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0 16:10:24

고황후 박씨

박부인에서 넘어옴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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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황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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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 애제 때 황태태후가 되었으나 평제 때 박탈되었다.
한 황후한 황태후 }}}}}}}}}

高皇后 薄氏
(? ~ 기원전 156년)

1. 개요2. 생애3. 여담4. 창작물에서

1. 개요

전한의 1대 황제 고제의 후궁이자, 5대 황제 문제의 생모.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흔히 박희(薄姬)나 박태후(薄太后), 효문태후(孝文太后)라 부른다.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는 후궁 품계인 박부인(薄夫人)으로 칭해졌지만 해당 기록을 빼면 다른 기록에는 부인으로 불린 적이 없다. 따라서 널리 알려진 이름인 박희는 후궁 품계인지 이름 불명의 여인을 칭하는 의미인지는 불명.

사후에 여후를 밀어내고 고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2. 생애

박씨의 어머니인 위씨(魏氏)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왕족이었지만, 위가 멸망한 후 혼란한 정국에서 오나라 사람인 박모(薄某)와 관계를 가져서 박씨를 낳았다.[1]

이후 박씨는 성장하여 당시 위나라를 재건하고 서위왕(西魏王)에 오른 위표의 후궁으로 들어갔는데,[2] 남편인 위표라는 인물이 처음에는 항우쪽의 사람이었다가, 항우를 배신하고 유방에게 붙었다가, 또 다시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게 붙었다가, 유방에게 패하고 사로잡혀 다시 유방쪽으로 붙었다가, 결국엔 그 상태로 형양 수비를 하던 중 항우가 쳐들어오자 도저히 저런 위표를 믿을 수 없었던 유방측 인사들에게 살해당한다. 덕분에 위표는 초한쟁패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배신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3]

이 위표가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 쪽으로 붙었다가 유방에게 패하여 사로잡혔을 때, 포로가 된 박희는 직조실에서 베를 짜는 처지가 된다. 후에 유방이 직조실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박희를 만나 후궁으로 들이긴 했으나 한 해가 지나도록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때는 전황이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도 있었을 듯.

그녀는 함께 후궁이 된 관부인, 조자아 등에게 "누가 총애를 받게 되건 서로를 잊지 말자."고 맹약하였는데, 어느날 유방이 성고에서 후궁들을 끼고 다닐 때 관부인과 조자아는 불려갔으나 박희만이 유독 따돌림을 당했다. 문득 박희가 한 말이 떠올라 관부인과 조자아가 웃자 이상하게 여긴 유방이 이유를 물어보아 이 일을 알게 되었는데, 그 말을 듣고 유방은 박씨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녀를 불러들여 잠자리를 가졌고, 기원전 202년에 황자 유항을 낳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반짝하는 총애였을뿐, 전체적으로 보면 박씨가 유방의 총애를 받은 기간은 아주 짧았다.[4]

그런데 이것이 의외의 전화위복이 된다. 이후 유방이 황제가 되고, 한신이 주살당한 기원전 196년에 당시 8세이던 박씨의 아들 유항이 대왕(代王)[5]으로 봉해졌고 박씨 자신도 대왕태후(代王太后)로서 동생 박소(薄昭, ?~ 기원전 170)를 대국의 승상(丞相)으로 삼았으며 고조 사후 고황후 여씨척부인과 다른 후궁들처럼 감금하기 커녕 바로 대나라로 보내주었다. 즉 박씨는 그다지 총애를 받지 못한 덕에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여후도 그런 그녀를 정적으로 여기지 않아 숙청할 필요가 없었기에 척부인과 다르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국(代國)에 부임하여 조용히 박씨 모자가 몸을 피하며 16년이 지난 기원전 180년에 고황후 여씨가 죽은 직후 권력을 잡고 있던 여씨 일족이 주발, 진평, 유장 등에 의해 모두 주살되고, 살아남은 유방의 자식들 중 박씨의 아들인 대왕 유항이 황제로 옹립되자 박씨 역시 황태후가 되어 장안으로 당당하게 입성한다.

그리고 이로서 여후로부터 비롯된 황통은 완전히 끊어지고,[6] 문제 이후 전한과 후한의 황제들, 심지어 촉한의 황제[7]들까지 모두가 박씨의 후손으로서 혈통을 이어가게 된다. 결국 유방의 총애도 못 받고 베나 짜며 비웃음 당하던 박씨야말로 유방의 여인들 중 최후의, 진정한 승리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

또한 박씨는 황태후가 된 이후에도 여씨처럼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평화를 중시하며 현명하게 처신해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일례로 기원전 176년 지방으로 부임하게 된 주발에게 모반의 조짐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자, 문제는 주발을 압송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를 들은 박태후는 곧장 아들인 문제를 불러서는 두건을 집어던지며 "주발 장군은 여씨를 타도할 때에 황제의 새수를 보관하고, 북군을 통솔했음에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어찌 작은 현에 있는 지금에서야 모반을 일으키겠는가?"라고 질타하였고, 결국 주발은 옥에서 나와 복직될 수 있었다. 여후의 경우 자신이 나서서 공신들을 잡아 족치며 토사구팽을 해댔던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외척 세력에 관해서도 여후는 자신의 일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나라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지만, 박씨는 동생인 박소가 칙사를 살해하는 일을 저지르자 그를 자결시키기도 하는 등, 자신의 일족인 외척의 준동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정치적 감각도 보여주었다. 여러모로 여후의 안티테제격인 포지션.

이런 언행 덕분인지 박씨가 죽고 시간이 흘러 후한이 건국된 뒤, 광무제는 여씨에게서 고황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박태후를 그 자리로 추존하였다.[8] 하지만 고제의 장릉(長陵)에는 합장되지 못했다.

3. 여담

박씨가 이렇듯 유방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척부인이나, 권력을 휘어잡았던 여후를 누르고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박씨가 아직 위표의 아내이고, 위표가 아직 위왕이던 시절, 당시 유명한 관상쟁이 허부(許負)가 박씨의 관상을 보고는 그녀에게 "천자를 낳을 상이다."라고 말을 해버린 것.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위표는 아내인 박씨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키고, 호기롭게도 유방과 항우의 줄다리기에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위표의 비정상적인 배신 릴레이에는 이런 황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9]

하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저 말을 들은 위표가 폭주해서 날뛰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박씨가 유방의 후궁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대로 베 짜는 종이 되었다가, 유방의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정말로 천자가 되어버린 것. 결국 저 예언이 완벽하게 들어맞은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저 예언이 없었다면 위표가 간이 배밖에 나와 박쥐행각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 박씨가 천자를 낳을 일도 없었을 거라는 소리다.

거기다 기이하게도 유방은 위표의 아내인 박희를 빼앗아 후궁에 넣은 후에도 전남편인 위표를 죽이지 않고 계속 막하에 부하로 두었고, 이 때문에 위표는 원래는 자신의 아내이자 장차 천자를 낳는다고 했던 박씨가 유방의 후궁에 들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전부 지켜봐야만 했다.

훗날 촉한의 황후가 된 한소열제[10]의 황후 목황후 오씨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전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는 박희의 인생사를 상당히 왜곡시킨 채 묘사했다. 박희가 추녀여서 유방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는 것과 유방 사후 여후가 박희와 유항을 유배보냈다는 것. 박희는 총애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외모에 대한 기록은 없었으며 되려 두 번이나 첩이 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외모는 척희보다는 못할 지 언정 박색이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그리고 유항은 알다시피 대왕이 되었기에 박희도 대국의 왕태후로 유배를 갈 일은 없었다.

4. 창작물에서

공통적으로 고조기와 문제기를 다룬 창작물에는 주요 인물로 묘사되며 각 작품마다 차이는 있으나 남겨진 기록 때문인지 공통적으로 생각이 깊고 조용한 인물로 묘사된다.

중국 드라마 대풍가(大風歌)는 전한 초기(고조기 ~ 문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주조연급 인물로 나온다. 본 드라마가 실제 역사를 그대로 따라가되 인물 묘사와 인간관계만 어느 정도 창작한 쪽이라 박희는 미인이긴 하지만 조용하다 못해 내성적인 성격이라 유방이 좋아하지 않아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설정이 들어갔다. 그러나 기록대로 아들 유항을 타이르거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사려 깊은 어머니로 나온다.

중국 드라마 미인심계에는 배우 백산이 담당. 여후 못지않은 지략과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1화부터 여후의 손에 죽을 뻔하자 8살도 안 된 유항을 데리고 출궁해 대나라로 향한다.[11] 그 후 대나라의 왕태후로서 유항을 훈련시키고 주인공 두의방(두운석)을 끊임없이 여후의 첩자로 의심하며 살벌하게 대립한다. 여후 사후에는 역사대로 유항이 5대 황제의 오름에 따라 황태후가 된다. 사후에는 그간 두의방을 싫어하고 괴롭힌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목적만 아닌 여자로서 질투도 있었음을 밝히며 여후는 권력을 가지고 자신은 행복한 결말을 얻었지만 남자(유방)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척희는 남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권력을 얻지 못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으나 그래도 척희가 부러웠기에 권력과 사랑 둘 다 얻은 그녀를 내심 질투했었다고. 이내 두의방의 품에서 눈을 감는다.

초한전기에는 쉬양이 담당. 척희와 반대로 현명한 여자라는 것이 부각되었다. 유방이 부상을 입었을 때 척희가 갖은 실책을 저지르는 동안 박희는 묵묵하게 유방의 치료와 간호에 힘을 썼다.[12] 실제 역사에서 척부인은 결국 정치적인 감각과 처세술 부족에 의한 그릇된 처신으로 여후의 원한을 사 아들을 포함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박희는 여후에게 숙청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황태후가 되고 외척들을 등용하기는커녕 제지하는 등 관리를 했으며 사후에도 그녀의 후손들이 황제가 되어 후한 대에는 고황후로 추촌된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 정식 결혼이 아닌 사통이었다고 전해지며, 아버지 박모는 회계군 산음현에서 죽었다고 한다.[2] 위표는 알만한 사람들은 알지만 구 위나라 왕족이니 곧 박씨의 외가 친척이다.[3] 물론 항우와 유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이 위표뿐만은 아니겠지만, 위표는 멀쩡한 부모까지 팔아서 핑계를 댔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그 다혈질인 항우조차도 이런 상식적인 비난을 생각해서 유방의 아버지를 삶아죽이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자.[4]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이 단 한 번뿐이었다고도 한다.[5] 대나라는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산시 성·내몽골 자치구의 접경 지대[6] 혜제 이후의 황제들이 혜제의 친자식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여후가 자신의 일족의 아이를 데려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므로 어쨌든 여씨 일족의 핏줄로 황통이 이어지는 것이 단절된 것은 확실하다.[7] 촉한의 황제들은 문제의 손자이자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들이다.[8] 당연하지만 광무제 역시 여후가 아니라 박태후의 후손이다.[9] 일부 소설 초한지 판본에서는 허부가 항우(혹은 범증)의 의뢰를 받고 위표를 유방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로 각색한다. 위표는 당시 지휘권을 받은 상태로 수수대전을 대패하여 전전긍긍하고 있던 상태였기에 가능한 발상. 허부가 배신 조용을 위해 먼저 위표의 관상을 보았을 땐 그저 불길함만 가득해서 말을 안하고 있다가 박희의 상을 예언을 한 것이다.[10] 상술했지만 역시 박 태후의 후손이다.[11] 물론 이는 드라마만의 왜곡으로 실제 역사에서 박희는 유항만 대나라로 보냈다. 전한도 후궁들은 부군이 죽기 전에는 궁에 남아야 한다는 계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희는 유방이 승하하고 나서야 대나라로 갔다.[12] 그래서인지 한나라 진영으로 돌아온 여후가 박희에게 감사를 표하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