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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의 내전 중의 전투
1.1. 개요
Battle(Siege) of dyrrhachium | ||
시기 | 기원전 48년 7월 10일 | |
장소 | 로마 공화정 일리리아 속주의 디라키움(현 알바니아의 두러스 시) | |
원인 | 카이사르의 내전의 일부 | |
교전국 |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 |
지휘관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1]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볼루세누스 콰드라투스 로우킬루스→ 에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가이우스 트리아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
병력 | 25,000명+@ | 45,000명+@ |
피해 | 2,000명 | 1,000 ~ 4,000명 |
결과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패배. |
디라키움 공방전은 기원전 48년 4월에서 7월까지 디라키움(지금의 알바니아 두러스)에서 카이사르의 내전의 일부로써 벌어진 일련의 전투 중의 하나이다. 방어 측에는 디라키움 보급기지의 폼페이우스 군대가 있었으며, 공격 측에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있었다. 디라키움 기지의 포위 이후 카이사르의 퇴각까지 전선에 큰 변동이 없었기 때문에 포위전의 양상이 짙다.
폼페이우스의 막판 공세에 허점을 찔린 카이사르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퇴각했지만, 카이사르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일부러 져줬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가 추격을 중지시켰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군대는 보병 1천 명, 기병이 200명 정도의 경미한 손실만 입고 질서정연히 퇴각할수 있었고, 이때 살아돌아간 카이사르의 정예병들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어난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2. 배경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발발한 내전에서 20개 대대로 이루어진 카이사르의 본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폼페이우스의 파벌을 성공적으로 분쇄한 후 해전에서 9천 명을 잃어가며 이베리아 반도를 정벌하는 데 성공했다.부관인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이끄는 4개 군단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공략했지만 북아프리카 북부에서 누미디아의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와 조우해 궤멸에 가까운 손실을 당하고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 장악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부관 쿠리오 본인도 전사했다.
제해권 장악에 실패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의 중요한 요충지인 디라키움 보급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본대를 돌렸다.
1.3. 포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yrrhachium_48_en.png카이사르의 목적을 파악한 폼페이우스는 급히 본군을 디라키움 기지에 집결시켰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 주변으로 포위막을 형성하고, 디라키움 남부의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의 병력은 강의 북쪽에, 카이사르의 병력은 강의 남쪽
원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의 2진 병력이 카이사르의 본대와 합류하기로 했지만, 내전 초기에 제해권 장악에 실패하여 폼페이우스의 해군 병력 때문에 쉽게 움직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여기서 안토니우스는 크나큰 도박을 감행했다. 카이사르가 압도당하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출항했다간 계속 부는 남풍 때문에 카이사르의 위치보다 훨씬 북쪽에 상륙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면 강 북쪽에 진을 친 폼페이우스의 군대의 표적이 되기도 쉽거니와, 폼페이우스의 해군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자칫했다간 땅과 바다 양쪽에서부터 포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안토니우스는 출항을 결심했고, 3월 26일 제2진의 보병 1만과 기병 800기가 브린디시항에서 출항했다.
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폼페이우스의 해군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받았지만, 당시 로마의 배에 달린 돛은 매우 원시적이어서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흘러갔기 때문에 손 놓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상륙하려면 남서풍이 필요했지만 야속하게도 바람은 남풍이었다. 그렇지만 사령관 안토니우스는 얼마간의 피해를 감소하고서라도 상륙을 강행하는데, 전쟁사에서 꽤나 자주 보듯이, 이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바람이 남서풍으로 바뀌었던 것.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피해가 전무한 채로 무사히 착륙한 데 반하여, 뒤에서 안토니우스를 추적하던 폼페이우스의 함선들 대다수가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고 밀려가 근처의 해안 절벽에 부딪쳐서 침몰했다.
극도의 운으로 안토니우스 휘하의 2진 병력은 바로 다음 날인 3월 27일에 무사히 상륙했고, 상륙 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급히 진영지를 걷고 안토니우스와 합류하기위해 북진했다. 낌새를 챈
카이사르의 입장에서는 병력 증원 없이는 큰 손실을 입을 것을 알았기에 필사적으로 북진했고, 성공적으로 2진 병력과 합류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폼페이우스는 역공을 방지하기 위해 재빨리 보급기지로 귀환해 방어진을 펼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포위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1.4. 공방전
포위를 당했다고는 하나 디라키움은 해안가에 인접한 데다가 이미 폼페이우스가 제해권을 틀어쥔 상황이어서, 카이사르군과 달리 폼페이우스군은 꾸준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정면을 따라 언덕 두 곳이 나란히 있었기 때문에 방어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다. 따라서 폼페이우스도 카이사르와 지속적인 전면전을 벌여 조기에 담판을 내기보다는 교착된 전선에서 장기간 소모전을 하여 카이사르의 병력을 약화시키고 힘을 빼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 소모전 중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같은 고관, 백부장들을 상당히 잃었다.[3]카이사르 역시 바보는 아니어서 폼페이우스가 원하는 대로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 본인이 갈리아 정벌 중 기술한 병법을 도입해 폼페이우스의 방어진 코앞에 포위진지를 구축함으로써 폼페이우스를 육지에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 바닷가로 밀어부쳤다. 더군다나 석 달 간 전선이 교착되어 보급품이 많이 고갈되긴 했지만 머지않아 수확철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기지에 병력을 집결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청야전술 같은 것도 구사할 시간이 없어서 농작지 등도 남아있던 상황이라, 수확철이 되면 카이사르군이 쉽게 주변에서 식량을 장만할 수 있을 게 뻔했다.
1.5. 폼페이우스의 역습
폼페이우스는 이런 이유로 더 이상 시간을 끌며 버텨봤자 해안요새의 이점을 살리기 어렵다고 판단, 포위진의 약점을 탐색하여 결국 우세한 머릿수를 이용해 포위진 남쪽에서 카이사르 제9군단을 쳐서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4]포위가 깨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바로 안토니우스 휘하에 증원병력을 보내서 구멍을 메우려 시도했다. 결국 임시적으로 포위망 파괴를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수적 열세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병력을 차출해 증원을 보낸 사이 폼페이우스가 기존 돌파구의 우측에 새로운 돌파구를 형성해 측면공격을 감행하자 카이사르의 군대는 우측 날개 지점부터 붕괴했다.
자신의 병력이 혼란 속에서 무너지는 꼴을 보고 카이사르는 전열을 정비시켜 다시 맞서려고 시도하지만 부질없는 짓임을 바로 깨닫고 병력을 통솔해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데 집중했다. 이 덕분에 (본의 아니게) 폼페이우스를 기지 밖으로 유인해내기 위해 퇴각하는 듯한 기만술로 보여서 적의 추격을 방지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 측에서도 일이 너무 유리하게만 돌아가자 오히려 유인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일찍 추격을 중단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그 덕분에 상황에 비해 경미한 피해만을 입고 전열을 유지한 채 탈출에 성공했다.
1.6. 결과
카이사르의 군대는 원래의 목표였던 디라키움 기지 점령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소모전으로 인한 손실 외에도 퇴각 과정에서 보병 1000명과 기병 200명 정도로 가벼운 손실을 입었으므로 폼페이우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명백한 승리였다. 하지만 만일 폼페이우스가 추격을 강행했다면 카이사르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혀 이후 일어날 파르살루스 전투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폼페이우스 역시 큰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5]2. 동로마 제국 때의 전투
Battle(Siege) of Dyrrachion | ||
시기 | 서기 1081년 10월 18일 | |
장소 | 동로마 제국 일리리아의 항구 도시 디라히온(현 알바니아의 두러스 시) | |
원인 |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의 일부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세르비아 왕국 [[룸 술탄국| ]][[틀:국기| ]][[틀:국기| ]] | 노르만 라구사 공화국 |
지휘관 | 알렉시오스 1세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 그레고리 파쿠리아노스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도메니코 셀보 콘스탄틴 보딘 | 로베르 기스카르 보에몽 1세 시켈가이타 |
병력 | 총원: 20,000 ~ 25,000명 타그마: 8,800명 프랑크 용병:1,000명 바랑인 부대: 1,000명 룸 술탄국: 9,000명 기타: 2,800명 | 총원: 15,000명 기사: 1,300명 전선: 60척 수송선: 150척 |
피해 | 전사자: 5,000명 탈주: 7,000명 | 불명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대패. 동로마제국군의 간신히 남아있던 중앙 야전군 궤멸 동로마 제국의 디라히온, 테살리아 전역, 마케도니아 일부와 카스토리아 일대 상실. 이라클리오스 이전 고대 로마군 부대들의 궤멸 및 완전해체. |
2.1. 개요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는 전임 황제들과의 혼담을 핑계로 약해진 로마 제국에 대한 패권을 주장했다. 이피로스 지방의 디라히온은 옛부터 서방 세력들이 제국을 침탈하기 위해 거치는 가장 주요한 지대였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1070년대 이미 교황을 윽박질러 아풀리아와 남이탈리아 전역의 지방을 공식적으로 장악했고, 방해되는 시칠리아의 에미르들도 격파한 상태였다. 1071년 그는 결국 로마의 마지막 이탈리아 영토인 바리를 함락시키면서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6] 하지만 로베르의 야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지역은 당시에 당연히 로마의 영토로 인식되는 지역이었고, 로베르는 이 곳을 점령했으니 황위 계승에 끼어들 최소한의 껀덕지를 얻어낸 셈이였다. 후임 두카스 왕조의 무능한 황제들이 그에게 로마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고 그가 휘하 노르만인들에게 로마식 수여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자, 그의 야망은 더더욱 동하였다.그러던 1073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동방 황제 미하일 7세가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자신의 황자 한명과 기스카르의 딸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는 당연히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이 이를 가로막았다.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니키포로스 3세는 알렉시오스 1세에게 각각 찬탈당하면서, 로베르의 혼담은 흐지부지 되었고, 그의 딸과 결혼하려 했던 콘스탄티노스 왕자는 유폐되었다[7]. 로베르의 딸 헬레나는 이미 두카스 왕조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결혼하기 위해 로마 제국으로 향했지만, 결국 니키포로스 3세에게 끌려다니게 되면서 헬레나의 거취도 불안정하게 되었다. 1081년이 되자 로베르는 딸 헬레나가 제국 황궁에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방 제국의 서부 변방을 유린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만지케르트 전투의 후유증을 제대로 극복하지도 못한 채 당대 최고의 전사 집단, 노르만 족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2.2. 노르만의 상륙
1081년 5월, 기사 1300명을 포함한 노르만 군대 1만 5천 명이 아블로나를 건너 코르푸에 상륙했다. 대군은 그대로 코르푸 지방에 소수 배치되어있는 로마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내고 정복을 위한 하역 작업에 나섰다. 그들의 목표는 이곳에서 보급을 받고, 디라히온 관구의 주도인 디라히온(현대의 두러스)을 공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라히온은 작은 반도를 끼고 높은 성벽으로 방어되는 천혜의 요새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르만군의 군수를 수송하던 함대가 디라히온의 해협으로 들어오려다 폭풍을 만나 침몰해버리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로베르는 일단 디라히온 성곽 앞에 포위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공성은 시작하지 못했다.2.3. 전초전, 베네치아의 지원군이 오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은 남이탈리아에서 노르만 권력이 강해지면 아드리아 해 내의 베네치아 상권이 약화될 것을 걱정했다. 베네치아 도제 도메니코 셀보와 베네치아의 상업 귀족들은 알렉시오스와 연합하여 디라히온 주변에 웅거한 노르만을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노르만 함대는 이미 디라히온 앞바다를 포위하고 있었고, 이들을 이끄는 장군은 보에몽 1세였다. 베네치아의 함대는 야밤을 틈타 보에몽의 함대를 기습했지만, 보에몽과 노르만 수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격전 끝에 베네치아 함대는 노르만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흩어내고 디라히온 항구로 입항해 로마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로마 함대가 베네치아와 연합한 2차전도 노르만인들은 대패하였다.한편 로베르가 지휘하는 육군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 장군이 이끄는 디라히온 방어군은 높은 고지의 이점을 이용해 발리스타와 투석기를 막아내고 알렉시오스 1세의 중앙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르요스 장군은 머리에 화살이 박혔음에도 적의 공성탑을 파괴하는 등 분전했다. 심지어 그해 여름에는 역병이 돌아 500명이 넘는 기사와 거의 1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죽는 등 로베르에게는 액운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노르만군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남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보내왔고, 공성병기는 계속해서 디라히온을 옥죄여왔다, 황제가 군대 2만 5천을 이끌고 테살로니키에 도착했을 때 즈음엔 도시의 명운은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2.4. 전투는 동로마 쪽으로 기울고..
10~11세기 동로마인들의 진지 복원도 |
그렇기에 황제는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아나톨리아 지역의 병력을 빼서라도 서부 제국을 수비하는 것이었다. 트라키시온 일대와 아나톨리아 내륙의 관문에 위치한 호마(Choma)의 병력과 카파도키아 내륙에 있던 미하일 부르치스 휘하의 병력, 비티니아 일대와 이라클리아 폰티카에서 튀르크의 침탈을 가능한 억제하던 군병력이 유럽으로 전출되었다. 또한 베네치아가 제공한 수천 가량의 프랑크 기사들과, 각지에서 사들인 투르코폴레스[8] 심지어는 서부 변방의 땅을 거의 거저로 넘겨주고 데려온 룸 술탄국의 지원군 7천 명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황제는 최대한 빨리 노르만을 정리하고 다시 아나톨리아에 병력을 배치해 안정시키던가, 아니면 여기서 시간을 끌면서 아시아 영토를 날려버리던가 둘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다.
결국 황제는 바로 다음날 노르만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동로마인들은 좌익에 아르메니아인 장군인 요르요스 파쿠리아노스를, 우익에는 매형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를, 자기 자신은 금군과 함께 중앙을 맡았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중앙에서 황제를 직접 상대하고 싶었다. 그는 아들 보에몽에게 좌익을, 지오비나초 백작에게 우익을 지휘시키고 자기 자신은 궁병대, 기사대와 함께 중앙에 포진했다.
황제의 군대는 얕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황제가 돌격을 명령했고, 금군은 적의 중앙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동로마제국의 금군은 원래는 바랑기라고 불리는 바이킹들로 구성되어있었으나(바랑인 친위대) 당시에는 정복왕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과정에서 가족과 고향을 몽땅 잃고 숙청을 피해 망명한 앵글로색슨 테인들이 대거 입대해있었으므로(앵글로바랑기) 복수심에 불타는 금군의 투지는 엄청났다. 노르만군이 이들에게 사격과 투석을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쉴드월을 짜고 느리지만 막힘없이 전진했다. 곧이어 금군의 앵글로바랑인들이 노르만 궁병대에게 근접하자 로베르는 궁병대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이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로베르는 본대의 기사들에게 앵글로바랑인들을 향해 돌격하여 이들을 격퇴시킬 것을 명했다. 하지만 내로라 하던 노르만 기사들의 일제돌격조차 앵글로바랑인들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앵글로바랑인들에 의해 돈좌된 기사들이 동로마인들의 궁병대에 요격당해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을 뿐이었다.
지오비나초 백작은 이런 교착 상태를 참지 못하고 동로마인들의 좌익과 중앙 사이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는 앵글로바랑인들을 본대로부터 분리하여 포위하기 위한 돌격이었다. 하지만 금군의 노련한 앵글로바랑인들은 이 기동의 의미를 깨닫고 진격을 멈춘 채로 그 돌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었다. 동로마군 좌익에 배치된 중앙군 베스티아리테와 엑스쿠비티 소속의 중기병들도 금군을 돕기 위해 그대로 돌격했다. 결국 바랑인 친위대라는 모루와 카타프랙트라는 망치에 제대로 짓이겨진 지오비나초 백작의 노르만 우익은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져 디라히온 바닷가를 향해 패주하기 시작했다. 앵글로바랑인들은 특유의 배틀액스를 들고 달리며 도주하는 노르만 우익의 뒤통수를 박살내는 중이었고, 동로마군 우익에 배치된 투르크인 지원군도 스웜 전술로 노르만군 좌익을 녹여내리는 중이었다.
이대로만 흘러가면 노르만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기는 커녕 디라히온의 물고기밥이 될 것처럼 보였다.
2.5. 발키리의 재림
그녀의 모습은 아테나까지는 아니라도 팔라스 정도는 되어보였다.[9]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드에서)
패퇴하는 우익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디라히온의 바닷가도, 동로마인들의 군대도 아닌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내 시켈가이타였다. 그녀는 맹렬히 욕설을 퍼부으며 앞다퉈 도주하던 노르만 기사들을 불러모은 뒤 전열이 흐트러진 채로 추격해오던 앵글로바랑인들에게 반격을 가해 보병전력의 전멸을 막았다.[10] 그리고 복수에 눈이 멀어 자기들을 쫒다가 중앙군 본대와 떨어져버린 앵글로바랑인들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두꺼운 체인 메일과 라운드 쉴드를 뚫기 위해 장창병과 석궁병이 길게 줄을 이어 이들을 집중적으로 타격했고, 기세가 꺾인 앵글로바랑인들은 후퇴하여 디라히온 근교의 성 미카엘 대천사 성당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전은 앵글로바랑인들의 한 가지 특기였으므로 정석으로 공략하려 했다면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만, 시간을 낭비할 생각도 후환을 남길 생각도 없었던 로베르는 성당에 불을 질러서 앵글로바랑인들을 태워죽였다. 노르만 우익은 불타는 성당을 뒤로 하고 동로마인들의 본대를 치기 위해 전장으로 복귀하였다. 디라히온 성채에 주둔하고 있던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와 방어군 결사대가 앵글로바랑인들을 구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노르만군의 반격으로 그들을 구하는 것을 실패했다. 오히려 요르요스의 군대는 디라히온 성채와 고립되어 도시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위기를 맞아야 했다.
시켈가이타가 이끄는 노르만 기사대는 무방비상태의 알렉시오스 황제와 동로마군 중앙에 그대로 돌격했다. 황제와 함께 있었던 경기병들은 노르만 중기병들을 막아낼 수 없었고, 수 차례 기병 돌격이 이어지자, 전열은 붕괴되었다. 황제는 오흐리드로 후퇴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제국의 지원군으로 도착한 세르비아 왕 콘스탄틴 보딘은 이 사태를 그저 관망할 뿐 동로마인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동로마인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지 않았던 룸 술탄국의 투르크 궁기병들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후퇴했다.
2.6. 후일담
도망치는 알렉시오스 1세 황제 |
로베르 기스카르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디라히온의 요새는 아직도 튼튼했다. 오히려 알바니아 지역의 징집군들로 보강된 성채는 다음 해가 넘어서인 1082년에야 함략되었다. 이마저도 성 내의 아말피인이 요새 문을 열어준 덕이었다. 그러나 그가 카스토리아까지 진군했을 때, 본국에서 비보가 넘어왔다. 남이탈리아의 그리스계 폴리스 시민들이 노르만의 지배를 거부하고 반란에 나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중요한 동맹이었던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의 공격을 당하는 중이었다. 교황이 버티지 못한다면 남이탈리아는 쉽게 독일 황제의 손에 떨어질 상황이었다.
이는 알렉시오스 1세의 계략이었다. 동로마인들이 남아있는 재보를 털어 36만 노미스마를 신성 로마 제국에게 안겨주며 남이탈리아를 공격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스카르는 아들 보에몽 1세에게 원정군을 맡기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했다. 황제는 오흐리드에서 패잔병을 규합하고 제국 전역의 교회에서 금을 긁어내 새 군대를 차렸다. 그의 군대는 아르타와 요안니나에서 두번의 패배를 더 겪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병력을 온존하며 테살로니키로 후퇴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룸 술탄국은 아직도 그들에게 병력을 지원할 용의가 있었고 테살로니키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라리사에서 노르만군을 격파했다. 라리사에서 한번 격파된 이후, 노르만군은 파죽지세로 모였던 것처럼 그대로 흩어졌다.
그들에게 급료도, 식량도 제공할 수 없던 보에몽 1세는 사그라지듯 없어진 자신의 군대를 보며 서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투르크 연합군이 서쪽 국경으로 진격하며 승전보를 울리는 동안 베네치아와 동로마인들이 조약을 맺었다. 그들은 관세면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조계지 설치라는 두 가지 엄청난 보수를 받았다. 이에 신난 베네치아는 남이탈리아로 넘어가는 노르만인들의 함대를 격파하고 코르푸와 디라히온의 노르만 잔당을 전멸시키며 두 성을 황제에게 되돌려주었다. 1085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급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동로마인들의 군대는 노르만에게 빼앗긴 그리스 내의 모든 영토를 회복해 보에몽을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이는 훗날 보에몽이 십자군 전쟁에 참가해 영지를 갈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국이 겪은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이라클리오스 황제 때 동부 영토를 포기하고 적을 막은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막지도 못했을 뿐더러 비어버린 제국령 아나톨리아는 그대로 튀르크의 영토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고가 파탄나 더 이상 용병과 관리들의 급료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치세를 시작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동서 분할 이전은 고사하고 심지어는 공화정 말기까지 역사가 소급될 여러 부대들이 완전히 소멸했다. 가까스로 건사한 부대들이 없지야 않았으나 가장 오래된 부대라봐야 이라클리오스 이후에 창설된 부대들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정부와 국체 자체의 연속성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까진 끊어진 적은 없었으나, 적어도 군대의 연속성만 따진다면 고대 로마로부터 내려오는 로마군은 이 전투 및 그 이후 시기에 거진 다 없어졌다고 보면 된다.
[1]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조카.[2] 심지어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편입된 군단 중 14, 15군단은 원래 카이사르 휘하의 병력이었다.[3] 백부장은 지금으로 치면 중대장급 간부이다.[4] 죄를 짓고 처벌을 피하려고 카이사르 진영에서 탈출한 갈리아족 기병들이 포위망의 약점을 폼페이우스에게 알려줬다고 한다.[5] 일반적인 군대가 이렇게 패주하는 상황이었다면 폼페이우스 입장에선 자신감이 두 배가 되어 추격을 명해 섬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당대에 자신과 비견될 만한 천재적 사령관인 카이사르, 휘하 군단은 지중해 세계에 위명이 자자한 최정예 카이사르 군단인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리멸렬하게 패주하자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역량에 자신감을 갖기보단 상대를 의심하는 마음이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추격을 중단한 것도 심리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해가 되는 부분. 신중한 폼페이우스의 성격을 고려하면 이미 전투목표는 충분히 달성한 상황에서 의뭉스러운 적의 행태에 괜히 도박을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6] 그러나 아직 현지 귀족들과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인 사회는 노르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노르만 지배자에 대한 항쟁이 100년 가까이 지속된다.[7] 니키포로스 3세 재위기 한정.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콘스탄티노스를 수도로 다시 복귀시켰다.[8] 정교회로 개종한 투르크계 동로마인 기병대[9] 팔라스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별명이다, 일종의 말장난[10]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3권, 쇠퇴와 멸망)[11] 당대 알바니아 지역을 부르는 그리스어식 명칭