 예우한다. 2017년 7월 21일 2017/18 시즌을 앞둔 다름슈타트의 출정식에 초대되었는데 출정식이 끝난 후 다름슈타트 회장 뤼디거 프리취는 차범근과의 만남에서 "전설과 마주하게 돼 큰 영광이다. 차붐이 다름슈타트에서 뛴 사실을 구단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곳의 팬들에게 무수한 사인 요청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1978년 다름슈타트 소속으로 치른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첫 경기인 보훔전을 직접 관람한 팬들도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나 레버쿠젠과 달리 단 한 경기만 출전했을 뿐인데 구단의 시즌 출정식에 정식으로 초대할 뿐만 아니라 구단의 회장이 직접 만나러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굉장히 이례적이면서도 새삼 차범근의 대단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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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81시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던 시절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상대팀의 겔스도프에게 등 뒤에서 고의성이 짙은 육탄 공격을 받아 척추에 금이 가는 심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이때,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난리가 나서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에게 살해 위협 소동까지 벌였다. 프랑크푸르트팀은 겔스도프를 고소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차범근의 동의를 구했으나 차범근은 고소를 취하하고 그를 용서했다고 한다. 차범근이 고소를 취하한 소식이 신문에 나자, 시민들이 감동을 받아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마구 면회 신청이 오고, 병실에 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그런데 기존에 선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부상으로 진단 받았으나 차범근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며 한 달만에 경기장에 복귀했다. 그리고 레버쿠젠으로 이적했을 때 겔스도프와 재회하는데, 그 이후 겔스도프는 타 팀 선수의 거친 수비로부터 차범근을 지켜주게 된다. 이후 겔스도프와는 절친한 사이로 지내는 모양이다. 이 사건 이후 분데스리가는 엄격하게 파울을 제재하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사건은 거친 파울 이후 살해 협박을 받은 선수들을 주제로 한 독일 다큐멘터리에서도 소개되었다.

대한민국의 축덕들 사이에서는 최근의 선수로 비유하자면 세비야의 레전드 프레데리크 카누테라는 반응이 많다. 카누테 또한 유로파 리그를 두 차례 우승했고, 개인 수상으론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클럽 통산 559경기 215골의 준수한 득점력을 가진 만만치 않은 선수다.

3.3. 분데스리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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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분데스리가에서 공식 선정한 분데스리가 레전드 네트워크 앰버서더 9인에 위촉되었다. 이에 따라 분데스리가 레전드 투어의 일환으로 '분데스리가 레전드 투어 in 코리아'가 2017년 11월 2일부터 4일까지 진행되었으며 분데스리가 우승 트로피인 마이스터샬레가 아시아 최초로 공개되기도 하였다.

이후 2019년 11인, 2021년 17인으로 2년 주기로 앰버서더 인원이 추가되어 발표되고 있는데, 차범근은 초창기 멤버로서 지속적으로 앰버서더에 포함되어 활동 중이다.

3.4. 기타 일화

독일에서의 현재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분데스리가 2008-09 시즌 바이어 레버쿠젠과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경기를 차범근이 독일에 가서 관람한 적이 있었다. 차범근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부인과 같이 경기를 관람했기에 들어갈 때는 사람들이 못 알아봤으나 전광판의 카메라가 딱 비추자 관중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쳤고, 경기를 진행하던 레버쿠젠과 코트부스의 선수들도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다가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파트리크 헬메스와 슈테판 키슬링, 카어슈텐 라멜로프 같은 선수는 직접 차범근에게 찾아가서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 찍기를 요청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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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차범근이 첼시 FC에 수원 감독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레버쿠젠 출신인 미하엘 발락[46]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얘기한 것도 유명한 얘기. 한때 귀화 요청도 있었는데 거절했다는 소문까지 있었을 정도.[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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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9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첼시 FC의 친선전을 앞두고 기자 회견에서 주제 무리뉴는 세계적인 명장의 위치에 오른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나는 옆에 있는 차범근 감독처럼 훌륭한 선수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대신 지도자가 되려는 열정이 컸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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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8일 수원 삼성첼시 FC의 월드시리즈 오브풋볼 경기가 끝난 이후 차범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주제 무리뉴 당시 첼시 감독.# 어 그래 무리뉴 왔구나

분데스리가 11시즌과 A매치 135경기를 포함한 선수 생활 동안 퇴장 0회, 경고 1회를 기록한 페어 플레이어기도 했는데 현재보다 거친 파울이 잦았던 1980년대의 과격한 축구에서 저러한 태도로 경기에 임했다는 것도 존경스러운 부분. 유일한 경고는 슈투트가르트 원정 경기때 독일 국대이자 당대의 명수비수 칼 하인츠 푀르스터를 상대로 기록한 것인데, 차범근의 술회로는 자신을 10번이나 거칠게 넘어뜨렸는데도 경고를 받지 않고 되려 푀르스터에게 태클을 하자마자 역으로 경고를 받았다고 회상한다.

독일 대표팀 감독 요아힘 뢰프는 선수 시절 차범근과 같이 선수 생활을 했는데, 주전에서 밀려 항상 서브 멤버였다. 차범근이 2006년 독일 월드컵 독일 경기 중계 당시, 당시 수석코치[50] 요아힘 뢰프가 카메라 화면에 잡혔다. 그러자 차범근이, "아, 저 코치가 예전에 저랑 팀 동료였는데...이름이..." 그러자 옆에 있던 김성주가 "요아힘 뢰프 코치입니다."라고 하자 차범근이 "아, 맞습니다. 선수 시절 제 동료였었죠. 좋은 선수에서 이제는 좋은 지도자가 되었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캐스터가 다시 묻는다. "선수 시절 요아힘 뢰프는 어땠나요?"라고 묻자, 차범근은 시크하게 "제 교체 선수였습니다."라고 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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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 행사 당시, 차범근이 추첨자가 되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특히 독일에서는 "차붐이 죽은 게 아닌가?"라고 의심했을 정도.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다음 월드컵인 2006년 독일 월드컵 준비 위원회에서 각국을 상징하는 현수막을 거리에 설치했는데 한국을 소개하는 현수막에 차범근을 넣어 놨을 정도로 한국=차범근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이 정도였으니 축구협회에 대한 국내 비판 여론은 어마어마했다.[52] 더군다나 차범근 대신 뽑힌 추첨자가 축구와 관련 없는 여배우였으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해설을 하던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 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53] 당시, 독일 감독 루디 푈러가 이 말을 듣고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을 너무 먹은 게 아니냐?'[54]며 농담을 섞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루디 푈러 본인도 또한 바이어 레버쿠젠 출신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화를 낸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 시민들은 '어떻게 감히 차붐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고 오히려 자국 대표팀 감독인 루디 푈러를 깠는데, 너 따위가 차범근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라는 뉘앙스라기보다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했기 때문에 농담이어도 정도껏 해야지라고 까인 측면이 크다. 거기에 더해, 독일 국민들도 차범근과 똑같이 독일의 예선전 경기력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루디 푈러는 차범근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전했다고 하며 차범근도 훈련장에 찾아가 화해했다고 한다. 당시 뉴스 소개 영상. 참고로 루디 푈러는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과 함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을 우승시킨 최고의 스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차두리에게는 푈러 아저씨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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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아르센 벵거가 차범근에게 엄지를 지켜드는 장면이 찍히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중계가 끝난 후 나오는 길에 또다시 아르센 벵거가 축하 인사(?)를 했다고 한다. 아마 독일이 우승 차지하자 독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차범근에게 축하 인사를 한 듯싶다. 2022년도에도 독일 vs. 일본전에서 VIP석에 바로 옆에 앉아서 경기를 관전했는데 차범근에게 웃으면서 말을 거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

요아힘 뢰프와 같이 따봉을 선보였다.

은퇴 직전 레버쿠젠 감독을 한 리누스 미헬스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리누스 미헬스는 바로 네덜란드 토탈 풋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명장이다. 차두리에게는 리누스 할아버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2014년 1월 대한민국미국과의 친선 경기 전 당시 미국 대표팀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이 SBS 해설 위원으로 온 차범근을 알아보고 다가와 포옹과 환담을 나누는 장면이 찍히기도 하였다.#

현역으로 뛸 당시 독일의 시인인 에크하르트 헨샤인트[55]가 차범근에게 헌정하는 시가 있을 정도니 그의 독일에서의 평가는 말하면 입이 아픈 수준이다.
헨샤인트의 차범근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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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mne auf Bum Kun Cha”

Schön ist, Mutter Natur, deiner Erfindung Pracht,
Die den großen Gedanken vermochte, den
Knaben zu träumen, zu denken - und dann auch zu
Bilden mit den schnellen, beseelten, jauchzenden
Füßen des Jünglings: Flink, flitzend,
Flirrend und flackernd - nicht lange fackelnd,
Doch feuernd und feiernd; den fühlenden Herzen
Frankfurts zur Freude.
Bum Kun Cha! Freund aus dem Osten! Fremdling bist
Du nicht länger - nicht bitt'res Los ist Exil
Dir! Heimat, die zweite, du fandst sie.

Wunderbar ist die Gunst denn des Gottes des
Fußballs. Zwar niemand weiß, wann und von wannen
Er schenket nach Puskas und Pele und Kempes den
Neuen Erwählten - nie doch und nimmer vergißt
Er sein hoffendes Volk. Über Indien hinaus
Und den Ganges spähet sein
forschender Blick, ins ferneste Land, da
Seit Alters Männermut blühet und hoher Sinn.
Tapf'res Korea! Du schenktest uns Cha!

Festlicher klinge mein Saitenspiel! Denn lang
Lieb ich dich, Cha, schon, drei Monde -
Drei Monde schon fällt dein verjüngendes
Licht auf die scheinbar gealterte Eintracht. Wir
Sahen dich erstmals, Lieblicher, gegen Stuttgart,
- und das Herz war bezaubert, verzaubert bald
Gar. Ach! Wie du da Förster, den Holzer,
Versetztest und Martin, den Rammler, so daß selbst
Sie dein Lob dann sangen - wie du dich
Schlängeltest durch die Abwehr - um endlich,
Endlich, kurz nach der Halbzeit, hoch in die
Lüfte dich reckend, die Flanke von Borchers
Nahmst mit der Stirn, der klugen, das
Leder versenktest im rechtesten Toreck - es war
Wie ein Herzkrampf, ein schöner, in Freude und
Ahnendem Jubel in eins.

Am Abendhimmel blühte ein Frühling auf, und
Sein Name war Cha. Die Eintracht aber, jahrlang
Von Klippe
Zu Klippe
Geworfen, glühte mit dir, o mein Trauter, zu
Neuschönem Glanze. Aus dem Schlaf des
Dornröschens erwachte die alte, die beinah
Vergeß'ne Primadonna sehr rasch. Vergessen das Alter
Grabowskis, vergessen der Streit mit dem Trainer.
O neues heilig' Herz der Mannschaft! Uns zur
Erhabenen Lust stürmst du, Schönster, so viel ich
Sah, seither, wie der Vogel des Waldes über die
Wipfel fliegt, schwingst du, Zierer, leichter und
Mühlos und sonder Gewalt dem Tore dich zu, dem
Beschützten - Östling unter Deutschen,
Und ihnen dennoch verwandt in der Seele,
Nah auch in Tordrang und Technik und
Teilung des Raumes in all seiner
Tiefe . . .

Kenntnisreicher Künstler am schwarweißen Balle!
Der Mann aus Korea allein hat die Präzision deines
Abspiels. Trocken schlägst du die Pässe, den
Kurzpaß sowie auch den raumgreifenden Vetter, den
Steilpaß. Nicht fremd ist dir der
Fallrückzieher, wir sahen's. Du zeigtest, daß
Auch in Asia, dem fernen, bekannt ist der Trick
Mit dem kunstreichen Haken - doch mehr noch
Erstaunen den Gegner die nicht-orthodoxen, die
Tricks, die im Lande noch unbekannt. Freilich,
Nie ähneln sie je doch der Tücke des Panthers,
Nie schielet Verschlagenheit Asiens durch -

Fair play ist Bum Kun Chas Religion!

Ach, abermals weiden die Augen auf dir! Hurtig
Treibst du das Leder nach links, kühner umkurvst
Du den grätschenden Stopper, zaubernden Fußes
Entläßt du den Lib'ro in Scham. Leichthin,
Euphorion erinnernd, vergleichbar auch durchaus
Der zarten Gazelle, dribbelst du torwärts und
Spannst doch den Fußnerv alljetzt schon zur Bombe -
Denn kaum hinkt die Macht deines Schusses der
Pracht nach Bernd Nickels, genannt "Dr. Hammer":
Dem du, so liest man, längst Brücken der
Freundschaft gebaut hast, auch menschlich . . .
Herzschöner Mann! Flutlichtumschwärmt auf den
Flügeln der Flanke, jetzt plötzlich der rechten,
Füllhorn der Technik, Fülle des Seins!
Samtschwarzen Seraphkopfs sehr schönen Scheins!
Seht nur den Doppelpaß jetzo mit Nachtweih und
"Holz"! Tripelpaß ewiger Klarheit!
Genius des Ostens! Sel'ges Korea!

Ein Flankengott jener Abramczik? Da lachen die
Gütter des alten Olymp! Sie lachen Schorsch
Volkerts und
Lächeln ob jenem, der, unrhythmisch seltsam,
Rummenigge sich nennt! Wer kennt Okudera? Cha
Aber - ob er nun "Cha Bum Kun" heißt, so wie die
"Frankfurter Rundschau" es will; oder doch
"Bum Kun Cha", wie die FAZ ihn besingt; oder
"Tscha Bum", wie "Bild" ihn begrüßte - dich,
Cha, kennt Deutschland, kennt Asien, die Welt so und so - -
Ew'ges Korea!

Im Winde klirret die Fahne zum Eckstoß. Gefahrstufe
Eins. Anläuft Cha Bum, herrlich die Flank' in die
Fluten der Zeit! Schon steht Cha Bum wieder nah
Dem Elfmeter, lauert des Zuspiels, hilft
Hinten aus. Schneisen schlägt er in Spielfeldmitte,
Schleusen öffnet sein schneller Fuß: Sammelnd der
Gegenwart hohes Vergang'nes, einend die Künste
Grabowskis mit denen des Pfaff, Kressens gedenkend
Und eingedenk Sztanis. Fußball berückend - und
Rührend selbst Toni, den treuedlen Zeugwart, der
Dir, Cha, im Air-Bus von Braunschweig nach
Frankfurt die Wange gar küßte; so stand's in der "Rundschau" . . .
Geh' unter, HSV! Trunken dämmerte die
Seele selbst dir (3 : 2)!

Ja, in den Ozean all deiner Tricks will ich mich
Stürzen, Bum, sturztrunken einfallen laut in die
Chöre des Jubels, Sohn einer fußballträumenden
Mutter. Anbeten will ich - gleich dir, der du
Betest vor Spielbeginn und auch während des
Kampfs "ständig vertieft bist im Gebet", wie
Wieder die "Rundschau" weiß. Anbeten will ich,
Singen dein Lob all mein Lebtag und
Endlich, wenn's gut geht, warte nur balde,
Berückt in Verzückung unendlicher Schöne vergeh'n - - -

Nur, Bum, daß du, folgt man einem Bericht in
der FAZ, nach deiner Aktiven-Laufbahn Deutsche
Predigend zu Gott bekehren willst, das, Bum,
Muß ja wohl nicht sein.
이하는 위 시의 일부 번역본이다. 전체의 번역은 이곳에 있다.
"차범근 찬가"

태고적부터
남성다움과 고결함이
찬란했던 곳.
용맹스런 한국이여

그대가 차붐을 우리에게 보냈도다

환희의 음악이여 더 크게 울려라.

차붐. 자네를 오랫동안 사랑하리

바다와 같은 당신의 발재간속으로
나는 빠져들고 싶다
관중들의 우레 같은 함성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은 울려 퍼진다
축구를 태몽으로 잉태된 아들이여
나는 그대를 찬미하리라
내 평생 동안
그대를 칭송하는 노래를 하리
파일:차범근 호랑이.png
1980년대 프랑크푸르트 동물원에 차범근의 이름을 딴 호랑이가 있었다. '범근'이라는 이름의 새끼 수마트라호랑이인데, 당시 서독 교민회장을 통해 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 호랑이라는 이야기를[56] 들은 프랑크푸르트 구단 측에서 시에서 운영하는 프랑크푸르트 동물원과 협업을 맺고 진행한 이벤트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차붐' 혹은 '갈색 폭격기'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온 호랑이'란 별칭이 서독 언론 기사에 많이 애용되기도 하였다.
파일:메디신볼 훈련중인 차범근.png
차범근의 신체적인 능력에 관해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노르베르트 나흐바이(Norbert Nachtweih)[57]의 이야기에 따르면 차범근은 구단 선수들 중 메디신 볼 훈련을 가장 오래 견딘 선수였다고 한다. 사실 말이 메디신 볼 훈련이지 현재와 달리[58] 그저 메디신 볼을 들고 하프라인을 왕복하며 뛰는 단순한 훈련이었는데 문제는 그 강도가 극악이라는 것.

당시의 메디신 볼 훈련은 총 3단계로 이뤄져 있었는데 1단계는 10kg 무게의 메디신 볼을[59] 양손에 하나씩 든 채로 하프라인을 따라 왕복 3차례 뛰기, 2단계는 양손에 메디신 볼을 들고 한쪽 발로 메디신 볼을 드리블하며 출발하여 돌아올 때는 반대 발로 드리블해 오는 식으로 3차례 왕복, 3단계는 볼 없이 3차례 왕복 뛰기로 이뤄진 훈련이었다. 이 3단계를 1세트로 취급하여 10세트를 기본 사이클로 진행하였다고 한다.[60]

사진에서 차범근 뒤로 주저앉아 있는[61] 프랑크푸르트 선수들만 봐도 대충 느껴지지만 극악의 훈련 중 하나였기 때문에 선수들 대부분이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훈련을 하거나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차범근은 항상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훈련을 마무리했을 뿐 아니라 정식 훈련이 끝나고도 메디신 볼 훈련을 포함한 추가 개인 훈련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차범근에게 박혀있던 한국식 마인드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정식 훈련 외에 남아서 훈련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응당해야 할 덕목처럼 여겨졌던 시절이었고 차범근 역시 그런 시스템에서 수년을 생활하다 온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추가 훈련을 한 것일 뿐이었다. 이런 차범근의 성실함에 대해 독일에서도 칭찬을 했지만 대한민국보다 축구 수준이 높았던 만큼 적절한 훈련량과 휴식 역시 중요하단 걸 고지시키며 계획된 수준 이상의 트레이닝은 자제시켰다.[62] 당시 프랑크푸르트 감독 부크만은 이런 차범근을 만류하기 위해 오버 트레이닝을 할 경우 1천 마르크(현재 기준 약 137만 원 상당)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할 정도였는데 당시 취재를 온 한국 특파원에게 "한국 사람은 모두 저렇게 다부지냐"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 차붐을 상대해야 했던 팀의 팬들한테도 차붐이 얼마나 인상에 강하게 남았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0여년 전에 한 축구 팬이 알싸에 레버쿠젠에 가서 차범근을 아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은 상대가 젊은 팬이어서 잘 모른다라는 대답을 했는데, 그 옆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샬케04팬이 "어떻게 레버쿠젠 팬이라는 녀석이 차붐을 모를 수가 있느냐"라고 말하며 젊은 레버쿠젠 팬에게 차붐에 대한 강의를 한 적 있다고 증언했다.

4. 감독으로서의 평가

차범근은 독일에서 은퇴한 후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고 코치 자격증을 따 왔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계에서 몹시 희귀한 경우였다. 물론 외국에서도 얼렁뚱땅 자격증만 따서 감독하는 얼치기 감독은 얼마든지 있다. 핵심은 제도권 스쿨을 거쳤느냐 하는 점이다. 차범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라이선스를 따오면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 줬고, 차범근 이후 코칭 방법을 몰라 외국 감독이 하는 걸 어깨 너머로 배우고, 그저 허세 부리기만 하던 기존의 지도 관행은 개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업적은 공과가 크게 갈린다. 가장 먼저 지적할 부분은 세계 축구의 유행과 발전상에 뒤처졌다는 점이다.[63] 차범근의 축구 철학이 1970년대 분데스리가 스타일을 숭상하기 때문에, 감독을 맡은 수원 삼성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재임기간 동안 트로피는 따줬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사실 이 시기 수원 팀 자체는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차범근 해임 이후 K리그의 빅5 추세를 본다면 귀네슈-빙가다-최용수로 이어지는 무공해 서울, 김정남-김호곤으로 이어지는 철퇴 울산, 최강희가 구축한 닥공 전북, 파리아스-황선홍으로 이어지는 스틸타카 포항은 모두 고유한 팀 컬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원은 무전술 뻥축구라는 조롱을 길게 받았다. 과거 김호 시절의 수원발레리 니폼니시부천 SK와 더불어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를 운용하며 포백 시스템과 존 디펜스 도입 등 선진 축구로 팬들의 찬사를 샀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명백한 퇴보다.

또한 당시 수원은 레알 수원으로 불릴 만큼 모기업의 막강한 재력으로 감독이 원하는 만큼 선수들을 영입하게 해 줬기 때문에 소위 선수빨, 돈빨이라는 소리도 들어야 했다. 이렇게 큰돈을 써 가며 원하는 선수를 시즌마다 영입해 줬음에도 성적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 시즌이 많았기에 재임 기간 동안 이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ACL을 병행하는 시즌은 성적이 죽을 쒔다. 수원의 최초였던 두 자릿수 순위 기록은 전부 차범근 때 나온 것이고 10위를 기록한 두 번의 시즌 모두 ACL을 병행한 시즌이다. ACL에서도 성적을 전혀 내지 못했다. 거기에 팀 성적이 죽을 쓰던 와중에 월드컵 해설한다며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

차범근 재임 시절 유스팀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이는 프로축구연맹의 지시 사항이었기 때문이고 차범근이 퇴임하는 2010년에 첫 유스팀 배출 선수 민상기, 주재현이 입단했으나 이들의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프로팀, 대표팀 감독으로 상당히 앞서가는 면모를 보인 것도 있다.
  • 첫째, 국가대표팀에서 처음으로 4백 수비를 시도했다. 1990년대 중반 K리그에서는 김호 감독과 조광래 코치[64]가 이끄는 수원 삼성발레리 니폼니시부천 유공 등이 4백을 시도했지만 아직 한국 축구계는 내려앉은 스위퍼가 자리 잡는 3백이 주류였다. 특히 대표팀에서 3백을 놓기 어려웠던 것은 '홍명보' 때문이다. 홍명보는 3백에 최적화된 선수로, 4백 시스템의 센터백으론 대단히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때문에 히딩크도 부임 초기 4백을 실험하다가 결국 3백으로 돌아갔으며, 결국 한국 국대에 4백이 정착된 건 홍명보가 은퇴한 이후이다.[65] 이는 단순히 수비수의 숫자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포메이션 전체의 압축 정도를 좌우한다.
  • 둘째, 일찌감치 체력 집중 트레이닝을 강조했다.
  • 셋째, 선·후배 관계는 중요하지만 경기장에서는 형·선배 호칭을 빼라 했고, 기자 회견 시간을 정해놓고 언론의 무차별 인터뷰를 차단하는 등 여러모로 서구형에 가까운 팀 운영을 보였다.
  • 넷째, 대표팀 감독으로 지원 파트를 중요시해서 비디오 감독관[66]을 포함한 대규모 지원 스탭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잘 살펴보면 위의 4가지 모두 차범근 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감독들이 일찌감치 지적한 문제들이다. 다만 국내 축구인들이 한국 실정을 모르는 외국인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K리그 대우의 비츠케이 베르탈란나 올림픽팀의 비쇼베츠는 항상 체격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체력에서 기술과 정신력이 나온다고 이야기했다. 비디오 감독관을 포함한 대규모 지원 스탭도 모두 대한축구협회에서 예산 낭비라는 이유로 거부해버렸다.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여 거스 히딩크가 대표팀 감독이 부임하며, 위의 사항 등이 개선되었고 그것은 4강이라는 성적으로 증명되었다. 즉, 비디오 감독관, 체격 트레이닝, 평등한 선·후배 관계 등 히딩크의 성공 요인으로 꼽히던 요소 대부분이 차범근이 먼저 이야기한 것인데, 2002년 전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해, 2002년 이전까지 한국 축구계가 그만큼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이야기다.

다만 당시에는 이런 공적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성적 부진에만 초점이 맞춰져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평가가 부정적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대회 도중 경질은 너무 가혹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당시에도 분노와 좌절에 휩싸여 원색적인 비난을 하던 국내 언론 및 축구 협회와는 달리 해외의 평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특히 차범근과 분데스리가를 함께 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의 경우 차범근의 경질 소식에 "축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차범근 같은 인물을 경질시킨 것은 한국 축구가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강한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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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EPL라리가가 유럽 1위 리그 자리를 두고 다투는 상황에 김민재가 그 둘에 밀리는 세리에 A에 갔다고 해서 '최고의 리그가 아니니 의미가 없다'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고의 리그를 꼽는 게 어렵다는 것과 상위 리그에서 뛴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이다.[2] 리그 우승 팀이 컵 대회를 우승하여 컵위너스 컵에 진출 가능하더라도 선택권 없이 유러피언컵에 나가야 했으며, 컵 대회 우승 팀이 UEFA컵에 진출 가능한 리그 순위를 기록했다면 선택권 없이 무조건 위너스컵에 나가야 했다. 만약 리그 우승팀이 FA컵까지 우승을 한 상황에서는 FA컵 준우승팀이 위너스컵에 출전했다.[3] 이는 작년도 UEFA컵 우승 팀을 제외한 리그 순위만의 진출 숫자로 UEFA 리그 랭킹 3위 리그가 4팀, 4~8위 리그는 3팀, 9~21위 리그는 2팀, 21위~30위 1팀이 출전했다.[4] 물론 1979년이 굉장히 특이한 사례였다고 볼 수도 있다.[5] 이 서술은 내용이 너무 길어 관련 답변 중 일부분만 발췌했다.[6] 독수리 군단(Die Adler)의 일원이라는 뜻.[7]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는 두 괴물이 비상식적인 골 경쟁을 해서 사람들의 눈높이 또한 올라가버린 것이 큰 몫을 하기도 했다.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인 2020년대에도 3경기당 1골은 현재 최고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어지간한 중위권 팀에서 붙박이 주전 스트라이커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다. 세 경기당 한 골이면 한 시즌 동안 총 38라운드인 리그를 풀타임 출장한다고 가정했을 때 리그에서만 총 12~13골을 넣는 셈이며 팀당 34라운드를 치르는 분데스리가에서도 11골 가량의 기대 득점이 나오는 수치다. 앞선 각주에서는 중상위권 붙박이 주전 스트라이커라고 써놨지만 실제로는 빅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이면 중상위권이 아니라 우승권 팀에서 기를 쓰고 데려가는 클래스의 선수다.[8]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구분하는 키커 랑리스테와 달리 키커 리그 평점은 공격수 부문(Sturm)에 공격형 미드필더(OFFENSIVES MITTELFELD)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포함되었다. 키커는 평점 숫자가 낮을수록 점수가 높은 것이다.[9] 84/85 시즌을 앞두고 키커지에서 1980년대 상반기를 정리하며 포지션별로 발표한 목록이다.[10] 79/80-81/82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1] 79/80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2] 79/80-80/81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3] 87/88 시즌 리그앙 이적[14] 87/88 시즌을 끝으로 은퇴[15] 분데스리가 7시즌 이상, 한 시즌 50% 이상 경기를 뛴 선수 기준[16] 79/80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17] 87/88 시즌 리그앙 이적[18] 85/86 시즌을 끝으로 은퇴[19] 79/80-80/81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20] 84/85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21] 81/82 시즌 데뷔, 2. 분데스리가 소속[22] 1987년~89년까지 코치 라이센스 취득 후 89/90 시즌 선수 복귀[23] 86/87 시즌 50% 미만 출전[24] 한 언론사의 평점이 절대적인 지표라고 할 순 없지만 독일에서 키커의 위상과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굉장히 유의미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분데스리가는 공식 연맹(DFL)에서 뽑는 '올 시즌의 선수'가 2019년에 시작되었고, 프로 축구 선수 협회(VDV)에서 선정하는 '올 시즌의 선수'와 '올해의 팀' 역시 1997년부터 시작되었을 정도로 공식적인 수상이나 평점이 없던 리그다. 그런 분데스리가에서 공식적인 평점과 시상으로 취급되던 것이 1920년에 창간된 키커의 평점과 랑리스테, 주간 베스트, 올해의 팀 등이었다. 특히 분데스리가 설립 이전부터 매겨진 랑리스테의 경우 독일 국가대표 선발에 활용할 목적으로 매겨지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유의미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독일 축구계에서 공식 시상 중 가장 유서 깊은 상으로 평가받는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역시 독일 기자 협회(VDS)의 투표를 취합하여 키커에서 수여하는 상일 정도로 독일 축구계에서 키커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1970~80년대 키커의 평점은 단순한 언론사의 평점이 아닌 유의미한 지표로써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25] 79/80 시즌을 일례로 들자면 호르스트 흐루베슈의 경우 팀이 승리한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고도 3점 혹은 4점을 받은 횟수가 6차례나 있고, UEFA컵 득점왕을 차지하며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UEFA컵 준우승을 이끈 하랄트 니켈(Harald Nickel)은 멀티골을 넣고도 3점을 받은 적이 두 차례나 있을 뿐 아니라 해트트릭을 기록하고도 2점을 받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공격수에 대해 상당히 까다롭고 박한 평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키커 평점 1점과 2점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 활약을 보여야 했는지 알 수 있다.[26] 79/80 시즌 파울 브라이트너 1.87점, 81/82 시즌 베른트 프랑케(Bernd Franke) 1.94점[27] 범위를 1970년대까지 넓혀도 공격수 중 시즌 평점 1점대를 받은 공격수는 단 한 명뿐인데, 78/79 시즌 1.94점을 받은 케빈 키건이다. 참고로 케빈 키건은 78, 79년 2년 연속 발롱도르 수상자이다.[28] 82/83 시즌 키커 평점에서 루메니게와 푈러에 이어 공격수 3위를 기록했는데, 평점으로 시즌 베스트 11을 선정하는 현재 방식이라면 82/83 시즌도 평점이 낮은 밀렙스키를 제치고 시즌 베스트 11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29] 참고로 랑리스테 등급은 애초에 서독 시절 국가 대표를 뽑을 때 기준점이 되라 만든 등급으로 K 등급에서 말하는 국가대표에 거론될만한 선수란 건 독일 대표팀을 뜻했으며, B 등급의 경우 랑리스테 초기만 해도 번뜩이는 활약을 하던 유망주들이 많이 받던 등급이었다. 이런 옛 명칭과 기준을 개선하기 위해 키커는 20/21 시즌 등급 B를 없애고, K 등급은 기존의 'IM WEITEREN KREIS'에서 내셔널 클래스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30] 1980년대 당시 독일인 외 모든 선수들은 포지션과 상관없이 외국인 부문으로 분류되어 순위가 매겨졌다. 88/89 시즌부터 독일 선수들과 통합되어 포지션 별로 평가되었고 이에 따라 경력 막바지인 88/89 시즌 미드필더로 뛰던 차범근도 '수비형 미드필더로' 8위에 랭크되었다.[31] 물론 이후 레반도프스키, 리베리, 로번 등 기록이나 활약면에서 차범근보다 뛰어난 용병들이 더 늘어났기 때문에 현재는 이보다 평가가 떨어질 수도 있다.[참고] 이 이미지는 현 독일 키커지 Christoph Huber 데이터 편집자(Datenredaktion)에게 받은 자료에서 센터 포워드 순위 부분만 편집하여 올린 것으로 위키에 사용하는 것을 승낙 받았으나 저작권상 이외에 일체의 어떤 용도로도 활용할 수 없음을 명시.[33] 차범근은 전 포지션을 통틀어 유일하게 순위에 오른 아시아 선수다.[34] 다만, 제일 처음 차범근을 소개할 때 나오는 프랑스 풋볼 선정 세계 4대 축구인, Kicker 선정 80년대 최고의 선수는 출처가 없으며,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다.[35] 어떤 경기에선 골을 넣었더니 상대방 수비수가 인종차별적 말과 함께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만 이건 독일에서의 일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클럽 에버딘과의 UEFA컵(유로파 리그 전신) 경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독일은 오히려 인종차별이 비교적 적은 국가라 볼 수 있다. 프리미어 리그세리에 A는 인종차별 관련 기사가 자주 나오는 반면, 분데스리가는 그런 기사를 보기 힘들다. 차범근 또한 자신이 실력으로 보여주니 인종차별을 하는 독일 팬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다만, 독일을 벗어나 유럽 대회에 나가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36] 사실 서양 축구 선수 기준으로도 딱히 작은 키는 아니지만, 독일에 왔을 당시 말랐던 탓에 키가 작은 걸로 느껴진 듯. 그는 진출한 뒤에 서양인들의 체격에 대항하기 위해 징그러울 정도로 육류를 먹으며 몸을 불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 음식을 먹고 경기를 하면 초중반에 허기가 져서 힘이 떨어졌는데, 스테이크를 두 덩어리 먹고 뛰니 경기 내내 배가 든든해져 효과를 봤다고 한다. 그래도 피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를 울면서 먹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애초에 그건 취향에 맞춰서 더 구워 먹던지 하면 될 일이다.)[37] 사실 이는 뒤의 영어를 전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사실 축구 선수가 대학교 나온 것 자체가 당시 독일에도 그리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에는 한국이 좋게 봐도 '이제 겨우 입에 풀칠은 해가는 나라' 이상의 이미지를 가지기 어려웠다는 것도 생각하자. '명문'이라는 인식까지는 없더라도, 위에서 말한 수준의 국가에서 대학까지 나온 축구 선수라는 건 당시로서도 놀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대학교의 영문명은 Korea University라 더 놀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우선 독일에는 '명문대'라는 개념이 없으며, 당시 대한민국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유럽에서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대학교'에 대한 인지도가 전무한 수준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다만 상기한 대로 고려대학교의 영문명을 듣고 한국 최고의 국립대학쯤이겠거니 짐작했을 가능성은 있다. 독일을 비롯한 대다수 유럽 축구 선수들이 대학을 안 가는 이유는, 대학은 '가면 좋은 곳'이 아니라, '재능이 없어서 딴 직업 알아봐야 할 때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차범근 본인이 우스갯소리로 언급한 내용이니만큼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고, 한국인들 인식에 맞춰 경험담을 살짝 비틀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대로 말했다면 농담이 아니라 한국 교육 제도에 대한 비판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실제 현지인들의 놀라움은 '그런 명문대를 나온 선수가 축구까지 잘하네?'가 아니라 '이렇게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어째서 대학까지 가야 할 정도로 프로 축구 환경이 안좋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은골로 캉테가 무명 시절, 축구 선수로의 성공을 확신 못해 회계 공부를 한 것이, 한국에서는 '회계사 자격증을 딴 엄친아'로 알려지는 것과 비슷한 사례.[38]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뽑은 선수 45명과 감독 4명이 후보 대상으로 15,000명 이상의 프랑크푸르트 현지 팬들이 참여하였으며 영구적으로 존치한다고 한다. 이 선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문서의 레전드 목록 참조[39]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연대기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단행본으로 출판된다.[40] 선수 24인+감독(코치) 3인[41] 구자철의 말에 따르면 언론에 노출이 안될 뿐 분데스리가 및 독일 축구와 관련된 상당히 많은 행사와 인적 모임에 참여를 한다고 한다.[42] 총 4000여 명 이상의 현지 팬들이 참여하였다. 차범근은 공격수 중 3위에 해당하는 득표를 받았으나 아쉽게도 베스트 11에는 선정되지 못했는데, 레버쿠젠이 선택한 베스트 11의 포메이션이 4-4-2다 보니 투톱에서 서브로 밀려났기 때문이다.[43] 5년 뒤 열린 30주년 행사에서도 초청받았으나 개인 사정으로 불참.[44] 레버쿠젠은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79/80 시즌 처음으로 분데스리가에 승격했다.[45] 2주 동안 레버쿠젠 서포터즈 약 12,000명이 투표하여 선정하였다.[46]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레버쿠젠에서 뛰었다. 발락의 출생지는 구 동독의 괴를리츠라는 도시이다. 하지만 발락이 태어날 당시는 서독과의 해빙기였기 때문에 서독 스포츠 채널을 볼 수 있었다.[47] 엄밀히 말하면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코치로서 요청한 건 사실이다. 다만 선수로서 요청인지는 확인된 바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gjfg4NpwSIQ[48] 이 이야기는 1980년 유니세프가 주관한 세계 올스타전에서 당시 서독 대표팀 감독이자 세계 올스타팀 감독을 맡은 유프 데어발이 올스타전이 끝난 후 맹활약한 차범근을 극찬을 했는데 그 내용 중 "현재 서독 대표팀 왼쪽 윙 포워드가 부실하다. 차붐이 독일 선수였다면 당장 기용하고 싶다"라는 내용이 와전된 것이다.[49] 물론 경기 자체가 첼시와 삼성의 5년 후원 계약 체결을 기념하는 경기인 만큼 무리뉴 역시 특유의 독설보다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수원을 만만치 않은 팀으로 평가하거나 한국 선수들을 첼시에 영입하고 싶다는 등 립서비스 발언을 많이 하기도 했다.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한 내용은 역시나 삼성과 첼시의 협약에 관한 부분이었고 자신의 첼시 계약과 삼성의 후원 계약 기간이 같다며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차범근에 대한 발언만큼은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닐 것이다.[50] 당시 감독은 위르겐 클린스만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2골을 기록했다. 본프레레호와의 친선전 패배 당시에도 독일 감독이었다. 다만 당시 위르겐 클린스만은 전술을 요아힘 뢰프에게 다 일임했다고 한다.[51] 사실 뢰프의 선수 경력은 성공적이라 말하기 힘들다. 일종의 립서비스나 이후의 교체 선수 드립을 위한 빌드업이라고 봐야 할 듯.[52] 대한축구협회와 차범근은 현재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다.[53]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54] 레버쿠젠의 모기업이 약제 아스피린의 제조사 바이엘이기 때문이다. 팀 엠블럼에도 사자 두 마리가 좌우에서 아스피린을 붙들고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55] 뛰어난 독일 문학가에게 수여하는 Italo-Svevo-Preis를 비롯해 독일의 문학상을 여럿 탄 풍자 작가이다.#[56] 차범근의 '범'자가 호랑이를 뜻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는데, 사실 차범근의 범은 '법 범()'자를 쓰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다. 호랑이를 뜻하는 한자는 '범'이 아니라 '호()'다. '범'은 호랑이의 순우리말이다. 그래도 이런 동음이의어에 따른 의미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2013년에 토니 예보아와 함께 진행한 프랑크푸르트 팬미팅에서 차범근의 통역을 맡은 아내 오은미가 차범근의 이름의 뜻을 호랑이의(범) 뿌리(근) 차라고 설명하기도 했다.[57] 1979년부터 1982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과 함께 뛴 동료로 분데스리가에서만 345경기 46골을 기록했으며 포지션은 미드필더다. 프랑크푸르트 생활 이후 FC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200경기 이상을 뛰며 분데스리가 4회 우승을 경험했으며 프랑스 리그에 진출하여 AS 칸에서 당시 떠오르는 천재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던 지네딘 지단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58] 의료적인 효과를 비롯해 근력 훈련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만큼 현재 분데스리가에서도 계속 메디신 볼을 이용한 훈련을 하는데 1980년대와 달리 각 구단마다 훈련 방식이나 활용이 다양하다.[59] 메디신 볼은 5~7kg의 무게가 일반적이지만 좀 더 크고 무거운 메디슨 볼을 훈련용으로 만들어 이용했다고 한다.[60] 차범근과 같은 시기에 분데스리가를 뛰었고 쾰른 체육 대학에서 지도자 교육을 함께 받은 펠릭스 마가트VfL 볼프스부르크 감독을 맡은 2011년에 이런 1980년대식 메디신 볼 훈련을 팀의 피트니스 프로그램에 넣어 실행하기도 하였다. 유로스포츠에서 이 훈련을 취재를 간 적이 있는데 기사에 따르면 언제까지 해야 하냐는 선수들의 질문에 마가트는 '토할 때까지 할 것이다'는 경악스러운 답변을 했다고 한다.#[61] 한 명은 바닥을 보고 주저 않아 있고 한 명은 드러누워있는데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 때문에 마치 다리를 감싸 쥐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인다.[62] 차범근의 이런 마인드는 경기를 뛰는 자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차범근의 회고에 따르면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뒤 감독 및 코치진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90분 내내 온 사력을 다할 필요가 없다.", "페이스를 조절할 줄 알아야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레버쿠젠에서 뛸 시기에 이르러서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사실 차범근은 경기에서 죽어라 뛰지 않으면 선배들에게 흔히 '빠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혼나던 한국식 스포츠 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경기 내내 열심히 뛰어야지 저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차범근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힘이 남아있음을 느끼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고 한다.-그건 그냥 현역 시절의 감독님이 대단하신거에요-[63] 차범근 감독 개인의 노력 부족도 있겠지만 정보를 구하려고 해도 지금처럼 온라인 인프라가 없다시피하던 시절이라 유럽의 최신 견해를 습득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독일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덕분에 프란츠 베켄바워, 루디 푈러 등의 저명 인사들과 그것도 독일어로 무리없이 대화할 만큼 독일쪽 인맥은 탄탄했다지만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시기의 독일 축구 자체가 암흑기였던 지라.....[64] 수원 코치 시절에는 '4-4-2 전도사'라고 불리기도 했다.[65] 과거 독일도 마찬가지였는데, '마테우스'라는 걸출한 수비수 때문에 4백 전환이 굉장히 늦었다.[66] 훗날 압신 고트비가 이 보직으로 감독직까지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