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20:58:06

장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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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선희.jpg
출생 1893년 2월 19일
평안남도 평양직할시
사망 1970년 8월 28일 (향년 77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가족 아버지 장준강, 어머니 이영숙
큰오빠 장인석
작은오빠 장인성
언니 장인덕
배우자 오학수
학력 안신소학교 (졸업)
정신여학교 (졸업)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여자미술전문학교 (동양화과/졸업)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3.1 운동과 대한민국 애국부인회2.3. 교직 활동2.4. 해방 후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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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교육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893년 2월 19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장준강(張俊綱)과 이영숙의 차녀로 태어났다. 부친 장준강은 한약 도매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자손이었으며 초시를 합격할 만큼 학문이 밝았으며,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에게 서화를 사사하는 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장선희는 이러안 부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가축과 새와 꽃을 그리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00년, 장준강은 8살이 된 장선희를 남장시켜 오빠가 다니던 황해도 안악군의 양산공립소학교 여자반에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이후 13살이 될 무렵인 1905년, 그녀는 언니 장인덕과 함께 안신소학교에 입학했고 16명의 여학생 중에서 예술적인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 특히 그림과 이삭 위에 날아 앉은 참새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1907년 부친이 묵화로 난을 그려서 팔고, 오빠 장인성이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와 4가지 꽃 봉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벌어들은 수익금을 국채보상금으로 바치자, 장선희는 언니 장인덕에게 다음과 같이 제의했다.
"아버님, 어머님, 오빠가 저렇게 열심히 꽃 봉투를 만들고 계시는데,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틈틈이 골무와 베갯모랑 만들어요."

이후 그녀는 언니와 함께 수예품을 만들어 장터에 나가 팔아 그 수익금을 국채 보상금으로 바쳤다. 1908년, 장선희는 안신소학교를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16살에 안신소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녀는 안신소학교에서 근무하며 후학을 기르는 한편, 틈나는 대로 수예품을 만들어 학비를 저축했다. 큰오빠 장인석(張仁錫)이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자, 그녀는 큰오빠를 동경하며 학업을 계속하고자 했다.

1910년 한일병합 후, 장선희는 후임으로 김구의 부인인 최준례 여사를 추천한 뒤 평양 숭의여학교로 진학해 학문을 닦았다. 이에 장인석이 이왕이면 서울에 와서 공부하라고 권유하자,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고 1912년 서울의 정신여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장선희가 입학한 1912년 정신여학교 학생들이 배운 학과목은 성경, 한문, 국어, 역사와 지리, 산술, 도화, 습자, 체조, 음악, 가사, 침공, 과학, 천문 등이었다. 생물은 인체의 구조, 생리, 화학, 물리를 포함했으며, 학생들은 제중원에 가서 의학생들과 같이 실험하며 배웠다. 그리고 서양사와 천문은 선교사 게일(J. S. Gale)로부터 직접 교육받아서 교육수준이 매우 높았다. 한편 지리 역시 도티 교장이 <초학지지지(初學知地)>라는 순한글로 된 세계지리책을 저술해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정신여학교 뿐 아니라 시내의 사립학교 대부분이 이 책을 교과서로 사용했다.

이러한 정신여학교에서 서구적 근대 문물과 기독교 신앙, 그리고 애국정신을 함양했다. 그녀는 학업을 연마하면서도 틈틈이 자수를 놓았다. 그녀는 자수를 배우려고 모여드는 학우와 후배들에게 종종 "지금 우리는 열심히 배워야 해요. 왜놈들에게 지지 않도록 배워서 나라를 찾아야지요."라며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곤 했다고 한다. 1914년 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는 한편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자수 강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1915년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정신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그녀는 교사로서 미술, 자수, 편물, 조화를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에게 애국정신을 인식시키고자 노력했다.

2.2. 3.1 운동과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1919년 2월 21일, 장선희의 선배인 김마리아가 모교인 정신여학교를 찾아와 그녀를 만났다.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하고 동지를 규합해 독립선언서를 전국 방방곡곡에 밀송하고 여성들을 조직해 전국적인 시위에 참여하는 데 뜻을 모았다. 장선희는 동창인 이성완(李誠完), 이정숙, 황주의 신원애(申元愛), 평양의 변숙경(邊淑景)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거사 당일에 각 지방으로 독립선언서를 밀송하기 위해 분산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도 황해도 재령군에 독립선언서를 밀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녀는 두루마기의 뒷잔등을 뜯고 독립선언서를 솜장처럼 펴서 넣은 다음 꿰매었다. 그리고 손가방 밑에도 독립선언서 여러 장 깔아 놓고, 그 위를 종이 상자 뚜껑으로 덮은 다음 꿰매어서 버렸다. 그리고 재령읍에 가서 오빠 장인석에게 동지를 규합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명신학교 교장인 안병균(安丙均)과 부인 김성무(金成茂), 그리고 김용승(金龍昇) 목사와 김말봉(金末峰) 여사가 모여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후 이들은 3월 6일 재령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한편 재령으로 독립선언서의 밀송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장선희는 세브란스병원에 은신했다가 수색을 피해 동대문부인병원에 은신했다. 그러던 중 동대문부인병원에 방문한 정신여학교 동창 오현주(吳玄洲)[1]와 그녀의 언니인 오현관(吳玄觀)이 찾아와 '혈성(血誠) 부인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형무소에 수감된 동지들의 사식과 기타 필수품을 차입하고 그 가족들의 생활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부인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장선희는 이에 동의했고, 세 사람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이정숙(李貞淑), 배화학당 교사 이성완(李誠完) 등과 함께 투옥된 인사들을 위한 구제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회원 수가 날로 늘자, 그들은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고 군자금을 수합했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이 활동했지만, 나중엔 이성완의 제의에 따라 '혈성단애국부인회'로 이름붙이고 회장에 오현관을 추대했으며, 장선희는 재무부장 겸 지방 통신원을 맡았다. 한편 상하이에서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다. 1919년 6월 상순, 두 애국부인회는 하나로 통합하되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혈성단 측에서는 오현주를 회장, 오현관을 총재, 이정숙을 평의원, 장선희를 지방통신원으로 정했고, 대조선애국부인회에서는 최숙자를 부회장, 김희열을 부총재, 이혜옥을 서기, 경하순을 해외통신원, 그리고 이병철을 고문으로 했다.

1919년 7월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진력함을 감사한다’라는 내용의 감사장이 전달되었다. 이 감사장에는 부인회의 이름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로 명기되었다. 이를 계기로 회의 명칭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로 개명되었다. 애국부인회는 전국적인 조직이 되기 위해 지부 설치가 중요하다고 보고, 지방 순회를 단체의 첫 사업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장선희는 1919년 7월부터 전국의 도·부·군 등을 돌면서 지부장을 물색해 본부에 추천하고 신임장을 교부했다. 이렇게 해서 설치된 지부와 지부장은 16곳 16명으로, 경성 이정숙, 홍수원, 정근신, 재령 김성모, 진남포 최매지, 평양 변숙경, 대구 유인경, 영천 김삼애, 부산 백신영, 경상남도 김필애, 진주 박보염, 청주 이순길, 전주 유보경, 군산 이마리아, 원산 이혜경, 성진 신애균, 함흥 한일호 등이었다.

당시 일제의 감시를 피해야 했기 때문에, 애국부인회 회원 간에는 서로 연락이 없었고 극비리에 입회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이 때문에 장선희는 지방으로 통신원을 파견할 때 저고리 안깃을 뜯고 안섶에 달린 깃꼬리에 자기의 실인(實印)을 찍어 보내는 것으로 표적을 삼았다고 한다. 그녀는 이외에도 이신애를 만나 통신원으로 포섭했으며, 대구에서 유인경에게 독립운동자금 100원을 기탁받아 회장인 오현주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후 8월 4일에 3.1 운동에 관여한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예심 면소로 출옥한 김마리아정신여학교로 돌아오자, 장선희 등은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더욱 활성화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녀는 각 지방에 조직해 놓은 지부장을 불러모았다.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 황에스더의 출옥 환영 위로연을 구실로 정신여학교 구내에 있는 천미례 선교사 사택에 여성 동지들이 모였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황에스더를 제외하고 모두 정신여학교 출신이었다. 이들은 "조선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널리 회원을 모집하여, 전국 부녀들이 남자들처럼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리하여 새로 선출된 임원은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및 편집원 황에스더, 서기 신의경, 김영순, 교제원 오현주, 적십자 회장 이정숙, 윤진수, 결사장 이성완, 백신영, 재무원 장선희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국내 각 중요지점에 지회를 설립하고 회원 획득에 주력하는 것,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문서를 인쇄해 전국에 배부하는 것, 결사대로 별동대를 조직해 상해임시정부를 응원하기 위해 각 방면에서 금전을 모집하고 대표를 상해로 파견해 임시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하는 것, 적십자사를 조직하고 세계에 선전하는 등의 방안을 모색했다. 장선희는 이 방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녀는 재무부장으로서 자금 조달을 위해 회원에게서 매달 1원씩의 의무금을 거출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해야 했다. 또한 지방의 뜻있는 유지들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희사받아 독립운동 비용에 충당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고 덕분에, 애국부인회는 상해임시정부에 6천여 원에 달하는 독립자금을 송금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11월 말, 애국부인회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체포된 인사들은 총 52명에 달했는데 그중엔 장선희도 있었다. 그녀는 "교육 보급과 여성인재 양성이 목적이었을 뿐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며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했다. 이에 형사들이 모진 고문을 가했지만, 그녀는 "나는 매가 무서워서 다른 사람의 일을 억울하게 날조할 수는 없소"라며 끝까지 버텼다. 이후 1920년 6월 29일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그녀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훗날 수감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겨울은 겨울대로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을 견뎌내기에 힘겨웠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감방 안의 여인들은 더운 여름철 감방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감방에서는 겨울철보다 여름철이 더 지독했다. 찌는 듯한 여름철에는 굴 속 같은 감방 안의 변기통에서 풍겨나오는 악취가 코를 찔러 숨통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감방 벽 틈에 끼어있는 빈대가 줄을 지어 사정없이 습격을 하는가 하면, 모기들의 공세가 제트기와 같았으며, 벼룩이 옷 사이로 뛰어들어와 따끔따끔 물어뜯는데도 일어나서 털 수조차 없었다.

대구형무소 내에서 수공부에 소속되어 노동하는 한편 죄수에게 그림, 자수, 조화를 지도했다. 그녀는 여죄수들에게 자신의 기예를 가르쳐주면서 동시에 한글성경, 그리고 민족정신을 가르쳤다. 1922년 5월 6일 황에스더, 이정숙, 김영순과 함께 가출옥한 그녀는 서울에서 각계 인사들의 위로연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로 요시찰 대상으로 지정되어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2.3. 교직 활동

1922년 12월 9일, 장선희는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불과 1년만에 교수들로부터 그림 자수 실력을 인정받아 특별시험을 치르고 졸업했다. 1923년 여자미술전문학교 동양화과 3학년에 편입해 동양 자수를 위한 그림 공부를 하는 동시에 조화 기술을 익혔고, 1924년 봄 졸업과 함께 한국에 귀국했다. 이후 모교인 정신여학교 선생으로 복직했고, 1926년 3월에 오학수 목사와 황해도 재령군에서 결혼했다. 결혼 후 정신여학교와 경성여자상업학교에 근무하던 장선희는 1927년 정신여학교를 사직했고, 그해 8월에 '경성여자기예학원'을 설립했다.

1930년 '학생작품 전람회' 심사위원을 맡은 장선희는 작품을 감상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수도 예전보다는 많이 진보된 점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판화에 대한 선택이 매우 조잡해 모처럼 솜씨있게 수놓은 작품도 그 그림 때문에 예술적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 많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는 때에는 그 출품자의 노력에 대한 아까운 생각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그 지도자가 단지 자수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가졌을 뿐이요, 그림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수는 우선 판화가 좋아야 합니다. 바탕이 좋은 곳에라야 그 우에 자수로서 의미를 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1938년에 제17회 전조선미술전람회 제3부 공예품 부문에 자수 작품 <용>을 출품하여 입선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한국의 지도를 그리고 도 단위로 13도에 무궁화의 화판과 잎새의 자수를 수놓는 '근역 3천리'라는 제목의 자수본을 만들었다. 이 수본(繡本)은 전국 곳곳의 여학교에 널리 퍼졌고, 특히 함흥, 재령, 진주 등지의 기독교 학교의 자수도안으로 쓰였다. 1942년경 종로경찰서는 그녀를 취조해 이러한 자수본을 만든 이유를 캐물었다. 그녀는 이 일로 며칠동안 고초를 겪어야 했다.

2.4. 해방 후 경력

8.15 해방으로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장선희는 1948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자수과 초대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김은호 화가로부터 그림 지도와 동양 자수의 색 배합에 관한 조언을 받았으며, 사실적인 표현의 동양화를 자수로 옮겨 순수미술의 분야로 확립시켰다. 특히 화조를 스케치하여 작품의 밑그림으로 사용했다. 또한 ‘단모자수’라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여 작품의 사실적 표현을 배가시켰다. 이렇듯 그녀는 한국 자수의 보급과 여성의 기예교육에 공헌했으며, 대한민국 국기나 대통령기 및 유엔기를 자수로 제작하기도 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공예부가 설치되었고, 그녀는 국전 제1회부터 제20회까지 공예부 추천작가로 관여했고 심사위원도 2번 맡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녀는 또 다시 큰 시련을 맞이했다. 남편인 오학수 목사가 납북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피난지인 부산에서 남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여성 교육에 몰두했다. 1955년 '대한미술기예원'을 설립하고, 1956년에는 '장선희조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여성교육과 수공예 예술 분야를 파고들었다. 1959년에는 '대한여자미술학원'을 설립해 조화를 생활 장식품으로 기능화시키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제자들에게 조화의 재료 염색 기술을 전수했다.

1963년에는 공보부 후원으로 제1회 장선희 조화전이 개최되었다. 이때까지 그녀가 만든 작품은 500~600종류로, 언론으로부터 '조화 보급의 선구자', '조화 연구자', '조화 전문가'로 조명받았다. 1964년에는 그간의 작품 성과를 바탕으로 4만여 점의 조화를 뉴욕박람회에 출품했다. 그녀의 작품은 뉴욕박람회 한국관 장선희조화소연구 매장 앞에서 조화를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릴 정도로 미국인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미공보원장 부인 G.H.데이몬은 그녀의 조화에 대해 "생화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이라고 극찬했다.

1970년 8월 28일, 장선희는 서울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02년에 그녀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훗날 남편의 회유에 넘어가 변절하여 동지들을 배신하고 밀고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