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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기문의 생애를 다룬 문서.2. UN 사무총장이 되기 전
2.1. 유년기
1944년 6월 13일(음력 1944년 윤 4월 23일),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행치마을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충주군[1]으로 이사 후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충주에서 다녔다. 당시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집안일을 도우면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으스대지 않고 진중한 성격이라 동네 어른들은 그를 내성적인 학생이라 생각했다고. 또한 미국의 원조를 받아 만든 비료 공장이 충주에 생겼고 미국인 기술자들이 머물던 사택이 생겼는데, 미국인들에게 영어를 배우러 이곳을 방문하곤 했다.원 속의 인물이 반기문.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2년 여름에 적십자가 후원하는 에세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 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워싱턴 DC의 백악관에서 자신의 우상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그 만남에 참여했던 한 저널리스트가 장래 희망을 물어보자 그는 "외교관이 되겠다"고 말했고, 결국 그 꿈의 정점에 올랐다.
반기문이 졸업한 충주고등학교는 그의 사무총장 당선 이후 기숙사를 새로 지으면서 반기문 총장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2.2. 외교관 생활
196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現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에 입학했고, 1970년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 시기 국무총리이자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 밑에서 외무와 정무(총리실 의전비서관)를 배웠으며, 그를 롤모델로서 존경한다고 한다.재학 중이던 1965년, ROTC 후보생이 되었으나 2개월 만에 그만두고 사병으로 군복무를 했다. 제대한 후 복학했다. #
참여정부에서 (후술하겠지만) 정권의 성향과는 다소 상이한 인사로[2] 제33대 외교통상부장관을 역임했는데, 재직 중이던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이 납치, 피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반기문 장관은 알자지라 방송에 직접 출연해 석방을 호소하는 등 제스처를 취했으나 구출작전이나 교섭 등 실질적인 조치 없이 방송 호소만으로 씨가 먹힐 자들이 아니었고,[3] 결국 김선일은 참수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외교통상부장관 경질론까지 불거졌었고, 반 총장 자신도 이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북한은 반기문 당시 장관을 두고 '친미사대 매국노'라며 비난한 적이 있다.#.
이듬해 반 장관은 신속대응팀을 신설, 국외 비상사태 관리를 담당하게 하도록 했으며 허리케인 카트리나 대응에서 활약했다.
한미 FTA 찬성, 이라크 파병 찬성 등 당시 외교현안에서 한미 동맹을 중시했다. 한국일보: 미군기지 환경 협상 저자세 외교 드러나 반기문과 송민순, 윤광웅 등의 한국 핵심 관료들이 주한 미군 기지의 오염 정화비용에 대해 미국이 부담해야 한다는 환경부측의 주장을 묵살하고 한국이 비용을 부담하라는 미국측 입장에 우호적으로 반응했다는 지적도 있다. 위키리크스를 통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대사는 본국에 보낸 기밀문건을 통하여 반기문을 가리켜 '미국의 모든 사안에 대해 본디 호의적이다(he is naturally sympathetic to all things American)'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선 개인의 신념은 개인의 자유고, 그 결과로 외교관 직무상 어떤 심각한 손해를 끼친 적은 없으니 그걸 가지고 가타부타 하는건 도가 지나치다는 견해와 반대로 요직의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가진 개인적 시각이 공무나 정치적 사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하면 중요한 문제고, 실제로 미군기지 사건에서 그로 인해 한국에 손해를 끼쳤으니 비판할만 하다는 견해가 있다.
3. UN 사무총장이 되기까지
3.1. 선출 과정
이후 2006년 10월에 UN 사무총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전임의 아프리카 가나 출신 코피 아난에 이어 마침 아시아 대륙에서 사무총장을 낼 차례가 돌아왔는데[4] 출마선언한 아시아 각국[5]의 경쟁자들이 어째 죄다 결격사유가 있어서 유력후보로 급부상했다.경쟁자 면면을 살펴보자면,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인도의 샤시 타루는 다 좋은데 모국이 급부상하는 신흥 강대국[6]이라 집중 견제 당했고, 아프가니스탄의 아슈라프 가니는 반대로 모국이 상황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활동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제대로 된 득표활동을 치르기 힘들었다.[7] 타루와 함께 유력 후보였던 태국의 수라끼얏 사티라타이는 당시 모국의 정국불안[8]으로 무너졌고, 스리랑카 후보는 내전 중 타밀족 인권문제가 걸려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 요르단 후보는 서방세계의 아랍사회에 대한 불안감이 문제가 되면서 탈락했고, 라트비아 후보는 UN 사무총장의 대륙별 순회원칙을 무시한 유럽 후보인 바람에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무총장이 되는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프랑스는, 반기문은 프랑스어 못한다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다. 단순히 프랑스의 자존심 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게, 프랑스어는 16세기 이래 세계 외교가의 표준언어인데다, UN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아프리카 대륙에선 제1 공용어다. 결격사유로써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이에 반기문은 프랑스어 과외 교사를 고용해서 프랑스어를 벼락치기로 공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자크 시라크와 어느정도 대화를 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의 지지를 받아냈다.[9] 그리고 당시 행정부이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도 반기문 총장 당선을 위해 부단히 움직인 바 있다. 대표적으로는 당시 준비 중이던 07~08년 비상임이사국 선거에서 경합을 포기하고 경쟁자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를 지지했다. 이에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가 즉시 반기문을 지지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10] 동남아시아의 지지도 지지지만, 사무총장 배출국이 비상임이사국까지 해먹는다는 비난을 막기 위함이 컸다.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 시절 가나도 비상임이사국을 한 적이 있지만, 그건 적어도 2차 임기 중일 때였다.[11]
그 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을 위해 아프리카와 유럽 지역 순방에 당시 외교장관이었던 반기문을 동행시켰고, 특히 위에서도 언급한 프랑스 표를 공략하기 위해 일부러 아셈(ASEM) 회의에 참석해서 프랑스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굳이 급하게 정상회담을 할 필요가 없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돌면서 반기문이 유세할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나온다는 건 멋진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고, 정부 내에 전담기구를 두어 반 장관을 지원했다.# 여담으로 당시 기자들은 참여정부의 총장 선거 지원 프로젝트를 'Secretary General(사무총장) Wannabe'이니 SG워너비라고 했다고. 당시 외교부 2차관이었던 이규형 차관을 중심으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나중에 유엔 사무차장보를 역임하게 되는 김원수 장관특별보좌관은 투표권을 지닌 이사국들의 표심을 분석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참고로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대변인 전여옥은 '반 장관의 출마와 한국이 UN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라고 말했던 바 있다.#당시 기사
그런 노력에도 이후 계속되는 유엔 안보리 총장후보 찬반투표에서 반기문에 대한 반대표가 계속해서 1표가 나왔다. 사무총장은 만장일치 추대를 기본으로 하는데다, 무기명 투표에서 나온 반대표 1표가 상임이사국의 표일 경우, 독보적 1위라 하더라도 사무총장 취임이 불가하기에 당시 한국은 상당히 긴장했다.[12] 다른 후보들이 계속 저조한 지지로 사퇴하는 와중에도 반기문에 대한 반대표 단 1표가 계속 등장하여 모두들 불안감에 휩싸였으나, 마지막 안보리 투표에서 찬성 14, 기권 1로 반대표가 기권으로 바뀜으로서 반기문이 최종적으로 차기 UN 사무총장이 되었다.
덕분에 대체 어떤 나라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이 나왔었는데, 2008년에 출판된 존 볼턴 당시 UN 미국대사의 책 'Surrender Is Not an Option'에서는 반대표를 던진 나라로 일본을 지목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처음부터 반기문을 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계속해서 반대표가 나오자 한국과 외교적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을 의심했고, 이에 유엔 주재 일본대사를 찾아가 입장을 바꿀 것을 설득하자 다음 투표에서 반대표가 기권표로 바뀌었다는 이야기. 다만 정확한 물증은 없는지라 마냥 일본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당시 반기문 선거진영의 외교관과 측근들은 또 다른 후보였던 인도의 샤시 타루가 전임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가나를 의심하고 있었고, 일본은 아닐 것이라며 이 책을 미심쩍어하는 시선도 있는 모양.
또 반기문 후보에게 반대표를 던졌다고 의심받던 국가로 의심받던 중국의 경우는 오히려 반 총장을 적극 밀었다고 한다. 유력 후보 중 1명이 중국의 최대 가상적국 둘 중 하나인 인도 외무장관인 샤시 타루였기에 샤시 타루 당선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서 반기문을 밀었다고. 참여정부 당시 한중관계가 나쁘지 않았기도 했다. 또한 엉뚱하게도 중국에서는 중국인의 핏줄이 UN의 수장이 된다며 기뻐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국의 반씨는 모두 고려 시절 귀순한 중국인을 시조로 하는데, 그러므로 반기문은 중국의 후예라는 얘기도 종종 나오기도 했다. 한편, 어느 중국인 마을은 반씨가 사는 마을이라 반기문이 조국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는데 반기문은 대꾸도 안했다.
4. UN 사무총장 선출
2007년부터 5년 임기의 제8대 사무총장으로 취임했고, 재임 막바지인 2011년 6월 17일에 만장일치로 연임에 성공[13], 결국 2016년까지 임무를 계속하게 되었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유혈사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도 손을 놓고 있는 유엔 안보리에 평소엔 보여주지 않았던 화난 모습을 보여주며 비록 레임덕인 몸이지만 개혁할 건 해놓고 떠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2016년 12월 12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고별연설'을 하였다.#
관련 자료: Telegraph
5. UN 사무총장 은퇴 이후
5.1. 국제올림픽위원회 윤리위원장
반기문 전 총장은 2017년 9월 15일에 IOC 윤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페루 수도 리마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반 전 총장의 IOC 윤리위원장 지명 안을 최종 승인했다. 그의 직책 윤리위원장의 임기는 4년이며 재선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가 윤리위원장이 된 배경은 그가 사무총장직에 있었을 당시, UN에 윤리강령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지키게끔 한 것에서 반 전 총장의 윤리위원장의 자질을 알아봤다고 IOC가 설명했다. 한편 반 전 총장은 첫 취임사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은 북한의 위협에도 안전한 대회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취임 첫 행보로는 리우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매수를 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IOC 위원들을 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IOC, 반기문 신임 윤리위원장 공식 선출…투명성 제고 기대그리고 2021년에 재선에 성공했으며, 2020 도쿄 올림픽 기간에 일본 나루히토 일왕과의 면담을 가졌다.#
5.2. 하버드 대학교 교수
자신이 유학했던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인 케네디스쿨에서 종신교수직을 제안받아 2017년 5-6월 쯤 미국으로 떠날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주준비를 하고 있다 한다. 정확한 직책은 DISTINGUISHED SERVICE PROFESSOR로 공직을 비롯한 사회 각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종신교수직이다. 실제로는 3개월간 초빙교수로 하버드에서 지냈다.5.3. 연세대학교 교수
연세대학교의 석좌교수이자 글로벌사회공헌원 명예원장으로서 2017년 7월부터 재직하게 된다. SDGs를 시작한 UN 사무총장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에대해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며, 실제로 대규모 온라인 공개 강의 Coursera에서 '반기문과 함께하는 21세기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강의가 진행 예정이다.또한, 반 전 총장의 석좌교수 취임에 맞춰 기후변화 등을 연구하는 '반기문 지속가능성장센터'가 창립될 예정이다.
5.4.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
2019년, 청와대가 제안한 국가기후환경회의[14] 위원장직을 사실상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한정우 청와대 부대변인은 17일 서면브리핑에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어제 반 전 총장을 만나 위원장직을 맡아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고 밝혔다. 앞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지난 8일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를 구성할 것과 반 전 총장에게 위원장을 맡길 것을 제안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참모진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라고 지시한 바가 있다.
노 실장은 반 전 총장과의 면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이런 뜻을 전달했고, 반 총장은 이에 대해 "미세먼지 문제,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했다"며 "국제 환경문제를 오랫동안 다뤄온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에 도움이 될 기회를 주신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세먼지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매우 높으나,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과제여서 본인이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칠까 부담과 걱정이 있다"며 "범국가기구는 모든 정당, 산업계, 시민사회 등까지 폭넓게 포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문 대통령이 전폭적으로 범국가기구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
그러나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고 돌아온 자리에서 "중국에 간 사흘동안 하늘이 참 맑았다. 미세먼지 절감에 대한 노력을 우리나라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야 경제규모 차이라던가 중국도 황사 보호나 공장 이전을 위해 쓰는 돈이 적은게 아니긴 한데, 이 발언을 들은 사람들은 우리보고 노력을 하라고 그 자리 앉힌게 아니란 입장이라 그래도 UN에서 한 게 있으니 잘할거란 기대감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 동시에 '먼저 국내적으로 미세먼지 배출원을 획기적으로 감축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15]
4월 29일자로 국가기후환경회의가 출범하면서 위원장에 정식 취임하였고, 2021년 4월 30일 국가기후환경회의가 기능이 중첩되는 2050 탄소중립위원회와 통합되면서 자연히 퇴임했다.
[1] 충주군의 시 승격은 1956년.[2] 반기문이 특출났다기보다는 전통적인 외교 관료나 외교 전문가들이 보였던 성향이었다고 보면 된다. 사실 참여정부 하면 흔히 떠올리는 외교안보 성향은 NSC나 통일부 쪽이 강한 편이었고, 실제 정책 방향을 주도한 것도 이쪽으로 본다.[3] 이때부터 우려왕(nowhere man)#으로서의 싹수가 보였다.[4] 명확히 정해진건 아니지만 관례적으로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에서 차례대로 사무총장을 배출한다. 보통 사무총장은 연임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 대륙에서 사무총장이 배출되면, 다음 사무총장 배출을 위해 4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다. 게다가 한 국가에서 복수의 사무총장을 배출한 적이 없다. 따라서 만약 우리나라에서 UN사무총장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에겐 안타까운 소식일 수밖에 없을 듯 하다.[5] 관례적으로 아시아의 상임이사국을 제외하고, 개발도상국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군소국가에서 입후보한다.[6] 종종 무시당하지만 인도는 핵보유국이고 경제성장세도 뚜렷한 인구, 영토대국이다. 문화적으로도 확실한 서남아의 맹주이며, 인도 문화는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등 서남아에선 단연 1등 컨텐츠이며 중앙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까지 널리 인기 있는컨텐츠이다. 영국 식민지였던 영향으로 이민도 글로벌하게 벌어졌는데 이는 화교의 네트워크를 넘는 수준이다. 인도컨텐츠가 인기 있는 동남아의 경우 유교문화권과 인도 문화권이 확연히 차이난다. 유교문화권인 베트남이 한류가 강하다면 인도색이 강한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에선 인도컨텐츠가 인기가 많다.[7] 이후 가니는 아프간 정계로 노선을 바꿔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2021년에 탈레반에 항복한 후 돈과 가족만 챙긴 채 해외로 망명했다.[8]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탁신 총리가 쫓겨나고 군정 통치 중이었다.[9] 그때 시라크가 반기문에 대한 칭찬을 누군가에게 하는데, 그 인물은 케네디를 학창시절에 만났던 빌 클린턴이다.[10]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며, ASEAN의 수장국이다. 동남아시아의 주도국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는 것.[11] 그리고 한국 역시 반기문 총장의 2차 임기 중인 2013년부터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었다.[12] UN 사무총장 후보 선거는 안보리 15개국에 의해 치러지는데, 전체 후보를 대상으로 하여 특정 후보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후보에 대한 찬반투표로 진행한다. 그리고 이런 투표를 계속 진행하면서 저조한 지지를 받는 후보들이 눈치를 보며 알아서 사퇴하는 형식이 진행되는 것이다.[13] 외교 관례상 특별한 결점이나 엄청난 실수를 하지 않는 한, UN 사무총장은 암묵적으로 연임하는 것이 관례다. 르완다 대학살과 유고 내전에서 실패한 부트로스 총장이 재임에 실패한 것이 대표적 예.[14]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제안 당시의 가칭).[15] 참고로 다음과 네이버 댓글 어느쪽에서도 호의적인 여론이 전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