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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835><colcolor=#ffffff> 이름 | 마누엘 펠레그리니 Manuel Pellegrini | |
본명 | 마누엘 루이스 펠레그리니 리파몬티[1] Manuel Luis Pellegrini Ripamonti | |
출생 | 1953년 9월 16일 ([age(1953-09-16)]세) | |
산티아고수도주 | ||
국적 | [[칠레|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4cm / 체중 78kg | |
직업 |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008835><colcolor=#ffffff> 선수 | 클루브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1973~1986) |
감독 | 클루브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1988~1989) CD 팔레스티노 (1990~1991) 오히긴스 FC (1992~1993)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94~1996) CD 팔레스티노 (1998) LDU 키토 (1999~2000) CA 산 로렌소 (2001~2002) CA 리버 플레이트 (2002~2003) 비야레알 CF (2004~2009) 레알 마드리드 CF (2009~2010) 말라가 CF (2010~2013) 맨체스터 시티 FC (2013~2016) 허베이 화샤 싱푸 (2016~2018)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18~2019)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2020~ ) | |
국가대표 | 1경기 (칠레 /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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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칠레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20년부터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의 감독을 맡고 있다.2000년대 중반 후안 로만 리켈메, 마르코스 세나 등과 함께 비야레알 CF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맨체스터 시티 FC 감독을 맡았다.
부임 첫 해에 맨시티의 더블을 이루었지만, 단기적인 성과에만 치중하고[2] 어린 선수들을 내치며 보수적인 선수 기용과 로테이션의 부재 등 전술적 문제점이 많은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성적에 명성이 있는 편이다. 비야레알에서 4강, 말라가에서 8강을 찍었으나 레알 마드리드에선 16강에 그치며 주춤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는 두 시즌은 16강에서 그치더니 세번째 시즌에서 죽음의 조에서 조별 1위로 예선을 통과했다. 그리고 결국 PSG를 꺾고 4강을 기록했다.
2. 선수 생활과 비야레알 CF 이전까지의 감독 생활
선수 시절. 참으로 얼굴이 한결같다.
성에서도 대충 알 수 있지만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다. 우니베르시다드 칠레의 레전드급 선수 중 하나로, 유스 때부터 쭉 우니베르시다드 칠레 소속으로, 프로에서 13년 간 뛰면서 리그와 컵을 통틀어 451경기를 출전한 원 클럽 맨이다.[3] 수비수이고, 또 남미 선수기도 해서 돋보이는 선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노력파 선수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국가대표도 승선했고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다만 월드컵 스쿼드에는 커리어 중 칠레가 진출한 두 번의 월드컵 중 한 번도 승선하지 못했다. 그래도 선수시절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벵거, 무리뉴 등 보다는 선수시절 이력을 많이 남겼다. 추가적으로 선수시절 전체를 통틀어 받은 카드가 단 7개라고 한다.
33세라는 나이에 빠르게 은퇴한 후, 다른 일을 잠시 하다가 우니베르시다드 칠레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2013/14시즌 스티븐 제라드가 당장 은퇴하여 감독으로 부임하는 것과 같은 사례다.
그 이후 남미의 여러 클럽을 전전하며 10년간 명성을 키워나간다. 주로 자국 칠레의 여러 빅클럽에서 컵대회와 리그 우승컵을 간간히 뽑아주었고, 이때도 현재의 전술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1999년 LDU 키토를 자국리그에서 우승시킨 데에 이어, 남미의 챔피언스 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16강에 진출시키며 더욱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아르헨티나로 이동, 이름있는 명문들인 산 로렌소와 리버 플레이트를 맡게 된다. 산 로렌소에선 후반기 리그 우승, 그리고 당시 유럽의 UEFA 유로파 리그와 비견될 수 있었던 코파 메르코수르에서 우승을 시키면서 더블을 달성. 이후 아르헨티나 최대우승팀인 리버 플레이트로 이동, 다시 후반기 리그를 우승으로 끝맺는다. 하지만 선수 유출로 더이상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고 2003/04시즌 전반기를 끝으로 사임하게 된다.
아르헨티나 시절에 이후 다시 만날 마르틴 데미첼리스, 파블로 사발레타를 처음으로 지도해보게 되고, 더불어 리버 플레이트 시절, 현재까지 15년 가까이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오른팔 루벤 쿠시야스를 만나게 된다.
3. 이후의 감독 생활
3.1. 비야레알 CF, 노란 잠수함의 전설
펠레그리니는 2003/04시즌이 끝난 즉시 스페인의 비야레알 CF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비야레알은 2001/02 시즌에 15위, 2002/03 시즌에도 역시 15위로 겨우 강등을 모면했다가 03/04 시즌에는 리그 8위를 거두던 중하위권 팀이었다.[4]
펠레그리니는 이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먹튀를 하고 돌아온 디에고 포를란을 영입하게 된다. 후에 보게 되지만, 이 영입은 신의 한 수가 된다.
비야레알은 그 시즌 폭발하고 펠레그리니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인터토토컵에서는 오덴세,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함부르크라는 인터토토컵 치고는 어려운 대진을 이겨내고 우승으로 그 다음 시즌의 UEFA컵 진출권을 따낸다. 그 이후 UEFA컵에서는 8강에 진출, AZ에게 져서 탈락한다.
당시 비야레알을 빛낸 것은 리그에서의 성적. 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다. FC 바르셀로나와 당시 갈락티코 끝물이던 레알 마드리드를 따라잡진 못했지만 굉장히 가열찬 경쟁을 하던 중상위권 여러 팀들을 따돌리고 팀 역대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거머쥔다. 이 때 포를란은 사무엘 에투와 함께 라리가 득점왕에 올랐고[5] 리켈메는 15골을 집어넣으며 대활약[6]. 이때부터 비야레알은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2005/06시즌에 비야레알은 뎁스가 얇은 스몰클럽에서 챔스를 뛰느라 리그성적은 많이 떨어지고, 포를란의 부진도 겹쳐 7위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이 때, 비야레알 전성기에서 제일 많이 기억되는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4강 진출이 일어난다. 3차 예선에서 에버튼 FC를 2승으로 간단히 이기고 올라온 비야레알은 조별리그에서 벤피카, 릴 OSC,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진출한다. 일반적으로는 벤피카와 맨유의 진출이 점쳐졌지만, 피터지는 접전 끝에 비야레알은 맨유에게 2무를 포함 2승 4무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다.
16강에선 레인저스를 만나 역시 2무에 원정골 원칙으로 8강까지 진출한다. 8강에서의 상대는 인테르. 밀라노에서의 1차전에서 1분내에 포를란이 선제골을 넣었지만 당시 기량이 절정이던 아드리아누의 동점골과 오바페미 마틴스의 역전골로 인테르가 승리. 하지만 비야레알 홈에서는 달랐고, 비야레알은 인테르를 후안 파블로 소린이 폭발하며 경기내내 털면서 기회를 만들지만 스코어 자체는 1:0으로 승리.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번에도 원정골로 비야레알은 챔스 4강에 진출하게 된다. 4강에선 아스날 FC를 상대로 1차전에서 콜로 투레의 골로 패배. 2차전에선 이번에도 주도하는 경기였지만 리켈메의 페널티킥 실축 등의 불운으로 패배, 결국 결승진출엔 실패한다.
2006/07시즌엔 리그 5위를 기록. 포를란이 부활했지만, 챔스진출엔 실패한다. 인터토토컵에서도 광탈하면서 실패한 시즌으로 기록되었다.
2007/08시즌엔 다시 부활한다. FC 바르셀로나를 무려 10점차로 따돌리고 리그 2위를 기록한다. 스몰클럽으로서는 역대급의 업적. 포를란이 떠났지만, 주포 니하트 카베시를 중심으로 훌륭한 성적을 이룬다. UEFA컵(유로파 리그)에선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게 패하며 32강에 그친다.
2008/09시즌은 다시 리그 5위. 시즌 초엔 2위를 다퉜지만. 중반부터 챔스 영향인지 성적이 좋지 않아 순위가 떨어져 챔스진출에 실패한다. 이 때 리켈메는 떠난 뒤였고, 피레스와 세나, 그리고 주세페 로시의 활약으로 챔스에서 다시 좋은 성적을 내게 된다. 챔스에선 다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만나, 또다시 2무를 기록한다. 다른 점은 이번엔 맨유에 이은 2위로 진출했다는 점. 16강에서는 파나티나이코스를 만나 1승 1무로 진출.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다시 아스날이었다. 1차전 홈에서 세나의 선제골로 1:1로 비겼지만, 어웨이에선 마르코스 세나와 산티 카솔라가 부상으로 빠진 상태로 관광당했다. 그리고 이 시즌 뒤에 펠레그리니가 떠나면서, 펠레그리니의 비야레알 시대는 끝나게 된다. 비야레알은 그 뒤로도 몇 년간 강팀의 포스를 유지했으나, 로시가 부상으로 드러눕고 카솔라가 팀을 떠나자 바로 강등당하고, 세나도 떠나 사실상 펠레그리니 시절과는 연결이 단절되게 되었다.
이때부터 당연히 펠레그리니는 이름이 높아졌다. 헌데 제일 잘 기억되는 선수인 후안 로만 리켈메와 펠레그리니의 사이는 꽤나 유명할 정도로 좋지 않았으며, 결국 계속 불화가 나오다가 2006/07시즌 초반 이후 펠레그리니가 플랜에서 리켈메를 빼버렸고, 리켈메는 계속된 압박으로 결국 비야레알을 떠나게 된다. 단 여기서 펠레그리니가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리켈메를 내친 것은 아니다. 리켈메는 원래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선수였기도 하고, 또 항목에도 있지만 리켈메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리켈메에게 모든 경기운용을 맡겨야 제대로 경기가 돌아가는 타입이기도 하다. 즉, 의존도가 높았다. 하지만 펠레그리니는 리켈메가 나간 자리를 로베르 피레스와 산티 카솔라같은 선수로 완벽히 대체하여 리그 2위라는 성적을 내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3.2. 레알 마드리드 CF
비야레알에서의 전적을 본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스는 갈락티코 2기의 시작에 맞춰 그것을 가동할 감독으로 후안데 라모스를 버리고 펠레그리니를 데려오게 된다. 펠레그리니는 비야레알을 떠날 일이 없을 것이라며 부정했지만, 레알의 계속된 구애로 결국엔 비야레알을 떠나게 되었다. 스몰클럽에서 클래스 낮은 선수로도 훌륭한 성적을 만들어낸 감독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카처럼 월드클래스 선수들과 카림 벤제마, 사비 알론소 등의 A급 선수들을 영입하였다. 이때 레알은 정말로 역대급으로 돈을 풀었다.[7]
결국 결과는 밍숭맹숭했다. 시즌 자체의 성적만 보면 아주 실패한 시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펠레그리니가 이 때 기록한 96승점은 무리뉴가 우승시즌에 경신할때까지 역대 최다승점이다. 하지만 챔스에서 올랭피크 리옹에게 패한 데 이어, 국왕컵에서 3부리그의 알코르콘에게 패해 탈락하며 무관으로 시즌을 마무리. 리그 성적은 FC 바르셀로나가 워낙 대단했을 뿐 준수한 성적이었으나, 챔스와 컵 광탈은 즉 (갈락티코 스탠다드에서는) 실패한 시즌을 의미했고, 펠레그리니는 그대로 잘려버린다.
레알에서의 실패의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지목되고 많은 키배가 이루어지는데, 레알의 팬들은 펠레그리니를 까는 입장이 많고, 타팀 팬들은 펠레그리니를 옹호하는 입장이 많다. 하지만 갈락티코의 실패는 1기와 같이, 제대로 감독에게 선수영입 자유도를 부여하지 않았고, 선수기용에 관해선 알아서 하던 델 보스케와 달리[8] 선수기용에 대한 자유도도 부여하지 않았다. 펠레그리니가 기용하길 원하던 웨슬리 스네이더와 아르연 로번을 페레그는 상품성이 적다고 팔아버렸고, 펠레그리니가 원하지 않고, 비싼 선수를 굳이 데려왔다.[9] 거기에 페레즈가 선수 선발에 간섭했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데, 카카와 알비올 등의 폼이 좋지 않았음에도 기용을 강권했다는 말이 굉장히 많다. 펠레그리니는 이후 기자회견에서 갈락티코 2기를 상징하는 말로 회자되는 마드리드에서 나는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최고의 기타리스트만 10명이 있다고 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게는 피아니스트나 드러머가 없었다는 말을 남긴다. 심지어는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이후 세계최고의 감독이라 할 수 있는 주제 무리뉴도 더 다듬어진 레알에서 슈퍼코파를 뺄 시 3년간 컵 1개, 리그 1개의 트로피를 드는 데에 그친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단, 펠레그리니가 1년에 걸쳐 결국 제대로 스타 선수단을 휘어잡고 경기력을 향상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 레알에서의 1년이 성공한 1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3.3. 말라가 CF
이후 펠레그리니는 멕시코 대표팀으로부터 제안을 받지만 거절했고, 당시 중동 석유재벌이 소유하게 되며 제 2의 맨시티의 포부를 높이던 말라가 CF의 감독으로 취임했다.첫 시즌엔 시즌 중간, 이적시장 때도 아닌 정말 중간에, 순위가 강등권에 쳐져 있을 때 취임했고 당시 영입선수도 별 게 없었기에 거의 시즌 후반까지 강등권에서 고전을 했지만, 최후반 줄리우 밥티스타의 대활약으로 기적적으로 생환, 후반 연승으로 11위로 중위권에 안착한다.[10]
2번째 시즌은 본격적인 말락티코의 시작이었다. 전에 같이 있었던 카솔라를 필두로 뤼트 판니스텔로이, 호아킨 산체스 등 호화로운 스쿼드를 구축, 2위 바르셀로나의 절반도 안되는 득점수에도 불구하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추격을 뿌리치고 레반테를 제치며 4위, 승점 58점으로 챔스에 진출한다.[11] 국왕컵에선 16강에서 레알을 만나 탈락. 산티 카솔라가 에이스 역할을 했고, 이스코가 부상한 것이 이 시즌이다.
그런데 2012/13시즌, 말라가 구단주가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 드러나면서 팀내 최다득점자 살로몬 론돈, 카솔라, 마타이센, 부오나노테, 그리고 나초 몬레알까지 주전 라인 중 반이 뜯기면서 위기를 맞는다. 선수들 주급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에서 말라가는 그래도 순항했고, 이그나시오 카마초를 터뜨리고, 맨시티가 버린 로케 산타 크루즈와 벤피카가 버린 하비에르 사비올라 등의 한물 간 선수들을 적당히 이용하며 챔스에서 AC 밀란을 제치고 조 1위를 달성하고, 리그에서는 주급을 안 줘서 유럽대회 진출이 막힌 이후 설렁설렁 하다가 순위가 떨어졌지만(6위) 후반기까지 챔스'권' 경쟁을 했다.[12]
챔스 16강에서는 FC 포르투를 만나 어웨이에서 1:0, 홈에서 0:2로 이겨 8강에 진출.
8강에서는 분데스리가 2연패에 주가가 다시 폭발하고 있는 위르겐 클롭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만난다. 보루센이 쉽게 이길걸로 예상되었지만, 홈에서 0:0으로 비긴 데에 이어 어웨이에선 2:3으로 져서 탈락. 도르트문트는 홈인 지그날 이두나 파크에서 90분 이후 2골을 넣으며 엄청난 극장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여기서 도르트문트의 세 번째 산타나의 골이 어딜 봐도 명백한 오심이었지만 말라가의 둘째 골도 당연한 오심이라 그냥 넘어갔다. 도르트문트가 레알을 4:1로 대승을 거두고 바르셀로나를 7:0으로 제압한 바이에른 뮌헨에게도 긴장감을 주는 경기를 하다 1:2로 지면서 말라가의 저력이 새삼 부각되게 되었다.
3.4. 맨체스터 시티 FC
자세한 내용은 맨체스터 시티 FC/펠레그리니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3.4.1. 공백기
무직자인 현재 에버턴 FC, 발렌시아 CF 등과 강하게 링크되고 있다. 본래 발렌시아행이 점쳐졌으나, 감독 본인이 잉글랜드 생활에 만족한다는 느낌의 인터뷰를 해서 알 수 없게 되었다.3.5. 허베이 화샤 싱푸
헌데 갑자기 뜬금포로 허베이 화샤 싱푸 감독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팬들은 또다시 황사머니의 힘을 실감하는 중이다.EPL시절 적장이었던 상하이 상강 감독 안드레 빌라스보아스와 다시 만난 펠레그리니
허베이는 2015년 갑급리그에서 승급했는데 [13], 2016년 8월부터 펠레그리니가 지휘봉을 받아 7위를 했고, 2017년에 강팀으로 거듭나서 슈퍼리그 3위를 달리고 있다.2017년 시즌 내내 3위를 달렸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펠릭스 마가트가 이끄는 산둥 루넝에 5-4로 패했고, 4위로 허베이를 바짝 뒤쫓던 파비오 칸나바로의 톈진 취안젠이 광저우 헝다를 2-1로 이겨 순위가 역전, 허베이는 4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아쉽게도 3장의 티켓이 걸린 2018년 아챔 티켓은 얻지 못했다.
2018년에는 마스체라노라는 특급선수를 데려오고도 10경기까지 3승 3무 4패로 중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인데, 그런 와중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그를 노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디 마르지오, 스카이스포츠의 기사로 보아 데이비드 모예스의 후임으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로 가는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5월 20일 충칭 리판과의 경기를 2-1로 승리한 후, 허베이 화샤 공식 웨이보에서 마누엘 펠레그리니가 5월 20일부로 팀을 떠난다고 발표했고, 21일 중국을 떠났다. 이후 스카이스포츠에서도 마누엘 펠레그리니가 허베이 화샤와 계약을 해지했다고 발표했다. 5월 20일은 월드컵 브레이크 전의 마지막 경기이다. 마스체라노를 데려오고도 좀처럼 중하위권을 전전하는 성적에 불만을 품은 구단측과 웨스트햄의 오퍼가 오자 EPL로 복귀하고 싶은 펠레그리니의 뜻이 맞아 협상이 급물살을 탄 것으로 보인다. 발표는 갑작스러웠지만, 귀국날짜를 볼 때, 해지협상은 상당기간 이전부터 벌여온 듯 하다. 어쨌든 CSL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승리해 팀 순위는 정중앙인 8위로 맞춰놓은 후 유종의 미를 거두고 팀을 떠났다. [14]
허베이 후임은 의외로 2017/18시즌에 선덜랜드 A.F.C.를 3부로 강등시킨 크리스 콜먼이다. (물론 선덜랜드 감독 하기 전에 웨일스 황금세대 이끌고 유로2016에서 4강까지 가긴 했다.) 350만 파운드의 연봉으로 2.5년 계약이다.
3.6.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3.6.1. 2018-19 시즌
5월 22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구단과 3년계약했다. 연봉이 1,000만파운드(약 145억원)으로 안토니오 콘테 첼시 감독, 위르겐 클롭보다 더 높다. 허베이에서 1,200만 유로 (160억원)을 받았는데, 조금 깎였지만, 그래도 상당히 예우해 준 셈이다. 그리고 웨스트햄은 2018년 여름 펠레그리니 감독을 지원하기 위해 폭풍영입을 단행했다. 워낙 큰 규모의 이적 지출을 한지라 웨스트햄이 유로파 리그 진출에 실패한다면 큰 손해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초반에 리버풀, 본머스전에서 모두 패배하여, 암울한 리그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슷하게 2패를 기록한 처지였던 아스날전에서도 3-1로 참패했다. 본인은 아스날전의 팀 퍼포먼스에 만족한다고 밝혔지만. #. 영국 도박사들은 웨스트햄의 3패 후 중도하차할 감독 1순위로 무리뉴를 제치고 펠레그리니를 놓고 있다. 그 다음 울버햄튼전도 져서 4연패가 되었다. 유일하게 승점을 못먹고 있는 프리미어 리그 팀이다
파리목숨인 EPL 강등권팀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펠레그리니 조기해임은 어렵다고 한다. 구단측은 펠레그리니와의 계약에서 해고에 관한 자세한 조항을 넣지 않아서 만약 해고를 하게 되면 큰 손해를 본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기경질을 하면 계약 기간까지 남은 연봉을 그대로 줘야 하는데, 이 액수만 200억원을 훨씬 넘기 때문에, 구단이 경질을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5라운드 에버튼전에서 3-1로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 연패와중의 인터뷰에서는 "희망적이다. 곧 좋아질 것"이라고 장담 (또는 허세)를 하긴 했지만, 심적 압박감이 심했는지, 이 경기를 이기고 나서야 펠레그리니의 웃는 모습이 처음 나왔다
에버튼 전에서 4-3-3 시스템으로 변화한 것이 성공하면서 첼시전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을 들고 나왔다. 첼시전을 앞두고 치차리토, 아르나토우비치가 빠져 라인업은 다소 바뀌었으나 큰 차이는 없었다. 첼시전에서도 수비 상황에서 첼시 공격진들과 미드필더들이 조르지뉴를 제외하고는 딱히 합이 잘 맞지 않는 모습과 사이드 전환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며, 특히 캉테는 컨디션은 둘째치고 맞지 않는 위치였던 것 같았고 웨스트햄의 조밀한 수비와 공격지점 25m 자유?라는 펠레그리니가 예전부터 보여주던 그런 자유로운 움직임의 공격으로 오비앙-노블 등의 미드필더 진에서부터 빠르게 원-투 패스나 몇 안되는 터치 내에 빠르게 넘기고 공격진들도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발레타도 공격시 꽤나 올라오며 공격상황을 많이 만들었다. 수비상황에서 컴팩트한 간격유지를 잘하면서 실점 없이 효율적인 공수전환을 이어갔다. 적어도 4-3-3 시스템 전환 이후 연패에서 벗어나 펠레그리니가 원하는 축구를 보여주는 느낌..그리고 리그컵에서는 8-0 대승을 거두었다. 시즌 초반 무리뉴와 함께 경질 1순위에 올랐으나 7라운드 맨유전에서 3-1 승을 거두며 점차 올라오려는 분위기가 되었다.
결국 17라운드까지 리그 9위로 중위권으로 안정시키고 있는 반면에, 웨스트햄과 겨우 2점차로 6위에 처져있던 맨유 감독 무리뉴는 2018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임되어 펠레그리니와 극과 극이 되었다.
25라운드에서 리버풀과 무승부를 기록하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친정팀이 다시금 우승경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3.6.2. 2019-20 시즌
전해의 초반부는 매우 죽을 쑤었지만 EPL 복귀 2년차에서는 실력을 보여주며 초반부에 팀을 상위권에 고정시키고 순항시키고 있다.하지만 10월부터 연패의 부진에 빠져 팀이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11월부터는 경질설이 돌고 있다. 웨스트햄이 지난 여름 중국 다롄 이팡으로 간 전 뉴캐슬 감독인 라파엘 베니테스를 불러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레스터전 패배를 끝으로 웨스트햄을 떠나게됐다. 웨스트햄은 곧 새 감독으로 펠레그리니의 전임 감독인 데이비드 모예스를 다시 불러들였다.
3.7.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2020년 7월, 레알 베티스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2020-21 시즌에 부임하며 계약 기간은 2023년까지라고 한다.19-20 시즌에는 15위였던 베티스를 20-21 시즌 최종 순위를 결국 리그 6위로 끌어올려 베티스의 2021-22 시즌 UEFA 유로파 리그 진출을 이끌어냈다.
3.7.1. 2021-22 시즌
2021-22 시즌에는 지난 시즌의 돌풍이 운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지 리그 단독 3위를 기록하며 챔스권을 순항중이다. 4위인 승격팀 라요 바예카노와 함께 21-22 시즌 라리가 돌풍의 주역이다.
후반기에도 좋은 경기력을 이어가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 달린 4위를 쫓는 5위로 경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컵대회의 경우 UEFA 유로파리그에서는 16강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게 떨어졌으나 코파 델 레이에서는 발렌시아 CF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 함으로써 맨체스터 시티 시절 2015-16 시즌 리그컵 우승 이후 6년만의 메이저 트로피이자 베티스 감독으로서의 첫 메이저 대회 우승 타이틀을 얻게 된다. 덤으로 베티스로서는 17년만에 차지하는 메이저 트로피.
2019-20 시즌에 리그에서 겨우 강등권을 벗어난 15위에 그쳤던 팀을 이끌고 2020-21, 2021-22 시즌 모두 유로파 진출 순위까지 올리고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시킴으로써 자신의 지도력을 또 한번 입증했다.
3.7.2. 2022-23 시즌
현재 리그에서 12R 기준 4위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고 유로파 리그도 조별 리그 1위에 성공했다.이후 리그 6위를 기록하며 유로파 리그 진출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3.7.3. 2023-24 시즌
4. 감독으로서의 재능
온화한 성격을 바탕으로 폼이 떨어진 선수들을 다시 재활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다. 말라가 시절에는 폼이 다 떨어져 있던 산타크루즈를 재활시켜 재미를 봤고, 2013년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만치니 시절 폼이 다 떨어져 있던 나스리를 완벽히 부활시켜 놓은 적이 있으며 베티스에서도 옛 제자 이스코를 다시 만나 리베급 폼으로 끌어올렸다. 신사적인 성격에 걸맞게 언론플레이나 공격적인 인터뷰는 하지 않는 성격으로, 언론을 대하는 태도나 인터뷰는 가히 모범적이라고 할만하다.주전술은 공격적인 4-2-2-2(라고 분류되는) 전술로 비야레알 때부터 때때를 제외하면 이 전술의 틀 자체는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고 자신이 주장한다. 그 외로는 전체적으로 치고 빠지는 부분전술을 아주 잘 사용하는 감독이다. 그래서 점유율을 압도적으로 많이 가져가거나, 선수비 후역습 스타일의 축구를 지향하지 않고, 수비를 할 때는 수비를 하고 공격을 할 때는 빠르고 효율적인 공격으로 상대방을 흔드는 축구를 지향하는 편이다. 사이드에서부터 빠른 원투패스로 골을 성공시키거나, 전방에서부터 패스를 간결하게 주고받는 압박으로 공격을 이끌어나가는 스타일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이런 전술적 스타일은 상황에 따라 공격과 수비가 자유롭게 왔다 갔다 타는게 큰 핵심이다. 그에 걸맞게 로테이션도 잘 돌리고 전술적으로도 유연한 편이다. 그 예로 2013년 맨시티-첼시전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야야 투레를 공미로 놓는 3미들 전술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마지막 조 하트의 삽질로 패배하고 말했지만, 전술 자체는 무리뉴의 첼시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2015-16 시즌에는 드디어 투톱을 포기했다. 여담으로, 맨시티에서는 유스를 기용 안한다고 비판하지만, 말라가나 비야레알에서는 유스 기용을 잘만 하던 양반이다. 벵거처럼 중장기 플랜을 일임시켜줘야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풀백 살리기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에메르송 로얄이 리그 내에서 베스트급 활약을 하다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자마자 급격하게 부진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15] 또한 2021/22시즌부터는 아스날에서 부진을 거듭하던 엑토르 베예린의 폼을 부활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94~1996)
- 코파 칠레: 1995
- 코파 인테라메리카나: 1994
- LDU 키토 (1999~2000)
- 에콰도르 세리에 A: 1999
- CA 산 로렌소 (2001~2002)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00-01
- 코파 메르코수르: 2001
- CA 리버 플레이트 (2002~2003)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02-03
- 비야레알 CF (2004~2009)
- UEFA 인터토토컵: 2004
- 맨체스터 시티 FC (2013~2016)
-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2020~ )
- 코파 델 레이: 2021-22
5.2. 개인 수상
- 트로페오 미겔 무뇨스: 2007-08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 2013년 12월, 2014년 01월ㆍ 12월, 2015년 08월
6. 여담
- 별명은 '엔지니어'. 안정적인 수비를 바탕으로 그 위에 공격력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팀을 만들어왔는데, 이 과정에서 전술이나 선수 선발, 위치등이 상당히 유기적이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는 느낌을 가져서 이런 별명이 생겼다. 게다가 그는 칠레 대학에서 토목 공학을 전공했다!! 실제로 토목 기사 자격증까지 있다고.....
- 상당한 간지의 미중년~미노년으로 무조건 착용하다시피 하는 수트 간지는 장난이 아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지만 눈에서 나오는 신비한 눈빛 역시 이야기할 만하다. 그와 함께 얼빠를 양성하고 있다...
- 경기장에서나 어디서나 누구와는 다르게 조용한 편. 말라가에서 영웅시되었을 때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 패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주의 리그 경기에서도 그 분위기에 관중들이 이름을 연호하는데도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경기장을 나가버려서 주장 웰링턴이 통로에서 꺼내와서 관중들의 연호를 받아야 했다. 맨시티로 옮겨간 후에도 말라가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긴 그가 떠난 뒤로 중하위로 추락한 팀을 생각하면...
- 주제 무리뉴와 사이가 아주 좋지 않다. 워낙 무리뉴가 이곳저곳 시비를 걸고 다니는게 일상인 인물이다보니 평소 젊잖은 성격의 펠레그리니와도 갈등의 골이 깊은 듯하다. 웬만해서는 다른 감독들한테 험한 말 안하는 펠레그리니지만 무리뉴에게만큼은 종종 까칠한 인터뷰를 보여주기도 한다. ####### 최근 맨시티와 첼시가 리그에서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데 맞대결에서 경기가 끝나고 둘이 악수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감정의 골이 꽤나 깊어진 모양. 그런데 무리뉴 사단의 일원이었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와는 사이가 좋은 듯, EPL 시절에 이어 중국 슈퍼 리그에서도 다시 만났는데, 경기 전에 담소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한다.
- 영어에 능숙하다. 코치 자격증 수업을 영국에서 받아서, 영어에 능숙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프리미어 리그에 왔을 때도 언어상으로 아무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맨체스터 시티에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선수들이 많아서, 경기 중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선수들에게 지시를 할 때 다급하면 스페인어가 종종 튀어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다(...).
- 벵거와 전술적인 철학이나 고집이 상당히 비슷한 감독이다. 아마 펠레그리니가 20년만 젊었어도 벵거의 제일 유력한 후계자로 많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둘이 네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거의 맡을 뻔 했었다. 당시 이비차 오심 일본 대표팀 감독이 건강 이상으로 감독직에서 1년만에 물러나고 일본축구협회에서 새 감독을 찾던 중 펠레그리니와 접촉했다. 펠레그리니는 인터뷰에서 당시에 일본 대표팀을 거의 맡을 뻔 했지만 4년이라는 시간을 유럽에서 떨어져 일본에서 보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유럽 속에서 자신이 잊혀져 가는 게 두려워서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 대표팀을 정식으로 새롭게 맡게 된 사람은 자국인 출신의 오카다 다케시.
[1] 스페인어 발음: /maˈnwel ˈlwis peleˈɣɾini ripaˈmonti/.[2] 이 부분은 맨체스터 시티에서의 본인의 입지에 대한 불확실한 점이 한부분 차지했을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부임 직후에도 계속해서 나온 타 감독(펩과 같은)의 부임설이나 그의 부임 도중에 나온 펩 선임 발표라던지. 아래 감독으로서의 재능 부분에 서술되어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중장기적 플랜을 바탕으로 했을때 드러난다.[3] 단 그가 뛰었을 때 우니베르시다드는 암흑기여서, 리그 우승컵은 한 번도 들지 못했다. 다만 이후 감독으로는 우승컵을 드는데 성공했다.[4] 비야레알은 원래 창단이후 14시즌동안만 1부리그에 있던 팀인만큼 그저 그런 중하위권팀이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즌은 2부리그나 지역리그에서 활동했다.[5] 에투가 PK골이 3골 많아서 공식 득점왕은 포를란이다.[6] 이 때 뛴 다른 선수로는 산티 카솔라가 있다.[7] 그 돈을 풀어 펠레그리니를 지원했다고 보기엔 뒤의 내용들을 보면 미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8] 갈락티코가 막장티코가 된 것은 델 보스케가 나가고 마케렐레가 나간 시점이다. 델 보스케가 나가면서 무게있는 감독이 없어졌고, 페레즈의 기용 아래에서 갈락티코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9] 둘은 각각 인테르와 뮌헨으로 이적했는데 스네이더는 합류한 시즌인 2009-10 시즌, 로번은 2012-13 시즌 트레블의 주축이 되며 펠레그리니의 안목이 맞았음을 증명했다.[10] AS 로마에서 컵대회만 잘하고 리그에선 못하면서 팀이 팔고싶어했으나 오히려 충성심은 높은 바람에 되려 로마 팬들의 속을 썩였던 그 '밥장군' 맞다.[11] 동시에 비야레알은 강등당했다.[12] 비록 6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원래는 UEFA 유로파 리그 예선에 진출할 예정이였지만 FFP 규정 위반으로 진출권을 박탈 당했다.[13] 이때 에두를 전북에서 거액의 이적료로 데려와서 썼고, 에두는 후반기에만 맹활약하여 17골을 넣어서 허베이가 슈퍼리그로 승급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하지만, 팀이 슈퍼리그로 올라가면서 더 비싼 용병을 데려오면서 100억 원의 위약금까지 지불하며 자유계약으로 풀어주었다.[14] 중위권에 팀들이 몰려있기 때문에 이 경기를 졌다면 10위 밖으로 전락할 뻔 했다. 허베이가 무지막지하게 돈을 지르는 구단인데다가, 선수와는 달리 감독에는 중국 축협이 고액연봉에 그다지 제재를 가하지 않기 때문에, 후임 감독도 여러 명의 특급감독이 물망에 오르고 있는데, 중국 웹에서는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등이 거론되고 있다.[15] 바르셀로나로 임대 복귀 후 베티스전 시절 경기력은 어디갔는지 처참한 실력을 보여주고 곧바로 토트넘으로 팔려나갔으며 거기서도 실망스러운 폼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22-23 시즌 이후 폼이 급상승하여 토트넘의 핵심 자원이 되었다.[16] 비유럽인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일궈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