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5:51:30

부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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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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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왕과 왕족3. 관료4. 고구려, 백제 관련 인물5. 갈사국 관련인물6. 광개토대왕릉비에 등장하는 동부여 인물7. 기타
7.1. 번외: 중국 북조에서 활약한 여(餘)씨 관련 인물

1. 개요

한국사의 고대 국가인 부여의 인물들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부여를 조상으로 둔 고구려, 백제 측 기록이나 중국 정사 측에 기록된 부여의 기록이 남아있는 편이다. 하지만 가야보다도 알려진 인명이 없다.

2. 왕과 왕족

부여/왕사 참조.
  • 낙씨: 대소왕의 사촌동생. 부여의 왕족이었으나 대소왕 사후 고구려로 투항했다. 항목 참조.
  • 위구태: 후한서에 등장하는 부여 왕자. 항목 참조.

3. 관료

  • 아란불: 삼국유사에 기록된 인물로 해부루에게 가섭원(迦葉原)[1]으로 천도할 것을 권했다.
  • 위거(位居): 간위거왕마여왕 시기의 부여의 관료. 벼슬은 대사(大使). 대사가 되어서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국인(=귀족)들이 따랐다고 한다. 박대재 교수는 위거라는 인물이 일시적으로 부여의 왕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부여의 사료가 너무 적고 삼국지 부여전의 서술이 뒤죽박죽이라 자세한 정황을 알기는 어렵다.
  • 위거의 계부: 이름은 불명. 그가 딴마음을 먹자 위거는 계부 부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해서 관청에 보냈다고 한다.

4. 고구려, 백제 관련 인물

  • 고구려 측 관련인물
  • 백제 측 관련인물
    • 해루: 백제의 개국공신. 기록상 확인되는 첫 해씨 인물이다.
    • 우태: 비류 시조설에 등장하는 부여의 왕족. 비류 시조설에 의하면 우태는 해부루의 서손으로, 소서노와 결혼해 비류, 온조 두 아들을 두었지만 일찍 죽었다고 한다.
    • 구태: 중국 측 기록에만 등장하는 백제의 시조. 동명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5. 갈사국 관련인물

  • 갈사왕: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금와왕의 막내 아들이라고 한다. 대소왕 사후 해두국을 공격해서 멸망시키고 갈사국을 건국한다.
  • 2대 국왕: 이름 미상. 도두왕이 갈사왕의 손자인 점을 미뤄보면, 갈사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 차비 해씨: 이름 미상.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가 되어 호동왕자를 낳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 도두왕: 갈사국의 3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

6. 광개토대왕릉비에 등장하는 동부여 인물

'압로(鴨盧)'는 관직명으로 추정된다.

7. 기타

7.1. 번외: 중국 북조에서 활약한 여(餘)씨 관련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뒤에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하는 인물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 유민으로 보았다.[4]다만 여울(부여)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부여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를 제외한 여씨 인물들은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 여울(부여): 항목 참조.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잡았지만 동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5]
  •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한다.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399년에 처형당했다.
  •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에서 서중랑장을 지내다가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게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6]


[1] 위치미상. '가섭'이라는 단어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하나인 두타제일을 일컫는 말인 점과 동부여의 실존여부도 논란이 있어 확실치 않다.[2] 다만 생전 실제 호칭이 부여태후였던 것은 아니고, 부여태후는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그녀가 부여 출신 왕태후라는 점 때문에 임의적으로 붙인 호칭이다.[3] 비문의 글자가 마멸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다.[4] 출처는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4세기 후반 부여계 인물의 동향에 관련하여(2001), 강총훈, 4세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그 배경.[5] 모용농은 이후 요동과 현도를 장악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재탈환하게 된다. 단,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지역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6] 출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고조선・고구려・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